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늘은 이미 검은색을 넘어 핏빛이 감도는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연실군 전역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는 단순한 경고음이 아니었다.그것은 거대한 괴물, 처강력 태풍 가 마침내 이 작은 해안 마을의 턱밑까지 당도했음을 알리는 비명이었다.지익-, 지이익--.정전이 반복되던 합동 구조 본부 (TF) 통제실의 모니터가 거칠게 흔들렸다.기상청에서 보내온 위성 이미지는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태풍의 눈이 뚜렷하게 잡히다 못해, 마치 지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다."현재 시각 17시 40분을 기해 연실군 전역에 최고 단계 주민 대피령을 발령합니다! 반복합니다. 상습 침수 구역 및 해안가 저지대 주민들은 지금 즉시 지정된 대피소인 연실 군청과 정합체육관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통제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방송망을 타고 군청 스피커와 순찰차의 확성기로 퍼져나났다.통제실 한구석에서 밤새 대기하며 앙숙처럼 으르렁거리던 강태풍과 강서나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조금 전까지의 투덜거림은 온데간데없고, 두 사람의 눈빛은 무섭게 가라앉아 있었다."강 선생."강태풍 장비를 챙기며 서나래를 불렀다.무뚝뚝한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지금부터는 진짜 실전입니다. 훈련이나 시뮬레이션 따위랑은 비교도 안 될 겁니다. 내 지시 없이 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서나래는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TF 전용 방수 재킷을 걸쳐 입으며 코방귀를 뀌었다."강 구조대원님, 걱정 마시죠. 나 불도저 의사 강서나래예요.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들어갈 준비 되어 있으니까,그쪽이야말로 내 뒤나 잘 지켜요."두 강 씨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밤새 좁은 통제실에서 은근한 기류를 나누었던 분위기는 폭풍 전야의 긴장감 속으로 완전히 증발한 듯 했다.그때 통제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소방관 차도훈과 지구대 민수아 순경이 들이다쳤다.두 사람 모두 이미 온몸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강 대원님! 해안가 저지대 하천이
새벽 4시. 태풍 의 전면 강풍대가 연실군을 완전히 장악하면서컨테이너가 통째로 들썩였다.하지만 지독한 피로감 앞에서는 그 공포마저 잠의 장막을 뚫지 못했다,종일 현장을 뛰어다니며 환자들을 돌보던 서나래는,결국 간이 의자 위에서 앉은 채로 벽에 머리를 기대고 까무러치듯 잠이 들어 버렸다.스스스...............고요한 컨테이너 안, 강태풍이 자리에서 일어나 잠든 서나래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무릎을 굽혀 서나래의 얼굴과 시선을 맞추었다.늘 당당하고 팩폭을 날리던 입술은 조금 열려 있었고,뺨에는 현장에서 묻은 옅은 진흙 자국이 남아 있었디.앳된 얼굴 어디에 그런 불도저 같은 깡다구가 숨겨져 있는지,태풍은 보면 볼수록 이 여자가 불가사의했다.강태풍은 손을 뻗어 서나래의 뺨에 묻은 진흙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려 했다.거친 잠수 장갑을 벗은 그의 맨 손가락이 서나래의 부드러운 살결에 닿았다.아주 살짝, 스치듯 만진 손길이었지만 강태풍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쿵- 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3년 전 사고 이후, 그의 심장은 차가운 심해의 얼음덩어리와 같았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스스로를 징벌하듯 위험한 현장만을 찾아다녔다.하지만 이 겁 없는 여자 의사가 그의 삶에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온 순간부터,그의 차가운 심장이 미세하게 , 그리고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미련한 여자.."강태풍은 서나래의 어깨 위로 자신의 두꺼운 방화복 외투를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자신의 체온이 배어 있는 옷이 닿자, 서나래는 기분이 좋은지 태풍의 외투를 꼭 쥐며 품으로 파고들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태풍의 눈빛에, 평소의 냉혈한 같은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깊고 애틋한 다정함만이 가득 차올랐다.창밖의 번개가 번쩍이며 컨테이너 안을 순간적으로 환하게 비추었다.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강태풍의 시선은 오롯이 잠든 서나래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자신이 이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아니,어
