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처형당한 성녀 엘리시아는 자신을 믿지 않았던 황제 칼릭스와 함께 결속식 한 달 전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삶에서 그녀는 사랑도 황후의 자리도 거부하고 자신의 선택권부터 되찾으려 한다. 칼릭스는 용서를 구하는 대신 권력을 내려놓고, 두 사람은 황제와 성녀 중 하나를 제물로 삼는 오래된 운명에 맞서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View More종이 네 번째로 울렸을 때, 엘리시아는 자신이 죽을 시간을 정확히 알았다.
처형대 아래로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신성모독자를 보러 왔고,
누군가는 황제의 연인을 끌어내린 여자를 확인하러 왔으며,
대부분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훗날 부정할 수 있도록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비가 내린 뒤라 돌바닥은 검게 젖어 있었다.
붉은 천을 덮은 처형대 아래로 빗물이 모여들었다가 계단을 타고 흘렀다.
엘리시아는 맨발이었다.
발목을 감싼 쇠고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한 돌을 긁었다.
누군가 그녀의 등을 밀었다.
엘리시아는 넘어지지 않았다.
처형을 집행하는 자들 앞에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손이 몸에 닿을 테고,
지금은 누구의 손도 견딜 수 없었다.
높은 단상 위에는 제국의 문장이 걸려 있었다.
황금 독수리 아래, 검은 제복을 입은 칼릭스가 앉아 있었다.
거리가 멀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때는 어둠 속에서도 알아보았던 금빛 눈이었다.
엘리시아가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찾아와 창문을 닫아주고,
약 냄새가 밴 손가락에 입을 맞추던 남자의 눈이었다.
이제 그 시선은 증거를 확인하는 황제의 것이었다.
엘리시아는 마지막으로 그를 불러볼 생각이었다.
변명도, 애원도 아니었다.
자신을 한 번만 믿어달라는 말조차 이미 여러 차례 삼켜버렸다.
그저 이름을 부르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정말 저 자리에 앉아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술이 열리기 전에 붉은 천이 얼굴 위로 내려왔다.
축축한 천 냄새가 코와 입을 막았다. 세계가 어두워졌고,
종소리가 천 너머에서 둔하게 번졌다.
왼쪽 쇄골 아래의 성흔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집행하라.”
칼릭스의 목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렇게 믿어야 죽는 순간까지 그를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았는지도 몰랐다.
목덜미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엘리시아는 붉은 천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떠오른 것은 칼릭스의 얼굴이 아니었다.
잠기지 않은 침실 문과, 그 문을 닫으며 내일 다시 오겠다고 웃던 젊은 남자였다.
날이 떨어졌다.
엘리시아는 숨을 들이켜며 상체를 일으켰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가 손바닥 아래에서 뛰는 맥박을 느끼고 그대로 굳었다.
베인 상처도 피도 없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식은땀에 젖은 피부와 가늘게 떨리는 숨뿐이었다.
침대 위로 쏟아진 햇빛이 눈을 찔렀다.
붉은 천은 없었다.
머리맡에는 물이 담긴 유리병과 흰 백합이 놓여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늦여름의 바람이 얇은 커튼을 안쪽으로 부풀렸다.
익숙한 금실 자수가 햇빛을 받을 때마다 엘리시아의 시야를 잘게 갈랐다.
그녀는 이 방을 알고 있었다.
황궁 동쪽 별궁, 결속식을 준비하는 동안 성녀에게 제공됐던 침실이었다.
아직 침대 머리맡에 황실 문장이 새겨지기 전이고,
창가의 작은 책상도 새것처럼 깨끗하던 때였다.
엘리시아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발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휘청거렸다.
처형대의 쇠고리가 아직 발목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는 침대 기둥을 붙들지 않고 손을 거두었다.
대신 왼손 엄지로 손목 안쪽을 눌렀다.
하나.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둘.
커튼이 흔들리는 방향을 보았다.
셋.
목에 상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넷.
마지막 숨을 내쉰 뒤에야 발바닥을 바닥에 붙였다.
거울은 침대 맞은편에 있었다.
엘리시아는 그 앞까지 걸어가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거울 가장자리의 금박과 그 아래 놓인 은제 빗,
전날 벗어놓은 듯 가지런한 귀걸이를 먼저 확인했다.
