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4 화. 황혼속으로.(마지막 화)날카로운 목소리에 다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방안은 피가 낭자했고, 폐비는 목에 칼을 꽂은 채 엄청난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연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희미하게 뜬 폐비와 시선이 마주쳤다.눈을 파르르 떨던 폐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입모양으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말을 연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고맙네.’힘겹게 말을 마친 폐비를 향해 연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침내 폐비의 고개가 툭- 연화의 품에 떨어졌다.온몸에 피를 묻힌 채, 궁으로 돌아온 그녀의 행색에 궁인들이 모두 아연실색했다.그녀가 궁으로 도착했다는 소식에, 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소름 끼치는 행색이었다.“연화야!”그러나 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어찌, 그곳에 혼자 간 것이야? 이제 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데!”“마무리 짓고 싶었습니다. 근데, 스스로 떠나셨습니다.”“그래, 그래.”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그의 따뜻한 손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그 업보를 다 어찌할는지요.”“그 정도 각오도 않고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이제, 정말 끝인가요?”“아니, 생은 길고 왕관의 무게는 무겁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어찌 풍파가 없겠느냐.”“그렇겠지요?”그의 턱이 연화의 어깨에서 들썩였다.“하지만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라면 견디지 못할 일들이 무엇이겠느냐.”연화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제는 소년티를 벗은 중후하고 인자한 그가, 큰 품에 그녀를 품고 있다.헤쳐나가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함께 전장을 돌고, 모진 궁궐의 암투와 풍파를 함께 거쳐 왔는데.그 모든 것이 서로에 대한 연심과 끈끈한 연대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와 함께라면 남은 삶은 축복이 될 것이다.연화는 겸의 손의 꽉 그러쥐었다.“전하, 피곤합니다. 자고 싶어요. 곁에 계셔주실 거죠?”그녀를 향한 애정 어린 눈빛이 스며들고, 그녀의 곤한 눈가를 쓰다듬는 손길은 퍽-부드러웠다.“그러고
Last Updated: 2026-07-20
Chapter: 133화. 악연의 끝.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언젠가는 세자가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이제는 궁 안 모든 이가 연화가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자신과 임금을 지키던 무사가 어머니가 되어 중전의 자리에 앉았다는 걸 세자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언제, 어떻게 이야기해야 세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늘 고민했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었다.늘 당차고 침착하던 연화도 이 순간만큼은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은 표정으로 선 연화를 향해, 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소자는 아직 어려서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세자, 그것은…”“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소자는 홍연 대장도, 지금의 어마마마도 정말 좋습니다.”세자의 속 깊은 말에 감동한 연화는 그를 살포시 안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그 작은 품에서 나오는 포용과 아량에 연화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세자를 속이거나 숨기려 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세자도 이 상황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예요.”“예, 어마마마. 그때가 되면 어마마마께서 직접 들려주세요.”“그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자.”“그리고, 오늘 소자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마마.”세자의 진심 어린 고마움에 연화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더욱 꼭 껴안았다.세자를 산에서 내려 보낸 후 연화는 일행들과 헤어져 곧장 폐비가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궁이 눈앞에 들어오자, 억눌렸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말에서 뛰어내리듯 내려, 대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연화를 발견한 나인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뉘, 뉘신지…”“폐비는 어디 계신가?”나인은 연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보였다.“마, 마마께서는…”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뒷걸음질 치는 나인을 지나쳐 안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Last Updated: 2026-07-19
