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실군에서의 마지막 밤.강태풍과 서나래는 방파제 잔교 위에 나란히 섰다.잔잔해진 바다는 언제 폭풍우가 몰아쳤냐는 듯 새벽의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서나래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강태풍을 돌아보았다."내일이면 나는 서울 대학병원으로 복귀해요. 당신은 다시 거친 바다로 나가겠죠.."강태풍은 서나래의 옆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의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서나래의 부드러운 손등에 닿았다."서울이든 , 독도 앞바다든 상관없습니다. 강 선생이 있는 곳이 내가 돌아갈 항구입니다."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차갑기 이를 데 없는 남자가,서나래 앞에서만 보여주는 이 무조건적인 순정은, 언제나 서나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또 태풍이 오는군요. 이번엔 더 클지도 모른대요."서나래의 말에 강태풍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제우스도 이겨냈는데 뭐가 무섭습니까? 게다가 이제는 내 등에 강 선생의 어머니가 주신 목숨이 있고, 내 앞에는 이렇게 당신이 있는데..."강태풍은 서나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달빛 아래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겹쳐졌다.같은 시각, 소방서로 복귀한 도훈은 캐비닛에 구조 장비를 정리하며서나래와 함께 찍은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바라보았다."잘 가라, 내 첫 사랑, 행복해라."도훈은 사진을 소중히 접어 수첩 깊은 곳에 넣고,새로 온 출동 지령서를 집어 들었다.지구대에서 순찰을 돌던 수아 역시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도훈의 소방서 복귀 신호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한 태풍 제우스는 물러갔지만,그들이 지켜낸 대지 위에는 새로운 사랑과 사명의 싹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각자의 자리에서 해경으로, 의사로, 소방관으로, 경찰로 다시 마주할 청춘들의 뜨거운 연대기.강태풍은 바다를 향해, 서나래는 환자들을 향해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대자연의 분노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은 인간의 집념과 애절한 사랑이,그렇게 거대한 폭풍의 밤을
합동 특수구조 TF의 해체식이 다가오고 있었다.연실군의 수해 복구는 빠르게 진행되었고,대피소에 있던 주민들도 정부가 마련한 임시 주거시설이나 안전이 확인된 집으로하나 둘 복귀하기 시작했다.수아는 도로 통제를 마치고 순찰차에 올라타며 조타실로 복귀하는 도훈을 바라보았다.도훈의 왼쪽 어깨에는 아직 두꺼운 보호대가 채워져 있었다."차 반장님, 이제 본서로 복귀하시는 거예요?'수아의 물음에 도훈은 특유의 능글맞은 대형견 미소를 지어 보였다."왜 그러죠, 민 순경님? 나 안보니까 벌써 섭섭한가요? 평생 소방서에서 살라면서요."수아는 얼굴이 빨개져서 빽 소리를 질렀다."누가 섭섭하대요!! 법 부수는 인간들 잡느라 바빠서 반장님 생각할 겨를도 없을 거거든요!"하지만 수아의 손끝은 순찰차 핸들을 꽉 잡고 있었다.도훈은 그런 수아의 머리를 왼손으로 툭툭 쳤다. "연실 지구대 자주 순찰 돌 테니까. 밥값이나 준비해 두시죠. 이번엔 내가 살테니까."은연중에 서로의 상처를 채워주며 스며든 두 사람만의 귀여운 약속이었다.한편, 해경 본부로부터 긴급 서한이 TF 지휘실로 날아들었다.태풍 제우스는 물러갔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대만 동쪽 해상에서 또 다른 열대저압부가무서운 속도로 발달하며 제2호 태풍 으로 격상될 조짐을 보인다는 예보였다.이번에는 남해안이 아니라 동해안을 관통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었다.강태풍은 지휘실 모니터에 뜬 위성 사진을 보며 눈빛을 매섭게 빛냈다.트라우마는 완전히 극복되었고, 이제 그에게 태풍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가서 사람들을 구해야 할 사명의 현장일 뿐이었다. 강태풍은 자신의 목에 다시 걸린, 서나래가 튼튼한 낚싯줄로 임시 고정해 준은색 구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어디로 오든 상관 없다. 전부 받아쳐 주지!."거인의 독기가 다시 한번 깨어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강태풍 씨?"서나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강태풍은 자기 지갑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신문 스크랩 한장을 거내어 서나래의 손에 건네 주었다.32년 전, 역대급 태풍 속에서 해경 구조대원 임연숙이 만삭의 임산부를 구출하고 뜯겨나가는 주민센터에서 무너지는 잔해를 피해기적적으로 아기를 출산시켰다는 짤막한 미담 기사였다.