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귀족 부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대신의 얼굴 윤곽이 짧게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했다.
"당신은 늘... 너무 앞을 보세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는 아직 열여섯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야심은 비례하지 않소." 대신의 답은 짧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아이일수록 더 멀리 보게 되지." 귀족 부인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멀리 본다 해서 다 위로 오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신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오르느냐가 아니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오르려는 마음이 누구를 밟고 지나가느냐지." 잠시 침묵. 귀족 부인은 남편을 오래 보았다. "우리 애를 밟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은 공격적이지 않았지만 정확했다. 대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 애는 사람을 너무 쉽게 곁에 두오." 그의 시선이 문 쪽으로 잠시 향했다. "외로움은 판단을 흐리게 만들지." 귀족 부인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동생을 잃은 뒤로 딸이 조용해졌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 아이 덕에 요즘은 조금은 웃는 것 같습니다." 대신의 얼굴이 굳었다. 그 한 문장이 그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웃게 만드는 자가 항상 좋은 자는 아니오." 촛불이 짧게 탔다. 대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장은?" "이미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내일부터는 그 아이의 동선과 접촉을 하녀장이 더 세밀히 관리하게 하시오." 귀족 부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감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확인하라는 말이오." 대신은 차갑게 말했다. "확인은 의심이 아니라 책임이오." 그는 문으로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 애는 가문의 얼굴이오." 잠시 멈추었다. "얼굴 곁에는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지." 문이 닫혔다. 방 안에는 촛불과 귀족 부인만 남았다.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야욕이라..." 그녀의 기억 속에서 저녁 식탁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 있던 아이. 그 얼굴 어디에 야욕이 있었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궁정 대신이 괜한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시각. 작은 하녀 방에서 그림 하일드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살롱의 시선. 저녁 식탁의 시선. 그리고 아가씨가 잠시 자신을 오래 바라보던 눈. 그녀는 손을 천천히 오므렸다. 그녀에게 욕심은 없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런데도 어쩐지, 오늘 하루는 저택 전체가 자신을 한 겹 더 얇게 재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당겨 덮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생각했다. '틀리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그 말이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인지, 다짐인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저택의 복도는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귀족 부인은 촛대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불꽃이 작게 흔들릴 때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다. 하녀들이 묵는 방들이 나열되어있는 복도는 주인들의 공간보다 더 어둡고, 더 좁았다. 그녀는 그림 하일드의 방문 앞에 멈췄다. 잠시 손을 올렸다가,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문이 숨처럼 열렸다. 작은 방 안에는 가구 몇 개와 좁은 침대, 그리고 달빛뿐이었다. 그림 하일드는 이불을 단정히 덮고 누워 있었다. 두 손은 가슴 위에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마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단정해진 아이처럼. 귀족 부인은 문간에 서서 그 아이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잠든 얼굴은 낮에 보았던 얼굴보다 훨씬 더 어려보였다. 경계도 없고, 조심스러움도 없고, 그저 작은 아이였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야욕이 있소.' 남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저 얼굴에 무엇이 숨겨져 있다는 걸까.' 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림 하일드의 속눈썹이 아주 조금 떨렸지만 깨지는 않았다. 부인은 천천히 문을 닫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이 닫히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 가문ㅡ 드 로베르 가문. 오래된 귀족 가문. 사람들은 전통과 권위, 선망의 상징이라 부른다. 궁정 대신을 배출한 집안. 왕의 곁에 선 집안. 흔들림 없는 가문. 하지만ㅡ 그 내막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남편은 궁정 대신이다. 계산적이고, 차분하고, 언제나 한 수 앞을 읽는 사람. 겉으로는 품위와 절제를 말하지만ㅡ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항상 하나였다. '보여지는 것.' 왕 앞에서의 체면. 궁정에서의 입지. 다른 귀족들의 시선. 그는... 부인도, 자식도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부로 여긴다. 딸들이 항상 우아해야 하는 이유도, 항상 총명해야 하는 이유도, 결국은 자신의 이름을 더 높이기 위해서였다. 자식들이 성공해야 그의 체면도 서고, 그의 자리도 더 단단해진다. 그리고, 더 높은 자리. 그가 아직 말로 꺼내지 않은 그 다음 자리. 그 길에 방해가 될 사람들은 남편은... 미리 치워버리는 사람이다. 소리 없이. 흔적 없이.' 귀족 부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 끝 창문으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둘째 딸아이를 잃었던 날도 이렇게 조용했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은 더 단단해졌고, 더 계산적이 되었다. 첫째 딸아이를 향한 눈빛은 걱정보다 기대가 많았다.' 그때, 남편이 낮게, 분명하게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얼굴 곁에는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지.' 그 문장은 부탁이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 원칙이었다. 가문의 얼굴에 금이 가지 않게 하라는, 냉정한 원칙. 귀족 부인은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그 말 속에는 딸아이의 행복도, 감정도, 두려움도 들어있지 않았다. 