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OUTLAST - 네가 있는 폭풍속으로: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1. 태풍의 눈에서 태어난 아이

하늘과 바다가 구별되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32년 전의 그날은 대한민국 기상 관측 사상 가장 잔인한 괴물로 기록된초대형 태풍 ‘라합’이 한반도를 난도질하던 때였다.시속 200킬로미터가 넘는 미친 바람이 남해안의 연실항을 집어삼켰고,집들은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갔다.“으아아아악!”사정없이 흔들리는 연실 주민센터의 임시 대피소 구석.만삭의 임산부가 비명을 질렀다.양수가 터진 지 이미 수 시간이 지났지만,외부와 연결된 도로는 전부 침수되어 구급차는커녕 헬기조차 뜰 수 없는고립무원의 상태였다.“조금만 더 힘주세요! 산모님, 제 목소리 들리시죠? 저 보세요!”산모의 손을 부서져라 맞잡은 이는 다름 아닌파견 나온 응급구조대원, 임연숙이었다.그녀 역시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가를 적시고 있었지만,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주민센터의 창문이 굉음을 내며 깨져 나갔고,비바람이 칼날처럼 실내로 들이쳤다.정전으로 암흑이 된 공간을 비추는 건 손에 쥔 손전등의 희미한 불빛뿐이었다.“연숙 씨! 건물 외벽이 무너지고 있어! 철수해야 해!”밖에서 동료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으나 현숙은 소리쳤다.“머리가 보여요! 지금 안 받으면 둘 다 죽어! 나 여기 있을 테니까 먼저 대피해!”그것은 사명감 이전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살리겠다는 처절한 본능이었다.지옥 같은 폭풍우의 중심,기적처럼 태풍의 눈이 연실군 상각을 지나며 잠시 바람이 가라앉은 그 찰나의 순간.“으앙-! 으아아앙!”찢어지는 천둥소리를 뚫고,세상에서 가장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대피소 가득 울려 퍼졌다.연숙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갓 태어난 핏덩이를 품에 안았다.“살았다……. 살았어.”산모는 힘겹게 눈을 뜨며 아기의 얼굴을 보았다.그리고 연숙의 손을 잡으며 마지막 숨을 쥐어짜 냈다.“이 아이…… 이름은…… 태풍으로…… 해 주세요. 이 지옥에서도 살아남았으니…… 평생 지지 말고…… 강하게 살라고…….”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이었다.태풍 속에서, 누군가의 고귀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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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도저, 현장에 서다

대한대학병원 응급의학과 병동은 언제나 아수라장이었지만,오늘 밤은 유독 심했다.“선생님! 3번 베드 환자 어레스트(심정지)입니다!”간호사의 날카로운 외침과 동시에 한 여자가 바람처럼 나타났다.의사 가운을 휘날리며 베드 위로 침착하게 뛰어 올라간 그녀는망설임 없이 환자의 가슴 위로 체중을 실었다.쿵. 쿵. 쿵.“에피네프린 1앰플 가고, 제세동기 차징 200줄!”강단 있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응급의학과 전문의 강서나래(30).그녀는 이 병원에서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통했다.살릴 수 있는 환자라면 윗선이고 권위고 다 들이받고 제 갈 길을 가는 성격 탓이었다.“콰광-!”제세동기의 충격과 함께 환자의 모니터에 정상 파형이 돌아왔다.서나래는 그제야 이마의 땀을 닦으며 베드에서 내려왔다.“중환자실로 인계해 주세요.”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의국 문이 열리며 과장이 심각한 얼굴로 들어섰다.“강 선생. 지금 즉시 짐 싸서 남해안 연실군으로 내려가 줘야겠어.”“연실군이요? 거긴 왜요?”“초대형 태풍 가 그쪽으로 직격한단다.정부 차원에서 해경, 소방, 의료진을 묶은 합동 구조 본부(TF)를 결성했어.우리 병원에서는 현장 대응 능력이 가장 좋은 강 선생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연실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서나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곳은 32년 전, 어머니가 응급구조대원으로서 젊은 날을 바쳤던 곳이자,자신에게 대를 이어 사람을 구하라는 사명을 물려준 약속의 땅이었다.서나래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죄책감이 있었다.응급실에서 제때 구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환자들의 얼굴이비 오는 날이면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을 짓눌렀다.‘엄마처럼, 나도 그곳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을까.’서나래는 지체 없이 청진기를 목에 걸었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죠.”그녀의 성격답게 판단도, 행동도 불도저처럼 빨랐다.병원 밖을 나서자 벌써부터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기분 나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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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괴물의 북상

