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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Penulis: 금붕어
서승재가 말을 끝맺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민윤아에게로 집중되었다. 모두가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민윤서가 신태현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태현이 민씨 가문 딸과 결혼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고 그 상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민윤아는 고개를 들어 신태현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가볍게 짓씹었다.

신태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더니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서승재 씨는 추측을 잘하시는군요.”

애매한 말이었다. 대답 같기도 하고 대답 같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부정으로도 들릴 수 있었고, 긍정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민윤아에게는 그것이 긍정으로 들렸다.

민윤아는 본능적으로 민윤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우월감이 뚜렷하게 보였다.

‘봐, 신태현은 내 거야. 예전에도 내 거였고 지금도 내 거야.’

민윤서와 결혼했다고 해도 신태현은 결국 민윤아의 편에 설 것이다.

민윤서는 신태현의 애매한 대답을 듣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곧 이혼할 사이이니 굳이 민윤서의 체면을 지켜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민윤아가 자신의 아내라고 인정하는 것은 신태현에게 아주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민윤아는 이미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였다.

민윤서는 굳이 자신이 난처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승재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선배, 우리는 이만 가요.”

서승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

민윤서는 안색이 매우 나빴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던 서승재는 곧바로 민윤서를 부축해 자리를 벗어난 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신태현 씨는 언제 돌아온 거야? 민윤아랑 같이 왔던데... 너...”

민윤서는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시선을 살짝 내려뜨리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곧 이혼할 거예요. 이제 그 사람 일은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신태현과 민윤서는 이제 곧 아무 사이 아니게 될 것이다.

서승재는 그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으나 민윤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승재는 민윤서가 신태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모습, 신태현 때문에 행복해하던 모습, 눈물 흘리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었다.

서승재는 민윤서가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전혀 아니었다.

서승재는 민윤서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서야, 마음을 접는 건 절대 패배가 아니야. 그건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해.”

...

곧 대회가 시작됐다.

민윤서의 자리가 너무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승재는 주최 측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 자리를 앞줄로 옮겨 주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아랫배가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민윤서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버텼다.

다음 순간, 민윤아가 앞으로 걸어와서 말을 걸었다.

“윤서야, 여기는 내 자리야.”

민윤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가 말씀하셨잖아. 이 업계도, 우리 집도 내가 책임지면 된다고. 너는 편히 쉬고 있어. 돈이 부족하면 얼마든지 얘기해.”

민윤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민윤아를 바라봤다.

4년 전, 민윤아는 민씨 가문의 친딸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민윤서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뀌었고 아주 노골적으로 민윤아를 편애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민윤서는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민윤서에게 그 집은 피할 수도 없고, 물러날 수도 없는 곳이었다.

민윤서는 민윤아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가차 없이 말했다.

“우리가 가족은 아니지. 그러니까 괜히 아는 척하지 마.”

민윤아는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 임신 중이라 힘들어서 더는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아랫배의 통증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걸 느낀 민윤서는 주먹을 꽉 쥐면서 애써 통증을 참았다.

“이건 내 자리야. 내가 꼭 양보해 줘야 할 의무는 없어.”

민윤아는 입술을 깨물다가 속상한 듯이 말했다.

“윤서야, 이건 내 자리가 맞아. 네가 동생이니까 언니인 내가 모든 걸 다 양보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이미 나 대신 우리 집에서 십 년을 넘게 살았어. 그걸로도 부족해서 그래?”

그 얘기가 나오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민윤서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민윤서가 철없고, 제멋대로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봤다.

민윤서는 시선을 들어 민윤아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주최 측에 확인해 봐야겠네. 이게 대체 누구 자리인지 말이야.”

민윤서는 직원을 불렀고 직원은 난처해했다. 한쪽은 신태현이 데려온 사람이라 감히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고, 다른 한쪽은 배정된 자리에 앉은 민윤서라서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었다.

민윤서는 평온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직원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게 대체 누구 자리인지 말해 보세요.”

민윤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신태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차분한 분위기의 신태현은 현장을 쭉 둘러보다가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민윤서를 바라봤다.

