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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증거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9 08:01:39

여자는 손목을 오래 씻었다.

물은 차가웠고, 흐름은 일정했다.

아픈 곳을 씻는다는 건 통증을 없애기보다 사실을 확인하는 행위에 가깝다.

손목 안쪽, 얇은 피부 위로 옅은 자국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그러나 분명하게.

그는 흔적을 남기는 쪽이 아니라고 스스로 믿어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국은 늘 확신이 아니라 우연처럼 남았다.

우연처럼 남긴 것들이 나중에 모이면 사실이 된다.

여자는 거울 앞에 섰다.

손목을 들어 올려 각도를 바꿔 보았다.

빛이 닿는 위치에 따라 색이 달라졌다.

연한 자국은 조금만 신경 쓰면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수는 말했다.

사라질 것 같은 흔적이 가장 오래 남는다.

여자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카메라를 켰다.

촬영 버튼을 누르기 전, 잠시 멈췄다.

찍는 순간부터 이건 기억이 아니라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첫 장. 손목. 두 번째 장.

손목과 얼굴이 함께 보이게.

세 번째 장.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의 위치를 자기 손으로 재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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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륜해드립니다.   122. 이제 나는 도망칠 수 있다.

    산소마스크는 생각보다 가벼웠다.투명한 플라스틱과 얇은 고무줄.이게 사람의 생을 붙잡고 있다니, 그 사실이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다.이수는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그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했다.눈꺼풀은 닫혀 있었고, 주름은 펴져 있었으며, 입가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이수는 속으로 물었다.아빠는 지금, 나를 원망할까.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들어 있을까.그 질문에 답은 없었다.답이 없다는 건,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이수의 손끝이 마스크 끈을 건드렸다.순간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떨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마지막 반응에 가까웠다.그 반응을 넘어서야만, 이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어차피…”이수는 거의 소리 없이 말했다.“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지금 가셔도 서운하지는 않죠?”그 말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었다.이수는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으면, 다음 순간을 넘길 수 없었다.마스크를 벗기는 과정은 생각보다 빨랐다.끈이 풀리고, 플라스틱이 들리고,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이수는 그 얼굴을 끝까지 봤다.어떤 순간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돌리면, 그건 도망이 될 것 같아서였다.기계음이 달라졌다.삐.., 삐...의 간격이 흔들렸다가, 어느 순간 길게 늘어졌다.이수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소리를 듣는 건 확인이었고, 확인은 마음을 붙잡는다.이수는 마음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병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복도의 공기가 달랐다.소독약 냄새는 여전했지만, 방금 전까지 ‘살아 있는 척’하던 공기는 병실 안에만 남겨졌다.이수는 걷기 시작했다.도망치듯이, 그러나 무작정은 아니었다.‘이제 나는 도망칠 수 있다.’그 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똑바로 섰다.아버지가 사라져야만 가능한 도망.그게 너무 잔인하다는 걸 이수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민준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이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면, 이수는 그걸 선택했을까.

  • 불륜해드립니다.   121.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형식

    병실의 공기는 차갑고도 무기력했다.소독약 냄새가 벽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형광등 빛은 사람의 피부를 조금씩 말려버리는 색이었다.바닥은 늘 반듯하게 닦여 있었지만, 그 반듯함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 여기서는 누구도 흐트러질 수 없다는 듯이.이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자세는 단정했지만, 단정함이라는 건 가끔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형식”이 되기도 한다.손등 위로 손을 포개고, 숨을 고르면서도, 눈은 침대 위의 남자를 놓치지 않았다.서종민. 아버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엔 너무 오래, 너무 여러 번 버텨온 이름이었다.아버지의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투명한 플라스틱 너머로 김이 얇게 맺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 반복이 마치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기계가 “살려 두고 있는” 방식이라는 걸.기계는 성실했다.삐..., 삐....간격을 어기지 않고, 감정을 섞지 않고, 단지 기능으로만 존재했다.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사람도 어느 순간 기계처럼 생각하게 된다.이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이건 유지하냐, 끊느냐.의사는 오늘도 같은 말을 했다.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의식이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다고, 수치는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의 끝에는 늘 조심스러운 침묵이 따라붙었다.“결정은 가족이 하셔야 합니다.”그 말은 직접적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는 언제나 그 문장이 떠 있었다.가족. 이수는 속으로 그 단어를 한번 굴렸다.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였고, 그 하나 때문에 이수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그리고 그 하나는, 누군가에게는 너무 좋은 ‘줄’이었다.당기면 이수가 움직이는 줄.민준은 그 줄을 잡고 있었다.이수가 처음 민준을 만난 것도 병원이었다.그때의 이수는 계산을 잘하지 못했고, 스스로가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는지조차 정확히 몰랐다.대출, 사채, 수

