Chapter: 88화“우리 친구도 한번 해볼까요?”“네!”아이는 도운을 따라 중심화만 남긴 채,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머지 꽃들을 툭툭 솎아 냈다.“와, 아주 잘하는데? 하이파이브!”도운이 살갑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신이 난 아이가 도운의 손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짝! 소리가 과수원에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아야야! 와, 친구 힘이 장난 아닌데? 나중에 우리 농장에서 스카우트해야겠어!”도운이 엄살을 떨며 과장되게 손을 털어 보였다.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나오자, 그는 숙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이렇게 측화를 솎아주면 병해충도 줄어듭니다. 그러니 꽃을 없앤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가을에 만날 크고 맛있는 사과를 위한 준비라고 생각해 주세요."이번엔 도운이 직원들이 챙겨온 소품 상자 앞으로 가뿐하게 다가갔다.“여기 있는 소품들은 마음껏 사용하셔도 됩니다. 꽃따기도 하시고, 사과꽃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자유롭게 즐겨주세요. 궁금한 점이 생기면 언제든 직원들을 불러주시고요”말을 끝내려던 도운이 생각난 것이 있는지 손뼉을 짝 부딪쳤다.“혹시 사진기사가 필요하다면 저를 찾아주시면 됩니다! 대학 사진 동아리 출신이라 자신 있습니다!”장난스레 카메라 셔터 누르는 모션을 취하는 도운을 지켜보던 예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이쯤이면 사람은 파악됐다. 남은 건 문양뿐이었다.긴 토시를 착용한 도운의 맨손목을 어떻게 확인할지 물끄러미 가늠하는 예리의 등 뒤로, 은호가 조용히 다가왔다.“나 팀장님.”“앗, 깜짝이야.”“다들 체험하러 간 것 같습니다. 저희도 갈까요?”“아… 네, 그러죠.”예리가 가지 하나를 가볍게 잡아 측화를 솎아 내기 시작했다. 소진도 그 옆에서 묵묵히 손을 보탰다.“사과 따기 체험은 예전에 해봤어도 사과꽃 따기는 처음이네요. 팀장님 따라다니면서 정말 별의별 체험을 다 해보는 것 같습니다.”똑 따낸 꽃 한 송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소진이 자조하듯 중얼거렸지만,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강 비서님, 그동안 팀
Last Updated: 2026-07-21
Chapter: 87화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마당에서 기다리던 예리의 시야에, 쭈뼛거리며 걸어 나오는 은호의 실루엣이 들어왔다.늘 자로 잰 듯 완벽하게 피팅 된 슈트 차림만 보다가, 헐렁한 작업복을 입은 그는 무척 낯설었다. 거기에 사과를 든 꿀벌이 엄지를 치켜세운 티셔츠와 냉기 어린 얼굴의 조합이라니.그 환장의 불협화음에 예리는 뿜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이사님,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리시는데요?”은호가 티셔츠 밑단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릴 때였다. 도운이 무선 마이크를 어깨에 메고 다시 나타났다.“자, 여러분 집중해 주세요! 지금부터 사과나무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도보로 이동할 예정이니, 친한 분끼리 두 분씩 짝을 맞춰 길게 줄을 서주세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췄다. 은호 혼자 갈 길을 잃고 어색하게 서 있자, 소진이 그의 등을 예리 쪽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우리 이사님, 나 팀장님이랑 같이 서세요. 저는 두 분 뒤에 설게요.”소진의 센스 넘치는 배려 덕에 얼떨결에 예리의 옆자리를 꿰찬 은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줄 다 서셨으면, 출발하겠습니다!”도운의 활기찬 구령 들으며 예리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눈에 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하얀 사과꽃 물결이 일렁이는 과수원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웠다.***옆에서 나란히 걷던 은호 역시 풍경을 눈에 담는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예리를 내려다보았다.높게 질끈 묶어 올린 예리의 뒷머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볍게 찰랑였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예리의 향이 코끝에 은은하게 번졌다.은은한 배향이 섞인, 서늘하고 달콤한 꽃향기를 맡으며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은호가,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건넸다.“하도운 씨 말입니다. 사진보다 훨씬… 매력적이시더군요.”예리는 시선을 은호 대신 맨 앞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도운에게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쾌활해서 괜찮아 보이더라
Last Updated: 2026-07-20