마침내 시선을 들었을 때, 거울 속 여자는 죽기 직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핵관리국장이 세 개의 기록판을 펼쳤다.“본체 출력은 일정합니다. 황궁 내부선의 일부에서 외부 파장이 들어와 본체 신호에 얹히고 있습니다.”“외부에서 수도 왕핵을 이용해 로스테로 박동을 보낸다는 뜻입니까?”“예.”“어디에서 들어옵니까?”관리국장이 지도의 수도 구역을 확대했다.왕핵실에서 뻗은 선 아래로 오래된 구수로와 대신전 지하선이 겹쳐 있었다. 그중 한 지점이 검게 가려져 정확한 위치를 읽을 수 없었다.“신호가 자신의 출발점을 숨기고 있습니다.”칼릭스가 조작대에 손을 올리려다 멈췄다.“가림을 해제하려면 왕핵 출력으로 밀어내야 합니다.”엘리시아가 물었다.“위험은요?”“저에게 반동이 옵니다.”칼릭스의 답은 너무 짧았다.엘리시아는 그를 바라보았다.“어느 정도입니까?”잠시 침묵한 뒤 그가 지나치게 완전한 문장을 내놓으려는 기색이 보였다. 입술이 열리기 전, 엘리시아가 먼저 말했다.“괜찮다는 말은 필요 없습니다. 예상되는 부상과 중단 기준을 말씀하세요.”칼릭스의 오른손이 조작대 위에서 굳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심박 이상과 일시적인 호흡 곤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의식을 잃을 가능성은 낮지만 없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그는 자신의 몸을 담보로 왕핵을 여는 일을 너무 자연스럽게 선택하려 했다.엘리시아는 그를 위해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다른 방법은요?”왕핵관리국장이 답했다.“세 조사단이 외부선을 먼저 찾아 차단하면 가림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시간이 더 걸립니다.”“얼마나요?”“빠르면 반나절, 대신전 지하 출입이 늦어지면 며칠입니다.”로스테에서는 이미 검은 뿌리가 발견됐다.시간을 끌면 주민 피해가 커질 수 있었다.반대로 지금 칼릭스가 왕핵을 밀어붙이면, 그는 또 자신의 몸을 숨긴 비용으로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그 선택을 대신 막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엘리시아는 유리 지도 옆의 로스테 예상 피해표를 확인했다.현재까지 지반 붕괴 보고 없음.부상자 확인 안 됨.종탑
셀윈이 고개를 저었다.“지금 파괴하면 연결된 쪽으로 파장이 역류할 수 있습니다. 로스테에 실제 지맥 닻이 있다면 그곳이 먼저 터질 가능성이 있습니다.”“보관만 하면요?”“수도 지하에서 보내는 박동이 계속되는 한 반응할 겁니다.”엘리시아가 칼릭스를 바라보았다.“수도 지하 박동을 멈출 수 있습니까?”“어디에서 보내는지 찾으면 가능합니다.”칼릭스는 검은 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왕핵 본체는 아닙니다. 본체에서 이런 신호가 나갔다면 제가 먼저 느꼈을 겁니다.”“왕핵 외부선은요?”“황궁 지하와 대신전 지하, 구수로까지 이어집니다.”“전부 황제 폐하의 통제 아래 있습니까?”칼릭스의 대답이 늦어졌다.“아닙니다.”지나치게 완전한 설명은 뒤따르지 않았다.“황궁 내부선은 제 권한으로 정지할 수 있습니다. 대신전과 구수로는 공동 관리 구역입니다.”“황궁 내부선부터 끊으시겠습니까?”“바로 끊으면 다른 두 구역으로 출력이 몰릴 수 있습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세 구역의 파장을 동시에 측정해야 합니다.”엘리시아는 격리판 너머의 병을 보았다.“같은 조사단이 세 곳을 맡으면 정보가 한 사람에게 모입니다.”“분리하겠습니다.”칼릭스가 말했다.“황궁 내부선은 왕핵관리국, 구수로는 수도 시설국, 대신전 지하는 대신전이 확인하도록”그가 문장을 멈췄다.대신전이 자신이 숨긴 장치를 스스로 조사하게 하는 방식은 의미가 없었다.엘리시아는 그가 정정하기를 기다렸다.칼릭스가 다시 말했다.“대신전 지하는 법무청과 외부 마법감정관이 확인해야 합니다. 대신전은 입회만 허용하되 단독 조사권을 주지 않겠습니다.”“대신전이 출입을 거부하면요?”“영장을 청구하겠습니다.”“신탁이나 황제 명령으로 열지 않고요?”칼릭스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예. 법무청이 증거와 위험성을 검토하게 하겠습니다.”그는 빠른 길을 택하지 않았다.엘리시아는 그 선택을 신뢰로 바꾸지 않았다. 다만 같은 결론을 기록에 남겼다.“성녀 측에서는 세 구역의 측정 결
