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아침 공기는 전날보다 무거웠다.
비가 그쳤다는 사실보다, 언제든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기척이 먼저 느껴졌다.
습기는 벽에 남아 있었고, 냄새는 아직 빠지지 않았다.
이수는 카페 문을 열며 잠시 멈췄다.
안쪽에서 나는 소리가 어제와 달랐다.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사람의 움직임이 섞여 있었다.
진상은 이미 나와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오늘은 왜이렇게 일찍 왔어요?”
이수가 말했다.
말끝은 가볍게 올렸지만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
“잠이 안 와서요.”
그는 그렇게 답했다.
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그러나 이유를 남기듯이.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잠이 안 왔다는 말은 어젯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생각의 원인을 자기 말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카페는 아직 한산했다.
아침 손님 몇 명이 들렀다 나갔고, 그 사이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이수는 커피 잔을 정리하며 어제보다 더 천천히 움직였다.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은 바쁜 사람보다 더 눈에 띈다.
바쁨은 이해되지만, 여유는 의심을 만든다.
진상은 계산대에 서서 몇 번이나 시선을 보냈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숨기지 않는 시선은 이미 마음속에서 이유를 만들어낸 뒤에 나온다.
“어제는… 괜찮았어요?”
그가 갑자기 물었다.
무슨 이야긴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이었다.
이수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뭐가요.”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답했다.
“그… 어제.”
말을 줄이는 방식으로 상황을 다시 꺼냈다.
이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마주치면 그 질문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별일 없었어요.”
짧은 대답. 부정도, 긍정도 아닌 말.
진상은 그 말을 듣고 안심한 얼굴을 했다가,
곧 그 안심이 불충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은 늘 괜찮다는 말을 들은 뒤에 괜찮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제 막 시작된 상태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카페는 다시 바빠졌다.
이수는 주문을 받고, 컵을 건네고, 테이블을 닦았다.
그 사이 진상은 말을 자주 걸었다.
일과 관련된 말, 아무 의미 없는 농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설명들.
“이수씨가 온 이후로 손님이 더 많아졌어요.”
“하하 그런가요?”
“아까 그 손님은 거의 매일 와요. 이수씨 보러 오는 것 같은데”
그 말들은 정보 전달이라기보다
이수의 존재를 계속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방식.
이수는 그 말들에 필요한 만큼만 반응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 그렇군요” 정도.
적당한 거리. 적당한 무관심.
그 사이에서 상대는 스스로 균형을 잃는다.
컵을 닦던 중, 이수는 일부러 손을 미끄러뜨렸다.
컵이 흔들렸고, 작은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진상이 먼저 다가왔다.
이번엔 어제보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네.”
이수는 컵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손이 이수의 손목 근처에 멈췄다.
닿지는 않았지만, 닿았다고 느끼기엔 충분한 거리.
그는 손을 바로 거두지 않았다.
그 짧은 지연이 흔들림의 증거였다.
“조심하세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뒤늦게 손을 뗐다.
그 말은 이수를 위한 말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자신을 진정시키는 말이었다.
이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쪽이 상대의 생각을 더 오래 붙잡는다.
오후가 되자 카페는 다시 조용해졌다.
진상은 계산대에 기대 서서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미용 배운다고 했죠?”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지 않아요?”
그 질문은 일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질문처럼 들렸다.
“괜찮아요.”
이수는 이번에도 같은 말을 썼다.
그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말이었고, 그래서 상대를 더 헷갈리게 했다.
“미용 배우면서 카페 알바까지 이수씨 부지런하네요”
그는 질문을 이어갔다.
점점 사적인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이수는 짧게 답했다.
“힘들겠다.”
그 말에는 동정과 관심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만든다.
이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는 순간 그의 감정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래도… 괜찮아요.”
같은 말. 같은 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다른 맥락.
진상은 그 미묘한 차이를 느꼈다.
느끼고 나서 자기 마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도… 혼자였을 때는 몰랐는데 둘이 같이 하니 덜 힘든 것 같아요.”
그 말은 전혀 필요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눈이 마주쳤다.
길지 않은 시간.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미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혼자 보다는 둘이라서.”
