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부인, 혼례라니…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저러다 또 곡기라도 끊으면…”
“대감, 대감께서는 어찌 저 아이하고만 있으면 천치가 되시는겁니까?” “천치라니! 거참, 말이 심하지 않소?”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열흘 동안 곡기를 끊은 아이 혈색이랑 품이 저리 좋답니까?” “아… 생각해 보니 그렇구려… 내가 또 당했나 보오… 이것 참…” 부인은 보이지 않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감께서는 언제까지 저 과년한 아이를 끼고 사시렵니까?” “그것은… 혼사자리가 마땅치 않아…” “예, 마음에 드는 혼처가 없으시겠지요. 그러다 이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제 딴에는 뭐라도 하려고 한 것이겠지요.” “무엇이 저 아이를 위한 일입니까? 세상은 여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큰소리 내지 말라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합니다. 그저… 있으라 합니다.” “…” “이런 세상에서 저 아이를 위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좋은 혼처를 찾아내는 것이 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연화가 그… 내조라는 걸 잘할 수 있겠습니까?” “해야지요. 그것이 안 사람의 일이니까요. 저는 신부수업을 시킬터이니, 대감께서는 좋은 혼처를 알아보시지요.” “부인말대로 하리다.” 부인은 잠시 자리에 멈춰 별채를 바라보았다. 늘 그곳에 있던 아이. 집에 활기를 주던 아이. 웃는 것이 어여쁜 아이. 이제는 그 아이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다가왔다.
시끄럽던 별채 안에 적막이 흘렀다.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는 연화에게 막둥어멈이 슬며시 다가왔다. “괜찮으셔요?” “후— 쉽지 않네?” 긴 한숨뒤에 이내, 하늘을 향해 빳빳이 고개를 들었다. 흐르던 눈물은 멈추었고 표정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멈, 가서 곶감이나 가져다줘. 울었더니 배고프네.” “아침에 드린 다식은 다 드셨어요? 한 되는 되었을 텐데?” “그거 뭐 얼마나 된다고. 방 안에서 하루종이 뭐 하겠어? 그거나 하나씩 집어 먹는 거지.” 막둥어멈은 혼자 씨-익 웃었다. 기가 죽어 방에 틀어박힐 줄 알았는데, 다행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알겠어요. 들어가 계셔요. 후딱 가져올게요.” “고마워.” 연화가 막둥어멈을 보며 앳된 미소를 지었다. 텅 빈 별채마당에 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랗고 맑은 하늘에 하얗고 예쁜 구름들이 자유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결국, 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일장춘몽 같던 그날이 떠올랐다. 벽보를 쥐고, 대문을 벗어나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가던 그때. 미칠 듯 날뛰던 심장과 그날의 공기, 냄새, 분위기… 기억들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다. 풋- 그리고 두 사내와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추억이 되었다. 그날 왜 그리도 날을 세웠을까? 생각해 보니 그날 했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까지 할 일은 아니었었는데… 그 나리들은 잘 지내시려나…?’
***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겸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비가 온몸을 적시고, 젖은 옷이 말라가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궁인들이 모두 지나다니는 대전 앞에 왕세자를 세워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정신이 나간 사이 왕은 흘깃 그를 보고도, 그저 지나쳐갔다. “아바마마!” 왕의 귀에 세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겸은 황급히 왕의 뒤를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 “아바마마. 소자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모두가 들은 그 소리를 왕은 듣지 않았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왕세자를 지나쳐 대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불고, 해가 눈을 쪼아대었어도 겸은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그의 부름을 기다렸다. 그 긴긴 시간의 기다림이 이제는 어떤 의미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얼마 후, 중전의 회임소식이 들려왔으니. 누구의 입김인지, 누구의 계략인지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된 모멸감과 분노에 겸은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오늘은 유난히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다. 이제는 바람이 반가울 정도록 날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과 햇살의 응원 덕분이었을까. 겸은 이 무력감을 벗어던지고 싶어졌다. 천천히 걸음을 떼고 영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하… 오늘도 그냥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를 바라보는 영도의 언행은 조심스러웠다.. 이겸은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기다리기만 한다면… 이 자리를 지킬 수는 없겠지.” 그는 문밖으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 발걸음에는 의지와 힘이 있었다. “오늘은 스승님을 찾아뵈어야겠다.”