Chapter: 86화예리는 화끈거리는 볼을 손으로 슥 문지르며 물었다.“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아니요.”정작 은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를 의식하고 난리가 난 쪽은 예리였다. 그녀는 후다닥 손을 내리고 목을 가다듬었다.“그러면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데요?”여전히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은호를 힐끔거리며 물었다.“도운 씨가 아윤 씨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아낼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지 궁금해서요.”“아… 그게 궁금하셨구나.”나한테 개인적인 질문이 있는 게 아니고.“그건… 오늘 직접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백 마디 설명 듣는 것보다 눈으로 한 번 확인하는 게 훨씬 빠르거든요.”누가 봐도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였지만, 은호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캐묻지 않았다.예리는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가 또 곤란한 질문을 던질까 봐. 아니, 실은 제 요동치는 속마음을 들킬까 봐서였다.‘왜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거지?’예리는 툭,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은호가 항상 자신에 대해 궁금해할 거라고 착각하는 것도 웃겼고, 그게 아니라고 서운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더 기가 막혔다.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았지만, 아무래도 그의 문양에 감정적으로 동화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요상한 마음 상태가 설명되지 않았다.작은 한숨을 삼킨 예리가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골 풍경만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아침 일찍 출발한 차는 ‘햇살 사과’라 적힌 커다란 이정표가 세워진 넓은 부지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차에서 내린 은호가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참 많네요. 가족끼리 온 분들도 꽤 보이고요."창고 앞마당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도 보였지만, 유독 젊은 여성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그도 그럴 것이, 청년 농업인을 홍보하는 다큐에 출연한 뒤로 도운의 훈훈한 외모가 온라인상에서 크게 화제가 된 영향이었다.“팀장님
Last Updated: 2026-07-17
Chapter: 85화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은호가 고급 만년필의 뚜껑을 닫아 서류 위로 내려놓았다.“작가님, 이번 전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잘 살피겠습니다.”병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은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네, 저도 해상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 이사님.”그간 골머리를 앓던 거장 이병훈 작가와의 계약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직원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은호가 맞잡은 손을 놓으려 할 때였다.“저, 이사님….”병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은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한 채 직원들을 힐끔거렸다.“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죠.”은호의 차분한 지시에 눈치를 보던 직원들이 하나둘 각자 서류와 짐을 챙겨 회의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들이 모두 나가는 동안 병훈은 조용히 굳은살 박인 손끝만 내려다보았다.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정적이 회의실을 감돌았다.“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어떤 건가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병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사실… 계약 직전까지 고민이 아주 많았습니다.”불길한 이름이 머릿속을 스치자, 은호는 씁쓸하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저희 형들 때문입니까?”병훈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주변에서 다들 말리더군요. 굳이 해상과 일하면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냐고….”병훈이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해상 아트센터를 감싸안고 있는 드넓은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은호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유동현 사장님이 백화점 VIP 컬렉터들과 거래 갤러리들을 움직이기 시작한 뒤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해상 아트센터와 손잡으면 대형 컬렉터들이 등을 돌릴 거라는 말이 업계에 퍼졌어요. 그래서 계약을 망설이는 작가들이 적지 않습니다.”은호의 턱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동안은 아트센터에서 직접 접촉한 작가들에게만 훼방을 놓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업계
