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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3 10:51:53

나는 땅을 박찼다.

[광전사의 검술]이 내게 속삭였다. ‘목을 노려라. 심장을 찔러라. 더 잔인하게, 더 확실하게.’

놈이 남은 왼팔을 휘둘렀지만, 내 눈에는 너무나 느리게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여 피한 뒤, 그대로 대검을 놈의 명치에 꽂아 넣었다.

푸욱-!

"크르르… 컥."

이게 끝이 아니다. 마검 다인슬레프의 진정한 능력은 지금부터였다.

[특수 효과 발동: '폭혈(暴血)']

[검에 묻은 대상의 피를 폭발시킵니다.]

콰직! 펑!

놈의 몸속에 박힌 검신에서 붉은 섬광이 터졌다. 놈의 등 뒤로 거대한 구멍이 뚫리며 뼈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대한 몬스터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생기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튜토리얼 보스 '붉은 갈기 라이칸슬로프'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최초의 업적! '비각성자의 반란'을 달성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기뻐할 틈이 없었다.

[대여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아이템과 능력을 회수합니다.]

팟.

손에 쥐고 있던 묵직한 마검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몸을 지탱하던 초인적인 힘도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허억, 헉…."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생명력을 연료로 쓴 탓에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하지만 살아있었다.

내 심장이 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참한 시체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던 거대한 괴물의 사체.

내가 한 짓이다.

평생 F급 짐꾼으로 살다 죽을 줄 알았던 내가, S급 아이템의 힘을 빌려 이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띠링.

눈앞에 다시 금색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영수증 같은 모양새였다.

[대여 결제 명세서]

* 대여 품목: 마검 다인슬레프(복제품), 광전사의 검술(A)

* 이용 시간: 43초

* 청구 금액: 생명력 18% + 500 카르마(외상)

* 현재 잔여 카르마: -500 (채무 불이행 시 영혼 압류)

"…뭐? 영혼 압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생명력을 깎아 먹은 것도 모자라 빚까지 졌단다.

하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이 힘이다.

돈도, 빽도, 재능도 없는 내가 이 개 같은 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이 '대여 능력'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전사도, 마법사도, 암살자도. 심지어 신(神)의 힘조차 빌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때, 허공에서 기계적인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생존자를 확인했습니다.]

[축하합니다. 튜토리얼 '피의 연회'를 클리어하셨습니다.]

[10분 뒤, 1층 로비로 전송됩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보스 몬스터가 떨어뜨린 빛나는 전리품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왜 내게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알아내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빚은 갚아야 할 거 아니야."

나는 놈의 시체 옆에 떨어진 '마석'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마석의 감촉이 손바닥을 찔렀다.

이것으로 내 인생의 2막, '채권자'이자 '최강의 대여점 VIP'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

탑의 1층, '시작의 도시' 광장.

하얀 빛과 함께 전송된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구토감을 참아내야 했다.

"욱… 우욱…."

공간 이동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했다. 아니, 생명력을 갉아 먹힌 반동일지도 모른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야, 저거 봐! 튜토리얼 생존자다!"

"몰골 좀 보소. 피투성이네."

"이번 튜토리얼 난이도가 미쳤다던데, 용케 살았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헌터 복장을 한 이들, 상인들, 그리고 갓 튜토리얼을 깨고 나온 신입들.

나는 피 묻은 짐꾼 조끼를 벗어 던지고, 셔츠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거울은 없었지만, 내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일단 정산부터 해야지.'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상점]을 불렀다.

아까 급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내 능력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해야 했다.

[고객님, 환영합니다!]

[현재 등급: 브론즈 (승급 심사 필요)]

[보유 포인트(카르마): -500]

인터페이스가 묘하게 현대적이다. 마치 예전 세상에서 쓰던 쇼핑몰 앱과 비슷했다.

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장비 대여] / [스킬 대여] / [소모품 구매]

소모품은 '구매'라는 점이 특이했다. 포션 같은 건 빌려 쓰고 돌려줄 수 없으니 당연한 건가.

나는 [장비 대여] 탭을 눌러보았다.

화면 가득 아이템들이 쏟아졌다.

* [물의 정령왕의 눈물 (SS급)] - 대여료: 10,000 카르마 / 시간

* [투신(鬪神)의 건틀릿 (S급)] - 대여료: 5,000 카르마 / 시간

* [투명 망토 (B급)] - 대여료: 200 카르마 / 시간

목록을 훑어보던 내 눈이 가늘어졌다.

아이템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요구하는 대여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제약 사항이 보였다.

[주의 사항]

대여 시간 종료 후 아이템 미반납 시, 강제 회수 및 페널티(스탯 하락) 부과.

파손 시 수리비 100% 청구.

분실 시… 영혼을 저당 잡힐 수 있음.

"악덕 사채업자가 따로 없구만."

하지만 불만은 없다. 이 능력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까.

문제는 지금 내 상태창에 찍힌 '-500 카르마'였다.

이 빚을 갚지 않으면, 다음 전투 때 아이템을 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영혼 압류'라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카르마를 버는 방법은?'

시스템 창 한구석에 있는 [환전소]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환전소]

* 현실 재화(골드) → 카르마 : 교환비 10,000 : 1

* 마석 및 전리품 → 카르마 : 감정 후 책정

돈으로 카르마를 살 수 있다. 하지만 비율이 끔찍했다. 1 카르마를 얻으려면 1만 골드가 필요하다. 500 카르마를 갚으려면 500만 골드.

짐꾼 일당이 10만 골드니까, 50일을 꼬박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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