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추연화는 병이 도져 생명을 연장하는 인삼까지 썼지만, 피가 멈추지 않아 연신 한 움큼씩 기침과 함께 피를 쏟아냈다. 그녀와 수십 년간 사랑을 나눈 남편 방지혁은 지금 평양공주(平陽公主)를 데리고 궁중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한독(寒毒)이 도져 뼛속까지 파고드는 찬 기운이 밀려오며 의식이 흐려지던 찰나, 문득 방지혁이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추연화는 법당에서 꼬박 일주일 동안 무릎을 꿇어 무릎에 시퍼런 멍이 가득했지만, 자신이 기도한 대로 방지혁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러니 시녀의 부축을 받아 서둘러 안채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방지혁과 평양공주였다. 교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주와 혼인했다던 방지혁은 추연화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평양공주에게 옷을 입혀주고 있었다. 추연화가 참지 못하고 따져 묻자 평양공주는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고, 그 바람에 추연화는 바닥에 쓰러졌다. "장군님께서 나를 아끼시거늘, 네까짓 게 감히 어디라고 입을 놀리는 것이냐?" "사당에 가서 무릎 꿇고 <여인의 도리>나 똑바로 배우며 아랫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거라." 무릎을 꿇은 채 정신을 잃기 직전, 추연화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았다. ‘차라리 잘됐어, 이제는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도 돼.’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방지혁이 처음으로 평양공주의 거처에서 머물렀던 그날 밤, 추연화는 꼬박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방지혁은 눈이 벌게진 채 찾아와 해명했다. "연화야, 내가 평양공주를 아무리 싫어해도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서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추연화는 그 말을 믿었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방지혁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추연화가 손을 빼내자 그 기척에 방지혁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서 다행이다. 어서 약을 먹거라." 방지혁은 따뜻하게 데워진 약을 들고 한 숟가락씩 그녀에게 먹여주었다. "내가 잘못했다. 어제 술을 몇 잔 과하게 마셔 서재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너로 착각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View More홍수가 지나간 자리는 엉망진창이었고 집들이 무너져 수많은 백성들이 잘 곳을 잃었다.추연화의 가게는 지대가 높아 다행히 피해가 적었다.이에 그추연화는 가게에 있는 곡식을 털어 문앞에 임시 천막을 치고 죽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맹연우는 군말 없이 더 많은 곡식을 가져와 그녀의 곁에서 일손을 도왔다.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천막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추연화는 앞치마를 두르고 죽을 나누어 주었고, 맹연우는 곁에서 질서를 유지하며 힘든 일을 도맡아 처리했으며 두 사람의 호흡은 척척 맞았다.죽을 나누어 주는 천막은 가게 바로 앞에 있어 가게 안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였다.방지혁은 상처가 아물어 침상에서 일어나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자, 그는 더 이상 방 안에만 갇혀 있고 싶지 않았다.가끔 가게에 서서 맞은편 천막의 활기찬 모습을 바라보았고, 어떨 때는 뒷마당으로 가 그들이 새로 들어온 곡식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는 똑똑히 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묵묵한 신뢰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눈빛 하나, 몸짓 하나로 서로의 뜻을 완벽히 이해했다.어느 날 오후, 추연화는 평소처럼 약을 가져왔고, 방지혁은 약을 마신 뒤 약사발을 돌려주었다."조정의 명령을 받았다. 닷새 뒤 북쪽 변방으로 떠나야 한다."그가 갑자기 말을 꺼냈고, 추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변방을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요. 장군님께서는 가는 길 몸조심하십시오."방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천막 아래에서 맹연우는 허리를 숙인 채 어르신의 말을 경청한 뒤, 품에서 엽전 몇 푼을 꺼내 어르신의 손에 쥐여 주었다."사실 예전에는 널 다시 만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가겠다고 다짐했었다."방지혁은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허나 지금 네가 이토록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비로소 내가 틀렸음을 깨달았다."그는 고개를 돌려 추연화를 바라보았고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저 사람이 나보다 너를 더 잘 챙겨 주는구나.""과거에 부부였
올해 강남의 장마철에는 폭우가 잦았고, 최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비가 쏟아졌다.그날 저녁, 비가 매우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추연화는 마침 새로 들어온 말린 식품들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비 때문에 눅눅하게 젖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그녀는 창고로 가 물건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맹연우가 함께 가려 했으나 마침 단골손님이 찾아와 물건에 대해 상의하는 바람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괜찮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추연화는 미소를 지으며 우산을 쓰고 창고로 향했다.그녀가 물건을 확인하던 중, 갑자기 발밑에서 쿵 하는 진동과 함께 천장에서 삐걱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그녀는 즉시 장부를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강물이 넘치지 않게 막아 두었던 둑이 그만 무너져 내린 것이다. 흙탕물이 문과 창문 틈새로 무섭게 밀려들어 오더니 순식간에 무릎까지 차올랐다.물살이 워낙 세서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수위는 순식간에 허리춤까지 차올랐다.그때 갑자기 누군가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연화야!"