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3년 전, 가장 사랑했던 남자를 떠났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망치듯 들어간 새 집에서 한서윤은 가장 피하고 싶었던 남자, 강태준과 다시 마주친다. “이번엔 절대 안 놓쳐.” 끝난 줄 알았던 사랑은 후회와 집착이 되어 돌아왔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뜨거웠고, 서윤은 그 온도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같은 집, 같은 공기, 같은 밤. 그리고 다시 시작된 감정. 한서윤은 이번에도 그를 밀어낼 수 있을까?
View More끝난 관계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식어서 끝난 건 아니었다.
너무 오래 뜨거웠고,
너무 오래 서로를 태웠다.
가까워질수록 더 아팠고,
좋아할수록 더 지쳤다.
그래서 끝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기로.
다시는 흔들리지 않기로.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내 새 집 로비에서 다시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몸이 먼저 그 목소리를 알아봤다.
그래서 더 싫었다.
강태준.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던 남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오늘이 그냥 평범한 이삿날이라고 생각했다.
“한서윤 씨 맞으시죠?”
부동산 중개인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입주하시는 오피스텔, 집주인 측 대리인이 곧 도착할 겁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 집은 회사와 가까웠고, 조건도 괜찮았다.
급하게 집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 매물은 흔치 않았다.
다만 이상한 건 하나 있었다.
너무 쉽게 구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앞 자동문이 열렸다.
낮은 구두 소리.
검은 코트 자락.
익숙한 향.
나는 고개를 돌리다 그대로 멈췄다.
강태준이 로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셔츠 위에 어두운 코트.
무심한 표정.
그리고 여전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눈.
그 눈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괜히 손에 든 서류를 더 세게 쥐었다.
태준도 나를 알아봤다.
그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남자도 놀랐다.
놀랐는데,
금방 숨겼다.
예전에도 그랬다.
놀라도 티 내지 않았고,
상처받아도 조용했고,
붙잡고 싶은 게 있어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사람을 미치게 했다.
“강 실장님, 오셨어요.”
중개인의 말에 나는 태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 실장님.
그 호칭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내가 알던 강태준은,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사람 같았다.
아니.
그렇게 부르는 게 맞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태준은 중개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봤다.
“한서윤.”
3년 만이었다.
내 이름이 그의 목소리로 다시 불리는 건.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여기서 뭐 해?”
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중개인을 봤다.
“입주자 확인하러 왔습니다.”
“아,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중개인이 우리 사이를 번갈아 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맞지 않았다.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헤어진 사이.
다시 보면 안 되는 사이.
그중 어디에도 우리를 딱 넣을 수 없었다.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알던 사이입니다.”
예전에.
알던 사이.
그 말이 가볍게 떨어졌다.
나는 웃고 싶었다.
우리가 그렇게 간단한 말로 정리될 수 있다면,
나는 지난 3년을 조금 덜 피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럼 올라가시죠.”
중개인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주하실 호실 확인하시고, 서류만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 안에 중개인과 나,
그리고 강태준이 같이 섰다.
나는 일부러 정면만 봤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바로 옆에 있다는 걸.
검은 셔츠에서 나는 희미한 우디 향.
오래전에 너무 익숙했던 냄새.
익숙해서 더 기분 나쁜 거리.
태준이 낮게 말했다.
“이사, 갑자기 했나 보네.”
나는 앞만 본 채 대답했다.
“네가 알 일 아니야.”
“그런가.”
짧은 대답.
저런 식이다.
한 걸음 들어오고,
아닌 척 물러난다.
상대가 그 한 걸음을 계속 신경 쓰게 만든다.
나는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눌렀다.
종이가 조금 구겨졌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나는 먼저 걸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새로 닦은 바닥 냄새와 낯선 벽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 새 집.
아니, 이제 내 새 집이 되어야 하는 곳.
중개인이 문 앞에서 키패드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집 안이 드러났다.
큰 창.
차갑게 정리된 거실.
아직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공간.
밖으로는 도시 불빛이 낮게 깔려 있었다.
분명 괜찮은 집이었다.
혼자 새로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
그런데 이상하게,
문을 넘는 순간부터 새 집 같지 않았다.
누가 먼저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구조는 보셨죠? 옵션은 그대로고요.”
중개인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태준은 말없이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바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에도 저랬다.
낯선 공간에 가면 그는 늘 창부터 봤다.
해가 어디서 들어오는지,
밤에는 어디가 가장 어두워지는지,
바깥 소음은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는지.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살폈다.
나는 그게 좋았던 적이 있다.
이제는 그런 걸 기억하는 내가 싫었다.
“계약서 마지막 확인만 부탁드릴게요.”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계약 조건.