쿵-.제1대피소 건물 옆 임시 통제실로 쓰이는 좁은 컨테이너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비에 완전히 젖은 강태풍이 들이닥쳤다.그의 몸에서 떨어진 빗물이 컨테이너 바닥에 순식간에 흥건한 웅덩이를 만들었다.강태풍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컵라면을 들고 선 서나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강서나래!""앗, 깜짝이야! 문 부서지겠어요. 왜 그렇게 무섭게 봐요?'서나래가 새침하게 받아치자,강태풍은 뚜벅뚜벅 다가와 서나래의 손에 들린 컵라면을 빼앗아탁자에 탁! 내려놓았다.두 사람의 거리가 좁은 컨테이너 안에서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내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내가 분명히 본관 밖은 지옥이라고, 나가지 말라고 내 손까지 떨면서 말했을 텐데요."강태풍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와 안도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서나래는 그의 젖은 얼굴과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하지만 불도저답게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저도 바보가 아니니 지옥인 거 알아요. 근데 의사 면허증 딸 때 나도 선서라는 걸 했단 말이에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고려하겠다고. 강 대원님 눈에는 내가 어려보이고 보호 받아야 할 철없는 여자로 보일지 몰라도, 나 서울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피 떡칠 한 중증 환자들 하루에 수십 명씩 보던 의사예요. 나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누가 약하다고 했어요? 미련하다고 하는 거지!"강태풍은 컨테이너 벽에 기대어 앉으며 헬멧을 벗어 던졌다.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빗물이 그의 날카로운 콧날을 타고 흘러내렸다."거기 잠깐 앉아봐요. 젖은 옷 그대로 있으면 저체온증 와요. 구조대원이 환자 되면 답도 없으니까."서나래가 수건을 던져주며 핀잔을 주자, 강태풍은 수건을 받아 쥐고도 쓰지 않은 채,서나래를 빤히 바라보았다."강 선생님은 평소에도 그렇게 브레이크가 없습니까?""네. 면허증에 브레이크 달면 환자만 놓쳐요. 괜히 불도저겠어요? 강 대원님이야말로 평소에도 그렇게 인상만 쓰고 소리
치이이익-. 치익-.폭풍우가 거세지면서 무전기 너머의 소리도 심한 잡음과 혼선으로 가득 찼다.제1대피소 임시 의료 텐트 안에서 정신없이 환자의 둔부(머리)를 봉합하던 서나래는,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강 구조대! 강 구조대, 응답하라! 현재 하천 하류 차단벽 붕괴 조짐이다, 현장 대원들은 즉시 철수............ 치이익.......... 철수하라!" -"강 구조대? 나를 부르는 건가?"서나래는 간이 의무실에 혼자 남아 있던 터라,무전 속 라는 호출이 의료지원단장인 자신을 부르는 줄 착각했다.그녀는 피 묻은 장갑을 벗지도 못한 채 다급하게 무전기 버튼을 눌렀다."여기는 강 구조대! 서나래 의사입니다. 지금 대피소에 거동 불편한 중상자가 3명이나 있어서 철수가 불가능합니다! 차량 지원이 가능할까요? 아니면............"-"뭐야? 강서나래?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무전기 너머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찢어지는 잡음을 뚫고 들어올 만큼 거칠고 사나웠다.강태풍이었다.강태풍은 소방 구조차를 몰고 제1대피소로 향하던 중 ,해경 특수구조대를 뜻하는 호출 무전에웬 여자 의사의 목소리가 채 가듯 들어오자 이성을 잃고 버럭 고함을 지른 것이었다."강 대원님?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아까 강 구조대 찾아서 대답한 것 뿐인데."-"그 무전은 해경 특조대 강 구조대원을 찾는 무전이었어. 당신이 왜 내 무전을 채 가! 그리고 내가 분명히 본관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했을 텐데.. 기어코 거길 기어 나갔어? 지금 거기가 어떤 상태인 줄 알고 그래!!""환자가 있으니까 왔죠! 그럼 의사가 환자를 나 몰라라 하고 숨어 있어요? 강 대원님이야말로 왜 나한테 명령질이에요? 내가 당신 부하인가요?"서나래도 지지 않고 무전기에 대고 소리를 빽 질러댔다. 옆에서 치료를 받던 주민들이 눈치를 볼 만큼 서슬 퍼런 앙숙들의 무전 티키타카였다.- "시끄