민윤아는 곧바로 눈시울을 붉히면서 속상한 듯 신태현에게로 다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현 오빠, 나는 그냥...”

신태현이 손을 들어 자연스럽게 민윤아의 어깨를 감싸며 다독였다. 아주 자연스럽고 능숙한 행동에 민윤서는 눈가가 시큰해졌다.

신태현은 민윤서를 바라보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일어나.”

민윤서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이건 내 자리야.”

신태현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덤덤히 민윤서를 바라봤다.

“민윤서, 여기서 소란 부리지 마.”

“소란 부리지 말라고?”

민윤서는 순간 목이 메었다.

“이게 누구의 연구과제인지, 누구의 자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신태현은 철없는 타인을 보듯 민윤서를 차분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윤아는 몸이 좋지 않아서 무리하면 안 돼. 그런데 굳이 이런 자리에서 의자 하나 가지고 다퉈야겠어?”

민윤아의 몸이 좋지 않다는 말에 민윤서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민윤서는 이미 죽음을 앞둔 몸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민윤서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데다가 지금은 민윤아의 편을 들기까지 했다.

민윤서는 이런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태현 씨, 나는 태현 씨랑 싸우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도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양보하고 싶지 않아.”

민윤서는 싸울 기력조차 없었다.

신태현은 민윤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애도 아니고 이런 방식으로 관심받으려고 하지는 마.”

현장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늘 침착하고 냉담하던 신태현이 감싸는 사람이 민윤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윤서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신태현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차분한 어조로 민윤서의 모든 노력과, 서러움과, 존엄을 부정하고 있었다.

신태현은 냉담하고 강압적일 뿐만 아니라 민윤아의 편을 들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민윤서의 존엄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민윤서는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신태현이 나선 이상 민윤서가 그 자리를 지켜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몸 상태로는 싸울 기운도 없었기에 굳이 힘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민윤서가 괴로워해도 신태현은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민윤서가 하고 싶은 일은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님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됐어.’

“태현 씨.”

민윤서는 의자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기억해 둬. 이 자리는 내가 양보해 주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야.”

그건 중의적인 의미였다.

민윤서의 말뜻은 단순히 이 자리만이 아니라 신태현의 아내 자리까지 버린다는 의미였다.

민윤서가 떠나자 민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태현 오빠, 내가 너무 심했던 걸까? 윤서 많이 화가 난 것 같던데. 안색도 안 좋고 말이야.”

신태현은 떠나는 민윤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민윤아만을 바라봤다.

“너는 그동안 충분히 힘들었잖아. 앞으로는 그냥 편히 지내면 돼.”

민윤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태현조차 민윤서가 민윤아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민윤서는 민윤아 대신 부귀영화를 누렸고 남의 가족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으니 뭐든 민윤서가 양보하는 것이 당연했다.

...

그곳은 국가 핵심 연구과제인 혁신 신약 및 중개의학 연구과제 발표 현장으로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과 대형 병원, 대형 제약회사가 모두 참석하는 자리였다.

앞줄에는 박사 지도교수와 교수진, 연구책임자들이 앉아 있었다.

자리를 빼앗긴 탓에 다시 뒷줄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자리가 없었다.

민윤서는 더 이상 서승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진통제를 삼킨 뒤 한쪽에 서 있었다.

민윤서는 팀을 소개하는 자료도 없이 노트북만 품에 안고 있었다.

발표가 시작되기 전, 옆 팀의 연구원들이 한데 모여 작게 수군거렸다.

“저 사람은 누구죠?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민윤서 씨라고 서승재 씨 실험실 사람인 것 같던데요. 보조원인 걸로 알고 있어요.”

“보조원이 국가 핵심 연구과제에 도전한다고요? 그냥 머릿수를 채우러 나온 건 아닐까요?”

