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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가까운 체온, 위험한 선

Author: 윤미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8 19:06:52

잠을 거의 못 잤다.

정확히는,

잠이 들었다가 계속 깼다.

눈을 감으면 자꾸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강태준의 손.

내 팔을 붙잡던 힘.

너무 가까웠던 거리.

그리고.

선 넘은 건 아직 아닌데.

미친 남자.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낮게 욕을 삼켰다.

욕을 한다고 잊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그 말은 자꾸 귓가에 남았다.

선 넘은 건 아직 아니라고.

그럼 어디까지가 선인데.

나는 이불을 걷어찼다.

아침 빛이 커튼 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일곱 시 반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슬슬 출근 준비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몸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을 못 자서인지,

그 남자 때문인지,

둘 다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오래 씻었다.

눈가가 조금 부어 있었다.

울어서가 아니었다.

안 잤으니까.

그렇게 정리하면 된다.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누르며 거울 속 나를 봤다.

괜찮아 보이려고 애쓰는 얼굴.

그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샤워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자 집은 여전히 낯설었다.

짐은 대충 정리되어 있었지만,

생활의 온기는 없었다.

박스 몇 개.

아직 자리 잡지 못한 그릇들.

식탁 위에 올려둔 계약서 봉투.

싱크대 옆에 놓인 생수병.

새로 시작하려고 고른 집인데,

어딘가 남의 집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혼자 있는 집인데도 자꾸 강태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현관 앞.

주방 옆.

욕실 문가.

내 팔을 붙잡았던 자리.

나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아무 자국도 없었다.

그런데 없는 자국이 더 신경 쓰였다.

“진짜 미쳤나 봐.”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현관 쪽에서 벨 소리가 났다.

띵동.

나는 그대로 멈췄다.

이번엔 도어락 소리가 아니었다.

벨이었다.

그래도 몸이 먼저 굳었다.

아침부터 올 사람이 없었다.

이삿짐 정리도 어제 거의 끝났고,

관리실에서 연락 온 것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인터폰 화면을 켰다.

화면 안에 강태준이 서 있었다.

검은 셔츠 차림.

한 손에는 쇼핑백.

나는 짧게 웃었다.

어이없어서.

어제 새벽에 그렇게 들어오더니,

이번엔 벨을 누른다.

참 잘했다.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나는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뭐야.”

화면 속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아침.”

“뭐?”

“먹으라고.”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너 지금 장난해?”

“아니.”

“아침을 왜 네가 가져와.”

“냉장고에 물밖에 없었으니까.”

“그걸 왜 봐.”

“어제 봤으니까.”

너무 당연하다는 말투라 더 짜증이 났다.

나는 현관문을 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냥 가.”

“문 앞에 두고 갈게.”

“필요 없어.”

“그럼 버려.”

태준은 그렇게 말하고 쇼핑백을 문 옆에 내려놓았다.

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가지 않았다.

그게 더 문제였다.

가라고 하면 갈 수 있을 텐데,

완전히 떠나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결국 문을 열었다.

체인락은 걸어둔 채였다.

문이 조금 열리고,

그 틈으로 태준의 얼굴이 보였다.

그도 체인락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 나았다.

“이게 뭐 하는 건데.”

내가 말했다.

태준은 문 옆에 놓인 쇼핑백을 내려다봤다.

“아침.”

“그 말 아까 들었어.”

“토스트랑 샌드위치.”

“내가 그걸 왜 먹어.”

“안 먹어도 돼.”

“그럼 왜 가져와.”

태준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 소리도 거의 없었다.

그 조용한 복도에서,

우리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체인락이 걸린 문.

그게 우습게도,

어제보다 안전했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네가 안 먹을 것 같아서.”

나는 바로 대꾸하려다 멈췄다.

정확해서였다.

나는 아마 안 먹었을 것이다.

커피도 제대로 안 마시고,

출근 준비를 하다가,

점심쯤 돼서야 속이 쓰린 걸 느꼈을 것이다.

이 사람은 그런 걸 아직도 안다.

그게 싫었다.

정확히는,

싫어야 하는데 아주 싫지만은 않은 게 더 싫었다.

“이런 거 하지 마.”

“왜.”

“헷갈리니까.”

말이 너무 빨리 나왔다.

나오고 나서야 내 입을 의심했다.

태준의 눈빛이 아주 조금 바뀌었다.

“헷갈려?”

“그 뜻 아니야.”

“넌 원래 그런 말 하고 나서 꼭 후회하더라.”

“아는 척하지 마.”

“척 아니야.”

“그럼 더 하지 마.”