들어있는 건 오직 가문의 이름과 자신의 자리 뿐이었다. 그림 하일드가 정말 흠집이 될까. 아니면... 딸아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줄 손이 될까.' 귀족 부인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저택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완벽하게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누군가는 이미 누군가를 흠집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저택의 공기는 밤보다 더 얇고 조용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복도의 바닥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리본 상자와 빗을 정리한 쟁반을 들고 아가씨의 방으로 향했다. 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속도도, 숨도 일정했다. 하지만 방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하녀장이었다. 팔짱을 끼지도, 기대지도 않은 채 정확히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이미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 앞에서 멈췄다. "하녀장님." "왔구나." 하녀장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은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마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림하일드는 조용히 기다렸다. "오늘부터 너와 아가씨의 접촉을 더 세밀히 관리하라고." 접촉. 그 단어가 낯설게 들렸다. 그림 하일드의 손가락이 쟁반에서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관리... 말씀이십니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녀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가씨의 일정은 하녀장을 통해 전달한다. 단독으로 대화하는 시간은 줄인다. 필요 이상의 체류는 하지 않는다." 짧게 끊어 말했다. "아가씨의 방에 들어갈 때는 하녀장과 함께 들어간다." 복도는 조용했지만 그 말은 규칙처럼 또렸했다. 그림 하일드는 잠시 침묵했다. 어젯 밤, 아가씨의 질문. '고아원에선... 어떤 걸 배웠어?' 그리고, '넌... 누가 빼앗아도 괜찮은 아이구나.' 그 말이 아주 얇게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짧고 단정한 대답. 하녀장은 그 얼굴을 살폈다. 당황이나 억울함 같은 것을 찾듯. 그러나 그림 하일드의 표정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그저 배운대로. 하녀장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아침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커튼이 천천히 흔들렸다. 아가씨는 화장대에 앉아 있었다. 거울 앞에 곧게 앉은 모습은 아침부터 흐트러짐이 없었다. 햇빛은 거울을 스쳐 그녀의 어깨와 머리카락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하녀장을 거쳐 그림 하일드에게 닿았다. 잠시, 아주 잠깐. "오늘부터 하녀장이 같이 있을거야." 아가씨가 말했다. "괜찮지?" "네, 아가씨." 잠시 후. 그림 하일드는 노란 리본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밝은 색. 햇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빛이 도는 리본이었다.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돈한 뒤, 리본을 끼워 넣었다. 각도는 의식하지 않아도 이미 몸이 알고 있었다. 조금, 아주 조금. 왼쪽으로. 매듭을 정리하고 손을 떼자 노란 리본이 아가씨의 흑발 위에서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 물러섰다. "다 매었습니다." 아가씨는 거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녀장의 시선이 두 사람을 동시에 훑었다. 그리고 아가씨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오늘도..." 부드러운 목소리. "마음에 들게 매줬네." 그 말에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조금 풀렸다. 하지만 아가씨는 여전히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자신의 얼굴과 그 뒤에 서 있는 그림 하일드가 함께 비쳤다. 아가씨의 시선이 천천히, 거울 속 그림 하일드에게로 옮겨갔다. 잠시. 그리고, "그림 하일드." "네, 아가씨." "잠깐... 거기 서 있어 봐." 그림 하일드는 조금 당황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앞으로." 아가씨가 덧붙였다. 하녀장이 눈썹을 조금 움직였다. 그림 하일드는 조심스럽게 아가씨의 바로 뒤, 거울이 정확히 비치는 자리에 섰다. "고개 좀.. 들어볼래?" 그 말은 부드러웠다. 그림 하일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 거울은 항상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아가씨의 머리를 빗기며 비친 옆모습을 잠깐 봤을 뿐. 정면으로 자신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아원에서는 애초에 거울이 없었다. 있다 해도 아이들이 들여다볼 자리는 아니었다. 자기 얼굴을 확인하는 일은 그곳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 있었다. 작고, 마른 얼굴. 빛을 거의 받아본 적 없는 피부. 조심스러운 눈. 그리고, 아가씨의 뒤에 서 있던 그 아이가 아니라, 아가씨와 나란히 같은 틀 안에 담긴 한 사람의 얼굴. 그림 하일드는 숨을 아주 잠깐 멈췄다. 낯설었다. 이렇게 선명하게 자기 얼굴을 보는 게. 아가씨는 거울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생각보다... 눈이 또렷하네." 그 말이 칭찬인지 평가인지 알 수 없었다. 하녀장은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가씨는 리본을 한 번 더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이 집에 오기 전엔 거울 자주 봤어?" 그림 하일드는 거울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아니요." "그렇구나." 잠시 침묵. "그럼... 오늘부터는 가끔 봐도 되겠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림 하일드는 처음으로 자기 얼굴과 아가씨의 얼굴이 한 프레임 안에 함께 들어와 있다는 걸 또렷하게 인식했다. 노란 리본은 아가씨의 머리 위에서 빛났고, 그림 하일드의 눈은 그 옆에서 조용히 빛을 받아 더 또렷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가씨, 아니, '엘로이즈 드 로베르'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아주 천천히 그림 하일드의 눈과 마주쳤다. 엘로이즈의 미소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처음으로 낯선 흥미가 아주 얇게 스며들고 있었다.마굿간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희미한 등불이 흔들리고, 짚 냄새와 말들의 낮은 숨소리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하인은 여전히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루시안은 낡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모자 아래에 가려진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사과나무만큼... 마력이 잘 스며드는 과일나무도 없지. 열매도. 껍질도. 뿌리조차도." 허공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어갔다. "옛날부터 그랬다. 사과는.. 참 순순한 아이들이었지. 