  • 불륜해드립니다.   120. 숨

    삼겹살집 안은 늘 그렇듯 시끄러웠다.환풍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 소리와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며 튀는 소리,옆 테이블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서로를 밀어내듯 뒤섞여 있었다.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생활의 소음이었다.이수는 그 소음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조용해졌다.장미 미용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고,머릿속으로 계산을 반복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여기,”하빈이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네가 전에 자주 오던 집이잖아.”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한동안은 거의 매주 왔지.”‘한동안’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언제부터 자주 오지 않게 됐는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그걸 정확히 말하는 순간, 지금의 자리가 설명해야 하는 공간이 될 것 같았다.하빈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언제부터, 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 선택이 이수에게는 고마웠다.이런 자리는 괜히 정리하려 들지 않을수록 편해진다.삼겹살이 익자 하빈은 고기를 잘라 이수 앞 접시에 올려줬다.늘 하던 동작이었다.“먹어.”“이러다 다 타.”“응.”이수는 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씹는 동안 생각이 잠시 멈췄다.고기 맛이 어떤지, 쌈장이 짠지 그런 것들이 오랜만에 중요한 감각처럼 느껴졌다.“요즘,”하빈이 불쑥 말을 꺼냈다.“너 많이 달라졌어.”이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하빈을 봤다.“어떻게.”“말수가 줄었어.”“예전엔 말 안 해도 뭔가 남아 있었거든.”“지금은?”이수가 물었다.하빈은 잠시 생각했다.“지금은… 아예 안 보여주려고 하는 느낌.”이수는 웃었다.짧고, 무심한 웃음이었다.“그게 더 편할 때도 있어.”“너만 편한 거지.”하빈이 낮게 말했다.“보는 사람은 불편해.”이수는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잔을 들어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그때, 유리창 너머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처음

  • 불륜해드립니다.   119. 감정은 대개 끝나기 전에 다 써버리거든요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시작됐다.지연은 눈을 뜨고도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잠을 설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피곤한 것도 아니었는데움직여야 할 이유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전에는 아침마다 오늘을 어떻게 버틸지를 먼저 생각했었다.지금은 그 질문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컵에 따르며 지연은 어제의 일을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 보았다.로비, 보안 요원의 목소리,사람들의 시선,그리고 자기 이름이 공간에 퍼지던 순간.그 모든 장면이 이미 조금 먼 일처럼 느껴졌다.감정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회사에 도착하자 관리팀에서 지연을 불렀다.회의실에는 법무팀 직원이 함께 있었고,탁자 위에는 이미 정리된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지연 씨,”담당자가 말했다.“어제 상황은 공식적으로 기록됐습니다.”“접근금지 조치와 업무 방해 관련해서 절차가 진행될 예정입니다.”지연은 서류를 하나씩 넘겨보았다.날짜, 시간, 행동 요약.어디에도 감정이라는 단어는 없었다.“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추가로 하실 말씀은 없으시죠?”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없습니다.”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점심 무렵,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오후에 한 번만 들르세요.-마무리 확인만 하면 됩니다.지연은 ‘네’라고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 짧은 대화가 이제는 이 관계의 전부였다.장미 미용실은 한산했다.지연은 안쪽 의자에 앉았고, 이수는 서류를 한 장 더 꺼내 놓았다.“이걸로,”이수가 말했다.“법적인 정리는 완료 단계에 들어갑니다.”“이후에는 연락이 오더라도 대응하실 필요 없어요.”지연은 그 말을 들으며 서류를 바라봤다.“끝이네요.”그녀가 말했다.“네.”이수는 짧게 답했다.“확실하게요.”지연은 웃지 않았다.울지도 않았다.다만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생각보다,”지연이 말했다.“아무 느낌이 없어요.”“그게 정상이에요.”이수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 불륜해드립니다.   118. 더 이상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그날은 유난히 조용했다.지연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확인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올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그 예감이 불안을 만들지는 않았다.이제는 무슨 일이 와도 이미 한 번은 다 겪어본 일처럼 느껴졌다.출근 준비를 하며 지연은 거울 앞에 잠시 섰다.얼굴은 조금 수척했지만, 눈은 또렷했다.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자기 얼굴을 다독였을 것이다.‘괜찮아질 거야.’‘조금만 더 참자.’지금은 그런 말이 필요 없었다.회사에 도착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보안팀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지연 씨,”“지금 잠깐만 로비로 내려와 주실 수 있을까요.”지연은 전화기 너머의 미묘한 긴장감을 느꼈다.“무슨 일인가요.”“강준혁 씨가 현재 로비에서 지연씨를 찾습니다.”지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들으니 호흡이 한 박자 늦어졌다.“저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지연은 차분히 말했다.“절차대로 진행해 주세요.”보안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답했다.“알겠습니다.”“이미 출입 제한 안내는 드린 상태입니다.”지연은 자기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손이 떨리지 않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지금 이 순간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그 사실이 이제는 명확했다.잠시 후, 사내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관리팀에서 공식 공지가 올라왔다.[외부인 출입 통제 관련 안내]지연은 그 문장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읽지 않아도 의미는 충분했다.이제 이 상황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회사 시스템 안에 완전히 편입된 상태였다.그 시각, 로비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준혁은 경비의 제지를 받으며 목소리를 높였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내가 남편인데!”“왜 못 만나게 하는거야!”그 말은 자기 위치를 증명하려는 외침이었지만,공간은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보안 요원은 차분하게 말했다.“지금 이 건물에서는 출입 권한이 없습니다.”“계속 문제를 일으키시면 퇴거 조치하겠습니다