태준은 조용히 나를 봤다.

그 시선이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는데,

이미 안쪽으로 들어온 것처럼.

나는 손끝으로 문을 잡았다.

“너 지금 우리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알아?”

태준은 바로 대답했다.

“알아.”

“아는데 이래?”

“알아서 이러는 거야.”

“뭐?”

“모르면 못 왔겠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식이다.

짧게 말하는데,

그 안에 사람을 붙잡는 데가 있다.

나는 문을 더 열지도,

닫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태준이 쇼핑백을 조금 앞으로 밀었다.

“문 안 열어도 돼.”

“…….”

“이건 그냥 두고 갈게.”

“강태준.”

“응.”

“앞으로 이런 식으로 아침 챙기지 마.”

그는 잠깐 나를 보았다.

“알았어.”

너무 쉽게 대답했다.

쉬운 대답은 믿기 어렵다.

“진짜야.”

“응.”

“응도 하지 마.”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바로 멈추는 게 더 불편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내가 싫다고 해도 한 번쯤은 더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그는 이상하게 물러난다.

물러나는데,

그 자리에 남은 것들이 더 오래 간다.

나는 쇼핑백을 내려다봤다.

브랜드 로고가 보였다.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카페였다.

정확히는,

아침 회의 있는 날 자주 사 먹던 샌드위치 가게.

나는 그것까지 알아봤다는 사실이 싫어서 바로 시선을 떼었다.

“…너 아직도 이런 거 기억해?”

“기억나니까.”

“그런 걸 왜 기억하냐고.”

태준은 아주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그 질문이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너랑 관련된 건 잘 안 잊어.”

나는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런 말을 아침부터 하면 안 된다.

이 남자는 아직도,

어떤 말이 어디를 건드리는지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모르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게 더 위험하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너 그런 말 쉽게 하지 마.”

“쉽게 한 적 없어.”

“나한텐 쉽게 들려.”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잠깐 복도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 틈을 견디기 싫어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태준이 낮게 말했다.

“회사 몇 시 출근.”

나는 다시 그를 봤다.

“왜.”

“태워다 주게.”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됐어.”

“차 없잖아.”

“버스 타면 돼.”

“잠 못 잤잖아.”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너는 왜 아직도 사람 숨 막히게 해?”

태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걱정하는 건데.”

“그 걱정이 부담스럽다고.”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그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의식되는 거겠지.”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그게 더 싫었다.

문틈 사이로 그의 시선이 들어왔다.

아침 햇살이 복도 창에서 들어와 그의 어깨를 비췄다.

밤보다 밝은데,

오히려 더 피할 데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 잘 보였다.

잠이 부족한 사람처럼 조금 가라앉은 눈.

어제와 같은 셔츠.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리 끝.

태준은 나를 보더니 낮게 말했다.

“눈 부었어.”

나는 바로 대답했다.

“안 울었어.”

“그럼 잠 못 잤네.”

“너 진짜.”

“왜.”

“사람 좀 그만 봐.”

그가 아주 작게 웃었다.

“너는 아직도 얼굴에 다 보여.”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나는 거짓말을 못 했고,

강태준은 그런 나를 너무 잘 읽었다.

그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건 숨을 곳을 없애는 일이 됐다.

나는 문을 닫으려 했다.

“출근 준비해야 하니까 가.”

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아.”

그 호칭에 문을 닫던 손이 멈췄다.

헤어진 뒤 다시 들은 그 이름은,

아직도 나를 너무 쉽게 붙잡았다.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왜.”

태준이 나를 똑바로 봤다.

“우리 진짜 끝난 거 맞아?”

순간 복도 소리가 전부 멀어졌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태준 얼굴은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눈은 아니었다.

참고 있는 사람의 눈.

나는 갑자기 겁이 났다.

이 남자가 다시 가까워지는 게.

내가 또 밀려나는 게.

그리고 밀려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쪽에서 문을 완전히 닫지 못하고 있다는 게.

나는 일부러 더 차갑게 말했다.

“그걸 이제 와서 물어?”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끝났어.”

“…….”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체인락이 걸린 문틈 사이로,

그의 시선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

“근데 왜.”

그의 눈이 내 입술 근처에서 아주 짧게 멈췄다.

“아직도 넌 내 앞에서 그렇게 떨려.”

나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반박해야 했다.

떨린 게 아니라고.

네가 불쾌해서 그렇다고.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렇다고.

할 말은 많았다.

그런데 어떤 말도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을 태준은 전부 봤다.

이 남자는 늘 그런 침묵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결국 문고리를 더 세게 잡았다.

