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복도를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그들은 한 번 멈춰 섰다.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나이 많은 하녀가 다가와 있었다. 저택 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 특유의 굳은 기척이 있었다. 하녀장은 귀족 부인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이 아이가 오늘 새로 들어온 아가씨의 하녀입니까." "그래요." 부인의 말은 짧았고, 망설임이 없었다. "손을 보니 일은 할 줄 알겠더군요." 하녀장은 그 말에 더 묻지 않았다. 귀족 부인은 덧붙였다. "우리 애 성격이 조금 예민한 건 저한테 이미 들었어요." "네. 그럼, 잘 가르치겠습니다." "규칙만 제대로 익히게 해요. 우리 애 곁에 설 아이니까." 그 말은 부탁도, 걱정도 아니었다. 지시였다. 하녀장은 소녀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연민도, 호기심도 없었다. 그저 이 집에 새로 들어온 역할 하나를 확인하는 눈이었다. "따라와." 그 한마디에 소녀의 발이 움직였다. 하녀장은 소녀를 데리고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짧은 복도 끝으로 이동했다. 창은 작았고, 빛은 충분하지 않았다. 일을 가르치기엔 딱 알맞은 장소였다. "이름." 하녀장이 먼저 말했다. 소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작게 대답했다. "그림 하일드입니다..." 하녀장은 그 이름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이름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 소녀의 시선이 바닥에 더 깊이 박혔다. "중요한 건 역할이야." 하녀장은 소녀의 손을 보았다. 굳은 손. 이미 여러 번 일에 길들여진 손. "아가씨의 시녀는 아가씨의 하루를 흐트러지지 않게 만드는 자리야. 아침에 기분이 상하면 하루가 망가진다. 하루가 망가지면 책임은 네 몫이야." 그 말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치 당연한 순서처럼. "그러니까 기억해라." 하녀장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첫째. 아가씨의 얼굴을 볼 때는 표정을 먼저 본다. 말보다 먼저, 숨보다 먼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아가씨의 말은 말 그대로 듣지 않는다." 하녀장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짧은 숨이었다. "'괜찮다'는 말은 대개 괜찮지 않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좋아'는 네가 알아서 틀리지 말라는 뜻이고." 소녀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조금 더 굳어졌다. "셋째." 하녀장은 고개를 숙여 소녀에게 눈높이를 맞췄다. "실수했을 때 변명하지 마라. 설명하지 마. 울지도 마라. 그건 아가씨를 더 피곤하게 만든다." 잠시 침묵. "그리고 마지막." 하녀장은 몸을 바로 세웠다. "네가 불편한 건 중요하지 않아."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아가씨가 편안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녀장은 말을 마치고 잠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킬 수 있겠지." "네..." "좋아. 그럼 이제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직접 보게 될 거다." 그 말과 함께 복도 끝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운 소리. 하녀장은 소녀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기억해. 여기서는 틀리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복도 끝에서 가볍고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귀족 아가씨가 다가와 서 있었다. 소녀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지만,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흑발 머리는 윤기가 흘렀고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피부는 햇빛을 과하게 맞은 적이 없는 듯 깨끗했고, 눈매는 길고 또렷했다.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에게서 나올 법하지 않은 기품이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의 공기가 자연스럽게 정돈되는 느낌. 소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숨을 고르는 데에만 온 신경이 쏠렸다. 아가씨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었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잠시 후, 아가씨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안녕." 정말 다정한 웃음이었다. 고아원에서 보던 관리인의 웃음보다도, 귀족 부인의 미소보다도, 훨씬 부드러웠다. 소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더 숙였다.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게 된 아이구나?" "네..." "이름은?" "그림 하일드입니다..." "그림 하일드. 예쁜 이름이네." 소녀의 가슴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아가씨는 한 걸음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또렷했다. 눈동자 안에는 자기 자신이 비쳤다. 작고, 조심스럽고,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앞으로 내 곁에 있으면 되겠네." 아가씨는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 "네... 잘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 아가씨는 만족한 듯 미소를 조금 더 깊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소녀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감각을 느꼈다. 그 미소가 자기를 향해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위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마치 이미 정해진 자리로 자기를 밀어 넣는 것처럼. 아가씨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괜찮아. 나, 까다롭지 않아." 그 말이 왜인지 모르게 소녀의 손을 더 굳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직 몰랐다. 이 다정한 미소가 훗날 거울보다 더 자주 자기를 평가하게 될 얼굴이 되리라는 걸. 아가씨의 방은 저택에서도 가장 빛이 잘 드는 곳에 있었다. 창문은 크고, 커튼은 얇았으며, 햇빛은 언제나 아가씨 쪽으로 먼저 떨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의 머리를 빗고 있었다. 손놀림은 조심스러웠고,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오늘은 이 리본이 좋을 것 같아." 아가씨는 거울을 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부드럽고, 나긋 나긋 했다. 그림 하일드는 준비해둔 리본 중 하나를 집었다. 색도, 질감도 아가씨가 평소 좋아하던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머리카락 사이로 리본을 끼워 넣었다. "이렇게요?" 아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림 하일드는 손을 멈춘 채 거울 속 아가씨의 표정을 살폈다. 미소는 그대로였다. "응." 아가씨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 말에 그림 하일드는 숨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어제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괜찮다'는 말은 대개 괜찮지 않다는 뜻이다.' 그림 하일드는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리본의 각도를 다시 살폈다. 