기사 속 사진에는 앳된 모습의 임연숙 대원이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내가......... 그날 밤 폭풍 속에서 태어난 그 아기입니다."강태풍의 목소리에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서나래는 신문 기사와 강태풍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어머니가 평생 사명감의 훈장처럼 이야기하던 그 아기가,지금 자기 눈 앞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해경 구조대원이 되어 자신을 구하고도시를 구한 거인으로 자라 서 있는 것이었다."엄마가....... 살린 아기가.... 당신이었다구요?"서나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강태풍은 서나래의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그의 심장이 단단하고 힘차게 뛰고 있었다."기억해 주십시오. 내 심장은 강 선생 어머니가 살렸습니다. 이 심장은 어머니 때문에 뛰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내 목숨은 이제 완벽하게 강 선생의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당신을 떠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입니다."평소 무뚝뚝하던 테토남의 입에서 나온 가장 뜨겁고 절절한 고백이었다.서나래는 강태풍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의 위대한 유산이 바로 눈앞의 이 남자라는 사실에,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환자들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이 눈 녹듯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교실 문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도훈은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의 손에는 서나래에게 주려고 챙겨둔 따뜻한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도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캔커피를 자신의 주머니 다시 넣었다."강서나래, 대단
태풍 제우스가 물러간 지 이틀째 되던 날, 연실군에는 외부 방역반과 보급품을 실은 대형 수송차량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통신도 일부 복구되어 본부와의 정상적인 교신이 가능해졌다.강태풍은 본부로 복귀하기 전,주민들의 건강 상태를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있던 서나래를 찾아갔다.그의 손에는 바다에서 건져 올려 깨끗이 닦어낸, 끊어진 은색 구조 목걸이가 들려있었다. "강 선생님, 이거........ 줄은 새로 갈아야겠지만 펜던트는 멀쩡합니다."강태풍이 목걸리를 건네자, 서나래는 그것을 받아들며 아련한 눈빛을 지었다."이거... 우리 엄마가 현역 시절에 쓰시던 구조 목걸이예요. 제가 성인이 되자 엄마가 물려주신 건데............. 엄마가 태풍 치던 바다 위에서 어떤 아기를 받아내고 그 아기의 배냇저고리에 이 목걸이를 걸어줬다가 나중에 다시 돌려받았다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강태풍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그의 머릿속에서 과거 어머니가 해 주었던 이야기와32년 전의 기록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지기 시작했다.'태풍 속에서 나를 받아준 대원.... 그 분이 바로..............?'강태풍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강 선생님. 혹시..... 어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강태풍의 갑작스럽고 진지한 질문에 서나래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임연숙 대원이요. 당시 남해 해경 관할 응급구조대 소속이셨어요. 왜 그래요?"임연숙, 강태풍이 자기 평생에 가슴에 새겨두고 찾아 헤매던 그 이름이었다.자신에게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폭풍 속에서 자기의 목숨줄을 세상에 붙잡아 매 준 은인.그 은인의 딸이 바로 자기 눈 앞에서 독설을 내뱉으면서도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강서나래였던 것이다.강태풍은 떨리는 손으로 서나래의 어깨를 꽉 움켜 쥐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당신이었어. 내 심장을 살린 분이, 바로 강 선생의 어머니였습니다.