“착각하지 마.”

“그랬으면 좋겠는데.”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착각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체인락을 풀지 않았다.

문도 더 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이미 너무 가까웠다.

닫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태준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한서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그 말이 더 안쪽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그는 문틈 사이로 나를 보았다.

닫힌 것도 아니고,

열린 것도 아닌 문.

그 애매한 틈 사이에서,

그 남자는 너무 쉽게 나를 흔들고 있었다.

“우리 아직 안 끝났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나는 문을 닫아야 했다.

당장.

그런데 손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체인락이 걸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너무 가까웠다.

태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끝났다고 말해야 했다.

끝났다고,

분명히,

다시 한 번.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문밖에는 태준이 있었고,

문 안에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아직 끊어내지 못한 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우리 아직 안 끝났네.

[작가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났다고 믿었던 관계가

가장 애매한 거리에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미열주의》는 다음 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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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열주의   186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5)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열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안으로 들어갔다.손잡이를 잡고 서자, 손끝에 아직 우산대의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내 손 위에 닿은 건 아니었다.그런데도 그가 잡아준 방향이 남아 있었다.몸은 참 이상하다.직접 닿지 않은 것도 기억한다.집에 도착해서 문을 잠갔다.젖은 우산을 펼쳐놓고, 코트를 벗었다.오늘은 휴대폰을 바로 들지 않았다.일부러 조금 늦췄다.손을 씻고, 물을 마시고, 머리를 묶었다.그리고 나서야 메시지를 보냈다.[들어왔어.]읽음.답은 바로 왔다.[강태준]문은?나는 웃었다.[잠갔어.][강태준]우산은?나는 잠깐 멈췄다.우산은?이 사람 진짜.[펴놨어.]읽음.답이 왔다.[강태준]잘했어.나는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그 말은 네가 할 말 아닌 것 같은데.][강태준]그래도 하고 싶었어.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한참 입력창을 열어두고 있다가 썼다.[오늘 우산 잡은 거.]읽음.답은 없었다.기다리는 것 같았다.나는 이어서 보냈다.[기억하지 마.]보내자마자 후회했다.너무 차갑나.곧바로 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그건 어려운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또.또 이런다.[그래도 너무 크게는 말고.]읽음.한참 뒤 답이 왔다.[강태준]응.잠깐.[강태준]작게 기억할게.나는 결국 웃었다.작게 기억할게.그게 말이 되나.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휴대폰을 내려놓았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에는 비가 여전히 내렸다.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몸보다 마음이 더.현장.유리벽.흔들린 발.멈춘 태준.잡힌 우산.싫지 않았다는 말.그중 뭐가 제일 크게 남았는지 모르겠다.아마 전부 조금씩.나는 눈을 감았다.어제보다 조금 가까워졌고,오늘도 아주 멀리 가지는 않았다.그 정도면 됐다.아직은.⸻【태준의 속마음 33】비가 오면 아직도 네가 먼저 생각난다.

  • 미열주의   185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4)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신호는 빨간불이었다.차들이 지나갔다.젖은 도로 위로 헤드라이트가 길게 퍼졌다.옆에서 태준이 말했다.“아까.”“응.”“유리 안쪽에서 흔들렸을 때.”“별거 아니었어.”“알아.”“근데?”“가고 싶었어.”나는 신호등을 봤다.빨간 사람 모양이 너무 선명했다.“근데 멈췄잖아.”“네가 오지 말라고 한 것 같아서.”“손 들려다가 말았어.”“봤어.”“그런 것도 봐?”“응.”“너 진짜 피곤하겠다.”“조금.”태준은 낮게 웃었다.“근데 안 보면 더 피곤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신호가 바뀌었다.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우리는 같이 움직였다.중간쯤 갔을 때, 옆에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며 내 우산을 스쳤다.우산이 크게 흔들렸다.몸이 살짝 밀렸다.그 순간 태준의 손이 내 우산대를 잡았다.이번엔 멈추지 않았다.손이 정확하게 우산대를 잡았고, 내 어깨에 비가 떨어지지 않게 각도를 세웠다.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태준도 바로 손을 떼지 않았다.딱 신호를 다 건널 때까지.길을 건너고 나서야 그는 손을 놓았다.“미안.”그가 말했다.“잡아도 된다고 해서.”나는 우산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심장이 좀 빠르게 뛰었다.우산인데.그냥 우산인데.“응.”내가 말했다.“그건 괜찮았어.”태준은 아주 짧게 나를 봤다.“다행이다.”“근데.”“응.”“그렇게 조심스럽게 사과하면 더 이상해.”태준은 잠깐 멈칫했다.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엔 안 미안하다고 할게.”“그것도 이상해.”“어렵네.”“응.”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려워.”둘 다 웃지는 않았다.그런데 공기가 아주 조금 풀렸다.지하철역 입구가 가까워졌다.이제 여기서 헤어지는 게 익숙해질 때도 됐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입구가 너무 빨리 왔다.나는 계단 앞에서 멈췄다.태준도 멈췄다.비가 우산 위에 계속 떨어졌다.“오늘.”내가 먼저 말했다.태준이 나를 봤다.“응.”“우산 잡아준 거.”말하고 나서