조금 더 왼쪽인지, 아니면 이미 지나친 건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그때, 아가씨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덧붙였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왼쪽으로 기울어도 괜찮을 것 같아." 말투는 여전히 다정했다. 부탁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림 하일드는 그 말이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라는 걸 느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움직였다. 아주 조금. 정말 눈으로만 겨우 구분될 만큼. "이제는 어때요?" "응." 다시, 같은 대답. "괜찮아." 그림 하일드는 이번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손을 내리면서도 확신은 없었다. 괜찮다는 말이 이번엔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하일드." 이름이 불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처음 들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 아가씨는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다 괜찮아." "죄송합니다." 그 순간, 아가씨의 눈썹이 아주 잠깐, 정말 잠깐 움직였다. 하지만 그림 하일드는 그걸 보았다. 아가씨는 곧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사과할 일도 아니야." 그러면서 거울 속 자신을 다시 보았다. "다만... 다음엔 처음부터 내가 말한 대로 해주면 좋겠어." 그림 하일드는 그 말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했다. 괜찮다는 말은 끝이 아니라 유예라는 것. 미소는 허락이 아니라 감시라는 것. 그날 이후로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가 괜찮아라고 말할 때마다 손에 힘을 더 주게 되었다. 확인하고, 다시 보고, 혹시 모를 왼쪽과 오른쪽을 몇 번이고 바꿔보았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밤이 되어 작은 하녀 방에 누웠을 때도 그림 하일드는 리본의 위치를 떠올렸다. 왼쪽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아주 조금 더였는지. 아무도 혼내지 않았다. 벌도 없었다. 목소리는 끝까지 부드러웠다. 그런데도 그림 하일드는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했다. 고아원에서 배운 규칙은 단순했다. 잘못하면 혼난다. 하지만 이곳의 규칙은 달랐다. 잘못해도 혼나지 않는다. 대신, 다음부터는 절대 틀리면 안 된다. 그림 하일드는 그 사실을 아주 조용히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은 오래도록 몸에 남았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저택의 아침 공기는 밤보다 훨씬 조용했다. 소리조차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의 방에 들어서기 전, 문 앞에서 아주 잠깐 숨을 골랐다. 어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왼쪽으로.' 그 말은 이제 기억이 아니라 기준이 되어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리본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은 어제보다 더 단단했다. 망설임 없이,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이번엔 처음부터 약간 왼쪽으로. 아주 조금. 누가 봐도 의식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만큼. 리본을 매는 동안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매듭을 정리한 뒤 한 걸음 물러섰다. "이렇게는 괜찮으신지요..." 아가씨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림 하일드의 심장이 그 짧은 침묵 속에서 한 번 크게 뛰었다. 그리고, 아가씨가 웃었다. 어제보다도 더 다정한 미소였다. "응. 오늘은 마음에 들게 매줬네." 그 말에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눈에 띄지 않게 풀렸다. 아가씨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그림 하일드를 돌아보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해주면 좋겠어." 말투는 부드러웠고, 눈빛은 온화했다. "잘 부탁해, 그림 하일드." "네. 앞으로도 잘 모시겠습니다." 그 순간, 아가씨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를 유지한 채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다시는... 틀리지 않게 매줬으면 좋겠어." 그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림 하일드는 왜인지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틀리지 않게. 어제는 괜찮다고 했다. 오늘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다음엔... 아가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거울을 보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그 한마디가 마치 보상처럼 들렸다. 그림 하일드는고개를 숙인 채 아가씨의 뒤로 물러섰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알게 되었다. 이 저택에서 잘했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유예라는 것을. 그리고 틀리지 말라는 말은 경고가 아니라 약속이라는 것을. 그림 하일드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점점 더 많은 것을 미리 맞추기 시작했다. 말투를, 걸음 속도를, 숨 쉬는 타이밍까지. 아직 아무도 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아무도 벌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 하일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는 실수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그날 아침, 리본은 완벽하게 아주 조금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마굿간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희미한 등불이 흔들리고, 짚 냄새와 말들의 낮은 숨소리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하인은 여전히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루시안은 낡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모자 아래에 가려진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사과나무만큼... 마력이 잘 스며드는 과일나무도 없지. 열매도. 껍질도. 뿌리조차도." 허공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어갔다. "옛날부터 그랬다. 사과는.. 참 순순한 아이들이었지. 조금만 속삭여주면 아주 잘 자라주고, 아주 잘 물들어주니까." 그의 눈빛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산길. 후레지아. 사과나무라... 참 아름다운 조합이군." 그 순간, 루시안의 그림자 뒤편 어둠이 아주 잠깐 일렁였다. 마치 누군가가 웃는 것처럼. 일주일 후. 점심 햇살이 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현관 앞에는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검은 말들이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고, 하인들은 양옆으로 가지런히 서 있었다. 끼익. 현관문이 열렸다. 먼저 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한 외출복 차림으로. 그 뒤로 부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 엘로이즈와 클레르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이즈는 오늘도 단정했다. 흑발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그녀는 조용하고 우아하게 부모를 바라보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어머니,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대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역시 아주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 오늘도 중요한 연회가 있어서..."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목걸이 끝을 살짝 만지며 말을 이었다. "...좀 늦을 거란다." "...네." 그 순간, 부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클레르. 연한 노란빛 드레스를 입은 둘째 딸이 조용히 서 있었다. 평소처럼 들떠 뛰어나가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처럼 풀이 죽은 얼굴도 아니었
