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이튿날, 어전 서재.황제가 은밀히 고준형을 불러들였다. 황제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대의 상소문은 짐이 보았다. 허나 짐은 못 본 것으로 해 줄 수도 있다.”고준형이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폐하, 신은 이미 처자식과 남은 생을 함께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신은 타고나기를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조정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신의 신분은 폐하께서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세워 주신다 한들, 사람들의 의심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하여 신은 폐하를 곤란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황제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고준형, 짐은 진심을 듣고 싶구나.”고준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신은 그저 한낱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벼슬살이에 진저리가 나, 사랑하는 이와 서로 의지하며 살고자 할 따름입니다. 당초 강씨 가문의 사건만 아니었다면, 신 또한 두 번째로 벼슬길에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양나라가 안정되었으니, 신도 공을 이루고 물러날 때가 되었습니다.”황제가 한 손을 상소문 위에 얹은 채, 고준형을 찬찬히 살폈다.“그러니 그대가 데릴사위로 들어갈 곳은 유씨 가문이지 송씨 가문이 아니라는 말이겠지.”고준형이 고개를 숙였다.“그러합니다.”황제의 눈빛이 한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딸아이의 이름은 지었느냐?”고준형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아이의 이름은 송서아라 합니다.”황제가 짐짓 말을 꺼냈다.“송서아라. 보아하니 외조부의 뜻을 잇게 할 셈이로구나.”고준형은 이를 반박하지 않았다.“송씨 가문에 뒤를 이을 이가 없으면 남방성은 우두머리를 잃어 반드시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다른 나라가 그 틈을 노려 파고들기 십상입니다. 이는 첫째, 하늘에 계신 송청명 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함이고, 둘째, 남방성의 군심을 안정시키기 위함입니다. 남방성의 장병들은 비록 멀리 있으나, 황성의 일 또한 익히 알고 있습니다.”황제의 손이 옥새를 어루만졌다.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
충용 후작은 손이 데는 줄도 모르고 화로를 마구 헤집었다.그의 두 눈에는 오직 성지를 향한 광기만이 어려 있었다.하지만 고준형은 진작 손을 써 둔 터였다. 성지에 기름을 끼얹어 둔 탓에, 도무지 건져 낼 수가 없었다.충용 후작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화로를 걷어차 엎으며, 추한 민낯을 남김없이 드러냈다.“성지! 내 성지가…… 아! 타지 마라! 타지 말란 말이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소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참으로 제 잇속밖에 모르는 위인이었다.어쩐지 노부인이 성지를 그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했다.고준형이 유소영의 손을 잡았다.“가지.”유소영 역시 후작부에 남아 충용 후작의 연극을 더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준형과 함께 자리를 떴다. 등 뒤 빈소에서는, 충용 후작이 여전히 미친 듯이 불을 끄며 성지를 건져 내려 애쓰고 있었다.화로를 걷어차 엎은 것은 고인에 대한 불경이었다.소리를 듣고 달려온 하객들은 그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가, 그 추한 몰골을 보고는 하나같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자식이 불효하는 일이야 드문 일도 아니었다.그러나 충용 후작처럼 연기에 능한 자는 실로 보기 드물었다.……노부인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신왕 사건도 결말이 났다.신왕이 궁을 압박하여 반역을 꾀한 일과 송씨, 염씨 두 가문을 모함한 일은 죄증이 명백했다. 그 밖에도 한패인 장여훈까지 연루되어 있었다.황제는 크게 노하여 장여훈을 붙잡으라 명했다.장씨 가문의 병권 또한 당분간 태자가 거두어 관장하게 되었다.신왕은 양나라 율례에 따라 처결될 것이었다.여전히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그를 구하려는 잔당들에게 남은 길은, 옥을 습격해 그를 빼내는 것뿐이었다.그러나 황제가 사람을 풀어 삼엄하게 지키게 한 탓에, 그들에게는 손톱만 한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신왕의 처형은 형장이 아니라 감옥 안에서 이루어졌다.옥중에서 누군가 몰래 사람을 바꿔치기할까 염려한 황제는, 형을 집행하는 날 몸소 감옥에 나아가 그 과정을 지켜보았