그는 말을 덧붙였다.
이유를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의 행동을 위해.
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 말이 끊기지 않을 때 더 멀리 나아간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수는 앞치마를 벗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진상이 말했다.
그 말은 어제보다 조금 느렸다.
“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쉬죠?”
그가 물었다. 이번에는 제안처럼 들렸다.
이수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잠깐의 망설임은 상대를 더 적극적으로 만든다.
“아마도요. 미용 실습있는 날이라서”
확답이 아닌 대답. 그러나 거절도 아니었다.
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에는 기대와 안도, 그리고 아주 작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이수는 문을 열고 나왔다.
공기는 차가웠고, 하늘은 다시 흐려지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오늘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질문이 늘었고, 시선이 길어졌고, 말에 이유가 붙기 시작했다.
그건 흔들림의 전조였다.
사람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설득한다.
이건 잘못이 아니라고, 이건 이해받을 수 있다고.
이수는 그 과정을 너무 많이 본 적이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하빈은 아직 오지 않았다.
불을 켜고 신발을 벗었다.
거울 앞에 서서 오늘의 얼굴을 확인했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도 하루가 끝난 뒤의 얼굴은 항상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이수는 물을 틀었다. 손을 씻었다.
따뜻한 물이 손끝을 감쌌고, 거품은 천천히 생겼다가 사라졌다.
어제도 씻었고, 그제도 씻었지만 다시 씻게 되는 손이었다.
그 손으로 사람들은 선택을 한다.
이수는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감각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흔들림의 날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이미 중심은 어긋나 있었다.
그 어긋남은 내일을 향해 기울어질 것이다.
그걸 막을 생각은 이수에게 없었다.
밖에서는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분명했다.
피할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이수는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은 흔들림이 결정처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두드림이 아니라,밀어붙이는 힘처럼 느껴졌다.미정은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남편은 소파에 다시 앉아 있었다.아까 턱을 잡았던 손은 이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잠시 전의 긴장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그저,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었다.“변호사라며.”그가 말했다.목소리는 낮았지만,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어디 변호사인데.”미정은 침을 삼켰다.이수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었다.“상담 받았어.”“누구한테.”“그건 말 안 해도 되지.”남편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그 눈은 이미 취한 사람처럼 흐릿해졌다.“너.”“나 무서워?”그 질문은 다정한 것처럼 들렸지만, 실은 확인이었다.자신이 여전히 상대를 지배하고 있는지 확인하는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는 순간, 어느 쪽으로든 붙잡힐 것 같았다.“나 술 끊겠다고 했잖아.”그는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센터도 다녀왔고.”“병원도 가봤고.”“약도 먹었고.”“근데.”미정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다시 마시잖아.”그는 한숨을 쉬었다.짜증이 아니라, 피곤함처럼 연기된 한숨이었다.“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지.”“완벽을 바라는 게 아니야.”“그럼 뭐야.”“무섭지 않게만 해달라는 거야.”그 말이 떨어졌을 때,거실 안의 공기가 잠깐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남편은 고개를 숙였다.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울음처럼 보였다.미정은 잠깐 흔들렸다.이 남자는 늘 이랬다.폭력 다음엔 후회,후회 다음엔 다짐,다짐 다음엔 눈물.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나도,”그가 말했다.“나도 힘들어.”그는 얼굴을 감쌌다.“술 안 마시면.”“손이 떨려.”“숨이 막혀.”그 목소리는 진짜였다.적어도, 연기처럼 느껴지진 않았다.미정의 가슴 어딘가가 쿵 내려앉았다.동정과 공포는 자주 비슷한 모양을 하고 나타난다.“그래서.”그녀가
