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라운지에서 지수를 마주한 이후, 수진의 행동은 한층 과감해졌다. 그녀는 마치 지수의 일과표를 훔쳐보기라도 한 듯, 지수가 산책을 나서는 시간에 맞춰 세 살 난 현지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수진은 지수와 스쳐 지나갈 때마다 보란 듯이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고는 아직 완연하지는 않지만, 옷감 위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15주. 생명의 태동을 준비하는 그 손길은 지수에게는 그 어떤 비수보다 날카로운 조롱이었다. 지수의 말투와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우아한 척 현지를 챙기는 수진의 가증스러운 연기는 매일같이 지수의 안식처를 더럽혔다.지수는 그 천박한 도발에 반응하는 대신, 계획보다 빠르게 독립을 준비했다. ‘포스트 빌리지’는 지수에게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도진과의 신혼을 시작했고, 자신의 커리어를 묻었으며, 끝내 아이를 지키지 못한 채 홀로 앓아야 했던 애증의 공
“대표님, 예강 주식회사를 비롯한 우호 지분 명의로 폭락하는 CB 그룹의 주식을 빠르게 매집하고 있습니다. 도진 측에서는 현재 터진 스캔들로 주가 방어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우리가 밑바닥에서 지분을 줍줍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강이현의 차분한 보고에 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차가웠다. 한수진에게 사법 처벌이라는 합당한 지옥을 선물하고, 마침내 아이들을 제 품에 안은 진우의 다음 타깃은 애초부터 강도진과 CB의 경영권이었다. 그들의 거대한 성을 통째로 무너뜨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같은 시각,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지는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도 오만의 정점에 선 강도진의 뇌 회로는 기괴한 희망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그래…… 하수진 저 여자는 돈이 모자라면 제 자식도 팔아넘기는 독하고 천박한 년이야. 저런 전과자에게 내 아이의 양육을 맡길 수는 없지.’도진은 집무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수진이 아닌 오직 한 사람, 이지수였다. 지수는 다정하고 모성애가 깊은 여자였다. 수진이 낳을 제 핏줄을 지수에게 맡긴다면, 지수는 분명 예인이와 함께 그 아이까지 친자식처럼 품어줄 터였다.‘박진우가 현수와 현지를 데려갈 테니, 이지수가 박진우 곁에 맴돌 명분도 완전히 사라졌어. 지수도 혼자 예인이를 키우느라 슬슬 한계에 부딪혔을 테니, 내가 다시 손을 내밀면 돌아올 수밖에 없다.’수진이라는 오물은 언제든 완벽하게 치워버릴 수 있었다. 이제 지수와 재결합하여 그녀가 키워낸 제이아우라를 CB의 날개 아래 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괴하고도 거대한 착각에 사로잡힌 도진이었다.한편, 한수진의 하루하루는 펄펄 끓는 지옥의 불길을 걷는 듯했
성수동 구시가지에 자리 잡은 멀티 플렉스숍 ‘the moon’.이곳은 정식 오픈식 전부터 이미 강남의 내로라하는 자산가들과 남성 커뮤니티 사이에서 은밀하게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그 안에서도 특히 제이아우라 존에 자리잡은 프리미엄 바버숍과 프라이빗 라운지를 결합한 ‘man cave’는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다. 패션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발걸음해야 하는 쇼핑의 성지로, 그루밍에 눈을 뜬 입문자부터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전문가들까지 모두를 만족시키는 공간. 무엇보다 사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대한민국 경제를 흔들 만한 고급 정보가 오가는 최고의 사교 장소였다.지수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이상적인 공간이 마침내 완벽한 형태로 구현되어 가고 있는 셈이었다.한편, 이 ‘man cave’는 또 다른 의미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유부남들 사이에서 ‘가정의 수호’를 위해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로 알려진 탓이었다.“김 사장님, 사흘 뒤에 있을 사모님 생일을 위해 아주 특별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정갈하게 가위질을 하며 헤어를 정리하던 바버 정우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말에 거울 속 김 사장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아차. 