방지혁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다급하게 창고 안을 두리번거렸고, 추연화를 발견하자 안도하면서도 다급하게 소리쳤다."다친 데는 없느냐? 이곳은 위험하니 어서 나가자꾸나."추연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가려던 찰나, 천장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며 거대한 기둥 하나가 그녀를 향해 떨어졌다."조심하거라!"방지혁은 눈빛이 크게 흔들리며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밀쳐냈다.추연화는 쌓여 있던 물건 위로 쓰러져 다치지 않았으나, 방지혁은 기둥에 등을 정면으로 맞아 물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장군님!"추연화는 서둘러 그를 부축하러 갔다.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내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내며 정신을 잃었고, 거의 동시에 창고 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열렸다.맹연우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현장을 보자마자
방지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추연화는 그가 떠난 줄 알았으나, 서서히 이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했다.가장 먼저 늘 가게 주변을 서성거리며 사소한 트집을 잡던 건달들이 보이지 않았다.주변 가게 점주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자들은 얼마 전에 어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인물의 눈 밖에 나서 성 밖으로 쫓겨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이어서 옆 가게를 인수하는 일 역시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장사가 번창하자 기존 가게 크기가 좁다고 느낀 그녀는 마침 옆 가게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인과 협상을 벌이던 중이었다.그러나 옆 가게 주인은 워낙 까다로운 사람이라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했고 계약서 작성도 미루기 일쑤였다.그런데 이틀 만에 주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여 가격을 합리적으로 깎아 주었고, 관아에 서류를 접수한 지 사흘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다.어느 날 문을 닫은 뒤, 가게 점원이 물건을 옮기다가 의아한 소리를 냈다."사장님,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요. 구석에 놓인 과일 바구니 두개와 술 항아리는 저희 물건이 아닙니다."추연화가 다가가 보니 과일 바구니에 묻은 흙이 아직 축축한 것으로 보아 가져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점원이 머리를 탁 치며 말했다."아, 맞다. 오후에 낯선 중년 남자가 두고 간 겁니다. 처음에는 손님인 줄 알았는데 이걸 툭 던져 놓고는, 추 사장님의 가게 확장을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가 버렸습니다."추연화는 잠시 멈칫하다가 뒷골목으로 나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남자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방 장군님,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둠 속에서 방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다."추연화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가게로 돌아와 점원들에게 일렀다."그 물건들은 너희들이 나누어 가지거라."그녀는 여전히 대놓고 주는 것이든 몰래 주는 것이든 방지혁의 물건을 받지 않았다.방지혁 역시 그녀가 받아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듯, 오직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강남의 날씨는 늘 이랬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어느샌가 소리 없이 땅을 적시곤 했다.추연화는 가게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고, 맹연우는 곁에서 요 며칠간의 거래 내역을 정리했다."이 자수 손수건들이 꽤 잘 팔리는군요." 맹연우가 내역을 가리키며 말했고, 추연화는 꼼꼼히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문 틈새로 불어온 바람에 장부가 펄럭이자, 맹연우는 겉옷을 벗어 추연화의 어깨에 살포시 덮어 주었다."날이 쌀쌀합니다."추연화는 글을 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으나, 그의 표정이 평온한 것을 보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문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가 주변을 더욱 고요하고 아늑하게 만들어 주었다.바로 그때, 문이 쾅 열리며 온몸이 흠뻑 젖은 초라한 몰골의 방지혁이 들어와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추연화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손이 떨려 종이에 먹물이 번지고 말았다.그는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고 눈 밑은 거무스름했으며, 수염도 거칠게 자라 무척이나 초췌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겉옷에 꽂혀 있었다.이를 본 맹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추연화의 앞을 막아서며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신데 이리 무례하게 구십니까?"방지혁은 맹연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오직 추연화만을 바라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했다."연화야… 한참을 찾았다. 나와 함께 집으로 가자꾸나."추연화는 붓을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했다."방 장군님, 무례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혼인을 끝냈습니다."방지혁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알고 있다, 연화야. 내가 다 잘못했으니, 나와 함께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꾸나."추연화는 방지혁을 바라보았으나 마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잠시 놀랐지만, 그뿐이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방 장군님, 저는 이곳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가게도 있고 친구도 있지요. 이곳이 제 집이니 경성으로 돌아갈 일은 없습니다.""더구나 저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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