“서승재 씨도 참 이해할 수 없네요. 이런 곳에 보조원을 보내다니요. 계획서는 제대로 쓸 줄 아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그냥 지켜보자고요. 이런 수준의 연구과제는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민윤서는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자료를 넘겼다. 사람들의 경멸이나 멸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민윤서에게는 높은 직급도, 눈부신 경력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서승재의 밑에서 일하는 보조원일 뿐이니 이 자리에 참석한 것 자체가 서승재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한 일처럼 비쳤다.

민윤서의 차례가 되었다.

걸음을 내디뎌 단상 위로 올라가자 조명이 민윤서를 비췄다. 민윤서는 별다른 인사말 없이 곧바로 PPT를 클릭했다.

화려한 디자인 없이 오직 데이터뿐이었다. 표적 검증 모델, 내성 기전 분석, 공정 최적화, 비임상 안전성 자료, 원가 절감 방안까지 모든 내용이 심사위원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혁신성, 실현 가능성, 사업화 가능성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기존 특허와 충돌하는 부분은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파일럿 플랜트 안정성 데이터는 어디 있죠?”

“윤리성과 규제 대응은 어떻게 확보할 겁니까?”

“예산은 왜 이렇게 배분한 거죠?”

민윤서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매우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데이터도 충분했으며, 심지어 업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창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민윤서는 뜬구름 잡는 소리는 하지 않고 여유롭게 핵심만을 짚었다.

처음에는 무심하던 심사위원들도 하나둘 자세를 바로잡았고, 채점표 위에서 펜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발표가 끝난 뒤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곧 또렷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행사장이 술렁였다.

민윤아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민윤서가 이 정도 실력을 갖췄을 리가 없었다.

겨우 대학생일 뿐이지 않는가?

틀림없이 서승재가 뒤에서 도와줬을 것이다.

일개 보조원이 무슨 수로 국가 핵심 연구과제를 따낸단 말인가?

결과는 내일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곳에는 거물들이 가득했고 민윤아는 신태현을 통해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심지어 신태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민윤아에게 말을 건넸다.

민윤서는 단상 위에서 내려왔다. 약을 먹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상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자기 남편이 민윤아에게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있고, 두 사람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또 씁쓸하기도 했다.

결혼 2년 차 때, 민윤서는 신태현에게 친부모님의 생신날 함께 두 분을 뵈러 가자고 했었는데 신태현은 바쁘다면서 거절했다.

신태현은 가난한 민윤서의 친부모님과는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고 민윤서와도 선을 그으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민윤아에게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민윤아의 시선이 민윤서에게로 향했다.

“윤서야, 이리 와. 내가 이분들을 소개해줄게.”

신태현의 인맥을 민윤아를 통해 소개받아야 한다니, 정말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민윤아는 지금 신태현의 아내인 민윤서 앞에서 과시하고 있었고, 민윤서는 민윤아의 우월감을 채워줄 생각이 없었다.

민윤서는 민윤아에게 시선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며칠째 밤을 새우면서 실험하고, 발표를 준비하고, 오늘은 유언비어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눈앞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통증까지 느껴졌다. 민윤아를 상대할 기운이 없었던 민윤서는 최대한 빨리 조용한 곳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몸을 살짝 돌리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눈앞이 새까매지면서 모든 빛이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사람들의 목소리, 발소리, 에어컨 소리, 그 모든 것이 점점 멀어졌다.

