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0년 차 먼지 같은 엑스트라, 압도적인 연기로 전 세계를 집어삼키다!" 대사 한 줄 없는 엑스트라로 10년을 버틴 이현준. 그에게는 어떤 배역이든 완벽하게 영혼을 동기화시키는 기이한 몰입의 재능이 있었다. 우연히 톱스타의 눈에 띄어 거장 감독의 신작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된 그는, 텅 빈 내면을 무기 삼아 소름 끼치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남규만'을 완벽하게 구현하며 단숨에 주연 자리를 꿰찬다. 자신을 향한 대중의 조롱과 선배 배우들의 텃세를 오직 '압도적인 연기력' 하나로 짓누르며 충무로의 괴물로 진화하는 이현준. 스크린 속 악마의 얼굴과 현실 속 따뜻한 인간미를 오가며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영화계의 중심으로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비상하는 천재 배우의 위대한 서사시.
View More프롤로그: 먼지 같은 존재
쪽잠으로 겨우 버틴 밤샘 촬영의 여파는 혹독했다. 이현준은 촬영장 구석, 스티로폼 박스를 간이 의자 삼아 앉아 차갑게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맹렬한 겨울바람이 허름한 갑옷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젠장, 추워 죽겠네. 오늘 안에 끝나긴 하는 건가?"
옆에 앉은 동료 엑스트라, 박 씨가 입김을 호호 불며 투덜거렸다. 올해로 15년 차 엑스트라인 그는 이 바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주인공의 감정선이 잡히지 않으면, 수백 명의 엑스트라는 그저 하염없이 배경처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오늘 전투 씬이 하이라이트라니, 쉽게 안 끝날 겁니다."
현준의 대답에 박 씨가 혀를 찼다.
"하이라이트는 무슨. 어차피 우리 얼굴은 1초도 안 나와. 그냥 멀리서 '와아!' 하고 달려가다 칼 맞고 쓰러지면 끝이지. 현준 씨, 자네도 이 짓 10년 넘었지? 이제 지겹지도 않나?"
지겹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10년.
스무 살, 연기에 대한 막연한 동경 하나로 서울에 상경한 지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늘 '엑스트라', '단역', '행인 1' 따위의 것들이었다. 수백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화면 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먼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준은 단 한 번도 연기를 가볍게 여긴 적이 없었다. 대사 한 줄 없는 역할이라도, 그는 그 인물이 되어 촬영장에 섰다. 시장을 지나는 행인 1이 될 때는,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잠시 장터 구경을 나온 소심한 가장을 상상했다. 전쟁터에서 죽어 나가는 병사 7이 될 때는, 고향에 두고 온 노모와 아이를 그리며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기이한 능력이 있었다. 어떤 역할이든 순식간에 몰입하고, 그 인물의 감정과 습관까지 완벽하게 체화하는 능력. 목소리 톤, 걸음걸이, 눈빛, 심지어 호흡까지 바꾸는 것은 그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덕분에 그는 어떤 현장에서든 '시키는 건 뭐든지 잘하는 엑스트라'로 통했다.
"자, 슬슬 준비들 합시다! A팀 촬영 재개합니다! 부상당한 병사 역할들, 미리 가서 자리 잡고 누워요!"
조감독의 고함 소리에 현준과 엑스트라들이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의 그의 역할은 주인공인 이순신 장군에게 적의 기습을 알리고 죽는 비장한 병사. 하지만 원래 대사가 있던 이 역할은 어젯밤 갑자기 주인공의 단독 샷으로 변경되었다. 결국 그는 대사 없이, 그저 멀리서 달려오다 화살에 맞고 쓰러지는 수많은 병사 중 한 명이 되었다.
"레디, 액션!"
감독의 외침과 함께 촬영장의 공기가 바뀌었다. 현준은 숨을 가다듬었다. 함성이 터져 나오고, 수십 명의 병사들이 칼을 치켜들고 돌격했다. 현준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그냥 달리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돌격이 아닌,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장군에게 한시라도 빨리 적의 위치를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의 발은 진흙탕을 박차고, 입에서는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저 멀리, 위엄 있게 서 있는 주인공 배우 '강지한'이 보였다. '장군님! 장군님께 알려야 해!' 속으로 외치며 달리던 그 순간, 약속된 신호에 맞춰 그의 가슴에 와이어로 연결된 가짜 화살이 '툭' 하고 박혔다.
