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괴물의 담금질
그날 이후, 현준의 일상은 단순해졌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헬스장으로 향했다. '남규만'은 단순한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먹잇감을 압도하는 포식자의 날카로움을 지닌 인물. 현준은 전문 트레이너의 지도 아래, 지방을 걷어내고 뱀처럼 날렵하고 단단한 근육을 만드는 지옥 훈련에 돌입했다.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오후에는 연기 연습실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대사를 뱉는 연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남규만의 사소한 습관들을 몸에 새겼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걸음걸이, 상대를 관찰할 때 미세하게 기울어지는 고개의 각도, 그리고... 사람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소리 없는 미소.
밤에는 자신의 새로운 집에서, 수십 편의 범죄 다큐멘터리와 프로파일링 관련 서적들을
* 잠겨있던 문의 열쇠두 사람은 숲속의 작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조금 전의 일 때문인지, 거리가 한 뼘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윤세리는 방금 떠올랐던 그의 과거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동화 작가 이야기했을 때, 무슨 생각 했어요? 표정이... 아주 잠시, 먼 곳을 보는 것 같았는데."그녀의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현준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내면에서, 지난 12년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픈 기억을 외면하는 대신, 용기를 내어 그 문을 아주 조금, 열어보기로 결심했다.그는 윤세리의 눈을 바라보며,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저에게... 여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그것은 그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꺼내 보이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의 이야기였다."아주 어릴 때... 녀석이 잠이 안 온다고 칭얼거리면, 제가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곤 했습니다. 늑대 목소리, 돼지 목소리, 공주님 목소리... 흉내 내면서요. 그럼 그 녀석은... 제 목소리가 꼭 마법 같다면서... 제 품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는 트라우마를 고백하는 환자가 아니었다.그는 그저,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을, 소중한 사람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윤세리의 눈빛은, 그 어떤 때보다 깊고 따뜻했다. 그녀는 의사로서 그의 과거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의 추억에 조용히 동행해주고 있었다.* 새로운 지옥, 그리고 희망어느덧 해가 저물고, 두 사람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현준은 윤세리를 그녀의 차까지 바래다주었다. 어색했던 첫 만남과는 달리,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하고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현준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저와... 같이 걸어주셔서요.""천만에요."윤세리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하지만 기억해요. 이건 첫걸음일 뿐이에요. 앞으로 가
* 설렘이라는 낯선 감정다음 날 아침, 이현준은 난생처음으로 옷장 앞에서 30분을 넘게 서성였다. 어제 촬영장에서 입었던 편한 트레이닝복, 10년간 그의 교복이었던 낡은 면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김동진이 사준 몇 벌의 비싸고 단정한 옷들.그는 옷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몇 번이고 거울 앞에 서보았다. 너무 꾸민 것처럼 보이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너무 편하게 입고 나가면 성의 없어 보이지 않을까.'같이 걸어볼까요?'윤세리의 그 한마디는, 지난밤 내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의사의 제안이 아닌, 한 여자의 초대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배우 이현준이 아닌 남자 이현준으로서 그 초대에 응하러 가는 길이었다.수십 개의 배역을 넘나들며 단 한 번도 긴장해 본 적 없었던 그가, 지금은 고작 옷 한 벌 고르는 일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 낯선 감정의 이름이 '설렘'이라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될 터였다.결국 그가 고른 옷은, 가장 무난한 청바지와 흰 셔츠였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위태롭고 공허한 배우가 아니었다. 조금은 어색하고 수줍어 보이지만, 분명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를 가진, 30살의 남자였다.* 하이에나의 침묵같은 시각, 연예부 기자 강소영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밤새 정리한 취재 노트를 덮었다.노트에는 이현준의 끔찍했던 과거와, 그 상처가 어떻게 지금의 그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그녀의 분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특종'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너무나도 깊고 슬픈 통찰이었다."강 기자, 이현준 건은 어떻게 됐
강소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하지만... 동생은 구조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현준이의 손을 잡은 채로... 숨을 거뒀습니다. 현준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손안에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 죽어가는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겁니다."노교사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구조되었을 때, 현준이는 울지 않았습니다. 비명도 지르지 않았어요. 그저... 텅 빈 눈으로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죠. 그날 이후로, 현준이는 웃음과 울음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마치 자신의 모든 감정을, 죽은 동생과 함께 그 차가운 사고 현장에 남겨두고 온 아이처럼... 그렇게, 텅 빈 껍데기가 되어버렸습니다."이제야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그의 공허함, 그의 기이한 재능의 기원. 그것은 신의 선물이 아니었다. 끔찍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감정을 봉인해버린 한 소년의 처절한 자기 방어기제였던 것이다.강소영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특종 기사'로 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너무나도 아프고 신성한 기록이었다.* 제어된 광기, 완벽한 사냥다시, '아수라'의 촬영 현장.오늘의 촬영분은, 자신을 배신한 조 검사(조민극)를 남규만이 직접 처단하는 장면이었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가장 격렬하고 위험한 씬이었다. 이창욱 감독을 포함한 모든 스태프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카메라 뒤에서 숨을 죽였다."액션!"남규만은 도망치려는 조 검사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없었다. 오직, 아끼던 장난감이 고장 난 것을 보는 어린아이 같은, 차가운 실망감만이 어려 있었다."제가... 검사님을 얼마나 믿었는데."
