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무서웠으면 끝내 제 손으로 손목을 그었을까. 혼자서 그 지옥 같은 공포를 견뎌냈을 유라의 절망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한국에 도착했더라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먼저 움직였더라면 유라가 저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외로운 사투를 벌이지는 않았을 텐데.
“미안해, 유라야…… 내가 미안해…….”
어깨를 잘게 떨며 소리 없이 오열하는 도진의 전신으로 처절한 후회와 지독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심장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고통 속에서, 도진은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수술실의 붉은 불빛이 툭 꺼졌다.
VIP 병실로 옮겨진 유라는 링거 줄과 수혈 팩을 달은 채 침대 위에
유라가 깊은 충격과 혼란에 빠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간호사의 안내로 초음파실 침대에 눕게 되었다.유라의 질 속으로 기구가 들어가며 이내 모니터 화면에 까만 음영이 떠올랐다. 의사가 화면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 중앙에 아주 조그맣고 동그란 아기집이 유라의 눈에 들어왔다.“여기 보이시죠? 아기집이 아주 예쁘고 건강하게 잘 자리 잡았네요. 다음 주에 오시면 자그마하게 뛰는 심장 소리도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화면 속 조그마한 점을 바라보는 순간, 유라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손에 쥔 작은 초음파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며 병원 문을 걸어 나오는 유라의 발걸음은 무거우면서도 위태로웠다. 제 몸속에 온전한 하나의 작은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지만, 가슴을 채운 경이로움도 잠시, 마음 한구석에서 짙은 불안감이 먹구름처럼 밀려들었다.‘도진 씨에게…… 이 사실을 말해도 될까?’한참 잘나가는 최고 위치의 탑스타, 김도진이 자신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과연 순수하게 기뻐해 줄 수 있을까.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내렸다. 도진의 가족들이 자신 같은 배경을 가진 여자를 반길 리 만무했고, 세간에서는 틀림없이 '아이를 빌미로 덜컥 임신해 탑스타의 발목을 잡은 몰염치한 여자'라며 더한 비난을 퍼부울게 뻔했다. 가뜩이나 자신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도진에게, 이 아이의 존재는 축복이 아니라 더 무거운 짐이자 족쇄가 될게 뻔했다.유라는 초음파 사진을 꼭 쥐었다가, 이내 혹여라도 누군가에게 들킬까 두려운 듯 후드티 주머니 깊숙이 숨겨 넣었다.자신처럼 부모 없이 외롭게 자란 아이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제 몸속에 찾아온 이 작은 생명만큼은 온전한 사랑 속에서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한참 잘나가는 탑스타인 도진에게 자신의 존재는 이미 커다란 오점이자 짐이었다. 여기에 임신 사실까지 알려진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라는 가
이도현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김도진이라는 존재를 완벽하게 짓밟고 끌어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도진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기세였다.그렇게 어느덧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뜨거웠던 대중들의 관심도 겉으로는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유라의 일상은 완전히 멈춰 서 버렸다. 기사가 나간 그날 이후, 유라는 도진의 집에서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유라의 행방을 샅샅이 뒤지는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이 도진의 집 앞에 24시간 진을 치고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유라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도진의 집 안에서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인터넷 화면을 가득 채운 자신의 과거 사진들과 쏟아지는 자극적인 악성 기사, 그리고 차마 눈으로 읽기조차 힘든 잔혹한 댓글들. 그것은 형체도 없이 유라의 목을 조르는 가장 잔인한 폭력과 같았다.매일 아침 습관처럼 언제쯤 이 지독한 기사들이 사그라들까 싶어 화면을 내려보던 유라가 찌릿하게 밀려오는 아랫배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며칠 전부터 아려오던 배였지만, 유라는 그저 생리할 때가 다 되었거나 지독한 스트레스 때문이라 여겼다.하지만 오늘따라 밑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서서히 강도를 더해가는 알싸한 통증에 유라의 이마에는 몽글몽글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걷기조차 힘든 통증에 스케줄을 소화하러 나간 도진에게 연락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도진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결국 혼자 병원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은 유라는 푹 눌러쓸 모자와 마스크를 챙겼다. 혹여라도 얼굴이 드러날까 커다란 후드티의 모자까지 겹쳐 쓰고, 조심스럽게 집을 나섰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내내 아랫배를 감싸 움켜쥔 유라의 손끝이 아릴 만큼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큰 길가로 나와 겨우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탄 유라는, 뒷좌석에 몸을 묻자마자 차마 참지 못한 야위어진 신음을 내뱉었다.“손님, 괜찮으세요? 어디 편찮으신가 본데……