그는 기침을 참다 몸을 접었다. 마티아스가 등을 두드리지 않고 호흡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치료사가 천을 건넸고 메르텐은 입가를 닦았다. 하얀 천 위에 옅은 피가 묻었다.“용액은 수도에 남깁니다.”그가 겨우 말했다.“지하 왕핵선에 넣으려고 했습니다.”칼릭스의 시선이 천막 입구에서 굳었다.그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의료진과 환자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은 채, 열린 천 너머에서 말을 들었다.엘리시아가 물었다.“왜 수도 지하에 넣습니까?”메르텐은 그녀를 보았다.“로스테의 심장을 깨우려면… 수도에서 먼저 박동을 보내야 합니다.”“심장이 무엇을 뜻하죠?”“지맥 닻입니다.”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옛날 왕핵 기술자들이 중계 지점을 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공식 용어는 아닙니다. 장부에 남기면 안 되는 장치라서….”“성녀의 장기와는 관계없습니까?”“사람의 심장은 아닙니다.”메르텐의 시선이 북문에 세워진 첫 번째 마차로 향했다.“표본을 섞어서 파장을 만들고, 왕핵 조각을 심습니다. 성녀가 없어도 성녀가 있는 것처럼 지맥을 속이는 겁니다.”그는 숨을 들이쉬려다 얼굴을 찌푸렸다.마티아스가 엘리시아에게 손을 들어 질문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엘리시아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메르텐은 스스로 말을 이었다.“그들은 심장을 옮긴 게 아닙니다.”그의 손가락이 이불 위에서 떨렸다.“새로 만들었습니다.”마티아스가 천막 밖 사람들에게 말했다.“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메르텐이 고개를 흔들었다.“하나만 더….”“안 됩니다.”“그걸 말하지 않으면….”엘리시아는 마티아스의 판단을 뒤집지 않았다.“회복한 뒤 말씀하세요.”메르텐의 눈이 그녀에게 고정됐다.“그들은 성녀님이 결속을 거부할 걸 알고 있었습니다.”“그 사실은 확인 중입니다.”“아닙니다.”남자의 숨이 빨라졌다.마티아스가 침상 각도를 다시 낮췄다.메르텐은 눈을 감기 직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천막 안이 조용해졌다.그의 의식은 다
클라우스 메르텐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마티아스 로엔은 침상 양옆의 천을 걷어 바람이 통하게 한 뒤, 남자의 목과 손목에 남은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의원 옆에는 대신전 치유사가 아니라 북문 구호소 소속 치료사 둘이 보조로 붙었다.“향에 오래 노출됐습니다.”마티아스가 작은 유리관을 빛에 비췄다.남자의 옷깃에서 채취한 잔류물이었다. 액체는 투명했지만 관을 기울일 때마다 바닥에 흰 가루가 가라앉았다.“대신전에서 정신 안정에 사용하는 향과 조성이 비슷합니다. 다만 농도가 너무 높습니다. 이 정도면 기억이 흐려지는 게 아니라 호흡이 멎을 수 있습니다.”엘리시아는 침상 가까이 가지 않았다.“해독할 수 있습니까?”“완전한 해독약은 없습니다. 호흡과 체온을 유지하면서 몸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신성력으로 정화하면요?”마티아스가 고개를 저었다.“독성 성분만 밀어내려다 신경 자극까지 건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얼마나 오랫동안 노출됐는지 모릅니다.”엘리시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성녀라면 사람을 낫게 해야 한다는 시선이 주변에 모이지는 않았다. 이레나가 치료 인원 외에는 천막 밖으로 내보냈고, 마티아스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 말했다.전생의 엘리시아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신성력을 먼저 쏟았다.치유가 늦어지는 동안 누군가 죽을까 두려웠고, 성녀가 곁에 있는데도 기다리자는 말을 들으면 무능해 보일까 두려웠다. 그 결과 몸이 무너져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제가 도울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죠?”“폐와 심장 주변의 염증을 줄이는 정도입니다.”마티아스는 침상 위 남자를 보았다.“의식이나 기억을 억지로 깨우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깨어난 뒤 질문도 한 번에 하나씩만 해야 합니다.”“그렇게 하겠습니다.”엘리시아는 침상 끝에서 두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섰다.“응급 생명유지 범위의 치유를 시행하겠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이므로 회복 뒤 거부 의사를 확인하고, 이후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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