현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보통의 엑스트라라면 그대로 '으악!'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화살을 맞은 고통에 찬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장군이 있는 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피를 토하는 시늉과 함께 결국 소리는 터져 나오지 못했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병사의 원통함, 그 자체였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카메라는 그의 처절한 죽음을 담지 않았다. 그저 웅장한 전투 씬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배경일 뿐이었다.
"컷! 오케이!"
감독의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현준은 감정을 추슬렀다. 흙바닥의 냉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그는 이현준이 아니라, 이름 모를 조선의 병사였으니까.
"어이, 거기. 방금 쓰러진 친구. 연기 좀 하네?"
무심코 던져진 목소리에 현준이 고개를 들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배우, 강지한이 자신을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 적 없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였다.
"감사합니다."
현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10년 동안 엑스트라 생활을 하면서 주연 배우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멋대로 두근거렸다.
기회는 우연처럼 찾아온다
점심시간, 현준은 다른 엑스트라들과 함께 배급된 도시락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때, 조감독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혹시 여기 엑스트라분들 중에, 사투리 연기 가능한 분 계세요? 특히 전라도 쪽!"
웅성거리던 엑스트라들 사이에서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욕만 먹고 잘릴 게 뻔했다. 게다가 대사가 있는 역할은 페이가 조금 더 높을지언정, 그만큼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따랐다.
"아, 정말 아무도 없어요? 큰일 났네. '덕보' 역할 맡은 단역 배우가 급체로 병원에 실려 갔는데!"
조감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덕보'는 오늘 촬영 분량에서 꽤 중요한 역할이었다. 왜군의 기습을 눈치채고, 이순신에게 직접 그 사실을 보고하는 아군 병사.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극도의 공포와 다급함을 표현해야 하는 감정 씬이었다.
"감독님 지금 불같이 화나셨는데... 이거 새로 사람 구하려면 최소 서너 시간은 걸릴 거고, 그럼 오늘 촬영은..."
조감독이 거의 울상이 되어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아까 현준의 연기를 눈여겨봤던 강지한이 매니저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그러자 강지한의 매니저가 조감독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기요, 아까 전투 씬에서 화살 맞고 쓰러졌던 친구분 있잖아요. 그분 연기 괜찮던데, 한번 시켜보는 건 어때요?"
조감독의 시선이 매니저의 손끝을 따라 현준에게 꽂혔다.
그는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보다가, 가만히 귀를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감겨있는 눈꺼풀을 뒤집어보기도 했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기계 장난감을 분해하기 전에 구조를 파악하는 엔지니어의 모습이었다.시간이 흘렀다. 감독은 '컷'을 외치지 않았다. 그는, 그리고 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은 숨을 죽인 채 이 어린 괴물이 벌이는 기이한 의식을 지켜볼 뿐이었다.마침내, 현준이 움직였다. 그는 고양이의 가슴팍에 메스를 가져다 댔다. 심장이 뛰어야 할 바로 그 위치에. 그는 칼날을 찌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대고 있을 뿐이었다.그때였다. 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져나갔다.그것은 기쁨의 미소가 아니었다. 슬픔의 미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오만하고도 순수한 희열의 미소였다. '이제 곧, 나는 이 생명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그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그 찰나의 순간."컷! 오케이! 오케이!"이창욱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모니터를 부서져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미친... 미친 새끼... 저건 연기가 아니야. 진짜야. 내가 진짜 괴물을 카메라에 담았어."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었던 마법에서 풀려나,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대사 한마디, 과격한 행동 하나 없이, 그들은 방금 스크린 역사상 가장 소름 끼치는 악마의 탄생을 목격했다.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름다워서, 오히려 잔혹함이 극대화되는 완벽한 장면이었다.* 왕들의 경의"이야... 저 친구, 보통 물건이
그는 냅킨을 뽑아 젖은 손을 우아하게 닦으며, 조민극을 향해 기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니... 앞으로는 잔을 넘치게 하는 실수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인내심도... 저 물잔처럼 언제나 넘칠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왕좌의 주인이 바뀌다정적.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배우 조민극은, 자신의 다음 대사가 무엇이었는지 새하얗게 잊어버린 채 그저 현준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연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괴물에게, 심장을 붙잡혔다.다른 배우들의 표정도 경악 그 자체였다. 그들은 더 이상 현준을 풋내기 신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주인공 '남규만'의 실체를 목격했다. 그들은 앞으로 스크린 속에서 저 괴물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할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했다.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이 모든 것을 즐겁게 지켜보던 안성현이었다."크흐흐...!"그는 참지 못하고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조민극을 향해 말했다."조 선배, 어때? 우리 주인공, 패가 좀 묵직하지? 뻥카는 아닌 것 같지 않아?"조민극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현준을 향해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분노, 당혹감, 그리고 마지막에는 배우로서의 순수한 경외감."...너... 너, 이 자식... 진짜구나."그의 거친 한마디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미안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잘... 부탁한다."