툭, 하고 통화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서재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도진은 붙잡고 있던 휴대폰을 책상 위로 팽개치듯 내려놓고 유라를 쳐다봤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와 깊은 상처가 뒤섞여 잔뜩 불타오르고 있었다.“이유라, 이리 와 봐.”낮게 가라앉은, 그러나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명령조의 목소리였다. 유라는 도진의 싸늘한 모습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의 바로 앞에 섰다.도진은 유라의 가녀린 어깨를 부서질 듯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아?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도진의 다그침에 유라는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도진을 응시했다. 이미 밤새도록 수천 번도 더 삼켜냈던 말들이었다.“그게…… 저는 잃을 게 없지만, 도진 씨는 아니잖아요. 도진 씨뿐만 아니라 유태희 씨도 그렇고…… 도진 씨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이런 기사 하나 때문에 다 같이 무너지면 안 되잖아요.”“이유라!”“전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유라는 아무렇지 않은척 도진의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침에 기사 보니까…… 뭐, 틀린 말도 아니더라구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맞고, 불쌍한 것도 맞고……
유라는 아무 말 없이 도진의 넓은 품 안에서 눈을 꼭 감았다. 심장이 아릿하게 저려왔지만, 그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었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기사는 유라가 의도한 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인터넷 세상을 집어삼켰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 화면은 온통 붉고 강렬한 헤드라인으로 도배되어 있었다.[단독] 탑스타 김도진, 알고 보니 악질 ‘꽃뱀’에게 당했다? 충격적 전말[이슈] 김도진을 파멸로 몰고 간 여인은 누구? 정신 이상 증세까지 보인 이 모 씨[비하인드] 김도진, 동정심에 도와준 스토커에게 발목 잡혔나… 흉악한 폭로의 진실기사는 기획사의 발 빠른 대처가 맞물려 완벽한 소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도진은 하루 아침에 선의의 피해자로 둔갑해 있었다.거기에 대중들의 말동무를 자극할 가장 치명적인 미끼가 하나 더 던져졌다.[속보] 김도진의 진짜 연인은 유태희! ‘유태희도 이 모든 내막 알고 있었다’교묘하게 왜곡되었던 두 사람의 키스 사진은 ‘악질 꽃뱀에 시달리던 도진을 위로하던 연인 ’유태희‘ 라는 눈물겨운 프레임으로 재해석되었다.기사는 순식간에 김도진과 유태희의 눈물겹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불쌍한 꽃뱀을 어떻게든 조용히 감싸주려 했던 두 사람의 깊은 속내와 배려가 세상에 드러났다는 식이었다.여론은 무서운 속도로 반전되었다. 유태희의 악성 팬들조차 이번 기사를 보고는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유태희 진짜 다시 봤다. 저런 막장 스토커까지 품어주려고 했다니 천사가 따로 없네.’‘김도진도 피해자였어. 둘이 진짜 눈물겹다. 이 사랑 응원함.’댓글창은 두 사람을 향한 찬사와 동정론으로 가득 찼고, 유태희와 김도진의 이미지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라보다 먼저 잠에서 깬 도진은 습관처럼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피곤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포털 뉴스를 켠 도진의 눈동자가 순간
도진의 눈을 피해 유라를 따로 불러내 조용히 이야기 하던 매니저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분하고 현실적이었다.‘그럼 모든 화살은 유라 씨에게 향하겠지만, 그래도 유라 씨는 공인이 아니라 금방 잊힐 거예요. 하지만, 도진씨는 달라요. 이번 일로 무너지면 다신 복귀 못 해요. 유라 씨가 도진 씨를 정말로 생각한다면…… 무슨 뜻인지 아시죠?’그래, 자신은 어차피 이 화려한 세계의 이방인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악의에 찬 수군거림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질 먼지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김도진은 달랐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빛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아니요, 제가 지금 경찰서 갈게요.”유라가 도진의 옷소매를 다급하게 붙잡았다.“가서 다 이야기할게요. 기사에 나온 거 전부 다 이도현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도진 씨와 저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할게요.”유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제가…… 제가 도진 씨 너무 좋아해서 멋대로 쫓아다닌 거고, 도진 씨는 그냥 불쌍한 저를 동정심에 몇 번 만나준 것뿐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대중들도 믿어줄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이유라.”참지 못한 도진이 거칠게 유라의 말을 가로막았다.“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그만해. 너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은 하