한낮의 저잣거리에는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사람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장사꾼의 고함, 아이들의 웃음, 익숙한 삶의 소리가 오랜만에 이겸의 귀를 즐겁게 했다. “사람은 역시 해를 보고 나다녀야 돼.” “예?” 겸은 영도를 향해 짧게 웃고는 곧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영도야. 이 근처에 유명한 국밥집이 있다지 않았느냐? 한 그릇하고 갈까?” “저하… 아니, 도련님.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어서 서두르셔야 합니다.” 이겸은 아쉽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왕은 그를 점점 멀리했고, 그의 외출조차 꼬투리 잡히기 십상이니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참을 걷자, 크고 단정한 한옥들이 늘어선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이 근처인 듯합니다.” 영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겸은 지나가는 행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 홍양대감 댁이 어디인지 아시오?”
그녀를 슬쩍 본 홍양은 손에 든 술을 마저 입으로 가져다 댔다.그녀가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을 낚아챘다.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뭐 하는 짓이요? 부인!”“언제까지 이러실 작정입니까?”“……”홍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비밀이 버거워, 말없이 다시 술잔을 채웠다.“다녀오세요.”“?”그녀가 그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이게, 뭡니까?”“속량*을 해 달라, 관아에 요청을 했습니다”“!”“전하께서도 아시게 되었나 봅니다. 면천을 허락해 주셨습니다.”“부인!”그녀는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어조와 태도였다."제가 모르실 줄 알았습니까? "평소와 달라진 지아비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것이 여자문제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를 되돌려 놓아야 했다.그것이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하는 그녀의 역할이었으니.“데려 오세요. 양반이 첩을 거느리는 게 무에 그리 큰 흠이 라고, 몇 날 며칠을 이렇게 끙끙대신단 말입니다.”“……”“언제까지 폐인처럼 사실 생각이셨습니까?”그녀의 질책에도 그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면목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과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체면 때문이셨겠지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그녀는 고개 숙인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그녀에 대한 미안함도 잠시, 하령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하령아, 조금만 기다려 다오. 금방 너를 데리러 갈 것이다.”다음 날 이른 새벽, 홍양은 급히 함평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부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안채로 향했다.안방에서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부인이었다.강한 척, 담대한 척했지만, 그녀도 여인일 뿐이었다.홍양은 염치가 없어 차마, 문을 열지 못했다.그리고 문 밖
무력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그녀의 말대로 그녀와 했던 시간들은 일장춘몽으로 끝났단 말인가.이제는 그 이름을 부른다 한들, 대답해 줄 이도 웃어줄 이도 없다.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상실감에 정신이 메말라갔다.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데려 오고 싶은 상상을 수없이 반복했다.다른 놈의 품에 안겨 달뜬 숨을 내쉬는 모습과 그놈을 향해 웃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지독하게 괴로운 것이었다.그녀를 데려 올 용기는 없으면서도, 그녀를 잊지도 못했다. 천지같이.그녀가 없는 나주목은 적막했다. 외로운 타지생활은 더없이 지루하고 서글펐다.밤이면,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던 기억과, 자신을 바라보던 말간얼굴이 떠올라 잠에들지 못했다.너는, 잘 살고 있을까.머릿속을 지배해 버린 너를,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나는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인 놈이라,네 안위와 네 행복보다는 투기심에 들끓고 감당할 수 없는 내 감정에 화가 났다.그러니 부디, 잘 살라고. 나 같은 놈은 잊고 잘 살라고.너를 평생 잊지 않고 아파하는 것으로, 너를 보낸 형벌을 평생 받겠노라.그는 매일 밤, 그녀가 잠들었던 그 방에 누웠다. 그녀의 체취가 아직 남아 있었다.그녀가 없이 지난한 시간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양은 다시 한양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원자를 가르치라는 왕명이 내려왔기 때문이다.떠나는 그의 얼굴에 미련이 가득했다.이제 정말, 그녀와 영영 이별인가. 그녀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이곳과도 이별이리라.그녀와 나누지 못한 작별인사를 마음에 고이 접어 두었다.그저, 잘 살기를. 잘 살아내기
