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5년 연애와 3년 결혼 생활. 송남지는 평생 윤해진과 함께할 거라 믿었다.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이 들려왔을 때 죽음조차 둘을 갈라놓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너무도 잔인했다. 윤해진은 죽은 게 아니라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어 있었다. 송남지가 믿어온 사랑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송남지는 끝내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스스로 이 어리석은 사랑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집안에서 정해준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서경 상류 사회의 중심, 하씨 가문의 장남 하정훈이 이혼녀를 아내로 맞았다는 소식은 곧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송남지조차도 생각했다. 하정훈이 자신을 택한 건 단지 몸에 병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치른 것이라고 말이다. 하씨 가문에서 원하는 걸 얻은 만큼 송남지는 아내로서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줘야 한다고 다짐했다. “당신 몸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 하나 입양하죠. 제가 당분간 몸을 숨기고 지내다가 세상에는 제 친자식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 말에 하정훈은 송남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낮게 웃었다. “그렇게 원하면 그냥 솔직히 말해. 자기가 원하는 걸 내가 못 들어줄 이유가 없잖아.” 주변 사람들은 잘나가는 재벌 도련님이 왜 굳이 아내에게 매달리며 자신을 낮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군거렸다. 하지만 하정훈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입꼬리를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 “아내한테 매달려서 뭐가 나빠? 결국 내가 원하는 건 다 얻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하정훈을 조롱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온 짝사랑이 얼마나 쓰라린 기다림이었는지 그리고 그 끝에 마침내 손에 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었는지.
view more“하정훈 씨,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하정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틀렸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여 마치 제 내면을 향해 읊조리는 독백 같았다.“널 밀어내는 것만이 정답이라 여겼어.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미래 대신, 네가 더 온전하고 나은 앞날을 누리길 바랐지. 하지만 다 내 오만이었어. 사랑하기에 놓아준다는 비겁한 핑계를 댔고 소유보다 양보가 고결한 가치인 양 착각했지. 네가 날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과소평가했고, 무엇보다 내가 너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를 망각했던 거야.”송남지는 아무런 대답도 건네지 않았다.“지난 세월 동안 줄곧 자문해 봤어. 내게 허락된 삶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내가 마지막에 움켜쥐고 싶은 게 과연 무엇일까 하고.”하정훈의 애절한 시선이 송남지에게 와닿았다.“성은에서 사업을 완전히 마무리 지어 두는 것도, 재산을 빈틈없이 분배해 놓는 것도, 아직 밟아보지 못한 이국의 땅을 방랑하는 것도 아니었어. 단지 너와 함께하는 것뿐이었지. 매일, 매분, 매초를 말이야. 설령 네 옆에 묵묵히 앉아 네가 캔버스 앞에 선 모습을 바라보고 네 잔잔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별것 아닌 일로 토라져 다투는 사소한 순간일지라도.”그의 눈가가 붉게 젖어 들었으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남지야, 네게 무언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아. 널 밀쳐내고 깊은 상처를 주고, 이 무거운 짐들을 오롯이 혼자 짊어지게 만들었으니까.”하정훈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그럼에도 염치 불고하고 묻고 싶어. 내게 단 한 번만 기회를 줄 수 없을까? 내 남은 생 전체를 바쳐 속죄할 기회를 말이야.”송남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하정훈이 이대로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라 단념하려던 찰나, 마침내 그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정훈 씨, 내가 어째서 이 먼 코다르까지 왔는지 알아요?”하정훈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일 때문이 아니에요.”송남지는
“은비야. 할 말이 있어.”하정훈의 말에 고은비의 미소가 찰나 멈칫했지만, 그녀는 이내 여유로운 태도를 되찾았다.“말해요.”하정훈이 오가은에게 시선을 던지자, 오가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두 사람만의 시간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네가 코다르에 온 진짜 이유를 알아.”하정훈의 목소리는 오직 두 사람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깔렸다.“네가 송남지의 사진을 찍어서 누구에게 보냈고, 또 무슨 말을 했는지도 다 알고 있고.”고은비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지만, 샴페인 잔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는 꾹 힘이 들어갔다.“너를 탓하진 않아. 내 망설임과 미적지근한 태도가 네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거니까,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하지만 오늘부터는 네가 확실히 알아주었으면 해.”그는 고은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송남지는 내가 평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이야.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고은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이윽고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수면 위에 내려앉는 나뭇잎처럼 아주 가볍고 아득한 웃음이었다.