Chapter: 132화. 동궁의 무사겁에 질린 듯한 세자의 목소리에, 연화는 세자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단호하게 말했다.“세자! 칼을 드세요.”얼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던 세자는 연화의 명령에 엉거주춤 허리에 있는 칼을 뽑아 들었다.하지만 세자가 칼을 뽑아 들었을 때는 이미 괴한들이 그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세자는 두 손으로 칼을 꽉 움켜쥔 채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연화는 가슴속에 감춰 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그리고 자신과 세자를 향해 달려드는 괴한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었다.그리고 또 다른 괴한이 달려들기 전에 좀 더 튼튼한 칼을 확보해야 했다.연화는 잽싸게 쓰러진 괴한의 칼을 빼들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연화가 싸움에 끼어들자, 상황은 짧은 시간 안에 정리되었다.연화는 자신이 생포한 괴한을 향해 물었다.“우두머리가 누구냐?”칼이 목에 닿아 있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연화는 주저 없이 그의 목을 베었다.다음 괴한에게 다가가 물었다.“우두머리가 누구냐?”동료가 자비 없이 죽임 당하는 것을 목격한 괴한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저기! 저 자입니다!”그가 가리킨 곳을 확인한 연화는, 이 괴한 역시 망설임 없이 목을 베어냈다.그리고 천천히 우두머리 쪽으로 다가갔다.“누가 시켜서 왔느냐?”“말할 거였으면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도 않았소. 어서 죽이시오!”연화는 우두머리의 눈을 바라보았다.“죽음을 각오한 눈이군.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 무언가 거래를 해둔 모양이지?”“……”“어차피 죽으면 대가를 받을 수 없을 테니, 식솔들을 상대로 거래했겠군.”“아니요! 나에겐 거둘 식솔도 없소! 그러니 어서 죽이시오!”괴한은 용맹하게 소리쳤지만, 연화는 그의 눈에 두려움이 어리기 시작한 것을 눈치챘다.연화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당연히 죽어야지. 세자와 중전을 시해하려 했으니, 그건 마땅한 벌이다. 다만, 어떻게 죽을 것인지가 중요하지.”우두머리의 눈빛과 표정은 이미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차 있었다.
Last Updated: 2026-07-18
Chapter: 131화. 평안생소하고도, 간지러운 그 단어에 연화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예, 전하.”“부인. 부인.”연화가 킥-킥-웃으며 대답했다.“예, 전하. 어찌 부르시기만 하십니까? 닳겠습니다.”“나 또한 믿기지가 않아서요. 정말 부인이, 내 연화가 맞는 것이오?”“예, 전하. 연화입니다. 이제 정말, 하나뿐인 전하의 여인이 되었습니다.”겸이 연화의 두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앞으로 많이 고될 것이오. 궐 안 살림을 맡는 일이니, 해야 할 일도 많을 것이오. 바쁘다고 나를 내치면 안 되오.”그녀를 바라보는 눈에 걱정과 애잔함이 느껴졌다.“그럴 리가요. 언제나 소첩에게 있어 첫 번째는 전하이시옵니다.”“이전처럼 사랑을 나누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예, 괜찮습니다.”겸이 입술을 굴리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어? 괜찮으면 안 되는데, 나만 서운한 것입니까?”연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아닙니다. 소첩도, 실은 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둘은 조용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연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하고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그녀와 전장을 누비며, 함께 했던 그 긴 시간들이 아련한 추억 속으로 남겨지고 있었다.“연화야, 너와 나는 어쩌면 운명이었나 보다.”“예, 운명입니다.”겸은 연화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행복이 밀려들었다.“아름답구나.”겸은 연화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이제 마음껏 그를 받아들였다.두 사람의 몸이 이불 위로 쓰러졌다. 서로를 향한 깊은 감정을 확인하며, 천천히 서로의 몸을 탐했다.문밖에서는 상궁이 목소리를 높여 무언가를 계속 외치고 있었지만, 겸과 연화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그들의 세상에는 오직 둘 뿐이었다.기품 있게 펄럭이던 곤룡포가 그의 손에 하찮게 내던져졌다.그녀를 향한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얼마나 마음껏 품에 안고 싶