사흘 뒤가 와이프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이다.김 사장은 베테랑 사업가답게 놀란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며, 은근 슬쩍 우진에게 정보를 요구했다.“에이, 귀도 밝군 그래. 그렇지. 하지만 웬만한 명품은 다 선물해 본 탓에 올해는 뭘 해줘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와서 말이야.”우진은 거울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고급 정보를 자연스럽게 풀어놓았다.“저희 매장 바로 옆에,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기가 막힌 실력을 갖춘 조향사가 새로 입점했습니다. 사모님께서 워낙 향에 민감하셔서 시중의 일반적인 향수는 쓰지 못하신다고 들었는데, 오직 사모님만을 위한 세계 유일의 맞춤 향수를 선물하시는 건 어떨까요?”김 사장은 흥미로운 듯
CB 대표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강도진은 책상 위에 놓인 아스테리아의 공식 서한을 노려보며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루체른과 원석 공급 계약을 파기한 지금, 브랜드 신뢰도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아스테리아의 문을 두드려야만 했다.과거 아스테리아는 CB에 시장가의 70%라는 파격적인 특혜 가격으로 원석을 공급해 왔었다. 하지만 돌아온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시장가보다 20% 인상된 금액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도진이 서류를 집어던지며 포효하자, 태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 올렸다.“대표님, 하지만 아스테리아 측에서 보낸 세부 조항을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최근 블랙 다이아몬드 독점 입찰에 성공한 것을 감안해, ‘VVIP 우대 할인’ 명목으로 10%를 차감해 주겠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시장가보다 10% 높은 금액으로 계약을 진행하겠다는 뜻입니다.”“우대 할인?”도진이 실소를 터트렸다. 겉으로는 대단한 혜택을 주는 척 생색을 내고 있지만, 실상은 시장가보다 10%나 비싼 값에 원석을 넘기겠다는 교묘한 폭리였다. 과거에 받던 공급가와 비교하면 CB가 감당해야 할 원가 부담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태준은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예전에 루체른과 함께 저희 회사의 원석 공급을 위해 비공개 입찰을 했던 프랑스 공급사, ‘오렐리 주얼리’에 연락해 보는 건 어떨까요? 거긴 최소한 시장가에 원석을 공급받을 수 있을 겁니다.”도진은 태준의 말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서류의 가장 마지막 장에 붉은 직인과 함께 찍힌 서슬 퍼런 공문 한 줄을 바라보았다.
도진이 블랙 다이아몬드 VVIP 쇼케이스 준비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수진은 진우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수진을 기다리는 것은 차가운 기계음뿐이었고, 진우는 수진의 연락을 받지 않고 그녀의 최근 동향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그러자 독이 오른 수진에게서 결정적인 미끼가 날아왔다. 아이들 문제로 상의하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현수와 현지. 진우의 유일한 역린이자 전부인 아이들의 이름이 나오자, 진우는 그제야 차가운 눈을 빛내며 수진이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약속 장소로 향하며 진우는 수진의 자료를 다시 상기했다. 수진은 도진의 모친인 김미자에게 임신을 핑계로 30억 원을 받았고, 진단서 사건 이후 그 돈을 당장 돌려주어야 하는 처지라는 점이었다.‘이혼 후 한 번도 연락이 없던 여자가 갑자기 만나자고 한 이유가, 결국 그 30억 때문이었군.’수진은 장미처럼 화려하게 빛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닌, 온통 어울리지도 않는 명품으로 도배한 추한 임산부의 모습으로 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마주 앉은 수진은 차가운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뻔뻔하게 본론을 꺼냈다.“당신, 현수랑 현지한테 애착 많잖아. 솔직히 강도진은 제 핏줄도 아닌 애들한테 관심도 없어요. 내가 두 아이 양육권, 당신한테 순순히 넘겨줄게요.”진우는 대답 없이 팔짱을 끼고 수진을 응시했다. 그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수진이 침을 삼키며 본색을 드러냈다.“대신, 나 이혼할 때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나왔잖아. 그 위자료 셈 치고, 깔끔하게 50억 줘요. 그럼 나도 애들 문제에서 완전히 손 뗄 테니까.”자신의 친자식들을 삼십억 빚을 탕감하고 남은 돈을 챙길 ‘담보’로 던지는 여자. 진우는 속에서