의식보다 먼저 몸이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조용한 편이 아니었던 현장에서 둔탁한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민윤서는 그대로 차가운 바닥 위로 쓰러졌다. 긴 머리카락은 흐트러졌고 손에 들고 있던 발표 자료는 바닥에 떨어졌으며 창백한 얼굴은 바닥에 닿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신태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민윤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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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사회적 지위 때문에, 최상위 권력층에 있는 신태현에게 결혼은 결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체면이었고 이해관계였으며 세상의 평가를 좌우하는 요소였다.신태현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적이고 행복해 보이는 결혼이었다.이미 부부로서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고 아내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겉으로만 흠잡을 데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 그만이었다.그리고 민윤서는 그런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 결혼 생활을 떠받치는 가장 순종적인 장식품에 불과했다.민윤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속까지 서늘하게 식어 갔다.더는 선택할 권리조차 없었다. 가족의 안전도, 외할머니의 병원비도, 온 가족의 생계도 모두 신태현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민윤서는 자신이 상처받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 때문에 가족들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것만은 감당할 수 없었다.민윤서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이를 악물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눌러 통화를 끊은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예상대로 건물 앞 가로등 아래에는 낯익은 검은 세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운전석 창문을 통해 진현수가 보였다.민윤서를 발견한 진현수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 주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사모님, 국장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민윤서는 그 자리에 선 채 차 문만 바라봤다.마치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동굴을 마주한 것처럼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민윤서의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본 진현수는 속으로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신씨 가문 같은 명문가에 시집가 최고만 누리며 살면서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거야. 사모님 자리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면 될 일을, 괜히 집까지 뛰쳐나와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정말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화를 자초하는군.’물론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진현수는 끝까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 채 민윤서의 선택을 묵묵히 기다렸다.민윤서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6화

    민윤서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서승재가 평생을 바쳐 일군 청림바이오를 무너뜨릴 수도 없었다.그리고 이 프로젝트 하나만 바라보며 오랜 세월 함께 달려온 동료들의 노력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서승재는 애써 담담한 척하는 민윤서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윤서야... 미안하다. 괜히 너만 힘든 일을 떠안게 했네.”민윤서는 옅게 미소 지었다.“일은 일이잖아요. 사적인 감정까지 끌고 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겠어요? 결국 비즈니스는 이익으로 움직이는 거고요.”서승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서승재가 다시 말했다.“민윤아랑 직접 부딪히기 싫으면 앞으로는 내가 상대할게.”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민윤아가 청림바이오에 들어오는 일은 이미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오늘 거절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또 다른 방법으로 민윤아를 들여보내려 할 테니까.신태현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생각해 보면 신태현이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하지만 그 대상은 단 한 번도 민윤서였던 적이 없었다. 늘 해외에 머물던 신태현은 민윤서가 집에서 고열로 의식을 잃었을 때조차 연락이 닿지 않았다.대화를 마친 민윤서는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 약물 성분 데이터를 반복해서 분석했다.끝없이 일에 파묻혀 있어야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씁쓸함과 모멸감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사무실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퇴근한 뒤였다.민윤서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책상을 정리한 뒤 조용히 회사를 나섰다.‘이혼하면 돼. 모든 게 정리되면... 다 끝날 테니까.’민윤서는 오래된 빌라 앞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려다 걸음을 멈췄다.문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들려오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낡은 건물이라 방음이 좋지 않았다. 애써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지만,

  •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제25화

    민윤아는 지금 신태현이 공개적으로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런 민윤아가 굳이 청림바이오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것은 누구나 봐도 민윤서를 겨냥한 행동이었다.도발이었고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받아들이면 민윤서는 회사 안에서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될 터였다.하지만 거절하면 국가 핵심 연구 과제는 다른 기업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그렇게 되면 청림바이오가 수년 동안 공들여 준비해 온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될 수 있었고 회사 전체가 큰 타격을 입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서승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가까이에 서 있는 민윤서를 바라봤다.민윤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어떤 동요도 비치지 않았다.조금 전 이태섭 박사가 꺼낸 제안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것처럼 담담한 모습이었다.서승재는 그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프로젝트가 무산되더라도 민윤서에게 이런 모욕을 감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하지만 민윤서의 잔잔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목까지 올라왔던 말은 끝내 삼켜 버렸다.민윤서는 서승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회사는 혼자만의 것만은 아니었다.두 사람이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는 사이, 민윤서가 먼저 이태섭 박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박사님, 저희는 늘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회사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민윤아 씨께서 청림바이오에 합류하시겠다면 저희도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서승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 말하려 했다.그러나 민윤서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그 모습을 본 서승재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이태섭 박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시선을 민윤서에게 옮기더니 천천히 물었다.“서 대표 비서인가?”서승재는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민윤서를 소개했다.“박사님, 이쪽은 민윤서 수석연구원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핵심 약물 분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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