도진은 거짓 기사가 번지기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반박 자료를 배포하고 수습 기사를 냈지만, 대중은 이미 자극적인 가십에 눈이 멀어 진실을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이때다 싶은 언론사들은 조회수를 더 늘리기 위해 더 악의적이고 자극적인 찌라시를 공장처럼 찍어냈고,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도진이 메인 모델로 활약하던 대기업 광고주들로부터 계약 해지와 위약금 청구 압박이 들어왔고, 현재 촬영 중인 대작 드라마의 제작사마저 하차 요구를 빗발치게 받으며 도진의 캐리어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탁!정적이 흐르는 소속사 대표실. 소속사 대표가 태블릿 PC를 탁자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대표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김도진, 너 대체 어쩌려고 이래? 반박 기사고 뭐고 대중들은 이제 들으려고도 안 해! 남의 여자 빼앗은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혔다고!”도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게 담배 연기를 뱉어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태연한 태도에 대표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지금 들어와 있는 광고 서너 개는 이미 브랜드 이미지 타격 운운하면서 소송 걸겠다고 난리야. 오늘 아침엔 드라마 제작사 대표한테 직접 전화 왔어. 이번 주 촬영 분량부터 네 분량 다 들어내고 대본 수정하겠단다. 사실상 퇴출이야, 임마!”“…….”“도진아, 제발 정신 좀 차려. 여자 하나 때문에 네가 평생 쌓아 올린 커리어를 다 시궁창에 쳐넣을 셈이야? 언론에 그냥 발표하자. 그 여자 정신 불안 증세 있고,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돈을 노리고 너한테 접근한거라고!”지금 상황에서는 유라를 철저히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불쌍한 여자’, 그리고 돈을 노리고 접근한 악질적인 ‘꽃뱀’으로 위장해야만 도진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간의 비난 화살을 온전히 유라 한 사람에게 돌려 희생양으로 삼는 것. 그것이 탑스타 김도진을 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단숨에 건져낼 유일한 탈출구였으니까.“도진아, 넌 알고 있잖아! 대중들은 자극적인 마녀사냥에 미쳐 있어. 그 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라는 로봇 청소기를 서둘러 가동시키고, 부엌에 널브러진 술병들을 정리했다. 이어 화장실 청소를 위해 뜨거운 물을 벽면에 세차게 뿌리던 중, 수압을 이기지 못한 샤워기 헤드가 제멋대로 돌아가며 유라의 온몸을 정면으로 덮쳤다.“아앗! 정말 되는 일이 없네, 진짜……!”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이유라는 젖어 축축해진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에 넣고, 대충 화장실 정리를 마무리했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티셔츠 끝단을 잡아 물기를 짜냈지만, 얇고 하얀 면 티셔츠는 이미 제 기능을 상
“신세 많았어요, 오빠. 연락드릴게요.”유라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적막한 집안에 무겁게 울렸다. 혼자 남은 도현은 유라가 누워 있던 온기가 남은 침대를 바라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금방 다시 오게 될 거야, 유라야. 내 품 말고는 네가 숨 쉴 곳 따윈 없을 테니까.”택시 안에서 유라는 떨리는 손으로 김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툭, 하고 전화가 연결됐다. 수화기 너머로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도진 씨? 죄송합니다! 제가 첫날부터 술을
[다시 현재 도현의 방]자책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유라를 내려다보던 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날 밤 김도진이 제게 뱉었던 소유욕 어린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유라를 그 지옥 같은 놈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도현은 침대 옆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앉으며 낮게 읊조렸다.“거기 그만두고 우리 병원으로 와. 너 일할 자리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순간 유라의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다. 시급 두 배의 꿈의 직장이라 생각했지만, 첫날부터 이런 꼴이 되었으니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
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라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도현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낚아채듯 품에 안아 올렸다. 바로 그때, 룸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이도현?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네.”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이는 김도진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지독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도진의 시선이 도현의 품에 무력하게 안겨 있는 유라에게로 향했다.“내 신입 매니저가 왜 거기 안겨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도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유로웠지만, 눈빛만큼은 사납게 빛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