관리비.
입주일.
옵션 확인.
차례로 넘기던 손이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소유자 대리인.
강태준.
한동안 글자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집 네 거야?”
태준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내가 관리하는 집이야.”
“그게 그거잖아.”
“정확히는 달라.”
“장난해?”
중개인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너 일부러 그런 거야?”
태준은 나를 봤다.
“뭘.”
“내가 여기 들어오는 거 알고 있었냐고.”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대답보다 더 정확했다.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알고 있었네.”
“어제 알았어.”
“그럼 말했어야지.”
“말하면 안 들어왔을 거잖아.”
“당연하지.”
“그래서 안 했어.”
너무 태연했다.
너무 강태준답게.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잃은 게 아니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덜 화가 날지 고르는 중이었다.
결국 아무 말도 덜 화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너 여전하네.”
“너도.”
“뭐가.”
“도망가는 거.”
목 안쪽에 그 말이 걸렸다.
나는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말 조심해.”
“틀린 말은 아니잖아.”
태준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무심한 척하면서,
사람 속은 끝까지 들여다보는 눈.
저 눈이 싫었다.
나를 너무 잘 아는 것처럼 구는 눈.
아직도 내가 어디서 무너질지 아는 사람처럼.
“계약 파기하고 싶으면 해.”
그가 낮게 말했다.
“위약금은 내가 처리하지.”
그 말이 더 기분 나빴다.
마치 내가 도망칠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아서.
그리고 도망쳐도 된다고 말하는 척하면서,
내가 도망치지 못할 것도 아는 사람 같아서.
나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이 집을 포기할 수 있을까.
예전 집은 오늘 비워야 했다.
짐은 이미 도착하고 있었다.
회사 근처에 이만한 조건의 집을 다시 구하기도 어려웠다.
태준은 그걸 알고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게 제일 싫었다.
내가 선택한 집이라고 믿었던 곳에,
그가 이미 서 있었다는 게.
나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안 나가.”
태준의 눈매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여기서 살 거야.”
“…….”
“그러니까 네가 신경 꺼.”
나는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한서윤.
글씨가 평소보다 조금 날카로웠다.
중개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중개인이 돌아간 뒤,
집 안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공간이 이상하게 좁아졌다.
아직 가구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집인데,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방 안이 꽉 찬 것 같았다.
예전엔 같은 공간 안의 침묵이 편했다.
각자 다른 일을 해도,
서로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침묵은 자꾸 피부 가까이에 와 닿았다.
“비밀번호 바꿔.”
태준이 먼저 말했다.
나는 바로 그를 봤다.
“말 안 해도 바꿀 거야.”
“창문 잠금장치도 확인하고.”
“그것도 할 거야.”
“욕실 환풍기는—”
“강태준.”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관리인 역할 하지 마.”
그가 나를 바라봤다.
“필요한 말만 하는 건데.”
“그게 싫다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태준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등이 식탁 모서리에 닿았다.
차가운 감각이 허리에 닿고 나서야 내가 물러났다는 걸 알았다.
태준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딱 그 거리에서.
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너 어디 갈 데 없잖아.”
그가 낮게 말했다.
“짐도 다 오고 있고,
예전 집은 오늘 비워야 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모를 것 같았어?”
내가 뭘 숨기고 있었는지,
그는 너무 쉽게 말했다.
“너 조사했어?”
“부동산 서류 보면 알 수 있어.”
“그래서?”
“그래서 그냥 뒀어.”
“뭘.”
“네가 여기라도 들어오게.”
그 말은 이상했다.
차라리 더 노골적으로 나빴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태준은 늘 그런 식이었다.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다가와서,
마지막에는 다정한 척 빠져나갈 수 있는 말을 남긴다.
나는 그게 더 싫었다.
“착한 척하지 마.”
태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내 입술 근처에 머물렀다.
짧았다.
하지만 나는 봤다.
“착한 적 없어.”
그가 낮게 말했다.
“너한테는 특히.”
몸 안쪽에서 오래 눌러둔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밀치듯 지나쳐 현관 쪽으로 걸었다.
“나가.”
태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비밀번호 바꿀 거니까 나가라고.”
“바꾸는 거 보고 갈게.”
“내가 어린애야?”
“그랬으면 더 쉬웠겠지.”
나는 그대로 멈췄다.
“넌 늘 괜찮은 척하다가,
꼭 제일 안 괜찮을 때 혼자 버티니까.”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바로 화가 났다.
정확한 말은 가끔 틀린 말보다 더 잔인하다.
특히 그걸,
강태준이 할 때는.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있어.”
“없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이번엔 정말 뒤돌아봤다.
태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3년 전 마지막 날처럼.
