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화. 아직 아닌 사이, 먼저 온 말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는 그쳐 있었다.창문 밖은 흐렸다.마른 것도 아니고, 젖은 것도 아닌 색.어제 비를 맞은 도로가 아직 덜 깨어난 얼굴로 누워 있었다.나는 침대에 앉아 한참 창밖을 봤다.휴대폰은 조용했다.강태준에게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이제는 그게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매번 새로웠다.보내지 않는 사람.참는 사람.그리고 그걸 자꾸 확인하는 나.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대화방을 열지는 않았다.그 대신 사진첩을 열었다.어제 저장한 사진은 없었다.노트북에만 있었다.그게 괜히 다행이었다.휴대폰에 있으면 너무 자주 볼 것 같아서.아니, 이미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 핑계를 대는 것이다.나는 세수하러 일어났다.거울 속 얼굴은 어제보다 조금 덜 피곤해 보였다.잠을 푹 잔 것도 아닌데 그랬다.이상했다.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얼굴이 덜 망가지는 건가.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혼자 웃었다.진짜 별생각을 다 한다.출근길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우산은 챙기지 않았다.대신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작은 접이식 우산을 확인했다.있었다.괜히 손으로 한 번 만졌다.어제 태준이 내 우산을 잡으려다 멈춘 손이 떠올랐다.이건 잡아도 됐어.우산.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말하고 나서도 믿기지 않았다.다음엔 잡을게.다음엔?그 짧은 대화가 아직도 귀 뒤쪽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나는 버스 창밖을 보았다.도로는 느리게 밀렸다.사람들은 월요일 아침처럼 지친 얼굴로 서 있었고, 신호등은 자꾸 빨갛게 바뀌었다.나는 휴대폰을 꺼냈다.아무 알림도 없었다.그런데도 화면을 한참 봤다.요즘 내 손은 너무 자주 나를 배신한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서윤 씨, 어제 보고서 최종본 좋았어요. 오늘 내부 공유용으로 사진 몇 장만 추가해서 다시 올릴게요.”“네. 단체 컷도 넣을까요?”“넣죠. 그 사진 괜찮던데요.”나는 대답이 아주 조금 늦었다.“네.”“왜요? 별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54화. 같은 사진 안에, 다른 숨사진 파일은 오후 두 시쯤 도착했다.나는 그때 사무실 회의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오픈 첫날 결과 보고서 초안을 정리하는 중이었다.방문자 수.체류 시간.현장 반응.사진 자료.언론 노출 예정 리스트.숫자와 문장들이 화면 위에 줄지어 있었다.이런 일은 익숙했다.정리하고, 보기 좋게 만들고, 아무도 현장에서 허둥댄 티를 못 느끼게 다듬는 일.나는 그런 걸 잘했다.다만 오늘은 손이 자주 멈췄다.이메일 제목 때문이었다.[현장 사진 전달드립니다]별것도 아닌 제목.그런데 그 안에 어제 우리가 같이 찍힌 사진이 있을 거라는 걸 아는 순간부터,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끝이 이상하게 굳었다.나는 메일을 열지 않고 한참 제목만 봤다.웃기다.사진 한 장이 뭐라고.업무 사진이었다.프로젝트 기록용 사진.보고서에 들어갈 수도 있고, 보도자료 후보로 빠질 수도 있는 흔한 파일.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계속 어제의 순간이 먼저 떠올랐다.조금만 더 가까이요.사진기자의 목소리.옆에서 아주 작게 움직이던 태준.어깨는 닿지 않았는데, 닿은 것처럼 느껴졌던 거리.나는 한숨을 삼키고 메일을 열었다.첨부파일이 열두 개였다.현장 전경.입구.패널.관계자 컷.단체 사진.나는 하나씩 저장했다.파일명을 바꾸고, 폴더를 나누고, 보고서용으로 쓸 것과 내부 기록용으로 둘 것을 나눴다.그리고 마지막에서 멈췄다.단체_메인_03.jpg썸네일 속에서 나는 태준 옆에 서 있었다.작게.하지만 분명하게.나는 파일을 열었다.화면이 크게 바뀌었다.사진 속의 나는 어색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긴장한 티가 났다.입술은 조금 굳어 있었고, 어깨도 평소보다 올라가 있었다.그 옆의 태준은 나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다.아니, 차분한 척하는 얼굴이었다.나는 그걸 알아봤다.그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몸의 방향이 아주 조금 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어깨가 닿지 않게 애쓴 거리.그런데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사진은 이상하게 솔직했다.우리가 감추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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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3화. 