그녀 축축한 곳으로 몸을 밀어 넣자, 빠듯한 만족감이 덮쳐왔다.신음이 적나라하게 울리고, 방안은 열기로 가득 찼다.가녀린 몸을 비틀며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까워, 그의 입술로 그 소리를 삼켰다.자신의 아래에서 바들거리는 선연한 얼굴에 쉼 없이 입을 맞췄다.마침내, 그녀에 대한 욕망이 그녀 안을 꽉 채우고, 끈적한 흔적을 남겼다.“하-하-”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교차했다.그의 턱밑에서 그녀가 희미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순간, 감당하지 못할 후회가 밀려왔다.자신이 한 짓이, 그녀에게 어떤 불행과 고난을 안기게 될지 무서웠다.그녀를 지키고 싶었다.‘그래, 방도가 있을 거야. 찾아보자. 하령이를 내 것으로 만들 방법을.’서로 마주 보는 얼굴에 간지러움이 묻어난다.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었다.긴긴밤과 혹한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사랑은 점점 깊어졌고, 서로를 향한 마음은 견고해졌다.하령이 나갈 채비를 하자, 홍양이 다가와 물었다.“어딜 가려고?”“연꽃잎을 따 오려고요. 연잎밥을 해드릴게요. 향긋하고 맛있을 거예요.”수줍게 웃는 미소가 마치 연꽃처럼 발그레했다.“같아가자.”두 사람은 연못으로 향했다. 봄이 시작되자, 연꽃잎이 피어나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연꽃잎을 따, 차곡차곡 쌓고, 연잎을 부채질을 하고, 향기를 맡고, 세상이 둘 뿐인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보냈다.피어오르는 연꽃을 사이에 두고 입술을 맞췄다.두 사람은 연못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하령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한 봄 햇살이 따가웠다.“나리, 집안이 몰락했을 때도, 관비가 되었을 때도, 더는 제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요즘은 그마저도 다행히 아닐까 하는 이상한 마저 듭니다.”“정말 이상한 생각이로구나. 풉-”“나리를 만나서 그런 것이겠죠.”홍양은 하령의 머리에 자신의 이마를 비볐다.하지만, 그녀와 함께
허공에 흩날리듯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하늘을 향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자, 한숨이 흘러나왔다.“나리!”그리운 소리에 번뜩 떠진 눈이 소리를 좇자, 하령이 대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너!”“일찍 오셨네요. 빨래터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그녀는 빨갛게 언 손을 호호-불며 그에게 다가왔다.홍양은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가 빨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나리!”생경한 그의 행동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동공이 흔들렸다.“왜, 왜 이러세요. 놔, 놔주세요."당황스럽고 난처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그녀를, 홍양은 더욱 강하게 붙들어 잡았다.“추운데 무슨 빨래를 한다고.”“괘, 괜찮습니다. 익숙해져서…”“들어가자.”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언제 불을 피웠는지, 방안은 이미 뜨끈뜨끈했다.홍양은 아랫목에 덮인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앉혔다.“몸 좀 녹이거라.”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자리에 앉았다.둘 사이에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하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 이러세요. 냉정하게 밀어내실 때는 언제고. 혼란스럽습니다.”그녀의 말투에 서운함과 투정이 섞여 있었다.“네 신랑 될 사람을 만나고 왔다지?”“……”“어떴더냐? 맘에 들더냐? 기왕지사 혼인하는 거,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어?”그 삐뚤어진 말에, 반항하듯 대답했다.“예. 맘에 들었습니다. 듬직하고, 착하고. 잘생기고…”“잘생겼어? 그래서, 마음에 들어? 시집가고 싶어 졌어?”“……”“빨리 떠나고 싶어 졌느냐? 나만 여기 두고, 빨리 그놈에게 가고 싶어?”그는 화가 난 듯 그녀에게 쏘아붙이고,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몰아붙였다.“왜, 화를 내시나요?”정곡을 찔린 듯, 애써 아닌 척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아니, 착각하지 말거라. 그냥 말 잘 듣는 관비가 떠난다니, 아쉬울 뿐이니.”“……”앙-다문 입술이 움찔거리고, 턱이 바
다음날, 관아로 들어가는 홍양의 귀에 관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하령이가 시집을 간다고?”“그래. 옆 함평군에서 일하는 관노라던데?”“하긴, 좀 늦긴 했어. 빨리 치워야지. 안 그래도 눈독 들이는 놈들 많은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말이야.”“에효- 팔자도 참. 양반집 규수가, 노비랑 혼인을 하다니. 쯧.”순간, 홍양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졌다.하령이 시집을 간다니. 부질없이 일렁이는 마음이 성가셨다.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그는 이미 한양에 처자식이 있으며, 그녀는 국가의 자산이다.그녀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나? 그 뒷감당은 할 수 있나?그저 정도만 걸으며, 평탄하게 살고자 한 인생이었다.틀 안에 살고자 했던 그에게,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변수가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는 지금 조차도. 정말 성가셨다.그 말을 들은 이후, 그는 애써 그녀를 멀리하고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곁을 내어주지 않는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서글퍼 보이긴 했지만, 기분 탓일 테지.“나리. 오늘도 소인이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없다. 이제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서류는 거의 다 정리를 끝냈으니, 이제 밤새 일을 할 필요는 없다.”“네.”“할 말 없으면 나가보거라.”그녀는 대답 없이 그의 방 앞을 떠났다.시선은 서책에 향했고, 들리는 것은 여상한 그녀의 목소리일 뿐이니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후-”정신이 사나워, 글자가 눈에 들지 않았다.홍양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잡념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밤이 깊었지만, 도저히 잠이 들지 않아 홍양은 방을 나섰다.멀리, 하령의 방에서 등불이 새어 나왔다.‘아직, 안자나?’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거처로 다가갔다.다가갈수록 문틈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다.소리 내 울지 않던,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던 그녀가 울고