밤 9시.연실군 전체에 내리던 비는 이제 는 표현보다는와 는 표현이 보다 정확했다.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듯한 폭우 속에서,바람은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건불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가로등은 이미 절반 이상이 점멸을 반복하다가 완전히 꺼져 버렸고,암흑이 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했다."강 팀장! 저지대 하천 수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습니다! 제방 둑 하단부에서 토사가 유출되고 있다는 지구대 보고입니다!"TF 본부 통제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피해 보고에 대원들의 손길이 바빠졌다.하지만 강태풍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조금전, 의료지원단에서 서나래가 힙색과 구급배낭을 챙겨 나갔다는행정반 대원의 보고를 받은 직후부터,그의 이성은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강서나래........ 이 미친 여자가 정말 장난하나...!!"강태풍은 주먹을 너무 세게 쥐어 장갑 가죽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났다.분명히 경고했었다. 나가면 죽는다고.자신의 치부이자 가장 큰 트라우마까지 보여주며 붙잡았건만,그녀는 기어코 그 지옥 같은 비바람 속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강태풍은 통제실 모니터에 표시된 제1대피소의 위치를 노려보았다.하천 바로 옆이었다.수위가 넘치면 가장 먼저 고립되거나 침수될 위험이 있는 곳.게다가 지금 연실군에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의 무게와 바람의 궤적은,강태풍이 평생 바다에서 겪어온 의 귀환을 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팀장님, 어디 가십니까? 지금 지휘관이 자리를 비우시면 안됩니다."부팀장이 붙잡았지만, 강태풍은 묵묵히 자신의 헬멧을 깊게 눌러썼다."소방과 경찰에 무전해라. 저지대 제1대피소 주변 주민들 최종 대피 확인하고, 본대원들을 해안가 제방 최종 결속 확인한다. 나도 현장 확인하러 가겠다.""현장이라뇨..? 지금 거긴...""내 구역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장관 앞에서 서약했다. 그 한 명에는............ 부상자는 물론 말 안
강태풍이 으스러질 듯 잡고 있던 손목을 놓고 통제실로 가버린 후에도,서나래의 손목에는 여전히 그의 손자국을 따라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었다.복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연실군의 풍경은 이미 지옥의 시작이었다.강력한 비바람이 가로수를 꺾어 놓았고,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금방이라도 지상을 집어삼킬 듯 웅웅거렸다."강 선생, 진짜 기려고? 강 대원 말이 맞아. 지금 나가는 건 자살행위야."함께 파견 온 선배 의사 김민우가 구급 배낭을 둘러메는 서나래의 앞을 막아섰다.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공포가 가득했다.서울의 께끗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만 근무하던 이들에게,이 자연의 거대한 폭력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다리를 떨리게 만들었다."선배, 저지대 제1대피소에 노약자들이 많아요. 아까 무전 들었잖아요. 대피소 진입로 축대가 무너지면서 대피하던 주민 두 명이 깔렸다가 겨우 구조 되었는대, 한 명은 의식 불명이고, 다른 한 명은 둔부(머리) 외상 출혈이 심하대요.. 소방 구급대원들은 지금 다른 침수 지역 구출 작전 하느라, 의사가 안 가면 거기서 과출혈로 사망할 거에요. 구조대와 소방이 갈 수 있으면 우리도 갈 수 있어요!""그래도.. 통제관이 명령을 내렸잖아! 기상청에서 곧 본진이 상륙한대!!""통제관은 현장 안전을 보는 사람이고, 의사는.. 나는 환자 목숨을 보는 사람이에요. 각자 자기 할 일 하면 되는 겁니다."서나래는 민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구급 배낭의 버클을 단단히 채웠다.그녀의 별명이 왜 이겠는가.눈 앞에 살릴 수 있는 환자가 있는데, 다가올 위험이 무서워안전한 콘크리트 건물안에 숨어 있는 것은서나래의 사전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다.서나래는 통제실 쪽을 한번 쓱 쳐다보았다.모니터를 보며 대원들에게 거칠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강태풍의 뒷보습이 보였다.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지금은 의사로서의 사명이 우선이었다.서나래는 본관 뒷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고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