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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흐트러진 숨, 가까워진 현실

Author: 윤미주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9 17:29:06

눈을 뜬 건

한참 뒤였다.

희미한 새벽빛이 커튼 틈 사이로 번지고 있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옆을 돌아봤다.

강태준은 내 옆에서

등을 보인 채 잠들어 있었다.

흐트러진 셔츠.

가까운 체온.

그리고 바로 눈앞까지 남아 있는 어젯밤의 기억.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닿았던 입술.

흐트러졌던 숨.

셔츠 안으로 파고들던 뜨거운 손끝.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태준 목덜미 아래로 희미하게 남은 손톱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그대로 멎었다.

…내가 남긴 거였다.

귓가까지 뜨거워졌다.

나는 급하게 이불 끝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계속 도망가네.”

낮게 갈라진 목소리.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태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잠에서 막 깬 얼굴인데도,

눈빛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안 잤어?”

“방금 깼어.”

갈라진 낮은 목소리.

이상하게 더 위험했다.

태준 시선이 천천히 내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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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진짜 말 잘 듣네.”“오늘은.”오늘은.또 오늘은.우리는 계속 오늘만 이야기하고 있었다.내일은 모르니까.다음은 모르니까.지금 이 정도만,오늘 이 정도만.그렇게 겨우 이어가고 있었다.나는 지하철역 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태준은 따라오지 않았다.“나 갈게.”“응.”나는 몇 걸음 걷다가괜히 뒤돌아봤다.태준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왜 아직 보냐고,왜 그렇게 서 있냐고,왜 사람을 불편하게 하냐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하지만 싫지는 않았다.나는 아주 작게 손을 들었다.인사인지,그만 보라는 뜻인지,나도 모르겠다.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냥 고개만 끄덕였다.나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역까지 가는 길에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었다.아직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당연했다.나도 아직 역에 도착하지 않았다.그런데도 확인하고 싶었다.이런 내가 너무 낯설었다.조금만.나는 어젯밤 그 말을 보냈고,오늘 하루 종일 그 말 안에서 살았다.조금만 허락한 줄 알았는데,사실은 내가 조금씩 허락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하루.말해도 무너지지 않는 거리.싫지 않다고 인정해도당장 모든 걸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나는 그걸 오늘 처음 배운 것 같았다.지하철역 입구 앞에서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나는 바로 열지 않았다.몇 초.정말 몇 초만 참았다.그리고 열었다.[강태준]* 천천히 가.나는 그 문장을 보고작게 웃었다.조심히 가도 아니고,빨리 들어가도 아니고,왜 연락 안 하냐도 아니고.천천히 가.딱 그 정도.오늘의 우리에게 맞는 말.나는 답장을 썼다.[응.]보내려다 멈췄다.또 응.나는 지우고 다시 썼다.[너도 천천히 와.]전송.읽음.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

  • 미열주의   150화. 조금만, 허락된 마음 (6)