  • 미열주의   184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3)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려다가 멈췄다.또 괜찮아.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그 말이 먼저 떠올랐다.나는 대신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괜찮다는 뜻이기도 했고,오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태준은 멈췄다.정확히 유리문 앞에서.그가 멈추는 걸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내려앉았다.다행이었다.그리고 조금 미안했다.촬영은 금방 끝났다.내가 자리에서 나오자 우진이 물었다.“괜찮아요? 아까 살짝 흔들리던데.”“괜찮아요.”말하고 나서 이번엔 그냥 웃었다.이제 이 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나 보다.태준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나를 보지 않는 척했다.하지만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이 꺼져 있었다.그가 아무것도 안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나는 그것까지 알아차리는 내가 싫었다.촬영팀은 마지막 컷을 준비했다.전시장 안쪽의 가장 어두운 벽면.그곳은 조명이 낮게 깔려 있어서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생겼다.촬영 감독은 태준에게 말했다.“강 디렉터님, 이 컷은 직접 한 번 서주시면 안 될까요? 뒷모습만 필요해서요.”태준은 잠깐 나를 봤다.왜 나를 보지.내 허락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나는 일부러 체크리스트를 봤다.태준은 말없이 벽면 앞으로 갔다.그는 조명 아래에 섰다.검은 코트가 어둠에 거의 묻혔다.어깨선만 남고, 옆얼굴은 아주 조금 빛을 받았다.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가까이 가고 싶다는 말보다,저 사람이 왜 저렇게 외로워 보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혼자 서 있는 태준은 늘 조금 멀어 보였다.예전에도 그랬다.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이상하게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나는 그게 멋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지금은 조금 아팠다.촬영 감독이 말했다.“좋습니다. 조금만 고개 오른쪽으로.”태준이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아주 잠깐.촬영용으로 고개를 돌린 것뿐인데, 나는 괜히 들킨 사람처럼 굳었다.태준도 바로 시선을

  • 미열주의   183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2)

    우진이 뒤에서 말했다.“강 디렉터님, 조명 라인 먼저 확인하면 될까요?”태준은 시선을 내게서 거뒀다.“네. 오른쪽 벽면부터 보면 됩니다.”일이 시작됐다.촬영팀은 장비를 세웠고, 우리는 조명과 동선을 확인했다.나는 체크리스트를 들고 다니며 촬영 컷 순서를 맞췄다.입구 전경.중앙 벽면.패널 디테일.야간 조명 반사.외부 유리 너머 장면.태준은 촬영 감독 옆에서 조명 각도를 조정했다.그는 일할 때 말이 줄어든다.필요한 말만 하고, 쓸데없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손짓은 정확했고, 눈은 어두운 공간 안에서 이상하게 더 선명했다.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얼른 시선을 내렸다.일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반칙이다.그 사람이 나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얼굴을 할 때, 오히려 더 신경이 간다.나는 체크리스트 맨 위 항목에 표시했다.입구 전경 완료.촬영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비가 오는 덕분에 유리 너머로 번지는 빛이 좋았다.촬영 감독은 계속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비 오는 게 오히려 살렸네요.”우진이 웃었다.“저희는 힘든데 사진은 예쁘죠.”나는 유리벽 옆에 서서 화면을 확인했다.카메라 모니터 안의 공간은 실제보다 더 어둡고, 더 깊어 보였다.빛이 천천히 번지고, 벽면의 그림자가 길었다.그때 태준이 내 옆으로 왔다.가까이 오지는 않았다.딱 모니터가 같이 보일 정도.“어때.”그가 물었다.“좋아.”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나는 바로 덧붙였다.“사진.”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알아.”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그 말 이제 너무 빨리 알아듣네.”“틀릴까 봐 빨리 확인하는 거야.”“그것도 웃겨.”“응.”그는 화면을 봤다.촬영 감독이 다음 컷을 준비하러 가자, 잠깐 주변이 조용해졌다.우진은 장비 쪽에 있었고, 우리는 유리벽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태준은 내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오늘 비 올 줄 알았으면.”나는 그를 봤다.“응?”“우산.”그는 잠깐 멈췄다.“잡아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 미열주의   182화. 이름 없는 사이, 가까워진 밤 (1)