비가 오던 밤.
끝까지 나를 붙잡지 않던 남자.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넌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잖아.
그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마디도.
그래서 나는 떠났다.
내가 틀렸다는 말도,
맞다는 말도 듣지 못한 채로.
“이제 와서 그런 말 하지 마.”
내 목소리가 내가 원한 것보다 낮게 나왔다.
태준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알았어.”
그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직전,
잠깐 멈춘 그가 낮게 말했다.
“한서윤.”
나는 싫은데도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아직도 너무 익숙해서.
“여기서 사는 동안.”
“…….”
“나 피하려고 애쓰지 마.”
내가 웃었다.
웃음이 예쁘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태준이 나를 보았다.
낮고 조용한 눈빛.
“어차피 자주 보게 될 거니까.”
문이 닫혔다.
철컥.
도어락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 집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빈집이어야 하는 공간 안에서,
자꾸만 그 남자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제야 알았다.
이 집은 내가 고른 곳이지만,
내가 완전히 피해서 들어온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났다고 믿었던 감정이
다시 열을 올리는 순간들을 담아보려 합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조금만.보내고 나서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좋아해도 돼?태준이 그렇게 물었고,나는 그렇게 답했다.조금만.진짜 웃긴 대답이었다.좋아하는 마음에 조금이 어디 있다고.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싫으면 싫은 거지.그 사이에 선을 그어놓고여기까지만 좋아하라고 말하는 게말이 되는 일인가.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보냈다.조금만.더 웃긴 건,그 말이 싫지 않았다는 거다.내가 허락한 것 같아서.완전히 밀어낸 게 아니라서.그리고 그걸 태준도 알 것 같아서.나는 화면을 오래 봤다.읽음.한참 답이 없었다.십 초.이십 초.삼십 초.나는 괜히 침대 끝에 앉아휴대폰을 양손으로 잡았다.왜 답이 없지.당황했나.기분이 이상한가.아니면 너무 좋아서 말을 고르는 중인가.거기까지 생각하고나는 이마를 손등으로 눌렀다.진짜 미쳤나 보다.내가 지금강태준이 좋아하길 바라고 있는 건가.그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오늘도 조금만 좋아할게.나는 숨을 멈췄다.오늘도.조금만.좋아할게.그 문장을 읽는데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뜨거워졌다.그는 장난처럼 말하지 않았다.나를 놀리려고 한 말도 아니었다.그냥,정말 그렇게 해보겠다는 사람처럼 보냈다.오늘도 조금만 좋아할게.말은 다정한데왜 이렇게 아프지.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입력창을 열었다가 닫았다.괜찮다고 써볼까.알겠다고 할까.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할까.아니면 그냥,나도 모르겠다고 할까.아무 말도 맞지 않았다.그래서 보내지 않았다.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그런데 화면을 뒤집어도문장은 계속 남았다.오늘도 조금만 좋아할게.나는 불을 끄고 누웠다.방 안은 어두웠고,창밖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이상하게 몸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다.무슨 일이 크게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안긴 것도 아니고,다시 시작하자고 말한 것도 아니다.그런데 오늘 나는태준에게 아주 작은 문 하나를 열어준 것 같았다
오후 세 시 회의실 앞에서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깐 멈췄다.안에 태준이 있었다.혼자.그는 창가 쪽에 서서 자료를 보고 있었다.회의 시작까지는 아직 십 분쯤 남아 있었고,회의실 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들어가야 하는데발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어젯밤 내가 보낸 문자가갑자기 손끝에서 다시 살아났다.도착했어.문도 잠갔어.내가 먼저 보낸 말.태준이 묻기 전에.그가 기다리고 있을 걸 알면서도,일부러 내가 먼저 보낸 말.그리고 그가 답했다.잘했어.기다렸어.네가 한 말이라서 믿고 기다렸어.그 문장들이 자꾸 나를 이상하게 만들었다.무슨 대단한 약속도 아니었다.집에 들어갔다는 말.문을 잠갔다는 말.그게 전부였다.그런데 왜 이렇게 민망하지.왜 이렇게 들킨 것 같지.나는 손에 든 자료를 한 번 고쳐 잡았다.현장 벽면 서브 카피 최종안.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내가 쓴 문장이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 아래 붙을 문장.메인 카피보다 담담하게 쓰려고 했는데,막상 쓰고 보니 이것도 내 얘기 같았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정말 싫다.요즘 내가 쓰는 문장은왜 자꾸 나를 배신하는지 모르겠다.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열었다.태준이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딱 그 짧은 순간에어젯밤의 메시지가 우리 사이에 다시 놓였다.도착했어.문도 잠갔어.잘했어.기다렸어.