‘새로운 태양’ 프리미엄 라인의 디자인으로 겨우 강도진의 신뢰를 되찾은 수진은, 다시 그의 카드를 손에 쥐게 되면서 물질적인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백화점 명품관을 돌며 닥치는 대로 긁어대던 영수증만이 그녀의 얄팍한 자존심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쇼핑백이 쌓여갈수록 마음 한구석의 무거운 돌덩이는 도리어 커져만 갔다.도진의 부모, 강 회장 부부에게 받았던 30억 원. 그것이 여전히 수진의 발목을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다행이라면 도진의 입김 덕분인지 김미자가 당장 돈을 돌려달라고 사납게 재촉하지는 않는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진의 무정자증 진단서가 세상에 공개된 이후, 아이의 친부에 대한 추잡한 의문은 유령처럼 수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었다.게다가 수진을 가장 미치게 만드는 것은 도진의 애매한 태도였다.그는 여전히 자신의 집과 수진의 처소를 오가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프리미엄 라인 준비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수진을 찾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배도 불러오는데 회사 출근해서 스트레스받지 마. 특별한 일 없으면 집에서 쉬어.”배려를 가장한 도진의 말은 수진의 귀에 날카로운 배제(排除)로 들렸다.‘이래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이지수를 몰아내고 이 자리까지 왔는데……! 왜 아직도 나는 떳떳한 안주인이 아니라 내연녀라는 더러운 꼬리표를 달고 있어야 하지?’수진은 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손톱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올랐다.‘설마 강도진, 그 인간…… 내 디자인만 쏙 빼먹고 날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니야, 이 아이는 강도진의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선주문 오픈 30분 만에 10피스 모두 계약 완료되었습니다!”비서실장의 흥분 섞인 보고에 강도진은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크리스탈 잔벽을 따라 부드럽게 감돌았다.아스테리아의 블랙 다이아몬드 낙찰 소식을 대대적으로 터뜨린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안젤라이트 이미테이션’ 사태로 바닥을 치던 CB의 이미지는 하룻밤 사이에 ‘세계 유일의 원석을 보유한 독점적 하이엔드 브랜드’로 탈바꿈했다.물론 아직 원석은 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진에게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는 한수진이 급하게 뽑아낸 디자인 시안을 바탕으로, 일반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은 샘플 피스를 제작했다. 그리고 상위 0.1%의 VVIP들만을 은밀히 초청해 프라이빗 프리오더 세션을 연었다.‘눈부신 화이트 다이아몬드가 박힌 이 자리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완벽한 블랙 다이아몬드가 세팅될 겁니다. 오직 전 세계 딱 열 분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입니다.’도진의 유려한 화술과 샘플의 화려함에 매료된 자산가들은 앞다투어 지갑을 열었다. 아직 실물조차 존재하지 않는 보석에 수백억의 선주문 대금이 쏟아져 들어왔다.“완판 소식, 곧바로 2차 보도자료로 배포해. 그리고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한 보급형 라인 샘플링도 이번 주 내로 대중에게 공개한다고 홍보하고.”도진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곁에 선 태준을 바라보았다.“봤지, 태준아? 프리미엄 라인으로 희소성을 증명하니까, 대중성은 알아서 따라오는 거야. 주춤했던 ‘영원한 사랑’ 주문량도 예전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됐다더군. 시장은 이렇게 흔드는 거다.”“……네, 대표님. 대단하십니다.”태준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도진은 승리에 도취해 있었지만, 태준의 손에 든 태블릿에는 수많은 독소 조항이 가득한 계약서와, 당장 메워야 할 대출 이자 그래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선주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
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
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