오늘의 거리, 내일의 말아침에 눈을 떴을 때, 손끝이 먼저 느껴졌다.밴드 붙은 손가락.아주 작은 상처였는데, 이상하게 존재감이 컸다.나는 이불 속에서 손을 들어 올려 한참 보고 있었다.하얀 밴드가 어제보다 조금 구겨져 있었다.손을 씻고, 가방을 들고, 휴대폰을 쥐고, 현관문을 잠그는 동안 자꾸 닿았으니 당연했다.그런데도 그게 꼭 어제의 일이 아직 내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태준의 손.조심스럽게 받쳐주던 손.붙이고 나서 바로 놓던 손.놓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알아버린 사람의 손.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따끔한 건 거의 없었다.문제는 아픈 게 아니었다.별것도 아닌 게 자꾸 생각나는 쪽이 문제였다.휴대폰은 조용했다.어젯밤 마지막 메시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강태준]그 정도로 있을게.그 문장을 다시 보려고 한 건 아니었다.그냥 알림창을 보려다가, 자연스럽게 대화방을 열었고, 자연스럽게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자연스럽게.참 편한 말이다.요즘 나는 자꾸 자연스럽다는 핑계로 태준을 확인했다.메시지가 왔는지.안 왔는지.읽었는지.멈췄는지.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나는 화면을 껐다.오늘은 오픈 첫날이었다.정신 차려야 했다.진짜로.씻고 나와 옷장을 열었다.한참을 보다가 검은 니트를 꺼냈다.그 위에 어제와 비슷한 코트를 걸쳤다.거울 앞에 서니 어제보다 얼굴이 더 말라 보였다.잠을 못 잔 티가 났다.입술 색도 흐렸다.나는 립밤을 발랐다가, 다시 닦아냈다.너무 꾸민 것 같았다.그런데 안 바르면 너무 지쳐 보였다.결국 아주 조금만 다시 발랐다.이런 사소한 짓까지 신경 쓰는 내가 싫어서, 거울을 오래 보지 않았다.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심장이 먼저 반응했다.나는 괜히 신발 끈을 한 번 더 만지고 나서 화면을 봤다.[강태준]오늘 비 온대.나는 그 문장을 한참 봤다.비 온대.그냥 날씨 이야기였다.그런데 그가 고른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출근 조심해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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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2화. 한 걸음 뒤에, 남은 온도태준의 마지막 답장은 그거였다.해볼게.나는 그 뒤로 더 보내지 않았다.잘 자.내일 봐.오늘 고생했어.그런 말들이 입력창 근처까지 갔다가 전부 사라졌다.이상했다.예전에는 그런 말을 못 해서 안 보냈다.보내면 너무 많은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그런데 어젯밤에는 조금 달랐다.더 보내지 않는 것도 하나의 대답 같았다.오늘은 여기까지.내가 정한 자리에서 멈추는 것.태준도 거기서 멈추겠다고 했으니까, 나도 더 열지 않았다.휴대폰을 뒤집어 침대 옆에 놓았다.그런데도 잠은 바로 오지 않았다.눈을 감으면 자꾸 문장들이 떠올랐다.아직 좀 커.싫진 않았어.같이 들을게.오늘만.그 순간만.해볼게.별것도 아닌 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하나씩 보면 다 별말 아닌데, 모아놓으면 너무 컸다.나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으로 아주 약한 빗소리가 남아 있었다.어제보다 덜 외로운 조용함이었다.그게 더 문제였다.나는 그걸 알아차리고 나서 괜히 눈을 꼭 감았다.진짜 큰일 났다.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휴대폰을 확인하는 거였다.알림은 없었다.강태준에게서도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나는 잠깐 화면을 보고 있다가, 다시 잠금 버튼을 눌렀다.없네.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서운한 건 아니었다.아니, 조금은 서운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진짜 멈췄네.태준은 어젯밤 내가 닫은 자리에서 더 두드리지 않았다.잘 잤어?오늘 몇 시에 나가?출근 조심해.그런 말을 보내지 않았다.예전의 태준이라면 보냈을 것이다.아니, 예전이라는 말도 웃기다.그때 그는 내가 답을 안 해도 다음 말을 보냈다.내 침묵을 기다림으로 두지 못했다.그런 사람이 오늘은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나는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그리고 조금 허전했다.양치하면서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이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잠을 못 잔 사람 얼굴이었다.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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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1화. 아직은, 닿아도 되는 순간[너도 천천히 와.]