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술집 문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공기가 한 번 바뀌었다.그 변화는 아주 미세했지만 분명했다.시선이 한 방향으로 기울었다가,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흩어졌다.이수는 그 흐름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어깨를 펴고,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태훈은 이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전날과는 달랐다.오늘은 웃고 있지 않았다.그 대신, 눈이 조금 더 가늘어져 있었다.‘확인.’그 눈은 상대를 재는 눈이었다.이 여자가 어제의 우연인지,아니면 오늘도 반복되는 선택인지.이수는 바 쪽 자리에 앉았다.조용히 술을 주문했다.태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또 오셨네요.”목소리는 가볍게 올렸지만, 속은 가볍지 않았다.“네.”“생각 정리 잘 됐어요?”“아직이요.”짧은 대답. 여지를 남기는 말투.태훈은 옆자리에 앉았다.거리감은 전날보다 가까웠다.“저는요,”그가 잔을 들며 말했다.“어제 좀 기분이 이상했어요.”“왜요.”“그냥.”그는 웃었다.“자꾸 신경 쓰여서.”그 말은 돌려 말한 표현이었다.‘관심.’이수는 눈을 잠깐 들어 그를 봤다.“저도요.”태훈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확신이 생기는 순간이었다.“어제… 남편 없다고 했죠?”그가 물었다.이수는 고개를 기울였다.“왜요.”“그냥.”“확인하는 거예요?”태훈은 웃었다.“그럴 수도 있죠.”이수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확인하고 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그 질문은 날카로웠다.태훈은 잠깐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식의 응수에 익숙하지 않았다.대개는 웃거나 피하거나, 부드럽게 넘어가는 여자들이 많았다.“달라질 수도 있죠.”“뭐가.”“가능성이.”이수는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렸다.“가능성.”“네.”“위험한 단어네요.”태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위험한 건 싫어요?”“상황에 따라.”그는 조금 더 가까이 기울었다.“전 위험한 거 싫어해요.”이수는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그럼 왜 여기 와요.”한 박자 늦게, 태훈의 웃음이 나왔다.“여긴
술은 늘 핑계였다.사람이 본모습을 숨기고 싶을 때 가장 쉽게 꺼내 드는 변명.기억이 안 난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미안하다.하지만 미정의 남편은 그 말을 너무 능숙하게 반복해왔다.이수는 그 남자의 이름을 천천히 입 안에서 굴렸다.박태훈.밖에서는 자상한 남편.회사에서는 유능한 팀장.술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그리고 집에서는 손이 먼저 나가는 남자.“술만 마시면 달라진대요.”미정의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아 있었다.술만 마시면. 그 말이 이수를 자극했다.‘술이 아니라, 허용이겠지.’이수는 미용실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천천히 묶었다.오늘은 일부러 차분하게. 튀지 않게.누가 봐도 동네에 사는 평범한 여자처럼.하빈은 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오늘 바로 가?”“응.”“계획은.”“술자리.”짧은 단어 하나로 정리되는 위험. 하빈의 눈이 굳었다.“혼자는 아니지.”“아니.”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근처에 있을 거잖아.”하빈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이수.”“응.”“도발은 하지 마.”그 말은 부탁에 가까웠다.이수는 작게 웃었다.“도발 안 해도, 저런 사람은 스스로 넘어와.”그 말이 더 불안했다.저녁이 되자 비는 잦아들었고, 공기는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태훈이 자주 간다는 단골 술집은 회사 근처 골목 안쪽에 있었다.크지 않은 공간,적당히 시끄러운 음악,적당히 밝은 조명.이수는 안으로 들어서기 전, 한 번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안쪽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태훈은 중앙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잔을 들고 있었고, 웃고 있었다.그 웃음은 집에서의 얼굴과 전혀 다를 것 같지 않았다.이수는 바 쪽에 앉았다.메뉴판을 펼치고, 술을 주문했다.소주 한 병.그는 그녀를 아직 보지 못했다.이수는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이런 남자들은 먼저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게 되는 사람’을 선택한다.십 분쯤 지났을까.태훈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그녀 쪽으로.한 번. 그리고 두