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공기가 눅눅했다.미정은 모텔 방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하며 남편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었기 때문이다.-어디야.-지금 장난해?-전화 받아.마지막 메시지는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그 뒤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그 고요가 오히려 더 무서웠다.미정은 이수에게 짧게 메시지를 남겼다.-집에 안 들어간 지 하루째예요.-연락은 끊겼어요.잠시 후 답장이 왔다.-오늘은 들어가세요.-대신 기록은 계속하세요.-혼자 들어가지 마시고요.미정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혼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장미 미용실.이수는 가위를 닦다가 멈췄다.비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그리고 곧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툭.툭.툭.하빈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오늘 터지겠네.”“응.”“그 집도.”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가위 날에 비친 자기 얼굴이 잠깐 낯설어 보였다.“오늘은,”하빈이 말했다.“직접 부딪힐 수도 있어.”“알아.”“준비됐어?”이수는 가위를 닫았다.“그 사람.”“밖에선 완벽하다며.”“그래.”“그럼 안에서 무너질 때 더 세게 무너지겠지.”이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오늘.”“선은 확실히 긋고 와야 해.”하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설계 시작하는 거야?”“응.”“위험할지도 몰라.”“알아.”하빈은 한 발 더 다가왔다.“이수야”“응.”“이번엔… 네가 남자를 흔드는 쪽이야?”이수는 잠시 침묵했다.“그래야 해.”그 말은 차분했지만 단단했다.오후,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졌다.미정은 집 앞에 서 있었다.우산을 접으며 현관문을 올려다봤다.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문을 열었다.남편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술은 마시지 않은 얼굴이었다.오히려 지나치게
미정은 그날 밤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미용실을 나서며 이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도망이 아니라, 거리를 두는 거예요.그 문장은 생각보다 오래 붙잡혔다.미정은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버스를 탔다.버스 안은 조용했다.저녁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휴대폰 화면 속으로 고개를 묻고 있었다.아무도 미정을 보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버스에서 내려 작은 모텔 간판 앞에 섰을 때, 미정은 잠시 멈춰 섰다.손이 가방 끈을 놓지 못한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오늘 하루뿐이야.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문을 밀었다.그 시간, 장미 미용실에는 이수와 하빈만 남아 있었다.영업을 마친 뒤에도 불을 바로 끄지 않았다.어둠이 들어오기 전의 애매한 시간대는 둘에게 익숙했다.하빈은 창가에 기대 서서 밖을 보고 있었다.“연락 올 것 같아?”그가 물었다.“올 거야.”이수는 서랍을 정리하며 말했다.“오늘은.”“왜.”“처음으로 집에 안 들어간 날이니까.”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다.“이번 남편.”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전보다 위험해 보여.”“응.”“술 때문만은 아니야.”“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눈이야.”이수는 손을 멈췄다.“그 사람도 그랬어.”그 이름이 나오자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괜히 말을 얹으면 이수가 더 멀어질 것 같았다.“미정 씨 남편은.”이수가 말을 이었다.“밖에선 완벽한 사람이야.”“그게 더 문제지.”“응.”“그래서 균열은 안에서부터 생겨.”하빈은 이수 쪽으로 돌아섰다.“이번엔.”“네가 직접 나서야 할 수도 있어.”이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알아.”“근데 이번엔 그게 무서워.”하빈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왜.”“겹쳐 보여서.”“미정 씨 남편이 민준 씨랑.”그 말은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이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계속 말했다.
