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하정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송남지가 닦아주는 손길을 받아들이며 입가에 겨울 햇살처럼 평온하고 충만한 미소를 머금었다.“남지야.”그가 낮게 입을 열었다.“네.”“돌아와 줘서 고마워.”송남지의 손길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단 한 번도 진정으로 펴진 적이 없었던 미간의 주름이 지금은 마치 봄눈 녹듯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여기도 내 집이에요.”그녀가 아주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기 침대에서 막 잠들려 하는 하연지가 깰까 조심스러워하는 듯한 속삭임이었다.“내가 돌아온 건 당신 곁이 아니에요. 집으로 돌아온 거지.”하정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동자에는 맑은 빛이 서려 있었다. 사랑에 눈이 먼 열정적인 광채가 아니라, 달빛처럼 아주 고요하고도 확고한 빛이었다. 눈이 부시지도, 뜨겁지도 않았지만, 열일곱 살의 그녀가 하씨 저택의 거실에 서서 보여주었던 그 빛보다 훨씬 깊고 묵직하여 남은 생을 다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게 만드는 그런 빛이었다.“그래. 집이지.”하연지는 아기 침대 안에서 하품을 한 번 하더니 마침내 두 눈을 감았다. 하정훈의 손가락을 꼭 쥐고 있던 작고 고사리 같은 손이 서서히 힘을 잃고 침대 시트 위로 툭 떨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조용히 피어난 꽃송이 같았다.송남지는 고개를 숙인 채 아이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 자그만 얼굴은 언젠가 자라나 소녀가 될 것이고 여인이 될 것이며 이 침실과 저택을 벗어나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머나먼 곳으로 향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이는 연노란색 침대 시트와 우윳빛 아기 침대 틈에서, 아빠의 손끝에 남아 있는 온기와 엄마의 아쉬움 가득한 눈길 속에 안온하게 잠들어 있었다.온 세상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그런 아름다운 꿈을 꾸며.송남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하씨 저택의 밤은 지극히 고요했다. 나한송 위로 은백색 달빛이 쏟아져 내려 마치 얇은 서리가 내린 듯
하정훈은 오지훈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어. 완벽해졌지.”오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정훈의 두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어머니와 송남지를 바라보며, 마침내 깊은 안도감을 내뱉는 듯 아주 옅고도 충만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오지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정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최보라를 찾아 몸을 돌렸다.그날 밤, 송남지는 묵란 펜트로 돌아가지 않았다.오가은은 진작에 사람을 시켜 2층 침실을 말끔히 단장해 둔 터였다. 침대 시트는 예전의 그 차갑고 밋밋했던 흰색이나 베이지색이 아닌, 포근하고 따스한 연노란색 새 시트로 바뀌어 있었다. 오가은이 오직 하연지를 위해 특별히 고른 색이라고 했다. 커튼 역시 시트와 같은 톤으로 교체되어 있었는데, 그 위로는 새하얀 데이지가 잔잔하게 수놓아져 있었다.침실 한편에는 옅은 크림색 원목 아기 침대가 새로 놓여 있었다. 침대 가드에는 리넨과 솜으로 직접 바느질해 만든 작은 모빌 장난감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새, 토끼, 다람쥐 등 저마다 모양이 다르게 생겨 퍽 앙증맞았다.“이건 사모님이 프랑코니아에서 직접 가져오신 거예요.”침구를 정리하던 이미란이 흐뭇한 얼굴로 덧붙였다.“우리 연지가 예쁜 공주님이니까 제일 좋은 걸 써야 한다면서, 코다르에 계실 때 가게를 몇 군데나 돌아다니며 고르셨답니다.”송남지는 품에 하연지를 안은 채 침실 문가에 멈춰 섰다. 눈 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가슴 안쪽에서부터 따뜻하면서도 시큰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이 침실은 그녀가 머물렀던 공간이었다. 하정훈과 부부가 되어 함께하던 시절, 매일 이곳에서 아침을 맞고 밤을 보냈으며 창문 너머로 해당화가 피는 것을 지켜보았던 바로 그 방이었다. 지금 아기 침대가 놓인 저 자리에는 원래 갤러리에서 가져온 라탄 흔들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거라 굳게 믿었던 방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하연지
