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1 화

Author: 진해랑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3 08:00:18

발끝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차도영은 손님을 집으로 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이런 시간에는 더더욱.

가슴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쿵, 하고 떨어지는 대신, 바닥을 더듬듯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괜히 예민해지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서일 거다.

급한 업무가 생겨서 잠깐 들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뭐겠는가.

차도영은 일 때문에라면 밤중에도 사람을 부르는 남자였다. 감정을 이유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그는 그랬다.

나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안은 조용했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서재 쪽에서만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카펫 위를 밟는 소리마저 신경이 쓰였다.

서재 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이건 제가 정리해 둘게요.”

연지원의 목소리였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비서일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아주 잠깐. 정말 잠깐이었다.

“굳이 안 해도 돼.”

차도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담담하고 건조한 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

“아니에요.”

연지원이 말했다.

말끝이 살짝 늘어졌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거리감 없이.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저에게 맡기셔도 괜찮아요. 본부장님,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잖아요. 오늘은 이쯤하고 좀 쉬세요.”

그녀는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무 익숙하게.

“또 밤새우시면 내일 일정 전부 무너져요.”

“알겠어. 고마워.”

대답은 짧았지만, 여운이 남는 그 한마디가 오래 귓가에 남았다.

이대로 대화가 끝났나 싶은 찰나, 연지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표님은 혼자 다 떠안으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

차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도 나를 밀어냈다.

단순한 대표와 비서의 관계라고 보기에는, 너무 사적인 공기가 서재 안에 차 있었다.

위로와 걱정, 이해와 배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공간.

그 안에는 내가 없었다.

아내라는 이름도, 계약서에 적힌 권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서재 문 앞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건,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집의 안주인으로서, 아내로서.

그런데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들어가면 감정적이 된다.

괜히 일을 키운다.

확실한 상황도 아닌데, 의심부터 하는 사람이 된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이 이뤄졌다.

대표로서, 계약의 당사자로서, 이성적인 선택은 침묵이었다.

‘업무야. 비서로서 그 정도 챙기는 건 당연한 거야.’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돌아섰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등을 문에 기대고 서 있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숨만 쉬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서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들은 목소리와 말들이 계속 맴돌았다.

연지원의 낮은 웃음.

차도영의 침묵.

그 장면 속에서 나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연지원이 돌아간 것이다.

그날 밤, 차도영은 내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지원을 배웅한 후 나를 찾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침묵이 우리 결혼이 무너지기 시작한 가장 정확한 순간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변명하지 않았고, 설명하지 않았고, 나를 붙잡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오래 착각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된다고.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바람 핀 남편을 정리했다   154 화

    “개인적으로 챙겨온 일이라면…….”그녀가 천천히 되물었다.“식사나 약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그렇습니다.”“그것도 제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요.”“비서가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입니다.”도영은 단정적으로 대답했다.연지원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러나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알겠습니다.”예상보다 순순한 대답이었다.“본부장님께서 불편하셨다면 진작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어요.”도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혀졌다.“불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연지원은 그것을 놓치지

  • 바람 핀 남편을 정리했다   153 화

    수진이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폈다.“그래도 답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요?”창밖으로 여름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파리와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두 달 전 이곳을 떠날 때만 해도 돌아온 뒤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그저 멀리 가고 싶었다.차도영이 없는 곳으로.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매일같이 떠오르지 않는 곳으로.그러나 도망치듯 떠났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나는 돌아왔다.그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내 자리로.“정해진 기한까지 기다려요.”나는 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때까지도 답이 없으면 조정 신청하고요.”“대표님

  • 바람 핀 남편을 정리했다   152 화

    내가 그랑 팔레 본사 회의실에 들어서자, 이야기를 나누던 임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열두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답지 않게 재킷의 단추는 끝까지 잠겨 있었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정히 묶어둔 상태였다.다만 화장으로도 완전히 가리지 못한 눈 밑의 그늘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가장 먼저 나를 알아본 해외사업부 마케팅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놀란 얼굴들이었다.내가 오늘 귀국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수진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귀국 일

  • 바람 핀 남편을 정리했다   151 화

    오후 세 시가 되자 법무팀이 본부장실로 올라왔다.동남아 유통망 계약을 맡은 서정훈 법무팀장도 함께였다.서정훈은 도영이 노드 리테일을 세울 때부터 주요 계약을 함께 처리한 사람이었다.도영 앞에서도 듣기 좋은 말만 고르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현지 독점권 조항은 수정했습니다. 다만 최소 구매 수량은 상대 측에서 양보할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그 조건을 받아들이면 재고 부담이 커집니다.”“마케팅 비용 일부를 상대 측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다시 협상해보겠습니다.”“그렇게 진행하세요.”보고는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끝

  • 바람 핀 남편을 정리했다   150 화

    비행기가 인천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은 건,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바퀴가 지면에 닿는 순간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한국이었다.두 달 만에 돌아온 서울은 떠날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였다.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마지막까지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휴대전화를 켰다.꺼져 있던 화면 위로 메시지가 쏟아졌다.수진이 보낸 일정 보고.유온이 남긴 도착 확인 메시지.본사 임원들의 업무 연락과 파리 법인에서 넘어

  • 바람 핀 남편을 정리했다   149 화

    “세 시에 법무팀 보고가 있고, 다섯 시에는 광고대행사 미팅입니다.”“알고 있습니다.”“저녁 식사는...”“취소하세요.”도영의 대답은 짧았다.어쩐지 선을 긋는 듯한 말투였지만 연지원은 당황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그녀는 곧바로 태블릿에 일정을 수정했다.두 달 동안 연지원은 거의 모든 자리에 도영과 함께했다.임원회의와 외부 미팅은 물론이고, 업무상 동행이 필요하지 않은 식사 자리에도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그의 커피 취향과 식사 시간, 피로할 때 먹는 약까지 먼저 챙겼다.도영은 그 모든 것을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했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