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너무 많은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나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일찍 왔네.”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태준은 자료를 내려놓았다.“응.”“자료 확인 중이었어?”“응.”짧은 대답.그런데 나는 이제 안다.저 짧은 응 안에그가 얼마나 많은 걸 삼키는지.예전엔 몰랐다.아니,몰랐다고 하고 싶었다.나는 태준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자료를 펼쳤다.그가 내 쪽으로 오지 않는 게 느껴졌다.다가오지 않았다.묻지도 않았다.어제 먼저 보내줘서 고마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정우진 씨랑 있으면 편해?”태준의 첫마디가 그거였다.나는 회의실 문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오후 네 시.비는 그쳤고,복도 끝 유리창에는 젖은 하늘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사람들이 다니는 회사 복도였다.프린터 돌아가는 소리도 들렸고,멀리서 누가 웃는 소리도 들렸다.그런데 태준은 그런 곳에서너무 사적인 말을 꺼냈다.정우진 씨랑 있으면 편해?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질문이 너무 곧장 왔다.그런데 이상하게몰아붙이는 느낌은 아니었다.예전의 태준이었다면이렇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왜 그 사람 우산을 썼어.내 차 두고 왜.나 말고 그 사람이 편해?그런 식이었을 것이다.묻는 척하면서이미 화가 나 있는 말.그런데 지금의 태준은 달랐다.화난 얼굴은 아니었다.그냥 알고 싶은 얼굴이었다.아픈 걸 숨기다가더는 못 숨겨서 꺼내놓은 사람처럼.나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조금 세게 쥐었다.“갑자기?”“갑자기 아니야.”그가 말했다.“어제부터 계속 생각했어.”나는 시선을 피했다.어제.우진의 우산.비 오는 건물 앞.태준은 차를 가져왔다고 했고,나는 우진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그 순간 태준의 얼굴이아직도 생각난다.붙잡지 않는 얼굴.그런데 붙잡지 않느라무언가를 삼키는 얼굴.그걸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태준은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복도 벽에 등을 기대지도 않았다.그냥 내 앞에 서 있었다.조금 떨어져서.요즘 그는 자꾸그 거리를 지킨다.그게 더 어렵다.“편해.”내가 말했다.태준의 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나는 그걸 보고 바로 덧붙였다.“우진 씨는 편해.”말하고 나서숨이 막혔다.이 말은 너무 솔직했다.그리고 너무 잔인할 수도 있었다.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내 말을 삼키듯 듣고 있었다.나는 입술을 눌렀다.“근데 그 편한 게…”말이 잘 안 나왔다.이런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우진은 편하다.정확히 말하면,내가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편함이 있다.그는 나를 몰아붙이지
그 문장은 결국 벽에 걸렸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내가 썼고,태준이 오래 봤고,우진이 너무 안쪽에서 나온 문장이라고 했던 말.그 문장이 이제는 회의실 화면이 아니라실제 공간의 벽 한가운데 붙어 있었다.임시 출력물이긴 했다.아직 최종 시공 전이라얇은 폼보드에 붙여둔 시안일 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진짜보다 더 진짜 같았다.사람이 들어오기 전의 현장.전선이 바닥을 지나가고,조명은 절반쯤만 켜져 있고,벽면 일부는 아직 마감 전이라 거칠었다.그 한가운데너무 멀쩡한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나는 그 앞에 서서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문장은 내가 썼는데,이제 내 손을 떠난 것 같았다.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걸리면문장은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그 안에 뭘 숨겼든,누굴 생각했든,어디까지가 업무였고 어디부터가 마음이었든.이제는 다 소용없었다.벽에 걸린 순간그 문장은 나보다 더 뻔뻔해졌다.“한서윤 씨.”우진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시공팀과 이야기를 마치고 있었다.검은 파일을 들고,늘 그렇듯 단정한 얼굴이었다.“위치는 괜찮습니까?”나는 다시 벽을 봤다.“네. 괜찮은 것 같아요.”“조명이 들어오면 더 선명해질 겁니다.”“그럼 너무 튀지 않을까요?”우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그는 문장을 오래 보지 않았다.딱 필요한 만큼만 봤다.“튀는 문장이긴 합니다.”“역시 그렇죠.”“그런데 나쁘게 튀지는 않습니다.”나는 작게 웃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우진은 잠깐 생각하듯 벽을 봤다.“사람이 그냥 지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쪽입니다.”그 말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지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문장.그게 좋은 건지위험한 건지아직 모르겠다.우진이 나를 보았다.“불편합니까?”너무 정확한 질문이었다.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조금요.”“왜요?”“제가 쓴 문장이 너무 크게 보이는 게 이상해서요.”“문장이 커진 겁니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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