보내고 나서나는 한참 화면을 봤다.읽음.태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나는 가방끈을 괜히 고쳐 잡았다.답이 안 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내가 먼저 대화를 끝낼 수도 있는 말이었다.너도 천천히 와.그냥 인사처럼 보낼 수 있는 말.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나는 개찰구 앞에서 카드를 찍고플랫폼으로 내려갔다.사람이 많았다.퇴근 시간 특유의 소리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발소리,안내 방송,열차가 들어오기 전 바람,누군가의 짧은 통화.그 속에 섞여 있으니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래도 손은 계속 휴대폰 쪽으로 갔다.진짜 미쳤나 보다.내가 지금강태준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웃음이 날 것 같았다.어이가 없어서.그리고 조금 좋아서.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응.나는 화면을 보고 멈췄다.응.또 응.그런데 이상하게 이번엔 밉지 않았다.조금 뒤,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강태준]* 천천히 갈게.나는 입술을 눌렀다.별말 아닌데.정말 별말 아닌데.그 사람이 내 말을 그대로 받아자기 말로 다시 보내는 게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천천히 갈게.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대신 화면을 한 번 더 보고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열차가 들어왔다.문이 열리고,사람들이 밀려 들어갔다.나도 그 사이에 섞였다.자리에 앉지는 못했다.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창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조금 웃고 있었다.진짜 티 난다.나는 고개를 숙였다.오늘 하루 종일 이상했다.조금만.지금은 괜찮아.오늘은 괜찮아.문자해도 돼.천천히 가.너도 천천히 와.이런 말들이 뭐라고.예전 같았으면 우스웠을 말들이다.사랑해도 아니고,다시 시작하자도 아니고,보고 싶어도 아닌데.그런데 나는 이제 안다.너무 큰 말은 도망칠 수 있다.크니까.무서우니까.못 들은 척하기도 쉽다.그런데 작은 말은 이상하다.도망치기 전에 먼저 들어온다.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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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화. 조금만, 허락된 마음조금만.보내고 나서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좋아해도 돼?태준이 그렇게 물었고,나는 그렇게 답했다.조금만.진짜 웃긴 대답이었다.좋아하는 마음에 조금이 어디 있다고.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싫으면 싫은 거지.그 사이에 선을 그어놓고여기까지만 좋아하라고 말하는 게말이 되는 일인가.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보냈다.조금만.더 웃긴 건,그 말이 싫지 않았다는 거다.내가 허락한 것 같아서.완전히 밀어낸 게 아니라서.그리고 그걸 태준도 알 것 같아서.나는 화면을 오래 봤다.읽음.한참 답이 없었다.십 초.이십 초.삼십 초.나는 괜히 침대 끝에 앉아휴대폰을 양손으로 잡았다.왜 답이 없지.당황했나.기분이 이상한가.아니면 너무 좋아서 말을 고르는 중인가.거기까지 생각하고나는 이마를 손등으로 눌렀다.진짜 미쳤나 보다.내가 지금강태준이 좋아하길 바라고 있는 건가.그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오늘도 조금만 좋아할게.나는 숨을 멈췄다.오늘도.조금만.좋아할게.그 문장을 읽는데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그는 장난처럼 말하지 않았다.나를 놀리려고 한 말도 아니었다.그냥,정말 그렇게 해보겠다는 사람처럼 보냈다.오늘도 조금만 좋아할게.말은 다정한데왜 이렇게 아프지.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입력창을 열었다가 닫았다.괜찮다고 써볼까.알겠다고 할까.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할까.아니면 그냥,나도 모르겠다고 할까.아무 말도 맞지 않았다.그래서 보내지 않았다.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그런데 화면을 뒤집어도문장은 계속 남았다.오늘도 조금만 좋아할게.나는 불을 끄고 누웠다.방 안은 어두웠고,창밖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이상하게 몸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무슨 일이 크게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안긴 것도 아니고,다시 시작하자고 말한 것도 아니다.그런데 오늘 나는태준에게 아주 작은 문 하나를 열어준 것 같았다
Last Updated: 2026-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