남해안 연실군에 위치한 합동 구조 본부(TF) 텐트 안은이른 아침부터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대형 스크린에는 붉은색 거대한 소용돌이가한반도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위성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이번 태풍 는 과거 연실군을 초토화했던 의 두 배 규모입니다. 반경 400킬로미터, 중심 풍속 초속 55미터. 이 정도면 대형 트럭이 날아가고 콘크리트 건물이 무너지는 수준입니다.”브리핑을 하는 기상청 관계자의 목소리가 떨렸다.회의실 맨 앞자리에는 각 기관에서 차출된 최정예 대원들이 앉아 있었다.해경의 강태풍은 팔짱을 낀 채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었고,그 옆에는 119 특수구조대의 분위기 메이커인 차도훈 소방교가장비를 점검하며 앉아 있었다.“어이.강 경장님. 형님 이름이랑 똑같은 놈이 오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아주 패기가 넘치는 놈이네요.”차도훈이 능글맞게 툭 던졌지만, 태풍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도훈은 쾌활한 성격에 넉살이 좋았지만,현장에만 나가면 불처럼 뜨겁게 돌변하는 베테랑 소방관이었다.그때, 회의실 문이 힘차게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야무진 눈매. 강서나래였다.“늦어서 죄송합니다. 대학병원에서 파견 나온 응급의학과 강서나래입니다.”그녀가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센터장이 소리쳤다.“어, 거기 강 구조대! 서류 좀 이쪽으로 전달해 줘!”그 부름에, 자리에 앉아 있던 강태풍과 방금 들어온강서나래가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예?”“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태풍은 미간을 찌푸렸고, 서나래는 황당하다는 듯 태풍을 바라보았다.“아니, 해경 강태풍 대원 말이야.”센터장이 민망한 듯 허허 웃었다.태풍은 서류를 건네며 서나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가녀린 체구에 의사 가운.이런 험한 재난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온실 속 화초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현장이 장난인 줄 아나 보군.”태풍이 들으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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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해안 연실군으로

“정신 안 차립니까? 강 선생!”“제 이름은 강서나래입니다, 강 대원님! 그리고 정신은 그쪽이 차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방금 그 환자, 지혈 제대로 안 하고 이송했으면 쇼크사할 뻔했어요!”태풍 상륙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임시 본부 앞마당은 벌써부터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정신이 없었다.해안가 가로수가 뽑혀 나가는 와중에도두 사람은 환자 인계를 두고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현장에서는 속도가 생명입니다. 바다 위에서 1분 1초가 생사를 가르는데, 의사식 영양가 없는 꼼꼼함은 사치입니다.”태풍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사치? 사람 살리는 데 사치가 어디 있어! 대충 구해서 숨 끊어진 채로 데려오면 그게 살린 겁니까? 강 대원님 면허증에는 브레이크가 안 달렸나 본데, 제 면허증은 풀 액셀이라서요. 비킬 거 아니면 돕기나 하세요!”서나래가 태풍의 어깨를 홱 밀치고 구급차 안으로 들어갔다.태풍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저렇게 기죽지 않고 덤벼드는 여자는 평생 처음이었다.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태토남(태생이 토종 남성)인 그였지만,서나래의 거침없는 불도저 매력에는 속수무책으로 신경이 쓰였다.한편, 해안경찰서 지구대 소속의 민수아(27) 순경은빗속에서 순찰차 마이크를 잡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주민 여러분! 지금 즉시 대피하셔야 합니다! 해일 위험이 있습니다!”수아는 불의를 보면 피가 끓는 열혈 경찰이었지만,사실 겁도 많고 눈물도 많은 외강내유형이었다.대피를 거부하는 한 고집불통 횟집 주인 아저씨 앞을 막아섰을 때,거대한 철제 간판이 강풍에 뜯겨 수아를 향해 날아들었다.“위험해!”그 순간, 주황색 방화복을 입은 남자가날아들듯 수아를 감싸 안고 바닥을 굴렀다.쾅-!간판이 아스팔트 바닥에 박히며 스파크가 튀었다.수아를 구해준 사람은 차도훈이었다.도훈은 장비를 잡았을 때의 무서운 진지함으로 수아를 바라보았다.“순경아가씨, 대피시키다 먼저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다친 데 없어요?”능글맞던 평소 모습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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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연은 외나무다리에서