Last Updated: 2026-07-17
Chapter: 130화. 혼례‘내가 정말 이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앞으로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하늘로 솟은 용마루를 보며, 눈을 살포시 감았다. 처음, 궁에 발을 딛던 그 어린 시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제 인생을 살고 싶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그러다 마음이 통하는 정인을 만났다.처음부터 제 뜻대로 흘러간 인생은 아니었다.그러나 열심히 살았고,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이었다.그러다 보니 결국, 이곳까지 발이 닿았다.“흠-”연화는 몸을 돌렸다. 저 시선이 닿는 끝에 그가 있다. 그토록 품에 안기고 싶던 그가.그것이면 되었다. 그를 위해 살고자 결심했던 삶이었으니.연화는 천천히 대청마루에 올라섰다.***연화의 그간 행적과 출생을 문제 삼아 연화의 중전 책봉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하지만 전 부원군이었던 좌의정의 강력한 추천과 왕의 확고한 의지를 바꿀 수 있는 대신들은 없었다.겸이 용상에 앉은 이후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백성들은 평안했고, 그들의 지지로 왕권은 더욱 강력해졌다.신조차 그를 지지하듯 몇 년 사이 기근이 줄고 전국에 풍년이 들었다.강력한 왕권을 쥐고 있는 왕을 반대하기란 쉽지 않았다.그의 강인함이 연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연화가 중궁전으로 향할 때, 겸은 동궁전으로 발길을 옮겼다.아들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어미 잃은 자식의 눈치까지 안 볼 수야 없었으니.어느 날, 세자가 겸에게 찾아와 말했다."빈 마마라면, 어마마마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겸은 세자의 손을 꼭 잡았다."어미 잃은 세자의 마음이 아직 아물지 않았겠지만, 왕후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는 없다.""예. 아바마마 알고 있습니다.""빈은 좋은 왕후이자 좋은 어머니가 될 것이다. 이 아비가 보장해."붉은 혼례복을 곱게 차려입은 연화는 천천히 궁궐의 행랑을 따라 걸었다.길을 따라 늘어선 붉은
Last Updated: 2026-07-16
Chapter: 129화. 중궁전세자가 자신을 알아본 건 아닌지 잠시 걱정을 하던 연화는,이내 생각을 지우고 세자에게 다가가 작은 두 손을 꼭 그러잡았다.담담한 표정뒤에 보이는 그 슬프고 공허한 눈빛이 안쓰러웠다.“세자저하, 잠은 잘 주무십니까? 힘들진 않으시고요?”“예.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연화는 물끄러미 세자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혀 세자와 눈을 맞추었다.“어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괜찮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의 죽음은 당연히 슬픈 일인데요. 울어도 괜찮습니다.”“하지만, 세자는 강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울지 않습니다.”“눈물을 흘리는 것이 약한 것입니까?”“그렇지 않습니까?”눈을 반짝이며 묻는 말간 얼굴이 예뻤다. 연화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눈물은 그저 감정을 표현할 뿐입니다.”“하지만 제가 눈물을 흘린다면 모두들 세자가 약해빠졌다고 비난할 겁니다.”“비난을 하는 자들이야말로 약해빠진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의 말을 거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강인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자께서 보시기에 주상 전하는 강인한 분이신가요? 약한 분이신가요?”“아바마마께서는 아주 강인한 분이십니다. 그런 아바마마를 본받을 것입니다.”“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무엇인데요?”연화는 세자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입을 세자의 귀 가까이로 가져갔다.세자가 간지러운지 어깨를 움츠렸다.“사실, 주상 전하께서는 눈물이 아주 많으시답니다.”“예?”세자의 놀란 표정을 본 연화가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쉿! 이건 비밀입니다.”연화는 세자의 한 손을 잡고 걸어갔다. “후원에 단풍이 아주 예쁘게 들었답니다. 같이 보러 가시겠어요?”세자가 고개를 그녀를 끄덕이며 따라갔다. 작은 보폭에 맞춰 걸음을 걸었다.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후원을 거닐고 있으니, 세자의 답답했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빈마마께서 이제 왕후가 되시는 건가요?”“예? 글쎄요. 아직 그것을 논하기엔 이른 듯합니다. 지금은 애도만 하기
Last Updated: 202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