“알아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든 그녀의 눈시울은 조금 붉어져 있었지만 결코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정훈 씨, 행복하길 바랄게요.”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하정훈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몇 초간 잠자코 바라보다가, 다시 아래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송남지는 휴게 구역에 있었고 하정훈은 마침내 그곳에서 그녀를 찾아냈다.전시는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어 인파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송남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부푼 배를 감싸 안고 두 눈을 감고 쉬는 중이었다. 곁에서 따뜻한 물을 따라주던 권우빈은 다가오는 하정훈을 발견하고 미세하게 눈빛을 굳혔다.“누나.”권우빈이 낮게 속삭였다.“손님이 오셨네요.”송남지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하정훈이 서 있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짙은 회색 슈트 차림에 셔츠 맨 위 단추는 하나
하정훈은 전시회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2층에서 내려왔다.본래 그는 아래로 내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 먼 코다르까지 걸음 한 것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큐레이터, 미술품 소장가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으며, 전시관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다.그는 오직 송남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는 2층에 가만히 선 채 오랜 시간 그녀를 지켜보았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프랑스 출신 큐레이터와 유창한 프랑코니아어로 대화를 나누며 부드러운 미소로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기품 있게 답하는 그녀를 말이다.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서 있는 그녀의 자태는 마치 그 누구의 보호막도 필요로 하지 않는, 온전히 홀로 빛나는 왕비의 모습과도 같았다.문득 하정훈은 송남지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빛을 잃은 게 아니라 한층 더 굳건하고 강해진 것이다. 그 강인함은 겉으로 두른 단단한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의 확고함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이 깨달음은 그에게 긍지와 불안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긍지를 느낀 건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직감이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카나리아가 아니라, 척박한 땅 어떤 조건 속에서도 기어코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워내는 나무 같은 여자였다.반면 불안한 이유는 만약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면 대체 무슨 명분으로 그녀 곁에 머물러야 하느냐는 막막함 때문이었다.“하 대표님.”등 뒤에서 들려온 김서윤의 목소리에 하정훈이 돌아보자 그가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다.“알아보라고 하신 것들 여기 다 있습니다.”김서윤이 서류철을 내밀며 덧붙였다.“권우빈의 계약 날짜와 송남지 씨의 병원 기록, 그리고 수리스 호텔 투숙 내역까지요. 시간대가 오차 없이
“원망이라니, 내가 네게 무슨 원망을 하겠어?”오가은의 나직한 물음에 송남지는 고개를 숙인 채 부푼 배를 바라보았다.“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은 거요. 혼자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도, 정훈 씨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전부 다요...”오가은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남지야, 정훈이가 왜 너와 이혼하려 했는지 알고 있니?”송남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무너질까 봐, 그게 무서웠던 거겠죠.”오가은은 몇 초간 침묵했다.“그 아인 어릴 때부터 그랬단다. 무슨 일이든 혼자 짊어지려 하고 집에 통 말하는 법이 없었지. 아픈 것도 성루이야 병원의 의사가 전화를 주지 않았다면 나랑 그 애 아빠는 끝까지 까맣게 몰랐을 게다.”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울컥 메었지만,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남지야, 난 널 원망하지 않아. 다만 그 녀석이 너무 고집스럽고 제멋대로 판단한 게 야속할 뿐이지. 널 밀어내는 게 다 널 위하는 길이라고 착각하다니 말이다. 둘이 함께한다는 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기 위함이라는 걸 그 애는 몰랐던 게야.”송남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아주머니...”오가은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가볍게 도닥였다.“너는 그저 몸조리에만 전념하거라. 다른 일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정훈이 그 녀석은 제풀에 지치든 말든 내버려 두렴. 너한테 진 빚은 살면서 천천히 갚아 나가게 해야지.”송남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으나, 웃음 끝에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오가은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울지 마라. 임산부가 울면 눈에 해롭단다.”송남지는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쳤다.“그런데 코다르에는 어쩐 일이세요?”오가은은 송남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전시회 보러 왔다. 재스민의 화전인데 당연히 와봐야지.”송남지는 그것이 핑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가은이 코다르까지 온 것은 전시회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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