쿠구구구궁-!지진이 일어난 듯한 굉음과 함께연실항의 방파제를 집어삼킨 집채만 한 파도가 지상으로 밀려들었다.본부의 비상 발전기가 돌아가며 빨간 경고등이 사방을 비추었다.“강 경장! 방파제 인근 가옥이 침수됐다! 독거노인 세 분이 고립되었어!”무전기 너머로 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강태풍은 즉시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구조 보트로 향했다.그런데 보트 조수석에 이미 누군가 타고 있었다.구급 가방을 단단히 메고 있는 강서나래였다.“내려요, 강 선생. 거긴 물바다라 위험합니다.”태풍이 서나래의 팔을 잡으려 하자, 서나래가 그 손을 착 뿌리쳤다.“고립된 분들 중에 천식 환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장에서 흡입기 처치 안 하면 이송 도중에 기도 막혀서 죽어요. 제가 가야만 합니다.”“내가 알아서 데려올 테니까, 내리라고 했습니다!”태풍의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날카로운 분노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20대 시절, 태풍 속에서 동료를 구하려다결국 시신으로 마주해야 했던 과거의 트라우마가 발작처럼 그의 목을 죄어왔다.눈앞의 이 여자마저 그렇게 잃을 순 없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하지만 서나래는 태풍의 떨리는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그리고 태풍의 커다란 손 위로 자신의 따뜻한 손을 겹쳐 잡았다.“강태풍 대원님. 저 살리러 가는거지 죽으러 가는거 아닙니다. 그리고 그쪽도 안 죽게 내가 살릴 겁니다. 그러니까 같이 가요.”“…….”그 순간, 태풍은 온몸을 집어삼키던 한기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꼈다.평소엔 차갑기 그지없는 얼음 같은 남자였지만,서나래의 그 단단하고 따뜻한 위로 앞에서는은근히 쩔쩔매는 ‘애기’처럼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꽉 잡으십시오. 놓치면 안 구출해 줍니다.”태풍이 툴툴거리며 보트의 시동을 걸었다.풀 액셀을 밟은 보트가 거센 파도를 가르며 침수된 도심 한가운데로 돌진했다.사방에서 간판과 쓰레기가 떠내려오고, 바람은 살점을 찢을 듯이 불어댔다.“강 선생! 저기 지붕 위를 보십시오!”태풍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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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몸에 손대지 마시죠

“미쳤습니까, 강 선생? 거긴 왜 뛰어듭니까!”물에 젖어 미역 줄거리처럼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강태풍이 보트 위에서 고함을 질렀다.간신히 고립된 노인들을 구조해 보트 위로 끌어 올린 직후였다.태풍의 눈이 지나가고 다시 거세지기 시작한 빗줄기가두 사람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 상황에서 의사가 보트 위에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습니까? 천식 환자 숨 넘어가는 거 빤히 보면서?”강서나래 역시 지지 않고 소리를 빠락 질렀다.입술이 퍼렇게 질려 덜덜 떨면서도,손은 이미 노인의 가슴을 청진기로 짚고 흡입기를 입에 물리는 중이었다.“구조는 내 영역입니다. 내 영역에선 내 명령이 법이라고 했을 텐데.”“그쪽 법은 사람 숨 끊어지고 나서 집행하나요? 비켜요, 물 튀니까. 환자 체온 떨어집니다.”서나래가 젖은 가운 자락으로 노인을 감싸 안으며태풍을 팔꿈치로 툭 밀쳤다.태풍은 어이가 없었다.32년 차 인생에 감히 해경 특수구조대 최정예인 자신을짐짝 취급하는 여자는 이 의사가 처음이었다.본부로 돌아오는 보트 안은 침묵과 폭풍우 소리뿐이었다.간신히 임시 대피소에 환자들을 인계하고 나자,서나래의 긴장이 탁 풀렸다.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오한이 찾아왔다.대피소 구석 탕비실에서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터는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태풍이었다.그 역시 젖은 상체 위로 대충 마른 근무복을 걸친 상태였다.“이거 덮으십시오.”태풍이 툭 던진 것은 해경 마크가 커다랗게 박힌 두꺼운 담요였다.“됐거든요. 나라 지키는 해경 물품을 일개 민간인 의사가 쓸 순 없죠.”서나래가 뾰족하게 쏘아붙이자, 태풍의 미간이 좁아졌다.그는 다짜고짜 걸어와 담요를 나래의 어깨 위에 팍 덮어씌웠다.그러고는 서나래의 이마에 냅다 손을 올렸다.그의 큰 손바닥이 이마를 완전히 덮었다.“웁……!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열 오릅니다. 환자 고치다 의사가 먼저 실려 오면 현장 인력 손실입니다.”“손 떼요! 내 몸에 손대지 마시죠, 강 대원님.”서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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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사친의 선 넘는 경고