    퇴근 전,벽면 카피 최종 확인까지 끝났다.서브 카피는 그대로 확정됐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나는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봤다.처음 쓸 때는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힐 줄 몰랐다.그냥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현장 분위기와 맞고,메인 카피를 받쳐주고,너무 직접적이지 않아서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 안다.나는 자꾸 내 마음을 피해 쓰다가결국 내 마음이 들어간 문장을 쓰고 있었다.오래 머문 감각.다시 돌아온다.정말 싫다.정말.그런데 이제는 그 문장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팀장님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우진은 최종 파일명만 다시 확인하자고 했다.태준은 조금 뒤에서 벽을 보고 있었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정확히는 모른다.하지만 아마,나와 비슷한 문장 안에 있을 것 같았다.나는 그게 조금 무서웠다.그리고 조금 덜 외로웠다.⸻건물 밖으로 나오자하늘이 흐렸다.비가 올 것 같았지만아직 내리지는 않았다.퇴근 시간이라 길에는 사람이 많았다.우진은 먼저 택시를 잡아야 한다며 인사를 했고,팀장님은 다른 업체 담당자와 통화를 하며 먼저 걸어갔다.순식간에 입구 앞에는나와 태준만 남았다.또.이런 식으로 둘만 남는 순간이요즘 너무 자주 생긴다.정말 우연인지,내가 의식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태준은 차 키를 손에 들고 있었다.나는 지하철역 방향을 한 번 봤다.그가 태워다줄까 물을까 봐먼저 말했다.“나 지하철 타고 가.”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안 물어보네.”“오늘은 안 물어보려고.”“왜.”태준은 잠깐 나를 보았다.“네가 먼저 말할 수 있게.”나는 말문이 막혔다.아.또.이런 식이다.무리하게 다가오지 않고,그 자리에 서 있다가,내가 먼저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게 싫어야 하는데싫지가 않다.나는 시선을 피했다.“그런 거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니까.”“해보는 중이야.”“그건 또 괜찮네.”“다행이다.”태준이 낮게 말했다.

  • 미열주의   149화. 조금만, 허락된 마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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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열주의   148화. 조금만, 허락된 마음 (4)

    태준이 조용히 말했다.“어려운 거 알아.”그 말에 괜히 목이 잠겼다.예전의 태준은내가 어렵다는 걸 싫어했다.아니,싫어했다기보다 견디지 못했다.내가 복잡해질수록그는 더 단순한 답을 찾으려고 했다.잡으면 된다.말하면 된다.기다리면 된다.그런 식으로.그런데 지금의 태준은내가 어렵다는 걸 그냥 인정하고 있었다.그게 마음에 걸렸다.나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그럼 안 피곤해?”“피곤해.”예상 못 한 대답이었다.나는 고개를 들었다.태준은 나를 보고 있었다.“피곤하다고?”“응.”“근데 왜 해.”태준은 잠깐 생각했다.“안 하면 네가 더 피곤할 것 같아서.”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그 말이 너무 조용하게 들어왔다.안 하면 네가 더 피곤할 것 같아서.이 사람은 지금내가 지칠까 봐 자기가 피곤한 쪽을 고르고 있다.그게 다정해서,짜증났다.너무 늦게 다정해서.너무 늦게 배워서.그리고 지금이라도 배워서.나는 시선을 내렸다.“그런 말 하면 내가 뭐라고 해야 돼.”“몰라.”“너도 모른다는 말 자주 하네.”“요즘 진짜 몰라서.”나는 작게 웃었다.웃음이 났다.화가 나야 하는데웃음이 먼저 났다.“예전엔 다 아는 사람처럼 굴더니.”“그러게.”“진짜 짜증 났어.”“알아.”“그때는 몰랐잖아.”“응.”“지금 안다고 하면 더 짜증 나.”태준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그러고는 말했다.“그럼 지금은 안다고 말 안 할게.”나는 그를 봤다.“그건 또 왜 좀 괜찮냐.”말하고 나서 내가 먼저 당황했다.태준도 멈췄다.나는 바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일하자.”태준이 대답했다.“응.”나는 이번엔 뭐라고 하지 않았다.그 응이 조금 웃겼다.그리고 조금 편했다.⸻파일 수정이 끝날 때쯤,우진이 현장에 도착했다.그는 들어오자마자 벽면 카피를 확인했고,수정된 조명과 간격을 봤다.“좋네요.”우진이 말했다.“처음보다 훨씬 낫습니다.”나는 안도했다.“너무 어둡진 않아요?”“

  • 미열주의   147화. 조금만, 허락된 마음 (3)