조금만 속삭여주면 아주 잘 자라주고, 아주 잘 물들어주니까." 그의 눈빛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산길. 후레지아. 사과나무라... 참 아름다운 조합이군." 그 순간, 루시안의 그림자 뒤편 어둠이 아주 잠깐 일렁였다. 마치 누군가가 웃는 것처럼. 일주일 후. 점심 햇살이 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현관 앞에는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검은 말들이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고, 하인들은 양옆으로 가지런히 서 있었다. 끼익. 현관문이 열렸다. 먼저 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한 외출복 차림으로. 그 뒤로 부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 엘로이즈와 클레르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이즈는 오늘도 단정했다. 흑발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그녀는 조용하고 우아하게 부모를 바라보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어머니,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대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역시 아주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 오늘도 중요한 연회가 있어서..."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목걸이 끝을 살짝 만지며 말을 이었다. "...좀 늦을 거란다." "...네." 그 순간, 부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클레르. 연한 노란빛 드레스를 입은 둘째 딸이 조용히 서 있었다. 평소처럼 들떠 뛰어나가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처럼 풀이 죽은 얼굴도 아니었
그날 밤. 드 로베르 저택은 이미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복도에는 촛불 몇 개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창밖 정원은 달빛 아래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인들의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 뒤편,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오래된 마굿간 쪽으로 한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깊게 눌러쓴 젊은 남자 하인. 그는 몇 번이고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는 최대한 죽여져 있었다. 끼익. 낡은 마굿간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안쪽에서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른 짚 냄새. 낡은 나무 냄새. 그리고 말들의 낮은 숨소리. 남자 하인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마굿간 안쪽 구석. 낡은 의자 하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늙은 마부. 해진 외투. 거칠게 갈라진 손.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는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공기만큼은, 평범한 늙은이의 것이 아니었다. 카일 로웬의 아버지.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림자 속에서 움직여 온 마법사, 루시안 로웬. 남자 하인이 낮게 고개를 숙였다. "...루시안 님." "말해라." "...다음 주에 후레지아 꽃을 꺾으러 산으로 간답니다." "...산으로." "예. 둘째 영애와 큰 영애 둘이서요." "...그래. 드디어 때가 왔구나. 꽃을 좋아하는 계집 아이들은... 늘 경계가 없지." "...그리고 마침, 그 산으로 가는 길에 사과나무를 심어놓기 좋은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 "...사과나무." "예. 햇빛도 잘 들고, 땅도 꽤 깊다고 들었습니다."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자 아래 그림자 속에서, 그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사과나무. 그 단어가 마굿간 안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등불 불꽃이 다시 한 번 길게 흔들렸다. 루시안의 눈빛이 천천히 깊어졌다. "...그래. 좋군." 루시안은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었다. 늙은 마부의 허름한 그림자 아래
엘로이즈는 끝까지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굳어 있었다. 마침내 클레르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작게 이어졌다. "...언니. 정말... 어머니, 아버지도 나 싫어하시고...언니도 나 싫어할 거야?" "아니야." 엘로이즈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애가.. 괜히 심술 부린거야." "아니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고.. 어머니도.. 항상 나만 보면 한숨 쉬셨고... 방금도 아버지가 나 조심성없다고 혼내신 것도..." "아니야." 엘로이즈가 조금 더 빠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두 분 다. 너가 걱정돼서 그러신거야. 네가 다칠까봐, 또 남들이 함부로 말할까봐. 그래서 엄하게 말씀하시는 거지." "...나.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야." 엘로이즈의 눈이 멈췄다. 클레르는 울먹이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 볼 때 어떤 눈 하는지는 나도 알아..."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식당 안 공기가 아주 조용히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아주 작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클레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클레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툭. 엘로이즈의 손이 조용히 클레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클레르의 몸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클레르. 너 언니 눈 똑바로 봐."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언니 말 못 믿겠어?" 클레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선 너머로, 엘로이즈의 얼굴이 보였다. 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언니는 거짓말 안 해." 그녀가