“뭐라고요? 수아가 왜요?”탕비실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나온 것은 서나래와 태풍,그리고 대기 중이던 차도훈 소방교였다.도훈의 얼굴에서 장난기 어린 미소가 단박에 가라앉았다.“가스 누출 신고가 들어와서 민수아 순경이 현장 확인하러 갔는데, 상가 진입 직후에 무전이 끊겼답니다. 현재 그 지역 침수가 시작돼서 차량 진입이 불가능합니다.”통제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훈이 구조 장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나섰다.“내가 갑니다.”“차 소방교, 혼자는 위험해. 해경 구조대랑 같이 가.”센터장의 지시에 도훈이 고개를 돌려 태풍을 보았다.태풍은 이미 구명줄과 도끼를 챙겨 든 상태였다.두 남자의 시선이 교차했다.불과 얼음의 대치 같았다.“강 경장님, 현장 지리는 제가 더 잘 압니다. 발목 잡지나 마십시오.”도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툭 던졌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소방관님이야말로 장비 무게 때문에 물에 가라앉지나 마십시오. 인양하기 번거롭습니다.”태풍 역시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받아쳤다.두 남자가 출동하려는 찰나, 서나래가 구급 배낭을 메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저도 갑니다.”“안 됩니다.”“너 미쳤냐, 서나래?”태풍과 도훈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태풍은 원칙주의자답게 얼굴을 굳혔고,도훈은 오랜 남사친의 사적인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가스 누출이면 폭발이나 흡입 사고 환자가 무조건 나옵니다. 현장 처치할 의사 필수예요. 그리고 차도훈, 너는 그 내 걱정 할 시간에 민 순경님 구할 생각이나 좀 해.”서나래의 불도저 같은 태도에 도훈이 한숨을 쉬며 태풍을 돌아보았다.“강 경장님, 보시다시피 이 기지배 고집은 대통령이 와도 못 꺾습니다. 대신, 현장에서 내 여(사)친한테 까칠하게 굴기만 해봐요. 소방 호스로 물줄기 맛 좀 보여줄 테니까.”도훈의 도발적인 경고에 태풍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현장 지휘관은 접니다, 차 소방교. 당신 여사친이든 누구든, 안전은 내 원칙 안에서 내가 지킵니다. 선 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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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여의사

해안 상가 거리는 이미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상태였다.강풍에 간판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상가 셔터들은 찌그러져 있었다.“민 순경님! 민수아순경님!”도훈이 물을 가르며 소리쳤다.수아의 순찰차가 상가 입구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었지만, 안은 비어 있었다.“가스 냄새가 납니다. 공기호흡기 착용하십시오.”태풍이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며 도훈에게 지시했다.도훈 역시 장비를 잡자 장난기를 지우고 맹수처럼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서나래는 태풍의 등 뒤를 바짝 따랐다.“강 선생, 내 뒤에서 3미터 유지하라고 했을 텐데.”“3미터는 무슨... 뒤에 있으면 환자가 안 보이잖아요. 비켜봐요, 저기, 불빛!”상가 2층 셔터 틈새로 희미한 손전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세 사람이 다가가자,셔터 안쪽에서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쿨럭……! 문이 안 열려요……!”민수아 순경이었다.상가 안의 가스 밸브를 잠그던 중,강풍에 셔터가 내려앉으며 잠겨버린 것이었다.내부에는 가스가 차오르고 있었다.“비켜봐요!”도훈이 유압 절단기를 꺼내 들었다.기계가 굉음을 내며 셔터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그 사이 태풍은 주변의 스파크 요인을 차단하기 위해 배전반을 확인하러 달렸다.“차도훈! 조금만 빨리 해봐! 내부 산소 부족한 거 같아!”서나래가 셔터 틈새로 소리치며 청진기를 귀에 걸었다.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그 위험한 가스 구역에 코를 박고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는 나래를 보며,배전반을 차단하고 돌아온 태풍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런! 강..서나래! 서나래 씨!!”태풍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거칠게 불렀다.그는 서나래의 허리를 통째로 한 팔로 안아 뒤로 끌어내렸다.“읍! 뭐 하는 짓이에요!”“가스 농도가 높잖아! 터지면 당신부터 날아간다고! 제발 현장 지휘관인 내 명령 좀 들으라고!!”태풍의 눈에 핏발이 섰다.그 서슬 퍼런 눈빛에 서나래도 순간 숨을 삼켰다.언제나 냉정하던 남자의 눈에 서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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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면허 취소 조항은 없습니다만