밤새 잠을 설친 건 미정뿐만이 아니었다.위층 작은 방에 불이 꺼진 지 오래였지만, 이수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그대로였다.하빈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둘 사이에는 식지 않은 머그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자는 것 같아.”하빈이 낮게 말했다.“응.”이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미정이 미용실 위층에서 밤을 보내는 건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수는 이미 이런 밤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침착했다.“이번 건,”하빈이 말을 꺼냈다.“생각보다 깊어.”“알아.”“불륜으로 바로 가기 어려워.”“응.”이수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저 사람은,”그녀가 말했다.“술이 핑계야.”“본질은?”“통제.”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술은 기폭제고, 폭력은 결과고, 통제는 습관이지.”이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그래도,”하빈이 덧붙였다.“불륜 설계는 필요해.”이수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왜.”“법적으로 가장 빠르니까.”그 말은 차갑지만 현실적이었다.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저 사람,”그녀가 낮게 말했다.“다른 여자 있을 가능성 있어.”“확신이야?”“아니.”“그럼.”“촉.”이수는 웃지 않았다.“의심이 과한 사람은 대개 자기 그림자를 숨기고 있어.”하빈은 팔짱을 풀었다.“확인부터 하자.”“응.”“회사 동선, 카드 내역, 주말 이동 패턴.”이수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리고,”하빈이 그녀를 바라봤다.“네가 직접 접근하진 마.”이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왜.”“이수야.”그는 한 번 숨을 고르고 말했다.“저 사람 눈빛, 어제 봤지.”“봤어.”“그거… 정상 아니야.”“정상인 사람을 상대하는 일 아니잖아.”“그건 알아.”하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근데 넌.”“뭐.”“그 눈을 보면 너도 흔들릴거야.”이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하빈이 말하는 ‘흔들림’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나왔어요.”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이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귓가에 남은 것은 오직 그 한 문장뿐이었다.“어디쯤이세요?”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흔들리면, 상대도 흔들린다.“골목 끝… 편의점 앞이요.”이수는 하빈을 바라봤다.말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같이 가.”“응.”둘은 미용실 불을 끄지 않았다.잠시 비워둘 뿐이었다.차 안은 조용했다.와이퍼가 규칙적으로 움직였고, 그 리듬이 이상하게도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쫓아나오진 않았대?”하빈이 운전대를 잡은 채 물었다.“모르겠어.”이수는 짧게 답했다.사실 모르는 게 아니라, 확신할 수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폭력적인 남자는 붙잡지 못한 순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편의점 불빛이 보였다.미정은 유리문 옆에 서 있었다.비를 맞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어 있었고, 가방 하나가 발치에 놓여 있었다.도망쳐 나온 사람의 모습이었다.그러나 울고 있지는 않았다.이수는 우산도 쓰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괜찮아요?”그 질문이 공허하게 들릴 걸 알면서도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라, 버티고 있다는 의미에 가까웠다.하빈이 가방을 들었다.“차에 타세요.”미정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어둠뿐이었다.그 어둠이 더 무서웠다.미용실 문을 다시 열었을 때 형광등 불빛이 낯설게 밝았다.“여기 앉으세요.”이수는 수건을 건넸다.머리를 닦는 손이 작게 떨렸다.“그 사람… 전화할 거예요.”미정이 말했다.“하겠죠.”이수는 담담히 답했다.“받지 마세요.”“그럼 더 화낼 텐데요.”“화내게 두세요.”그 말은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상대를 달래는 방법이 아니라 패턴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 – 남편.미정의 손이 멈췄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스피커로 받아요.”미정은 숨을 고르고 통화를 눌렀다.“어디야.”목소리는 차분했다.너무 차분해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두드림이 아니라,밀어붙이는 힘처럼 느껴졌다.미정은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남편은 소파에 다시 앉아 있었다.아까 턱을 잡았던 손은 이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잠시 전의 긴장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그저,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었다.“변호사라며.”그가 말했다.목소리는 낮았지만,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어디 변호사인데.”미정은 침을 삼켰다.이수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었다.“상담 받았어.”“누구한테.”“그건 말 안 해도 되지.”남편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그 눈은 이미 취한 사람처럼 흐릿해졌다.“너.”“나 무서워?”그 질문은 다정한 것처럼 들렸지만, 실은 확인이었다.자신이 여전히 상대를 지배하고 있는지 확인하는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는 순간, 어느 쪽으로든 붙잡힐 것 같았다.“나 술 끊겠다고 했잖아.”그는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센터도 다녀왔고.”“병원도 가봤고.”“약도 먹었고.”“근데.”미정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다시 마시잖아.”그는 한숨을 쉬었다.짜증이 아니라, 피곤함처럼 연기된 한숨이었다.“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지.”“완벽을 바라는 게 아니야.”“그럼 뭐야.”“무섭지 않게만 해달라는 거야.”그 말이 떨어졌을 때,거실 안의 공기가 잠깐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남편은 고개를 숙였다.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울음처럼 보였다.미정은 잠깐 흔들렸다.이 남자는 늘 이랬다.폭력 다음엔 후회,후회 다음엔 다짐,다짐 다음엔 눈물.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나도,”그가 말했다.“나도 힘들어.”그는 얼굴을 감쌌다.“술 안 마시면.”“손이 떨려.”“숨이 막혀.”그 목소리는 진짜였다.적어도, 연기처럼 느껴지진 않았다.미정의 가슴 어딘가가 쿵 내려앉았다.동정과 공포는 자주 비슷한 모양을 하고 나타난다.“그래서.”그녀가
