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화. 정공법어느덧 작업을 시작한지도 3주가 다 되어 갔다. 전체적인 트랙 방향이 정해지고 컨셉이 확실해지며 앨범의 프로듀서들을 비롯한 스탭들이 더욱 바빠졌다. 정하와 보라도 마찬가지였다. 앨범의 메인 프로듀서인 정하와 작사가 보라는 대면 회의도 모자라 화상으로도 회의를 진행할 정도로 하루에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가사는 이 정도로만 수정해도 되겠네요.”“네 그럼..”“고생하셨어요. 내일 뵐게요.”그러나 딱 회의까지였다. 정하는 작업 외의 다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피하는 것 같았다. 보라는 카페에서의 일을 해명하고 싶었다.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블루 씨?”호칭도 예전으로 돌아왔다. 이름에서 활동명으로 돌아온 것만큼이나 둘의 거리는 벌어졌다.“없으시면..”“있는데요?”결국 보라가 먼저 터져버리고 말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으면서 무작정 있다고 말해버렸다. 아주 잠깐 아차 싶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 기회마저 날려버리면 영영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이, 일단 커피라도 한 잔씩 하면서 회의하도록 하시죠. 제가 사 올게요.”정하의 대답도 듣지 않았다. 무작정 소리치고 나왔다. 나온 보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주먹을 꼭 지고 자신의 머리를 치기 시작했다
Last Updated: 2026-06-29
Chapter: 10화. 엇갈림약속 장소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정하는 한 가게 앞에 멈춰 유리에 비친 모습을 확인했다. 평소 잘 입지 않는 흰 셔츠에 슬랙스. 꼭 첫 면접을 보러 가는 취준생처럼 떨리기도, 설레기도 했다.“프로듀서님, 여기요!”"커피는 미리 주문해놨어요. 괜찮으시죠?"정하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 보라는 이미 도착해있었다. 평소와 다른 카페, 약속하고 만나는 자리. 모든 게 낯선 이 상황이 정하는 그저 즐거웠다.“보라 씨, 먼저 와 계셨네요! 저도 빨리 온 편인데.”정하가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언뜻 의자를 끌어 앉으며 살핀 보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보라 씨, 무슨 일 있어요?”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보라였다.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프로듀서님, 제가 요즘 이상했죠?”보라의 첫마디는 의외였다. 인사도, 설명도 없었다. 정하는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사실 프로듀서님 때문은 아니에요.”“학교 다닐 때, 저를 스토킹하는 분이 있었어요.”정하는 잠자코 들었다. 물론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분명한 거절 신호였다. 고백도 하지 않았는데 차인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정하는 보라의 말을 끊지 않았다. 끝까지 들어야 할 말이 생길 것 같았다.
Last Updated: 2026-06-27
Chapter: 9화. 미완의 꿈리버브 모임 날이었다. 벌써 정하가 모임에 참여한지도 한 달이 되었다. 어색했던 첫 모임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리버브에 잘 녹아들었다. 이제는 매주 금요일이 자연스럽게 기다려졌다. 음악 작업과는 다른 이유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오늘도 재미있었습니다!”“다음 주 모임 때 뵐게요!”짧은 모임이 끝나도 아쉬운 마음이 거의 들지 않았다. 모임 이후에도 작업실에 가면 그녀를 만날 테니까. 리버브와 작업실, 작업실과 카페.. 요즘 그의 동선에는 항상 보라가 있었다. 보라가 자신의 삶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다.“오늘 모임도 괜찮으셨나요?”이미 몇 명이 각자의 짐을 챙겨 블루문을 나간 뒤였다. 제이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보라와 정하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 정리를 하고 있었다.“재밌었어요.”보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하도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요.”몇 명이 더 나가고, 제이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양손에는 작은 꽃병이 들려 있었다.“피치님, 플랫님. 혹시 저번에 두 분이 드신 칵테일 기억나시나요?”“그럼요.”제이의 질문에 둘은 대답을 하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하는 제이의 양손에 들린 꽃병으로 고개를 돌렸다.“원래 개기월식 날에는 문플라워를 밖에 두면 금방 시들어서요. 괜찮으시다면 두 분께 선물로 드리고 싶은데, 어떠세요?”제이가 의미심장
Last Updated: 2026-06-25