    현장 확인은 생각보다 길어졌다.벽면 조명 밝기,패널 높이,동선 안내 사인,관람객이 처음 마주하는 시야.확인해야 할 게 많았다.나는 설치팀과 이야기를 나눴고,태준은 조금 떨어져서 도면을 확인했다.가끔 시선이 마주쳤다.그럴 때마다 태준은 먼저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나는 그걸 봤다.너무 잘 보였다.말하고 싶은데 참는 사람.다가오고 싶은데 멈추는 사람.그걸 보니 속이 이상했다.편해야 하는데,편하지만은 않았다.왜냐하면 태준이 참고 있다는 걸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게 나를 안심시키면서도조금 아프게 했다.내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나.아니다.그건 아니다.우리가 그렇게 만든 거다.그와 나,둘 다.나는 괜히 자료를 고쳐 잡았다.그때 태준이 가까이 다가왔다.아까보다 조금 가까웠다.그래도 너무 가깝지는 않았다.“이쪽 조명, 너무 세지 않아?”그가 물었다.나는 벽을 봤다.내가 쓴 서브 카피 위로 빛이 조금 날카롭게 떨어지고 있었다.“세네.”“낮출까?”“응. 이 문장은 너무 밝으면 이상해.”“왜.”“너무 설명하는 것 같아 보여.”태준은 내 말을 듣고 벽을 봤다.“설명하는 것.”“응.”“그럼 어느 쪽이 나아?”나는 잠깐 생각했다.“조금 덜 보이게.”“…”“근데 안 보이면 안 되고.”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어렵네.”“원래 그래.”“문장이?”나는 그를 봤다.“사람이.”말하고 나서또 후회가 왔다.왜 자꾸 이런 식으로 말이 나가는지 모르겠다.업무 얘기를 하다가갑자기 사람 얘기처럼 들리는 말.정확히는,태준과 나 얘기처럼 들리는 말.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냥 나를 보았다.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했지만결국 먼저 벽을 봤다.“조명 낮추자.”“응.”그가 설치팀에 손짓했다.조명이 조금 어두워졌다.문장은 훨씬 나아졌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두 문장이 벽 위에서 조금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낮게 말했다.“이제

  • 미열주의   146화. 조금만, 허락된 마음 (2)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안쪽은 아직 반쯤 어두웠다.정식 조명이 다 켜지지 않아공간 전체가 조금 푸르게 가라앉아 있었다.설치팀 사람들이 패널 위치를 맞추고 있었고,한쪽 벽에는 메인 카피가 걸려 있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나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그 아래에는 내가 쓴 서브 카피가 출력물로 붙어 있었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내 문장인데볼 때마다 남의 비밀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오래 머문 감각.다시 돌아온다.나는 정말일을 하고 있는 걸까.아니면 자꾸 내 마음을 벽에 붙이고 있는 걸까.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일찍 왔네.”태준이었다.나는 바로 돌아보지 못했다.먼저 심장이 반응했다.정말 짜증 난다.목소리 하나에 이렇게 되는 게.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태준은 검은 셔츠 위에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손에는 도면이 들려 있었고,머리는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밤에 잠을 잘 못 잤나.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그러고는 바로 지웠다.내가 왜 그걸 신경 쓰는데.“너도 일찍 왔네.”내 목소리는 다행히 멀쩡했다.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나는 그를 봤다.“또 응.”태준이 아주 작게 웃었다.“다른 말 생각 중이었어.”“뭔데.”“안녕.”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봤다.“그걸 생각해야 나와?”“요즘은 그래.”“진짜 이상해졌네.”“알아.”그 대답이 너무 태준 같아서나는 웃을 뻔했다.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벽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웃으면 너무 티 날 것 같았다.태준은 내 옆으로 다가오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다.딱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거리.그 거리가 보였다.너무 또렷하게.예전의 태준은 이런 거리를 몰랐다.가까워지고 싶으면 가까워졌고,내가 물러나면 따라왔다.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그런데 지금은다가오고 싶은 사람처럼 서 있으면서도멈춰 있었다.나는 그게 고맙기도 하고,이상하게 서운하기도 했다.정말 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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