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세이런의 넓은 코트에 파묻힌 아티니스는 한층 더 작아 보였다.
커다란 코트가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툭 떨어져 내려앉았고, 소매는 손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어 그녀는 조심스레 소매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눈만 동그랗게 빛나며 그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마치 길을 잃은 작고 귀여운 동물처럼 보였다.
코트 자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잠옷의 끝자락과 가느다란 발목이 묘하게 가녀리고 여려 보여, 세이런의 눈길이 한순간 멈췄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녀를 다시 한 번 덥썩 안고 싶어질 만큼 사랑
대공 뒤에는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자세가 반듯했다. 그 소년은 조용히 서서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자, 세이런. 인사드리거라. 황녀님이시다.”소년이 한 발 앞으로 나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십니까, 황녀님. 세이런 포르투릭스입니다.”목소리는 아직 변성기 전의 것이었지만, 인사는 정중했다. 아이는 소년을 위아래로 살펴보다가 대공을 올려다보았다.“대공의 아들이에요?”“그렇습니다. 제 아들입니다.”대공이 답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앞으로는 제가 자주 찾아뵙지 못할 것 같아서요. 황녀님께서 외로우실까 봐 세이런을 대신 보내려 합니다. 앞으로는 이 아이가 황녀님을 지켜드릴 겁니다.”황녀의 얼굴에 그늘이 스쳤다.“대공이
[아홉 번째 심장 - 아티니스 (네루실리아)]제국에는 오십이 넘은 황제가 있었다.황후와 여러 후궁이 있었지만 황태자도, 황자도, 황녀도 없었다. 황실의 원로들은 매일같이 입을 모았다. 양자라도 들여야 한다고, 이대로 황통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그 논의의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포르투릭스 대공이 자주 오르내렸다. 황실과 인연이 깊고, 신망이 두터우며, 무엇보다 제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그러나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핏줄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다시 한번 후궁을 들이기로 결심했다.문제는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황제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황후도, 후궁들도 그저 아이를 낳을 도구로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황실 안팎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요즘 들어 황제가 오래된 전설에 집착하며 제정을 낭비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딜 가느냐.”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다급하지도, 놀라지도 않은 목소리였다.아티는 손을 짚은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다리가 떨렸다.“누, 누구세요?”“네가 마법을 부린다는 그 마녀냐.”그 말에 아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마녀 아니에요.”“마녀든 뭐든 상관없다.”남자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아티는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뒤에는 나무가 있었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그 마법을 쓴다면.”남자는 후드를 벗었다. 4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금빛 머리카락이 어두운 숲속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졌고, 사냥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들었어?”“숲속에 사는 마녀 말이야.”“다이엔 동생을 살렸다는 그 여자.”“이번에는 사람들을 공격했다더군.”“공격?”“사람들이 돌을 던지니까 갑자기 거센 바람을 일으켰대. 돌이 전부 튕겨 나가고, 사람들까지 날아갈 뻔했다잖아.”후드를 쓴 사내는 말없이 술잔을 들어올렸다. 조용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그의 눈빛은 후드 아래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역시 나쁜 마녀였어.”“오늘은 돌을 막았지만, 내일은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잖아.”“저런 힘을 가진 존재를 살려 두면
그 후로 몇 달이 흘렀다.다이엔의 동생은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걷지도 못하던 아이는 마당을 뛰어다니며 크게 웃었고,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다. 그 모습을 처음 본 날 다이엔은 말없이 한동안 동생을 바라보다가 눈가가 붉어졌다.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누나!”아이는 다이엔에게 달려가 힘껏 안겼다.“정말 다 나았어요!”다이엔은 떨리는 손으로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 아티를 향해 돌아섰다.“고마워요. 덕분에 제 동생이 살았어요.”아티는 고개를 저었다.“제가 살린 게 아니에요. 다이엔의 노력과 기도로 살린 거예요.”다이엔의 동생이 아티에게 달려와 안겼다.“누나 고마워요!”혈색이 돌아온 아이를 보며 아티도 환하게 웃었다.
다이엔은 여자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침대 옆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에 물을 가져다 입가에 적셨다. 그러고는 그냥 옆에 앉아 기다렸다.한참이 지나고서야 여자가 눈을 떴다.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현실을 인식하는 눈빛으로 돌아왔다.“으….”“... 괜찮아요?”다이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여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해요….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혹시나 해서 시도해 봤는데…. 안 되네요.”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아직 약간 떨리고 있었다. 미안함이 역력한 얼굴이었다.“아니예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건걸요….”다이엔은 할 수 없다는 말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동생을 살릴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절망에 다이엔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가씨, 그럼 약혼만 하는 건 어때요? 약혼은 결혼보다 깨기도 쉽고, 꼭 같이 지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형식적인 관계로만 유지할 수도 있고요.”리리의 말을 듣는 순간, 아티니스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그녀는 밝게 웃으며 리리를 와락 끌어안았다.“리리, 넌 정말 천재야! 좋아, 그럼 따로 지내는 약혼을 전제로 제안해 볼게.”아티니스는 일이 생각보다 잘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 가지 못했다.저녁 식사 자리.아티니스는 수프를 뜨던 숟가락을 든 채 그대로 굳어
그저 '특별하다'라는 막연한 대답에 아티니스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분명 끝까지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언가를 숨긴 채, 그녀에게서 의도적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제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그녀가 차갑게 내뱉은 말에도 세이런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며칠만 대공작에 머물다 가. 영애의 편지가 오늘 아침에야 도착해서 손님 맞이 준비가 미흡했거든. 아버지도 오늘 도착할 줄 모르고 황실에 계셔.”“제가 여기 더 머무를 이유는 없어요. 전 돌아갈 거예요. 부모님도 걱정하실 테고—”그때, 아티니스는 문득 한
“왜 이렇게까지 하시죠?”아티니스의 목소리에는 불편함과 억눌린 분노가 섞여 있었다.세이런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그 이유를 알아. 그리고 도와줄 수 있어.”“그 말도... 병약하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죠?”아티니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전 오늘 거절하러 온 거예요. 그리고 비밀을 지켜준다고 한 말… 끝까지 지켜주세요. 전 그걸 확인하러 온 거예요.”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등을 돌렸다.이곳에 더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껴졌다.알아
생각지도 못한 큰 키에 아티니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야만 했다. 그의 가슴팍 너머로 올라간 시선 끝에서 마주한 것은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는 짙은 자주빛 눈동자였다.‘여전히 잘생겼네… 잘생… 기면 안 되는데. 거절해야돼!’그와 시선이 딱 마주치자, 아티니스는 순간 목적을 까먹을 뻔했다.당황한 그녀는 뒷걸음치며 거리를 두었다.“청, 청혼서가 마음에 들긴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말을 하려다 목소리가 꼬이고, 톤도 이상해졌다.“대공자의 청혼서를 협박이라니. 너무한걸.”당황한 그녀와 달리,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