미정은 그날 밤 거의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남편의 손이 어깨를 밀치던 감각이 다시 살아났고,잠깐이라도 의식이 가라앉으려 하면 ‘기록해 보라’던 그의 비웃음이 귀에 남았다.아침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잠든 적이 없었다.부엌에 나가 물을 마시다 싱크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눈 밑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입술은 이유 없이 갈라져 있었다.화장은 하지 않았다.그럴 여유도, 용기도 없었다.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셔츠는 다려져 있었고, 구두도 정리되어 있었다.“오늘 일찍 나가야 해.”그는 신문을 넘기며 말했다.어제와 이어진 말은 아니었다.그래서 더 잔인했다.“아침 안 먹어?”미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먹어.”“그래.”“요즘 입맛 없더라.”그는 그 말을 던지듯 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다는 게 배려가 아니라는 걸 미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현관문이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미정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휴대폰을 꺼냈다.메모 앱을 열었다.08:12아침,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 어제 일 언급 없음적으면서 손이 떨렸다.사소해 보이는 장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이수의 말이 떠올랐다.-폭력은 늘 다음 단계를 준비해요.-전날보다 오늘이 평온하면, 그건 멈춘 게 아니라 숨 고르는 거예요.미정은 메모를 저장하고 가방을 챙겼다.오늘은 미용실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장미 미용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이수는 가위를 손에 쥔 채 머리를 자르고 있었지만,손님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공간을 편하게 만들었다.미정이 문을 열었을 때, 종이 울리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이수는 거울을 통해 미정을 봤다.어제보다 조금 더 굳은 얼굴.“어서 오세요.”미정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머리는… 다음에요.”“오늘은 그냥.”이수는 의자를 가리켰다.“앉으세요.”하빈은 카운터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다미정을
미정은 집에 들어오기 전 현관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TV 소리도, 발소리도. 이런 정적은 언제나 불길했다.미정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열었다.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주방 쪽에서 희미한 냉장고 불빛만 새어 나왔다.술병이 열려 있다는 뜻이었다.“왔어?”남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소파에 누운 채였다.“응.”미정은 괜히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괜히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이건 습관이었다.그의 기분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몸의 기억.“오늘은 늦었네.”“병원 갔다가.”거짓말은 아니었다.다만 설명을 덜 했을 뿐이었다.남편은 고개를 돌려 미정을 봤다.눈빛이 이미 조금 흐려져 있었다.“병원?”“어디 아파?”“아니.”“그냥.”그의 시선이 미정의 얼굴에서 목으로, 어깨로 내려갔다.“근데.”“왜 화장했어?”미정의 손이 순간 굳었다.“했나?”“그냥… 립밤만.”“아니.”“했어.”그는 몸을 일으켰다.술 냄새가 확 끼쳤다.“누구 만났어?”미정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이수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설명하지 마세요.“아무도.”짧게 말했다.그 짧음이 남편의 신경을 건드렸다.“아무도가 뭐야.”“말을 그렇게 해?”“피곤해서.”“피곤하면.”“집에 바로 와야지.”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왜 꼭 밖에서 시간을 써.”미정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그만해.”그 말이 선을 넘었다.남편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술을 마시기 전과 후,그리고 이 순간 미정은 그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만?”“지금 나한테 그만하라고 했어?”그는 탁자 위의 술병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너.”“요즘 말투가 달라졌어.”미정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아니야.”“아니긴 뭐가 아니야.”“나를 무시하잖아.”그는 미정의 팔을 잡았다.
미정은 이수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이 명령처럼 들렸기 때문이 아니라,그 말이 너무 오랜만에 자기 편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제가…”미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뭘 해야 하죠.”이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미정 앞에 놓아주었다.손이 조금 덜 떨리게 하기 위한 아주 기본적인 단계였다.“아무것도 새로 하실 필요는 없어요.”이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말투는 차분했고,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지금까지 해오던 걸 조금만 다르게 하시면 돼요.”미정은 고개를 들었다.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남편분은,”이수가 말을 이었다.“술을 마시면 미정 씨를 의심하죠.”“네.”“그리고, 그 의심을 말로 풀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요.”미정의 손이 다시 수건을 쥐었다.“그건 폭력이고,”이수는 단정적으로 말했다.“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이유예요.”미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그런데,”이수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은 자기 행동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하빈이 그 말을 받았다.“정당화하고 있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술 때문이라고 하고,”“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고,”“미정 씨가 말을 안 들어서라고 하겠죠.”미정은 그 말을 듣는 동안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이미 수없이 들어온 말들이었다.“그래서,”이수가 말했다.“이 경우에는 설명이 아니라 기록이 필요해요.”“기록이요?”“네.”이수는 테이블 위에 있던 노트를 열었다.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페이지였다.“미정 씨는 이제부터 하루에 한 가지만 하시면 돼요.”“뭐죠.”“시간.”이수는 펜으로 노트 위에 ‘시간’이라고 적었다.“남편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시간.”“집에 들어온 시간.”“말투가 바뀌는 시간.”“눈이 달라지는 순간.”펜 끝이 종이를 누를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그리고, 그때마다 무슨 말을 했는지.”미정은 조
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그가 말했다.물음이 아니라 확인이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