충용 후작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짙은 무력감을 애써 누르고 있는 듯했다.“폐하의 뜻은 이러합니다. 제게는 군사를 이끌 재주도 없고 뒤를 이을 후손도 없으니, 병권을 잠시 넘겨받는다 한들 별 쓸모가 없을 터. 차라리 조정에 반납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지요.”노부인은 그만한 연배에 이르도록 온갖 음모와 술수를 다 겪어 온 사람이었다.그녀는 황제의 속내를 대번에 헤아렸다.설령 제 아들에게 군사를 이끌 재주가 있었다 해도, 염씨 가문의 병권이 그의 손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이 병권은 눈앞에 놓인 탐스러운 먹잇감이 아니라, 도리어 목숨을 재촉하는 화근이었다. “내가 먼저 나서서 폐하께 염씨 가문의 병권을 조정에 반납하겠다고 청하마.”충용 후작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예.”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폐하께서 약조하시기를, 병권을 조정에 반납하기만 하면 후작부의 봉지를 넓혀 주시겠다고……”노부인이 손을 내저었다.“그런 것은 이제 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죽음을 앞둔 그녀에게 그런 것은 모두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충용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노부인은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속 깊이 서글픔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염씨 가문에는 더는 남은 이가 없고, 그녀 역시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그러니 이 병권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이미 정해진 운명이나 다름없었다.그녀는 염씨 가문의 역대 조상들을 볼 낯이 없었다……그날.노부인이 입궁했다.“폐하, 염씨 가문의 결백이 밝혀진 것은 모두 폐하께서 현명하게 살피시어 신왕의 죄를 밝혀내 주신 덕분입니다! 허나 소인은 이미 늙었고, 소인의 아들 또한 변변치 못하여 후작부의 일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런 자가 어찌 수만 장병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병약한 황제의 두 눈이 노부인을 가만히 응시했다.그는 뻔히 알면서도 짐짓 물었다.“그래, 그대 뜻은 어떠한가?”노부인이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성문 밖.말에 오른 유설요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호위 현청이 그 뒤를 바짝 따르다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큰아씨,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유설요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선나라에 아직 돌봐야 할 장사가 있으니, 우선 선나라로 간다.”현청은 그저 뒤를 따를 뿐, 딱히 만류할 말도 없었다.유설요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선나라로 가기 싫거든, 여기서 돌아가도 좋다.”현청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아닙니다. 저는 큰아씨를 따르겠습니다!”큰아씨가 어디로 가든, 그는 기꺼이 함께할 생각이었다.다만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모처럼 가족과 한자리에 모였건만, 큰아씨는 어찌하여 이토록 서둘러 떠나려 하는 것일까.……유소영이 제 방으로 돌아오자, 딸 곁에 장명쇄 하나가 놓여 있었다.아민이 설명했다.“큰아씨께서 아기씨를 보러 오셨어요. 이 선물도 놓고 가셨고요.”유소영의 눈빛에 아련한 아쉬움이 스쳤다.언니는 예나 지금이나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아민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어렸다.“아씨, 큰아씨께서 찾아내신 증거가 있으니, 이제 송씨 가문의 사건도 곧 만천하에 밝혀지지 않겠어요?”사실 송씨 가문은 진작 명예를 회복하고 결백을 인정받은 뒤였다. 다만 송씨 가문을 모함한 자가 신왕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이 사건에는 무고한 염씨 가문, 곧 노부인의 친정 사람들까지 얽혀 있었다.만약 진상이 온전히 드러난다면, 송씨와 염씨 두 가문 모두 결백을 되찾게 될 터였다.이 순간, 유소영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오랜 세월 좇아 온 진상이 이제 곧 그 끝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무더운 여름이 서서히 지나갔다. 그동안에도 신왕에 대한 심리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유소영은 이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고준형이 그녀를 다독였다.“확고한 증거가 있으니 신왕은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오. 심리가 이토록 더딘 것은 하나는 사건 처리 절차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폐하께서 여러모로 마음