  • 불륜해드립니다.   117. 임계

    아침부터 지연의 하루는 조금 더 단정했다.옷을 고르는 데 시간을 쓰지 않았고, 머리를 묶는 손도 망설임이 없었다.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불안이 선택을 지배하지는 않았다.이제는 하루를 버티는 게 아니라 하루를 지나가게 두는 쪽에 가까워져 있었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보안팀에서 연락이 왔다.“지연 씨, 오늘 오전에 추가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지연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외부 계정으로 회사 대표 메일에 문의가 접수됐습니다.”“지연 씨 관련 건으로요.”지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공식 메일,외부 계정,대표 주소.이제는 경계를 흐리는 수준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흔들고 있었다.“조치 부탁드립니다.”지연은 차분하게 말했다.“이미 접근 차단했고, 관련 내용은 모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그 말이 이제는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그저 정상적인 절차였다.오전 내내 지연은 업무에 집중했다.집중은 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제자리에 두는 방식이었다.중간중간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새로운 연락은 없었다.그 침묵이 이제는 잠깐의 숨 고르기처럼 느껴졌다.점심시간,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회사 쪽에서 추가 접촉 있었나요.지연은 간단히 상황을 전달했다.-대표 메일로까지 연락이 갔어요. 보안팀에서 기록 남겼다고 합니다.곧 답장이 왔다.-이제 의도가 더 분명해졌습니다.오늘은 따로 움직이지 않으셔도 됩니다.지연은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움직이지 않는 선택이 계속해서 상황을 밀어가고 있었다.퇴근길, 지연은 일부러 평소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걸었다.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자기 발소리를 느꼈다.이 도시 안에서 자기가 사라지지 않고 제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했다.장미 미용실에 도착했을 때,이수는 테이블 위에 정리된 출력물을 올려두고 있었다.“오늘 기록입니다.”이수가 말했다.“통로가 대표 메일까지 갔다는 건 상당히 무리한 선택이에요.”지연은 출력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불륜해드립니다.   8. 느려진 생각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 불륜해드립니다.   7. 문 앞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

  • 불륜해드립니다.   6. 오늘은 안 돼

    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그가 말했다.물음이 아니라 확인이

  • 불륜해드립니다.   5. 흔들림

    아침 공기는 전날보다 무거웠다.비가 그쳤다는 사실보다, 언제든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기척이 먼저 느껴졌다.습기는 벽에 남아 있었고, 냄새는 아직 빠지지 않았다.이수는 카페 문을 열며 잠시 멈췄다.안쪽에서 나는 소리가 어제와 달랐다.머신이 돌아가는 소리,컵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사람의 움직임이 섞여 있었다.진상은 이미 나와 있었다.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오늘은 왜이렇게 일찍 왔어요?”이수가 말했다.말끝은 가볍게 올렸지만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잠이 안 와서요.”그는 그렇게 답했다.변명처럼 들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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