    금요일이 왔다.별일 없이 온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이상하게 며칠 전부터 금요일을 의식하고 있었다.야간 조명 컷 재촬영.일정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그냥 업무였다.현장에 다시 가서 조명을 켜고, 사진 몇 장 찍고, 필요한 컷 확인하고, 정리하면 끝나는 일.그런데 내 머릿속에서는 그 일정이 자꾸 다른 말로 바뀌었다.밤.비.현장.태준.나는 아침부터 괜히 바빴다.메일을 보내고, 일정표를 다시 정리하고, 촬영 체크리스트를 출력했다.이미 확인한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오타도 없고, 빠진 것도 없었다.그런데 손이 자꾸 움직였다.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났다.지금도 아는 사이.내가 한 말인데도, 그 말이 자꾸 내 쪽으로 돌아왔다.아는 사이.그건 안전한 말이었다.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말.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었다.우리는 서로의 잠버릇까지 알았던 사람이고,말투가 바뀌는 순간도 알아차리는 사람이고,좋아하는 커피 온도와 싫어하는 침묵까지 기억하는 사람이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는 사이라고 한다.틀린 말은 아니었다.그래서 더 이상했다.점심쯤 팀장님이 내 자리로 와서 물었다.“서윤 씨, 오늘 야간 촬영 몇 시에 나가죠?”“여섯 시 반쯤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촬영은 일곱 시 반부터고요.”“강 디렉터님도 같이 가시죠?”나는 모니터를 보며 대답했다.“네. 조명 확인 때문에 현장으로 바로 오신다고 했어요.”“우진 씨도?”“네. 장비 체크 때문에 같이 갑니다.”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늦겠네요. 끝나고 바로 집에 가요. 정리는 월요일에 해도 됩니다.”“네.”“또 네 하고 밤새 정리하지 말고요.”나는 웃었다.“안 할게요.”“믿어도 되나.”“오늘은 믿으셔도 돼요.”오늘은.요즘 이 말을 너무 자주 쓴다.팀장님은 웃으며 돌아갔고, 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오늘은.오늘까지만.오늘은 괜찮은 날.오늘은 물어봐도 되는 날.오늘은 싫지 않은 날.하루 단위로 겨우 버티고 있는

  • 미열주의   181화. 아직 아닌 사이, 먼저 온 말 (6)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젖은 코트를 걸고 손을 씻었다.문도 잠갔다.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이번엔 조금 덜 망설였다.[들어왔어.]전송.읽음.답이 왔다.[강태준]문은?나는 웃었다.[잠갔어.][강태준]오늘은 물어봐도 괜찮은 날 맞네.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응.]잠깐 생각하다가 하나 더 썼다.[오늘은.]읽음.태준의 답은 조금 늦었다.[강태준]오늘 고마웠어.나는 화면을 보았다.고마웠어.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같이 걸어준 것.예전에는 빼라고 한 것.지금도 아는 사이라고 해준 것.전부.나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괜찮아.그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은 그 말만 보내고 싶지 않았다.나는 천천히 입력했다.[나도.]손이 멈췄다.너무 큰가.지웠다.다시 썼다.[나도 오늘은 괜찮았어.]전송.읽음.이번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몇 초 뒤 답이 왔다.[강태준]그 말 오래 들고 있으면 안 돼?나는 한숨처럼 웃었다.진짜 이 사람.[너무 오래는 말고.][강태준]그럼 오늘까지만.나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응. 오늘까지만.]읽음.태준의 답이 왔다.[강태준]잘 자.나는 조금 놀랐다.더 보내지 않았다.정말 잘 자 하나만 보냈다.나는 한참 그 문장을 보고 있었다.이제 그는 가끔 나보다 먼저 멈춘다.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나는 답했다.[잘 자.]그리고 화면을 껐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에는 비가 계속 내렸다.사진은 노트북 폴더 안에 있었다.이름 없는 복사본으로.그걸 아직 지우지 않았다.아마 오늘도 지우지 않을 것이다.나는 침대에 누웠다.오늘 들은 말들이 차례로 떠올랐다.예전에 아는 사이였습니다.정확한데 좀 별로였어.나도 몰라.보고 싶어서.오늘은 싫지 않아.예전에는 빼고.지금도 아는 사이.나는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아는 사이.너무 가볍고,너무 부족하고,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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