그날 밤. 드 로베르 저택은 이미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복도에는 촛불 몇 개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창밖 정원은 달빛 아래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인들의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 뒤편,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오래된 마굿간 쪽으로 한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깊게 눌러쓴 젊은 남자 하인. 그는 몇 번이고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는 최대한 죽여져 있었다. 끼익. 낡은 마굿간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안쪽에서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른 짚 냄새. 낡은 나무 냄새. 그리고 말들의 낮은 숨소리. 남자 하인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마굿간 안쪽 구석. 낡은 의자 하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늙은 마부. 해진 외투. 거칠게 갈라진 손.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는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공기만큼은, 평범한 늙은이의 것이 아니었다. 카일 로웬의 아버지.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림자 속에서 움직여 온 마법사, 루시안 로웬. 남자 하인이 낮게 고개를 숙였다. "...루시안 님." "말해라." "...다음 주에 후레지아 꽃을 꺾으러 산으로 간답니다." "...산으로." "예. 둘째 영애와 큰 영애 둘이서요." "...그래. 드디어 때가 왔구나. 꽃을 좋아하는 계집 아이들은... 늘 경계가 없지." "...그리고 마침, 그 산으로 가는 길에 사과나무를 심어놓기 좋은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 "...사과나무." "예. 햇빛도 잘 들고, 땅도 꽤 깊다고 들었습니다."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자 아래 그림자 속에서, 그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사과나무. 그 단어가 마굿간 안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등불 불꽃이 다시 한 번 길게 흔들렸다. 루시안의 눈빛이 천천히 깊어졌다. "...그래. 좋군." 루시안은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었다. 늙은 마부의 허름한 그림자 아래
엘로이즈는 끝까지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굳어 있었다. 마침내 클레르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작게 이어졌다. "...언니. 정말... 어머니, 아버지도 나 싫어하시고...언니도 나 싫어할 거야?" "아니야." 엘로이즈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애가.. 괜히 심술 부린거야." "아니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고.. 어머니도.. 항상 나만 보면 한숨 쉬셨고... 방금도 아버지가 나 조심성없다고 혼내신 것도..." "아니야." 엘로이즈가 조금 더 빠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두 분 다. 너가 걱정돼서 그러신거야. 네가 다칠까봐, 또 남들이 함부로 말할까봐. 그래서 엄하게 말씀하시는 거지." "...나.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야." 엘로이즈의 눈이 멈췄다. 클레르는 울먹이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 볼 때 어떤 눈 하는지는 나도 알아..."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식당 안 공기가 아주 조용히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아주 작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클레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클레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툭. 엘로이즈의 손이 조용히 클레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클레르의 몸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클레르. 너 언니 눈 똑바로 봐."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언니 말 못 믿겠어?" 클레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선 너머로, 엘로이즈의 얼굴이 보였다. 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언니는 거짓말 안 해." 그녀가
엘로이즈는 잠시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죄송해요..."하고 웃어 넘겼을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클레르는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엘로이즈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클레르..." 클레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은 잠시 더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 테이블 위에 번진 소스. 굳어버린 손끝. 그는 낮게 혀를 찼다. "쯧." 그리고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밀며 낮은 소리를 냈다. 부인이 눈을 들었다. "왜, 더 안 드시고요?" "입맛이 없어졌소." 대신은 아무 말도 더 하지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졌다. 식당 안은 더 조용해졌다. 클레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포크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입술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르... 아버지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 말이 거기서 멈췄다. 클레르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 눈 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울음을 참고있는 얼굴.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부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클레르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에는 피곤함과 복잡한 감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부인은 결국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 위를 조용히 스쳤다. "...먼저 일어나마." 그녀는 잠시 두 딸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덜컥. 이제 식당 안에는 엘로이즈와 클레르 둘만 남았다. 엘로이즈는 한동안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참고있는 동생. 평소처럼 밝게 웃지도 못하고, 포크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모습. 엘로이