*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웃음그날 밤, 현준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영화관을 찾았다. '아수라' 같은 무거운 영화가 아닌,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유치찬란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였다.처음에는 어색했다.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배우들의 연기와 카메라 워킹을 분석하고 있었다.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바나나 껍질을 밟고 아주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장면에서, 현준은 자신도 모르게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주 작고, 어색한 소리.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이현준'의 웃음소리였다.그는 자신의 웃음소리에 스스로가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아주 따뜻하고 낯선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이게... 웃는 거구나.'윤세리의 마지막 숙제. 그는 마침내, 자신을 웃게 만드는 것을 찾아냈다.영화가 끝나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던 그의 휴대폰이 '띠링'하고 울렸다. 김동진 실장에게서 온 문자였다.[휴식은 끝났습니다. 이틀 뒤, 촬영 재개합니다. 감독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준비됐습니까?]다시, 지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현준은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이전과는 다른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두려움. 하지만 그 두려움 옆에는, '돌아올 수 있다'는 작은 희망과, 돌아왔을 때 자신을 기다려줄 한 사람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고 있었다.* 왕의 귀환이현준이 다시 '아수라'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날, 현장의 공기
* '이현준'을 되찾는 연습"숙제를 내드릴게요."첫 상담이 끝날 무렵, 윤세리가 말했다."아주 간단해요. 하루에 한 번, '이현준'의 감각을 깨우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그녀가 내준 숙제는 연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하나, 매일 다른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그 맛과 향의 차이를 노트에 적어볼 것.둘, 버스를 타고 창밖 풍경을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세 가지를 그림으로 그려볼 것.셋, 서점에 가서 아무 책이나 한 권 골라, 소리 내어 한 페이지를 읽어볼 것.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이현준'을 웃게 만드는 것을 찾아볼 것."현준 씨는 지난 10년간, 그리고 최근 몇 달간 너무 많은 타인의 삶을 살아왔어요. 이제 다시 '이현준'의 삶으로 돌아오는 연습이 필요해요.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세요. 당신의 몸이, 당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걸 다시 기억하게 만들어 주세요.“다음 날부터, 현준은 숙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색했다.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 사람은 어떤 약점을 가졌을까' 분석하는 남규만의 시선이 튀어나왔다.하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윤세리의 말을 떠올리며 커피의 쓴맛과 우유의 부드러움에 집중하려 애썼다.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을 삐뚤빼뚤하게나마 노트에 그렸다. 서점에서 동화책을 골라, 낭독 부스에서 '아기 돼지 삼 형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처음에는 수치스러웠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피식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는 아주 조금씩, 세상과 다시
* 하이에나의 후각같은 시각, 연예부 기자 강소영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현준의 10년간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마침내 유의미한 '단서'를 발견했다.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였다. '품행이 방정하고 성실하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음.' 평범한 기록이었지만, 3학년 2학기 출결 상황에 길게 이어진 '무단결석' 기록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사유는 '가정 사유'라고만 적혀 있었다."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그녀는 날짜를 기억해두고, 당시의 지역 신문 기사들을 미친 듯이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귀퉁이에 실린 작은 교통사고 기사를 발견했다.빗길 교통사고로 일가족 3명 사망, 10대 아들만 기적적으로 생존...기사에는 피해자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 날짜와, 생존한 아들의 나이가 현준의 결석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했다."......이거였나."강소영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거대한 비밀의 첫 번째 조각을 맞춰낸 예감에 휩싸였다. 그가 가진 공허함, 타인과 섞이지 못하는 성격,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묘한 능력. 그 모든 것의 시작이, 어쩌면 이 끔찍한 사고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팀장님, 저 며칠 휴가 좀 쓰겠습니다. 이현준 씨 고향에...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깨어난 자의 공포이틀 뒤, 이현준은 자신의 오피스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약 기운 때문인지, 며칠을 내리 잔 듯 온몸이 무거웠다. 희미한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폐창고의 비릿한 냄새, 날카로운 송곳의 감촉, 그리고... 누군가의 공포에 질린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