“민 순경님!”도훈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 쓰러진 수아를 안아 들고 나왔다.수아는 가스 흡입과 밀폐 공간의 공포로 의식이 희미한 상태였다.“차도훈, 바닥에 눕혀! 수아 씨, 내 목소리 들려요?”서나래가 태풍의 품에서 빠져나와 수아에게 달겨들었다.그녀는 능숙하게 수아의 기도를 확보하고 산소마스크를 씌웠다.환자를 다룰 때의 서나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눈빛은 얼음처럼 차분해졌고 손놀림은 매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빨랐다.태풍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무모한 똥고집 의사인 줄만 알았는데,현장에서 환자를 살려내는 그녀의 모습은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이었다.“강 대원님!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송 보트 대기시켜요! 환자 저체온증이랑 흡입 화상 우려 있어요!”서나래의 호통에 태풍이 정신을 차렸다.“아……알겠습니다.”해경 특수구조대의 일인자가 의사의 명령에 군말 없이 움직이는 진풍경이었다.네 사람은 간신히 이송 보트에 수아를 태웠다.도훈은 수아의 손을 꼭 잡은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보트가 다시 본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할 때,서나래가 차가운 빗물에 젖은 얼굴을 닦으며 태풍을 째려보았다.“아까 제 허리 잡고 끌어내린 거, 성추행으로 고소하려다가 참는 줄 아세요.”“구조를 위한 불가피한 신체 접촉이었습니다. 고소 항목에 해당 안 됩니다.”태풍이 정면을 응시하며 덤덤하게 받아쳤다.“그리고 아까 내 이름은 왜 그렇게 막 불렀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성 떼고 이름 부르는 사이였다고.”“…….”태풍의 귀끝이 슬쩍 붉어졌다.강풍 때문이라 변명하기엔 너무 정직한 붉은빛이었다.“다급해서 그랬습니다. 강 선생이라고 부르면 나도 돌아보고 당신도 돌아보니까 혼선이 생기지 않습니까.”“핑계는 훌륭하시네요. 다음부턴 그냥 ‘어이’라고 부르시죠? 아니면 ‘불도저’라든가.”“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군.”두 사람의 유치찬란한 티키타카는 멈추지 않았다.로맨스의 ‘ㄹ’자도 섞이지 않은 지독한 앙숙의 밀당이었지만,두 사람을 제외한 도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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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폭풍우의 초대장

본부로 돌아와 수아를 안전하게 응급실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상황이 일단락되었다.도훈은 수아의 침대 곁을 지키며 수건으로그녀의 젖은 머리를 조심스레 닦아주고 있었다.평소의 능글맞음은 어디 가고,미안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민 순경님, 다음부턴 나보다 먼저 위험한 데 가지 마요. 내가.. 소방관 체면에 기가 살겠습니까?”“……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소방관님.”수아가 창백한 얼굴로 수줍게 미소 지었다.어색한 두 사람의 온도가 미세하게 상승하는 순간이었다.같은 시각, 본부 복도 자판기 앞.동전이 없어 투덜거리는 서나래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툭, 하는 소리와 함께 캔커피 두 개가 떨어졌다.태풍이었다.“의사 면허증에 자판기 사용 조항은 없나 보군.”태풍이 커피 한 캔을 나래에게 건네며 짓궂게 툭 던졌다.“원칙주의자 강 대원님이 민간인에게 뇌물을 다 주시네? 이거 부정청탁법 위반 아닙니까?”서나래가 커피를 받으며 피식 웃었다.“동료로서 주는 겁니다. 아까 상가에서…… 환자 처치는 훌륭했습니다.”태풍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칭찬에 나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태풍은 시선을 피하며 커피를 마셨다.차가운 얼음 남자의 뜻밖의 틈새였다.“뭐예요,진짜...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태풍이 와서 그런건가?”서나래가 장난스럽게 웃는 그 찰나.우르르릉-! 쾅-!방금 전까지의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본부의 모든 불이 일시에 꺼졌다.완전한 암흑.“아악!”대피소 안의 주민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동시에 통제실의 비상 라디오에서 치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기상청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기, 기상청에서 알려드립니다! 현재 태풍 ‘제우스’의 중심 기압이 대기 불안정으로 인해 역대 최저치로 급강하,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만조 시각과 겹쳐 10분 뒤 연실군 해안가에 20미터 규모의 메가 해일이…… 치지직……!]라디오마저 굉음과 함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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