덜컥. 살롱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다시 조용함이 내려 앉았다. 복도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만 길게 깔려 있었다. 클레르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 넘어졌던 자세 그대로. 작은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하녀가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작은 아가씨. 괜찮으세요?"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은 멍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네스가 서 있던 자리. 부드럽게 웃던 얼굴. 다정했던 목소리. '언니분까지 영애를 창피해하시고, 싫어하게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클레르의 손이 떨렸다. "...아가씨?" 하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불렀다. 클레르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손수건. 자기 손 안에 쥐어진 새하얀 천. 조금 전까지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천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꾸깃. 하얀 천이 손안에서 천천히 구겨졌다. 하녀의 얼굴이 더 굳었다. "...작은 아가씨, 어디 다치신 건 아니시죠?" "...진짜.." "...네?" "내가 진짜로... 언니를 창피하게 만들어?" "아가씨..." "내가 자꾸 뛰어다녀서... 말도 안 듣고... 그래서 언니도...나 싫어하게 되는 거야?"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 하녀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복도 창문 사이로 바람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클레르의 금빛 머리카락 끝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하얀 손수건이 점점 더 작게 구겨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드 로베르 저택의 식당은 조용했다. 하인들이 벽 쪽에 조용히 서 있었고, 식당 안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엘로이즈는 평소처
이네스는 아주 천천히 입가를 움직였다. "...괜찮아요." 미소였다. 완벽하게 단정하고, 부드럽게 만들어낸 귀족 영애의 미소. 이네스는 구겨진 소매를 가볍게 정리한 뒤, 천천히 클레르 쪽으로 다가갔다. 클레르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이네스는 그런 반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 드 로베르 가문의 둘째 영애신가요...?" 이네스는 잠시 클레르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수건을 꺼냈다. 하얀 손수건 끝이 클레르의 드레스에 묻은 먼지와 흙자국을 아주 천천히 털어냈다. 툭, 툭. 동작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이네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치진 않았나요, 영애?" "...네." 클레르는 눈을 깜빡이며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무서워 보였던 얼굴이, 갑자기 너무 다정해진 탓이었다. 이네스의 입가가 아주 부드럽게 올라갔다. "다행이네요." 그녀는 여전히 손수건으로 드레스 끝을 정리해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드 로베르 영애께... 동생분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어요." "언니가요?" "네." 이네스는 미소지었다. "동생분이 참 착하고..." 손수건이 천천히 멈췄다. "...순수한 아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녀의 눈이 아주 천천히 클레르를 향했다. "정말 그런 것 같네요." 말은 다정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친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묘하게 숨이 막혔다. 이네스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조금 조심해서 다니셔야겠어요, 영애." 클레르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이네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으시려면요." 그 말에 클레르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이네스는 그
철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마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고삐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은 묘지 한쪽ㅡ 그림 하일드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한번 스쳤다.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고, 철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부는 그제야 고개를 조금 숙였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쪽을 향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괜히 겁줘서... 미안했다." 말은 조용했지만, 아까의 위협과는 전혀 다른 결이였다. "암살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ㅡ" 잠깐 말을 멈췄다
마부의 말이 끝난 뒤에도 마차는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말발굽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그림 하일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지만 손끝에 힘이 아주 조금 들어가 있었다.그때,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 대신 말이다..."고삐를 쥔 손을 살짝 비틀었다."겉으로 보기엔 참 점잖지."짧은 웃음."말도 조용하고, 체면도 챙기고."잠시 후"근데 그런 인간일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그
거울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잠시 맞물려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 거울 안에 또렷하게 있다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미소였다. 마치 웃는 방법을 천천히 떠올리는 사람처럼.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지금... 웃은거야?" 그림 하일드는 잠깐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엘로이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너 웃는 거..." 그녀는 거울 속에서 그림 하일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은 놀림도 아니었고 비난도
귀족 부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대신의 얼굴 윤곽이 짧게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했다. "당신은 늘... 너무 앞을 보세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는 아직 열여섯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야심은 비례하지 않소." 대신의 답은 짧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아이일수록 더 멀리 보게 되지." 귀족 부인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멀리 본다 해서 다 위로 오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신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오르느냐가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