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눅눅했다.미정은 모텔 방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하며 남편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었기 때문이다.-어디야.-지금 장난해?-전화 받아.마지막 메시지는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그 뒤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그 고요가 오히려 더 무서웠다.미정은 이수에게 짧게 메시지를 남겼다.-집에 안 들어간 지 하루째예요.-연락은 끊겼어요.잠시 후 답장이 왔다.-오늘은 들어가세요.-대신 기록은 계속하세요.-혼자 들어가지 마시고요.미정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혼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장미 미용실.이수는 가위를 닦다가 멈췄다.비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그리고 곧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툭.툭.툭.하빈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오늘 터지겠네.”“응.”“그 집도.”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가위 날에 비친 자기 얼굴이 잠깐 낯설어 보였다.“오늘은,”하빈이 말했다.“직접 부딪힐 수도 있어.”“알아.”“준비됐어?”이수는 가위를 닫았다.“그 사람.”“밖에선 완벽하다며.”“그래.”“그럼 안에서 무너질 때 더 세게 무너지겠지.”이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오늘.”“선은 확실히 긋고 와야 해.”하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설계 시작하는 거야?”“응.”“위험할지도 몰라.”“알아.”하빈은 한 발 더 다가왔다.“이수야”“응.”“이번엔… 네가 남자를 흔드는 쪽이야?”이수는 잠시 침묵했다.“그래야 해.”그 말은 차분했지만 단단했다.오후,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졌다.미정은 집 앞에 서 있었다.우산을 접으며 현관문을 올려다봤다.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문을 열었다.남편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술은 마시지 않은 얼굴이었다.오히려 지나치게
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그가 말했다.물음이 아니라 확인이
아침 공기는 전날보다 무거웠다.비가 그쳤다는 사실보다, 언제든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기척이 먼저 느껴졌다.습기는 벽에 남아 있었고, 냄새는 아직 빠지지 않았다.이수는 카페 문을 열며 잠시 멈췄다.안쪽에서 나는 소리가 어제와 달랐다.머신이 돌아가는 소리,컵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사람의 움직임이 섞여 있었다.진상은 이미 나와 있었다.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오늘은 왜이렇게 일찍 왔어요?”이수가 말했다.말끝은 가볍게 올렸지만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잠이 안 와서요.”그는 그렇게 답했다.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비는 밤새 그쳤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아침이 되자 길 위엔 물기가 남았고, 공기는 묘하게 가벼웠다.무언가 씻겨 내려간 뒤의 냄새였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진상이 고개를 들었다.“일찍 왔네요.”어제와 같은 말이었다.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말보다 먼저 인식하는 방식.그건 습관이 아니라 선택에 가까웠다.“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손이 앞치마 끈을 묶는 동안,진상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손을 따라갔다.손목, 손가락, 매듭.이수는 그 시
카페의 아침은 생각보다 빨랐다.문을 열기도 전에 커피 향이 먼저 퍼졌고,기계가 예열되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진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셔터를 올렸다.매일 같은 시간, 같은 순서였고 그래서 더 생각하지 않는 동작들이었다.이수는 그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문을 열자 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진상이 고개를 들었다.“일찍 왔네요.”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계는 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네.”이수는 짧게 답했다.목소리는 낮았고, 불필요한 온도는 없었다.앞치마를 두르는 동안 그녀는 카페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