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서진의 눈동자에는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암전이 찾아와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면마취의 기운과 극심한 피로감 속에서 설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설고 고급스러운 병실의 천장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에 설아는 본능적으로 제 아랫배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리며 지독한 통증을 뱉어냈다. 시퍼렇게 멍이 든 손을 쳐다보던 설아의 시선이, 침대 곁에 멈추었다.그곳에는 서진이 있었다. 늘 빈틈없이 완벽하던 수트 차림은 온데간데없고, 셔츠 깃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침대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그의 하얀 소매 자락에 박힌 붉은 핏자국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사그락거리는 미세한 소리에 서진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고개를 든 서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힘없이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설아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이설아…….“서진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깨어난 그녀를 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설아의 시선을 마주한 서진의 심장이 사정없이 덜컹거렸다.자신 때문에 두 번이나 아이를 잃게 되었다는 잔인한 진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을 제 뜻대로 주무르던 유서진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 한 마디도 뱉지 못하는 무력한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설아야…… 아이는…….“차마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수현은 금방이라도 억울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서진의 매서운 시선을 받아냈다."어머님이 설아 씨 태도 때문에 화가 나셔서 얼굴을 한 대 때리신 건 맞아. 며느리가 도리를 못 하니 시어머니로서 훈육하신 거잖아. 하지만 저렇게 크게 다치고 넘어진 건…… 설아 씨가 흥분해서 날뛰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혼자 모서리에 부딪힌 거야! 우리가 밀어낸 게 아니라고!“"박수현.“"진짜야, 서진아! 심지어 설아 씨가 훈육하시는 어머님을 먼저 밀치기까지 했어. 손지검을 하려고 들었다니까? 내가 옆에서 어머님 안 막아드렸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라. 설아 씨, 보기보다 정말 무서운 여자야……!“수현은 시어머니를 보호하는 척 은근히 설아를 못된 며느리로 몰아갔다.옆에 있던 시어머니 역시 수현의 마음에 쏙 드는 변명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높였다."그래! 수현이 말이 맞다! 어디서 시어머니 멱살을 잡으려고 드는 걸 수현이가 겨우 떼어놓은 거야. 저것이 지금 너한테 불쌍한 척 쇼하는 거다, 서진아!“시어머니의 표독스러운 외침이 병실 안을 휘저었다.힘겹게 침대 위에 누워있는 설아와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악을 쓰는 두 여자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그만해, 두 사람 다. 당장 나가!!!“참다못한 서진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서진의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피눈물이 고일 듯 붉은 핏발이 솟구쳐 있었다."두 사람 지금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아?! 아이를 잃었어…… 못난 나 때문에, 나 같은 놈 만나서…… 두 번씩이나…… 우리 아이를……!“두 사람은 서진의 입에서 나온 '아이'와 '유산'이라는 단어에 잠시 놀란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설아가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계산에 없었던 변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박수현은 본능적으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순식간에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서진아…… 설마 지금 아이가 잘못된 걸 어머니랑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정말 너무하다.“수현은 억울함과 배신감으
서진의 뇌가 거대한 충격에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아이? 유산? 이설아가 임신이라니……."무슨…… 무슨 소리에요, 그게? 아이라니?현실을 부정하듯 간호사의 어깨를 부서질 듯 움켜잡는 서진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져 터졌다.간호사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손을 쳐내며, 붉은 피가 가득 묻은 차트를 내밀었다."환자분 얼굴 상태 못 보셨어요? 현재 산모님 상태로 보아 하복부에 가해진 강한 외상성 충격, 그리고 비정상적일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유산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아이는 이미 심장이 멎었어요. 지금은 자궁 내에 남아있는 잔류 조직을 제거하는 시술이 급선무입니다. 보호자 분, 정신 차리고 여기 서명하세요.“간호사가 억지로 쥐여준 펜과 수술 동의서에서 유독 비릿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서진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서명란에 '보호자 유서진' 세 자를 적어 내려가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마비된 듯 굳어, 잉크가 종이를 찢을 듯 지저분하게 번졌다. 자신의 손으로 다시 설아를 집으로 데려온 결과가 이거라니...서진은 응급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하게 생생한 기억의 조각들이 칼날이 되어 그의 온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어젯밤 설아는 평소와 다르게 강하게 애원하며 그를 거부했었다.하지만 서진은 거친 폭언과 행동으로 설아를 짓눌렀다.그녀가 온몸으로 지키려 했던 것은 제 몸이 아니라, 서진 자신은 존재조차 몰랐던 그들의 작은 아기였다.어젯밤 거칠게 설아를 대했던 자신의 잔인했던 손길과, 오늘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설아의 모습이 교차하며 서진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내가…… 내 손으로 직접 내 아이를 죽인 거나 다름없어……."서진은 붉게 충혈된 눈을 느리게 감았다. 손바닥에 딱딱하게 말라붙은 설아의 핏자국이 낙인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수술실 위의 불이 툭 꺼졌다. 문이 열리며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서진은 튕겨 나가듯 의사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이 피와 눈물로 얼룩진 채 터지고 부어올라 만신창이가 된 설아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손을 뻗었다. 구급차좀 불러 달라는 간절한 애원과 함께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수현의 발 끝에 겨우 닿았다.하지만 서진의 어머니는 그 처절한 몸부림조차 역겨운 연극이라 치부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바로 그 순간, 시어머니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 찰나를 수현은 놓치지 않았다. 수현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올라갔다. 그녀는 설아의 가냘픈 손가락 위로 자신의 발을 올려 몸무게를 실어 지그시 짓밟았다."아악……! 흑, 하아……!“차가운 대리석 바닥 쓰러져 있는 설아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손가락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손을 빼려 버둥거렸지만, 수현은 시어머니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게 가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발끝에 힘을 더 단단히 주었다.수현의 발 아래서 설아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터질 듯 시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어머니, 설아 씨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연기가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일부러 어머니 곤란하게 만들려고 끝까지 저러나 봐요.“수현은 입으로는 염려하는 척 위선을 떨면서도, 발밑으로는 설아의 고통을 고스란히 즐기고 있었다.설아의 의식이 점점 아득해져 가는 바로 그 순간, 도어락 해제음과 함께 현관의 문이 열렸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서진이었다. 그러나 집 안으로 들어선 서진이 마주한 것은 지옥 그 자체였다.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설아와,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어머니와 박수현.순간, 서