Chapter: 8화. 통화 기록“야, 너 기억 나냐?”꽤나 취한 것 같은 J가 정하에게 물었다. 테이블엔 소주 3병과 안주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정하는 젓가락으로 닭발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J를 쳐다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내가 너랑 친해지고 얼마 안 됐을 때였을 거야. 한 4년 전쯤? 그때 나 진영이랑 헤어지고, 엄청 울었었잖아.”그 말에 정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어두웠던 표정이 편해졌다.“기억 나지. 형 그때 형수님이 다시 받아주기 전까지 매일 술 마셨잖아.”“맞아. 하, 내가 그때 술만 안 먹었어도 지금 가왕 자리 두 번은 해 먹었다.”"아주 세상을 다 잃은 느낌이었지, 그때 형."정하가 입꼬리를 올리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단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위스키보다 도수가 낮은데 알코올의 향은 더욱 진하게 들어왔다. 표정이 저절로 찡그려졌다.“근데 넌 요즘 왜 그렇게 죽상이냐?”“내가?”“응. 누가 보면 나라 잃은 사람인 줄 알걸.”J의 물음에 정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오늘따라 소주가 썼다. 스무살 때 처음 소주를 먹을 때가 생각나는 맛이었다.“보라 때문에?”“꼭 그것만은 아니고.. 입시생 하나가 성대결절이래. 실력도 있고 열심히 하던 애였는데.”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정하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빈 소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울먹이던 다솔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
Last Updated: 2026-06-23
Chapter: 7화. 페르마타2020년 여름. 화장실에서 돌아온 보라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날도 여전히 자리엔 캔커피 하나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벌써 열일곱 번째였다. 내용은 평범했지만 보라에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늘 같은 시각, 같은 메모장이 남겨져 있었다. 처음엔 그냥 넘기려고도 해봤으나, 2주가 넘는 기간동안 이어진 쪽지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매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누군지 확신할 순 없었다. 다만 짐작은 갔다. 매일 저녁, 자취방으로 향할 때면 보폭을 맞춰 걷는 발소리가 있었으니까. 발자국 소리를 의식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두려움이 배로 늘어났다. 친한 남자 동기들에게 자취방 방향으로 같이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한두번이었다. 계속 부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스토킹을 당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확실한 피해를 당한 게 아니라면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내용뿐이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다. 그 때문에 다니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결국 보라는 대외활동도, 학업도 포기했다. 바로 다음 학기 휴학계를 내고 본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본가로 돌아온 자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진학한 학교였다. 보라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한 상실감과 공포가 몰려왔다. 그렇게 은둔 생활을 반 년여간 했다. 그랬던 그녀가 가사를 쓰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가끔 연락만 주고받던 학교 선배가 주선해 준 ‘J 컴퍼니’와의 미팅 덕분이었다. 그렇게 보라는 처음 가사를 써봤다. 그녀의 첫 작품이 바로 J의 정규 2집 타이틀곡 ‘가을이 지면’이었다. - “안녕하세요, 보라 씨.” 보라는 요즘 카페에 들어오기 전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정하가 신경 쓰였다. 꼭 자신에게 건넬 인사를 몇 번이나 연습하는 것처럼 보였다. 같은 학교, 같은 동네. 우연이라기엔 겹
Last Updated: 2026-06-21
Chapter: 6화. 불완전오후 4시. 아직 블루문이 오픈하지 않은 시각. 젊은 남자 바텐더가 한 손엔 장갑을 끼고 얼음 집게로 커다란 얼음을 꺼냈다. 이후 그는 능숙하게 아이스픽을 집어 들고 모서리를 깎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박했던 얼음은 완벽한 구형의 스피어 아이스로 변해있었다. “루루, 벌써 다 끝낸 거야? 이제 나보다 능숙한걸” 제이의 말에 루루가 조용히 웃었다. 순백의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이제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가 손짓으로 무언가를 묻자 제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완성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제이는 반쯤 다듬어진 얼음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제이가 무심코 진열장 쪽 거울을 힐끗 바라보았다. “급하게 만들면 꼭 어딘가 금이 가더라.” - “저번에 말했듯이 이번 앨범 컨셉은 ‘불완전’으로 잡아봤어. 다들 뭐 생각해 온 거 있어?” J가 서랍장 한구석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오며 정하와 보라에게 물었다. 이내 가사지 하나하나를 펼쳐놓기 시작했다. “‘불완전’이면 결핍인 거잖아. 그럼 앨범의 전체적인 트랙은 이별로 잡는 게 낫겠지?” “그렇다고 모두 그런 식으로 가면 저번 앨범 컨셉이랑 겹쳐요. 오히려 ‘첫사랑’이나 ‘짝사랑’ 같은 주제를 섞는 것도 좋아 보여요.” “아, 안 그래도 이번에 가사 미리 받아놓은 것 중에 괜찮은 거 있더라. 잠깐만.” J가 파일철을 이리저리 들춰보곤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도화’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Last Updated: 2026-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