송남지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연지한테도 온전한 보금자리가 있어야지.”오가은의 시선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아기 침대 속 조그만 형체에 닿았다. 이미란이 눕혀준 그대로 하연지는 동그랗고 까만 눈으로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오물거리며 작은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엄마, 아빠만 있다고 다가 아니란다.”오가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송남지의 심장에 콕콕 박혀 들었다.“아이한테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고 미란이도 있고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있단다. 연지는 사랑 속에서 자라야 해. 정말 많은 사람이 듬뿍 담아주는 사랑을 받으면서 말이야.”송남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서경에서 자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빠 엄마는 늘 일로 바빴기에 그녀는 방과 후면 자주 혼자 집에 남아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으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것이 익숙했기에 외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오가은이 말하는, 수많은 이의 애정 속에서 시끌벅적하고 따뜻하게 자라는 어린 시절은 그녀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풍경이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코다르에 머물던 시절, 그 손으로 홀로 배를 쓸어안고 르 파티오 정원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아이를 낳을 땐 분만실 침대 손잡이를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움켜쥐었던 손이었고, 하연지가 태어난 첫날 밤에는 제 목숨보다 소중한 그 보드라운 생명을 덜덜 떨리는 팔로 안아주던 손이었다.그녀는 하연지에게 자신과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이 무심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너무 바빠서 그녀의 곁을 지켜줄 시간이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씨 저택은 달랐다. 이곳에는 이미란이 있고 요리사와 정원사가 머물렀으며, 오가은이 매일 아침 식탁 옆에 꽂아두는 화사한 꽃이 있었다. 그리고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하종현이 툭 던지는 “오늘 날씨가 좋군” 같은 따뜻한 일상도 있었다.이 집은 구석구석 사람 사는
송남지는 순간 멍해졌다.하씨 저택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품 안에는 방금 전 오가은이 하연지를 안아 들었을 때 남겨진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가은의 말은 마치 작은 돌멩이처럼, 충분히 평온해졌다고 믿었던 그녀의 마음이라는 연못에 떨어져 천천히 퍼져나가는 잔물결을 일으켰다.다시 들어와 사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코다르에 머물던 시절, 르 파티오의 방에 홀로 누워 밤을 지새우던 새벽녘이면 그녀는 가끔 하씨 저택을 꿈꾸곤 했다. 본채 문 앞의 나한송 두 그루,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이미란의 실루엣, 2층 침실의 남향 창문과 그 창밖으로 매년 봄마다 꽃을 피우던 해당화 나무까지.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다시 들어와 사는 일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여전히 그럴 자격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떠날 당시 자신을 밀어낸 것은 하정훈이었지만,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고 캐리어를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이 문을 나선 것은 분명 자신이었다.그녀는 어떤 문은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 수 없다고 믿어왔다.오가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예전처럼 손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 손은 예전보다 다소 야위고 메말라 있었지만, 온기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알맞게 우려낸 홍차처럼 따스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온기였다.“너 혼자 묵란 펜트에서 아이 키우랴, 일하랴 바쁜데 몸이 어떻게 버텨내겠니?”오가은의 말투는 타이르는 게 아니라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 있는 단정이었다.“낮에는 재스민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연지를 돌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잔다면서.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미란이한테 다 들었다.” 송남지는 고개를 숙인 채 몇 초 동안 침묵했다. 미란 이모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의아했다. 권우빈이 말했거나, 최보라가 말했거나, 아니면... 어쩌면 하정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어머니.”그녀는 고개를 들어 오가은을 바라보았다.“저는 어머니께 폐를 끼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이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