엘로이즈는 잠시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죄송해요..."하고 웃어 넘겼을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클레르는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엘로이즈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클레르..." 클레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은 잠시 더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 테이블 위에 번진 소스. 굳어버린 손끝. 그는 낮게 혀를 찼다. "쯧." 그리고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밀며 낮은 소리를 냈다. 부인이 눈을 들었다. "왜, 더 안 드시고요?" "입맛이 없어졌소." 대신은 아무 말도 더 하지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졌다. 식당 안은 더 조용해졌다. 클레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포크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입술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르... 아버지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 말이 거기서 멈췄다. 클레르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 눈 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울음을 참고있는 얼굴.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부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클레르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에는 피곤함과 복잡한 감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부인은 결국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 위를 조용히 스쳤다. "...먼저 일어나마." 그녀는 잠시 두 딸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덜컥. 이제 식당 안에는 엘로이즈와 클레르 둘만 남았다. 엘로이즈는 한동안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참고있는 동생. 평소처럼 밝게 웃지도 못하고, 포크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모습. 엘로이
덜컥. 살롱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다시 조용함이 내려 앉았다. 복도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만 길게 깔려 있었다. 클레르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 넘어졌던 자세 그대로. 작은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하녀가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작은 아가씨. 괜찮으세요?"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은 멍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네스가 서 있던 자리. 부드럽게 웃던 얼굴. 다정했던 목소리. '언니분까지 영애를 창피해하시고, 싫어하게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클레르의 손이 떨렸다. "...아가씨?" 하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불렀다. 클레르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손수건. 자기 손 안에 쥐어진 새하얀 천. 조금 전까지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천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꾸깃. 하얀 천이 손안에서 천천히 구겨졌다. 하녀의 얼굴이 더 굳었다. "...작은 아가씨, 어디 다치신 건 아니시죠?" "...진짜.." "...네?" "내가 진짜로... 언니를 창피하게 만들어?" "아가씨..." "내가 자꾸 뛰어다녀서... 말도 안 듣고... 그래서 언니도...나 싫어하게 되는 거야?"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 하녀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복도 창문 사이로 바람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클레르의 금빛 머리카락 끝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하얀 손수건이 점점 더 작게 구겨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드 로베르 저택의 식당은 조용했다. 하인들이 벽 쪽에 조용히 서 있었고, 식당 안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엘로이즈는 평소처
이네스는 아주 천천히 입가를 움직였다. "...괜찮아요." 미소였다. 완벽하게 단정하고, 부드럽게 만들어낸 귀족 영애의 미소. 이네스는 구겨진 소매를 가볍게 정리한 뒤, 천천히 클레르 쪽으로 다가갔다. 클레르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이네스는 그런 반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 드 로베르 가문의 둘째 영애신가요...?" 이네스는 잠시 클레르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수건을 꺼냈다. 하얀 손수건 끝이 클레르의 드레스에 묻은 먼지와 흙자국을 아주 천천히 털어냈다. 툭, 툭. 동작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이네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치진 않았나요, 영애?" "...네." 클레르는 눈을 깜빡이며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무서워 보였던 얼굴이, 갑자기 너무 다정해진 탓이었다. 이네스의 입가가 아주 부드럽게 올라갔다. "다행이네요." 그녀는 여전히 손수건으로 드레스 끝을 정리해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드 로베르 영애께... 동생분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어요." "언니가요?" "네." 이네스는 미소지었다. "동생분이 참 착하고..." 손수건이 천천히 멈췄다. "...순수한 아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녀의 눈이 아주 천천히 클레르를 향했다. "정말 그런 것 같네요." 말은 다정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친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묘하게 숨이 막혔다. 이네스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조금 조심해서 다니셔야겠어요, 영애." 클레르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이네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으시려면요." 그 말에 클레르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이네스는 그
살롱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퍼져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았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커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귀족 영애들의 다과 시간. 하지만 왕의 양쪽 팔이라 불리는 두 가문의 외동딸이 마주 앉아 있는 이상,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던 적이 없었다. 엘로이즈 드 로베르. 그리고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 이네스 드 몽브랑. 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언제나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얇은 칼날 같은 긴장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같이 차를 마시러 온 다른 영애들은
저택 안.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엘로이즈."부드러운 목
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 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