날카롭고 묵직한 마찰음이 거실에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간 설아는 얼얼하게 타오르는 뺨을 감싸 쥐었다.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손에 정통으로 맞은 탓에, 하얗던 뺨 위로 순식간에 붉고 푸른 멍이 피어올랐고 터진 입술 사이로는 붉은 피가 배어 나와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설아가 떨리는 눈으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자, 서진의 어머니는 오히려 기가 찬다는 듯 핏대를 세웠다."이게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들어?! 너 내가 그동안 분수에 넘치게 많이 봐줬지! 어디서 건방지게 집을 나가?! 서진이가 너한테 도대체 얼마나 더 잘해줘야 만족을 하겠다는 거야, 이 영악한 년이!“분노로 눈이 뒤집힌 시어머니의 손이 이번에는 설아의 머리채를 한 움큼 움켜잡았다. 도망칠 새도 없이 또 한 번 가차 없는 손바닥이 설아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짝-!!강한 충격에 설아는 중심을 잃고 거실 대리석 바닥 위로 위태롭게 쓰러졌다."하아…… 하아…….“서진의 어머니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내팽개쳐진 설아를 벌레 보듯 내려다보았다."참 나…… 사람을 이렇게까지 상스럽고 나쁘게 만들어? 넌 도대체 매사 이 모양이니?!“그 참혹한 폭력을 코앞에서 지켜보던 수현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설아의 모습을 감상하며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속이 다 시원하네, 이설아.‘
"어머니! 안녕하세요, 여기서 다 뵙네요?“"어머, 수현이 아니니? 얘, 여긴 어쩐 일이야? 너도 관리받으러 온 거야?“차가운 표정으로 들어서던 서진의 어머니는 수현을 발견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얼굴을 폈다."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우리 수현이. 안 그래도 요즘 통 연락이 없어서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서진의 어머니의 말에 수현이 일부러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말 못 할 고민 때문에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처연한 연기였다.언제나 완벽하던 수현의 그늘진 안색을 포착하자, 서진의 어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수현아, 무슨 일 있니?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그게……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괜히 말 꺼내서 어머니 걱정만 시켜드릴 것 같네요. 그냥 잊어주세요.“철저히 계산된 멈춤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말을 뚝 끊어내며 궁금증과 불안감을 극대화하는 수현의 여우 같은 화술에 서진의 어머니는 완전히 말려들었다."얘는! 시치미 떼지 말고 어서 말해봐. 답답하게 왜 그래? 괜찮으니까 말해봐, 어서.“수현은 마지못해 입을 여는 척, 세간의 비밀을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그게…… 사실 이런 말씀까지 드려도 되나 모르겠는데, 가슴이 너무 아파서요. 설아 씨가 지난 한 달 동안 집을 나가서 안 돌아왔었대요. 그것 때문에 서진이가 얼마나 속앓이를 하고 힘들어했는지 몰라요. 매일 밤낮으로 찾아 헤매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요.“"뭐? 뭐라고?! 집을 나가?! 감히 집을 나갔단 말이야?!“서진의 어머니의 고함이 VIP 대기실의 정적을 날카롭게 찢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그녀가 핏대를 세우며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다."아니, 배경도 없는 년 거둬서 재벌가 며느리로 앉혀놓고 해줄 만큼 다 해줬는데, 어디서 건방지게 집을 나가?! 뼈대도 없는 집안 출신이 결국 이렇게 티를 내는구나! 그래서, 지금 그 년 어디 있대?!“"그게…… 어제 돈이 떨어졌는지 결국 서진이 집으로
설아는 매일 서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렸다. 다림질한 셔츠를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간혹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서진은 설아를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설아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무심한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서진은 돌아누워 잠들었다. 설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이게 결혼인가.’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울면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일도 밥을 차리고, 셔츠를 다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버텼
결혼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서진의 부모는 끝까지 탐탁지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설아의 부모는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서진은 설아의 곁에 있었다. 식이 끝나고 설아의 손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잘 부탁해. 이설아“그 한마디가 설아에게는 충분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신혼 초, 서진은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었다.바쁜 와중에도 설아를 챙겼고, 서툴지만 함께 밥을 지어먹었고, 설아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설아는 그 시간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하지만 행복은 오
다음날설아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낯선 천장이었다.설아는 한동안 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통증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여기가… 어디지.’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공간이었다. 넓고 정돈된 방. 고급스러운 가구들.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조차 낯설었다.그리고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눈이 멈췄다.설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아니야. 아닐 거야.’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어젯밤 기억이 없었다. 친구들과
어색하게 시작된 사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서진은 자주 설아 앞에 나타났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을 지키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한결같이 차갑고 무뚝뚝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유서진이, 설아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먼저 말을 걸었고, 소소한 것들을 챙겼고, 무심한 듯 곁에 있었다.친구들이 먼저 눈치챘다."야, 설아야. 유서진 선배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에이, 설마.""설마가 사람 잡는다."설아는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건 설아도 인정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