Last Updated: 2026-07-16
Chapter: 84화“목상에서 다음 촬영 일정이 어떻게 되죠?”“내일부터요.”“그럼, 제가 일정을 다시 조율해서 연락드릴게요. 그때 목상에서 직접 뵙는 걸로 하죠. 그리고….”예리는 아윤의 손목을 잠시 응시했다.“저와 함께 일하시는 동안은 손목 액세서리 금지입니다.”“맞아, 언니! 그래야 좋은 기운이 안 막힌다나 뭐라나.”주은이 제 소매를 걷어붙이면서까지 열변을 토했다.아윤은 마치 용한 무당의 비방이라도 전해 들은 것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명심할게요.”“그럼, 상담은 이쯤에서 마무리해도 될까요? 저도 곧 다음 회의가 있어서요.”“앗, 네! 오늘 진짜 감사했습니다. 주은아, 너도 예리 씨 소개해 주고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정말 고마워.”주은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손사래를 쳤다.“아휴, 우리 사이에 무슨! 이번에 꼭 잘됐으면 좋겠다. 예리야, 우리 아윤 언니 건은 정말 잘 부탁해!”예리가 알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소진에게 시선을 돌렸다.“강 비서님, 아윤 씨께 사전 설문지 전달해 주세요.”“알겠습니다.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소진이 문고리를 돌리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바깥에서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하게 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은호의 비서, 선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밖으로 향하는 소진과 아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다가와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이사님. 외부 미팅 시간 다 되어서 모시러 왔습니다.”은호가 클래식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곤 소파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재킷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는 예리를 내려다보았다.“저는 미팅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려던 은호는 멈칫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예리와 시선을 맞추었다.“목상군 출장 일정 정해지면 바로 공유해 주시죠. 제 스케줄 맞추겠습니다.”“네, 알겠습니다.”인사를 건넨 후 선우의 뒤를 따라 문으로 향하는 은호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뎠다.문이 닫히고
Last Updated: 2026-07-15
Chapter: 83화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주은이 사색이 되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나 절대 말 안 했어! 그냥 너한테 가면 좋아하는지 아닌지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고만….”손사래를 치던 주은이 살려달라는 듯 아윤을 바라보자, 아윤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을 거들었다."맞아요. 요즘 결혼정보회사들은 AI 기술이 워낙 정교해서, 데이터만 넣으면 심리 분석까지 전부 가능하다면서요?”“아… AI 기술이요.”예리가 한 쪽 눈썹을 삐딱하게 꿈틀거리며 주은을 짓씹을 기세로 훑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무릎 위로 깍지 낀 손을 내려놓았다.“음, AI… 아니, 저희 회사 시스템으로 상대방의 호감 여부를 분석해 드릴 수는 있어요. 다만, 정말 그게 전부예요. 분석 결과가 어떻든 아윤 씨의 마음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오로지 상대방의 선택에 달린 문제니까요.”“저는 그거면 충분해요.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좋아하게 만들 자신은 없지만,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를 사랑하게 만드는 건 자신 있거든요.”“…….”“만약 제 착각이 아니라 그 사람도 날 좋아하는 게 맞다면,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그 사람 마음 얻어낼 거예요. 하지만….”잠시 말을 멈춘 아윤이 쓸쓸히 미소 지었다. 그러곤 주먹을 꼭 쥐어 가슴께에 얹었다.“그게 아니라 정말 나 혼자만의 기우라면… 깨끗하게 포기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예리 씨. 그 사람의 진짜 마음이 어떤지만 확인해 주세요.”잠시 말없이 아윤을 바라보던 예리가 물었다.“…상대방에게 직접 물어는 보셨나요? 본인을 좋아하는지?”아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물어봤죠. 그런데 그 사람은… 저를 이성으로 본 적이 없대요. 하지만… 그때 그 사람의 눈빛은 정반대였어요! 저 연기하는 사람이에요. 눈빛이 진심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요. 심지어… 결정적인 사건도 있었어요.”“결정적인 사건이라뇨?”그때 일을 떠올리는지 아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제가 촬영
Last Updated: 2026-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