신왕은 고개를 숙인 채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웃음을 흘렸다.그는 어깨가 들썩일 만큼 웃어 댔다.옥사 밖에 선 황제는 차분하고 태연했다.“짐이 네게 온전한 시신만은 남겨 줄 수 있다.”신왕이 홱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음험한 눈빛으로 사납게 황제를 노려보았다.“네 뜻대로 되게 두지는 않겠다.”황제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힘없이 기침을 했다.이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또 애달프다는 듯 신왕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짐이 기회를 주었건만 네가 마다하는구나. 그래도 짐은 얼마든지 뜻을 이룰 수 있다. 다만 그리되면 네 말로가 그리 좋지는 못할 것이야. 게다가 네 처자식까지 하나같이 네 고집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겠지.”신왕이 서늘하게 웃었다.“증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정말 내게 죄를 씌울 수 있을 것 같으냐? 세간의 입을 막으려 해도 그럴듯한 명분은 있어야 할 텐데.”황제의 눈에는 오직 살기만이 어려 있었다.“이것이 네 선택이란 말이지.”……유씨 저택.유소영은 언니 유설요의 서신을 받았다. 신왕이 송씨와 염씨 두 가문에 누명을 씌운 사건에 대해, 유설요가 선나라에서 몇 가지 증거를 찾아냈다는 내용이었다.그녀는 지금 양나라로 오는 길이었다.유소영은 조심스러운 마음에 사람을 보내 마중하도록 했다.조정 안팎에는 아직도 신왕의 앞잡이들이 숨어 있었다. 그자들은 어떻게든 신왕을 구해 낼 방도를 찾고 있었으니, 신왕에게 불리한 죄증이 나타나는 것을 결코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한편, 유설요는 말을 재촉해 달렸다.가는 도중, 그녀는 아니나 다를까 매복을 만났다.다행히 유소영이 마중 보내 둔 이들이 때맞춰 당도한 덕에, 자객들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날은 무더웠다. 유설요는 가벼운 상처를 입은 터라 곧장 강가에 앉아 팔의 상처를 씻어 냈다.피가 강물에 스며들어 이내 옅게 흩어졌다.그녀는 채비를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산길로 간다!”……칠월 초.유설요가 양나라 황성에 도착했다.유 대감은 그녀를 보고 몹시 감격했
쓰러진 담은 누구나 밀어젖히는 법이니, 하물며 신왕이라는 저 굳건한 성벽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사람들은 그 담을 밀어 넘어뜨린 뒤, 그 주검을 짓밟고 서서 저마다 한몫씩 챙기려 들었다.무장들이 특히 그러했다.그들은 진작부터 신왕이 쥔 병권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그토록 커다란 고깃덩이는 누구 한 사람의 손에 떨어지든, 탐하다가는 배가 터져 죽을 만한 것이었다.장여훈은 희색을 감추지 못한 채 제 발로 유소영을 찾아왔다.그는 당초 유소영이 아이를 낳는 틈을 타 그녀를 죽이고 아이만 남기려 했던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얘야,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네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살핀 게로구나.” 유소영이 옅게 웃어 보였다. 그 눈빛에는 서늘한 냉담함이 서려 있었다.“장 장군,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려워 말고 바로 하시지요.”장여훈이 껄껄 웃었다.“좋다! 그럼 나도 터놓고 말하지! 지난번 우리가 계약서를 쓰고 손을 잡아 신왕을 상대하기로 했을 때, 네가 약조하지 않았느냐. 신왕의 병권을……”유소영이 그의 말을 잘랐다.“장 장군, 오해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신왕의 병권을 누구에게 나눌지 정할 만한 권한이 없습니다.”장여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우리 몇 가문만 한마음으로 뭉치면, 신왕의 병권쯤은 얼마든지 나눠 가질 수 있다.”“너도 알다시피, 이 양나라의 병권은 본디 다섯 가문의 것이어야 마땅해.”“다른 자들이야 우리 밑에서 밥술이나 얻어먹으면 그만이고.”“이번에 신왕이 궁을 위협하는 난리를 일으켜 하마터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뻔했으니, 이를 빌미로 폐하께 모든 병권을 다섯 가문에 돌려 달라 청할 수 있다. 네 생각은 어떠냐?”유소영은 매우 담담했다.“장 장군께서는 아직 소식을 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신왕에게 남은 병권은 이제 얼마 없습니다.”장여훈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말이냐?”“오만이 넘는 양주군이 모조리 죽었으니까요.”장여훈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너, 너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