태풍 제우스가 지나간 연실군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가로수들은 뿌리째 뽑혀 도로를 막고 있었고,간판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굴러다녔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은 지켜냈다.연실초등학교 대피소에 모인 300여 명의 주민 중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서나래의 신속한 응급 수술과 대원들의 사투 덕분이었다.오전 8시.합동 특수구조 TF 본보로 사용되던 교실에는임시 취사반이 꾸려져 따뜻한 국밥 냄새가 번지기 시작했다.서나래는 간이 침대에 강태풍을 앉혀두고그의 찢어진 등판과 뺨의 상처를 다시 치료하고 있었다.소독약이 닿을 때마다 강태풍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지만,그는 소나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쳐다보지 말아요. 집중 안되니까."서나래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붕대를 강랗게 잡아당기자,강태풍이 윽-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강 선생님, 평소에는 불도조 같으면서 붕대 감을때는 왜 이렇게 매섭습니까?"강태풍의 은근한 투정에 서나래의 입가에 참지 못한 웃음이 걸렸다."죽다 살아온 인간이 말이 많네요. 가만히 좀 있어요. 차 반장은 어깨 고정해 놨으니까 당분간 꼼짝 말고 쉬어야 하고, 민 순경도 발목을 삐었으면서 주민들 챙기느라 바빠요. 다들.... 전부... 제 정신이 아니야!!"그때 침대 옆으로 걸어온 도훈이 투덜거렸다."저기요, 해경 형 씨.. 내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꿀 떨어지는 눈빛 보내깁니까? 나 아직 서나래 짝사랑하는 중인 거 감빡 하셨습니까?"도훈의 능청스로운 도발에 강태풍의 눈빛이순식간에 원래의 차가운 테토남의 테이스트로 돌아왔다."차 반장, 어깨 정복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입은 아직 멀쩡히 살이있군. 소방관 명함 내밀려면 몸부터 추스리지."두 남자의 팽팽하면서도 한층 깊어진 연대감이 묻어나는 대화에 수아가 국밥 그릇을 들고 들어오며 끼어들었다."아이고, 우리 두 영웅님들 싸우실 힘은 아직 남아있으신가 봐요? 다 때려 부수고 들어오는 태풍도 막아내신 분들이 왜
오전 6시 15분.지옥 같던 괴물 태풍 의 꼬리가 완전히 남해안을 빠져나가면서,연실군을 집어삼킬 듯하던 비바람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먹구름 사이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한 줄기 내려앉을 무렵,연실초등학교 앞마당은 침수된 물이 빠져나가며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다.저 멀리 부두 방향에서 거친 엔진음을 내뿜으며 진흙을 헤치고 걸어오는 거대한 실루엣이 있었다.찢어진 해경 제복을 걸치고, 얼굴은 피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채,양손에는 선원들의 구명장비를 든 강태풍이었다.그의 뒤로 해경 대원들과 구조된 포세이돈호의 선원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걸어 들어왔다."강태풍……!"교실 창문으로 그 모습을 발견한 서나래가 통제선마저 부수고 복도를 달려 내려갔다.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온 서나래는 마당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췄다.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강태풍이 그녀를 바라보며 느리게 걸어오고 있었다.평소의 그 차갑고 무뚝뚝하던 눈빛은 어디 가고,서나래를 본 강태풍의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안도감과 피로가 교차했다."강 선생……." 강태풍의 목소리가 팍 잠겨 있었다.서나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강태풍의 가슴팍으로 그대로 돌진했다.쿵 소리와 함께 강태풍의 단단한 가슴에 안긴 서나래는그의 옷자락을 쥐어짜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이 미친 인간아! 죽은 줄 알았잖아요! 목걸이 줄이 갑자기 끊어져서 내가 얼마나…… 얼마나 무서웠는데!"강태풍은 거친 손으로 서나래의 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수많은 주민과 대원들이 보는 앞이었지만,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소의 냉철한 원칙주의자 해경이 아니었다.서나래의 눈물 앞에서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은근히 쩔쩔매는 '아기' 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안 죽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목숨은 강 선생 거라고…… 약속 지켰습니다."도훈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으면서도,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수아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대었다."민 순경님, 나 이제 퇴근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