홍양은 저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훔쳐보고, 그녀가 궁금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한양에 두고 온, 부인과 아이들을 떠올렸다. 절대,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고고한 선비이기를 바랐다. “나리.” 그가 뒤를 돌아보자, 게슴츠레 눈을 뜬 하령이 곁으로 다가왔다. “송구합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이만, 소인은 가보겠습니다.” 홍양은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날, 온 마을을 뒤덮은 거센 눈발에 홍양은 관아에서 나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늘 자신을 맞아주던 하령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오는 게 어딜 간 게야?” 그는 구들장으로 가, 그녀와 자신의 방에 장작을 밀어 넣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향리가 나무를 지고 들어오며,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하령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까 마주쳤을 때, 빨래터에 간다고 했습니다.” 홍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방으로 들어갔다. 등불을 켜고, 서책을 폈다. 어쩐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세지는 바람과 눈발이 신경이 쓰여 자꾸만 밖을 내다봐야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방문을 넘었다. 눈발은 더 거세지고,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깊이까지 쌓이고 있었다. “왜 이리 안 오는 게야?” 초조한 발걸음이 눈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겼다. 그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설피를 짚신 위에 단단히 묶고, 도롱이를 걸친 뒤 삿갓을 눌러썼다. 한발 한발 걷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겨우 빨래터에 도착했지만, 하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불안함을 감지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빨래터 인근을 다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 산으로 오르며 하령의 이름을 불렀다. “하령아! 하령아!” 정신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그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령아!”
행인은 겸을 한번 훑어보더니, 곧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감님 댁이라면 이 마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겸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백성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신하라니, 역시 스승다웠다. 그 덕분에 수월하게 홍양의 대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홍양대감의 저택 앞. 담장 너머로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치솟은 용마루들이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쿵쿵쿵- “또 밥을 다- 남기셨네! 이러다 정말 죽는다니까요!” 문 앞의 밥상 앞에 앉아 막둥어멈이 큰 소리를 쳤다. 누군가가 꼭 들으라는 듯이. “안 먹을 테니 헛수고 말고 가져가!” 방 안쪽에서도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그들의 바람이 통하기라고 한 듯, 홍양이 연화의 방 앞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막둥어멈이 자리를 비켜서자, 홍양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풀었다. 덜컹-문을 잡아당겼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는 것이냐?” 당황한 홍
"이제 그만하시오. 내가 실언을 했다 하지 않았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연화는 순식간에 영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연화야!" 놀란 홍문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칼은 영도에게 겨눠지고 있었다. 영도는 재빠르게 다시 칼을 뽑아 그녀의 칼을 막아냈다. 챙! "받아주는 건 여기까지요. 이제 그만하시오. 더는 나도 참지 않겠소!" 영도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최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이다. 무슨 여자가 이리도 드센지… 그렇다고 해도 여인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그렇소." 겸 또한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여기 보다 높으신 분?” 턱으로 관리를 가리키며 묻는 연화를 향해 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네요. 여기! 여기 좀 보십시오." 연화는 꼬깃해진 벽보를 겸 앞에 들이밀었다. "여기 누. 구. 나. 무술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소만?" "헌데 왜 저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합니까?" 겸은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관찰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