“고마워할 거 없어요. 당신 딸이기도 하지만, 내 딸이기도 하니까요.”하연지의 백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는 대신, 가장 가까운 이들만 초대해 조촐하게 열렸다.오가은은 아이가 아직 너무 어려서 인파가 몰리면 소란스러우니, 첫돌이 되면 그때 가서 성대하게 열어주자고 말했지만 송남지는 그 너머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행여 자신이 불편해할까 봐 건넨 오가은의 깊은 배려였다. 하씨 저택을 떠나 있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오가은으로서는 송남지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교계 지인이나 친척들을 다시 마주하는 일을 부담스러워할까 봐 염려했던 것이다.손님은 많지 않았다. 최보라와 오지훈, 유경태와 곽지민, 민지현과 권우빈을 비롯해 남성에서 달려온 하정훈의 고모와 사촌 여동생 등, 하씨 가문의 가까운 친척 몇 명이 전부였다.하연지는 오가은이 직접 고른 크림색 우주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기가 막히게 부드러운 최고급 실크 소재였고 깃 부분에는 자그마한 데이지 한 송이가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예뻐?”오가은이 하연지를 안고 고개를 숙이며 묻자 아이는 작게 하품을 하는 것으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오가은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예뻐. 할머니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곁으로 다가와 한참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하정훈의 고모가 한마디 거들었다.“애가 어쩜 남지를 쏙 빼닮았네. 아주 예뻐. 정훈이 꼬맹이 적보다 훨씬 낫다.”곁에 비스듬히 서 있던 하정훈의 입매가 그 말에 씰룩거렸다.“고모, 저 어렸을 땐 안 예뻤어요?”그가 짐짓 묻자, 고모는 그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너 어릴 때? 어찌나 뚱한 표정이었는지 누가 어르고 달래도 웃지를 않아서 꼭 애늙은이 같았어.”그 말에 옆에 있던 최보라가 빵 터져 웃음을 터뜨렸다. 오지훈이 기겁하며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좀 참아, 하 대표 체면도 좀 살려줘야지.”최보라는 그의 손을 찰싹 쳐내며 대꾸했다.“체면 차릴 게 뭐 있어? 하 대표가 먼저
하연지의 백일잔치는 하씨 저택에서 열렸다.송남지가 출산 후 이곳을 다시 밟은 것은 처음이었다. 차가 그녀가 수없이 오갔던 그 가로수길을 지나자, 길 양옆의 플라타너스는 이미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들이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청초하고 가느다란 선을 그리고 있었다.그녀는 뒷좌석에 앉아 하연지를 품에 안은 채, 머릿속에 선명히 박혀 있는 익숙한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경비실, 나한송 나무, 본채로 통하는 자갈길까지. 풍경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변한 것은 공간이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고 품속에서 꼬물거리며 앙증맞게 침방울을 튀기는 이 작은 생명이었다.차가 본채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는 순간 매서운 겨울바람이 훅 끼쳐 들자, 송남지는 움찔하며 하연지를 품 안으로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바로 그때, 이미란의 들뜬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오셨다! 드디어 오셨어!”이미란은 앞치마에 밀가루를 묻힌 채 본채 문 앞에 서서, 붉어진 눈시울로 목소리를 떨며 주변을 향해 외쳤다.“얼른 회장님과 사모님께 작은 사모님이 오셨다고 전하세요.”송남지는 차에서 내려 하연지를 품에 안고 본채 문 앞에 섰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이 한때 머물렀던 집을 올려다보았다. 연노란색 외벽과 민트빛 블라인드... 모든 것이 정겨웠고 모든 것이 따스하게 느껴졌다.그때 하정훈이 반대편 차에서 내려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넥타이 없이 흰 셔츠에 짙은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매치한 그의 차림은 평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송남지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들어가자. 엄마 아빠가 안에서 기다리셔.”송남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랐다. 그 순간, 본채의 문이 안쪽에서부터 활짝 열렸다. 문 앞에는 깊은 와인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머리를 정갈하게 올린 오가은이 서 있었다. 귀밑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 귀걸이가 그녀의 우아함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눈가가 붉어진 채 입가엔 미소를 띤 그녀의 모습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