* 사자들의 우리대본 리딩이 열리는 청룡 필름 지하 1층, 대형 회의실의 공기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으로 팽팽했다. 길게 이어진 테이블에는 이미 대한민국 영화계를 움직이는 '왕'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주인공 '오기철'의 파트너인 베테랑 형사 역의 배우 오달수, 남규만의 비리를 돕는 부패한 검사 역의 조민극, 그리고 판을 뒤흔드는 미스터리한 인물을 연기할 여배우 김혜선까지. 이름 하나하나가 영화 한 편의 무게감을 갖는, 그야말로 '연기 사자'들의 우리였다.그들은 서로 익숙하게 안부를 물으며 웃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모두 회의실 입구를 향해 있었다. 오늘, 이 위대한 왕들의 영토에 겁 없이 발을 들인 이단아, '이현준'이 나타나는 날이기 때문이다.문이 열리고, 이현준이 김동진, 박성철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순간, 회의실을 채우고 있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수십 개의 날카로운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호기심, 경멸, 의심, 그리고 약간의 동정심까지. 복잡하게 뒤섞인 시선들이 창처럼 날아와 꽂혔다.하지만 이현준은 그 어떤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듯, 텅 빈 눈으로 자신의 이름표가 놓인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미세한 기계음이라도 들리는 듯한, 부자연스러운 정확성이 있었다.그의 자리는, 안성현의 바로 맞은편이었다. 왕과 왕이 마주 보는 자리. 하지만 지금 그는 왕이 아닌, 왕좌를 탐하는 반역자일 뿐이었다."허, 저 친구가 그 유명한 친구 구만."침묵을 깬 것은 부패 검사 역의 베테랑 배우, 조민극이었다. 그는 특유의 비꼬는 듯한 말투로 이창욱 감독에게 말을 건넸다."감독님, 안목이 참으로 대담하십니다. 이 중요한 판에, 어디서 이런 패를 다 가져오셨을까. 부디 그 패가... 조
"시끄러워.""네?""사자가 토끼를 사냥할 때, 일일이 숲속 동물들한테 허락받고 사냥하는 거 봤어?"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제작사 대표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암반과도 같았다."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멈추나. 그냥 짖게 내버려 둬. 대신, 기차가 얼마나 빠른지 곧 보여주면 되는 거야. 조감독한테 전해. 사흘 뒤, 전체 대본 리딩 진행한다고. 배우들 스케줄 전부 조정해서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시키라고 해. 이제 우리 괴물을... 동료 사냥개들한테도 선보일 시간이 됐으니."한편, 이번 사태의 또 다른 중심축인 국민 배우 안성현은 자신의 자택 서재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며 인터넷 기사를 보여주었다."선배님, 큰일 났습니다. '안성현의 커리어에 씻을 수 없는 오점', '신인 배우 띄워주기에 이용당하는 국민 배우' 같은 악의적인 기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계시면 안 됩니다."안성현은 기사 제목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오점이라..."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나는 말이야, 40년 동안 연기하면서 수많은 배우들을 만나봤어. 천재라고 불리는 놈, 노력파라고 불리는 놈,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놈... 하지만 그놈은 좀 달라. 그놈은 '진짜'야."그는 며칠 전, 자신의 숨통을 조여왔던 그 신인의 서늘한 눈빛을 떠올렸다."사람들이 그러지. 내 연기는 호랑이 같다고. 근데 말이야... 그놈은 호랑이 따위가 아니었어. 늪이야, 늪. 한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아주 깊고 차가운 늪. 그런 놈이랑 연기하는데 내 커리어에 오점이 남겠냐, 아니면 화룡점정이 찍히겠냐?"매니저는 안성현의 눈에서 번뜩이는, 즐거움과 흥분을 발견하고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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