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동해시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 집이라고는 열 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 푸르기만 한, 특별한 일 없는 그곳에 온 세상 불만은 다 끌어안고 있는듯한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나인협. 한때는 매우 잘나가던 프로게이머였던 남자.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서 찔러대는 남자의 공격에 들썩거리는 소원리. 로맨스 한 스푼,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 한 스푼 섞인, 잔잔슴슴 이야기. atthebrink3@gmail.com
View More**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 사건, 장소는 모두 허구로 창작된 것임을 밝힙니다**
“아, 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요-.”고조된 돔 안의 분위기 위에 해설자의 쾌활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세계적인 게임인 리그 오브 카오스의 월드컵 결승전이 진행되는 날.
세계 각국에서 뛰어난 팀들이 모두 참여하는 만큼, 한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만난 건 엄청난 광경이었다.
“국내 리그에서는 부동의 1위인 원티드와 그 뒤를 늘 바짝 쫓는 케이비가 있습니다.” “네, 그 두 팀이 다시 월드컵 결승전에서 격돌하게 되었는데요.” “매번 승리의 문턱에서 넘어지고 마는 케이비. 오늘만큼은 우승을 거머쥘지 기대가 됩니다.”두 해설자의 의견이 오가고, 각 팀의 다섯 명씩의 선수가 각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몸을 풀고 있다. 전광판에는 선수들의 긴장된 얼굴이 번갈아 비쳤다. 헤드셋을 쓰고서 각자 컴퓨터를 응시하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각 선수의 얼굴이 나올 때마다 관중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이번 시즌에도 아주 좋은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케이비이지만, 매번 중요한 경기 막바지에 1등의 꿈이 좌절되고 마는데요-.” “맞습니다. 특히나 케이비의 레브 선수가 그런 실수의 중심에 자주 있어서 아쉬움이 큽니다.” “네, 중요한 경기마다 큰 실수가 나오고는 하는 레브 선수인데요. 개인 기량으로만 보면 레전드라고 불리는 원티드의 카이 선수를 한번 쯤은 꺾을 만도 하기에, 여러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는 일관성 있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큰 경기인만큼 좋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면 하는데요-.”그 중 무대 왼쪽의 안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선수가 긴장한 얼굴로 손을 풀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실수는 안 돼. 케이비의 레브라 불리는, 관심의 중심에 선 나인협이었다.
“인협. 오늘은 실수 없으리라 믿는다, 응?”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에서 들려온 팀 보이스에 인협은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안 돼. 생사를 건, 결의가 가득한 그의 눈빛이었다.
“자, 오늘 와 케이비의 역사적인 우승이 될 것인지 아니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원티드의 카이 선수의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이 될 것인지 지켜봐 주세요!”와아아-.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서는 우렁찬 함성이 쏟아졌다.
마우스를 잡은 인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6개월 후]드르륵, 드르륵-.
캐리어 바퀴가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는 소리가 고요한 시골 마을에 울려 퍼졌다. 동해시 신화읍 소원리. 신화읍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굽이진 길을 들어와야 만날 수 있는 외진 마을이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캐리어를 끄는 남자는 얇고 동그란 테의 안경을 쓰고서 잘 정돈되지 않아 덥수룩해 보이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182센티미터의 키. 그다지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곳곳을 잘 살펴보면 나름의 매력을 가진, 리그 오브 카오스 계의 몇 안 되는 훈남이라고 한때 불리던 얼굴이었다.
다행히 뼈대는 굵은 편이라 따로 운동한 것 없이 어깨는 좀 있는 편이었으나, 전체적으로 몸이 마른 편이었다. 그의 몸에서 굳이 근육을 찾아보자면 마우스와 키보드를 다루느라 돋보이는 전완근 정도였다.
구름도 한 점 없이 맑은 초여름의 하늘 아래. 머리를 태울 듯이 내리쬐는 쨍쨍한 햇볕에 남자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사방에 쟁쟁한 푸르름이 가득한 6월의 초여름.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포장된 길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푸르름을 머금은 너른 밭과 집들이 띄엄띄엄 지어져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봉긋한 산세는 부드럽고 둥그런 편이었다. 산이 마을을 둘러싼 덕분인지, 유독 푸르른 하늘 아래 마을의 푸르름은 배가 되었다.
“이 동네는 변한 게 거의 없네.”인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어딘가 잔뜩 날이 선 눈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동네의 전경을 찬찬히 살폈다.
마을 초입은 평지에 가까웠지만, 산 초입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져 있는 덕분에 길에서도 소원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살았던 어렸을 적의 기억과 다른 점이라고는 새로 지어진 집 두 채와 그가 이곳에 살았을 적에는 없던 작은 교회 건물뿐이었다.
그때는 모든 게 다 멀고 커 보이더니.
기억 속 마을의 풍경보다 축소된 듯한 마을의 전경을 꼼꼼하게 살핀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완만하던 길이 급격한 오르막으로 바뀌자, 짐이 든 캐리어를 끄는 손에 힘줄이 바짝 섰다.
비교적 선선한 편인 초여름인데도, 그의 이마에는 앞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후-.”양옆에 풀숲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소원 초등학교의 교문이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빼꼼 보였다.
여기도 변한 게 없네.
까르륵-. 주중 낮 시간인지라,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단층짜리 학교 건물 외벽을 어설프게 밝은색 페인트로 덧칠되어 있었지만, 학교의 낡은 티를 완전히 덮지는 못했다.
운동장 놀이터도 옛날 것 그대로였고, 관사도 어느 정도 노력은 기울인 듯해 보였지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인협은 다시 캐리어를 끌며 학교를 지나갔다.
교문 초입을 어느 정도 지나고 보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대체로 마을 뒷산 초입을 향해 오르막으로 경사진 마을이었으나, 신기하게도 학교 터는 마을 어떤 곳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네.”내리막이 조금 완만해진 오르막으로 바뀔 때쯤.
초등학교 언덕 바로 밑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는, 풀숲 사이로 난 길 앞에 멈춰선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열 걸음 정도 되는 좁은 길을 걸어 들어가면, 남자의 어깨높이까지 오는 담으로 둘러진, 낡은 기와집이 보였다. 제대로 된 대문도 없는 집이었다
8년여의 시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거의 폐가처럼 보이는 집.
‘인협이 왔나?’언제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따스함이 머무르던 집은 어느새 아무런 온기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버려진 곳이 되어있었다.
중앙에는 마당을 두고서 기역 자로 꺾인 집이었는데, 꺾여지는 부분에는 집 건물이 끊겨 있고 장독대가 여럿 세워져 있고, 옛날에 사용했던 수돗가가 있었다.
집 입구 바로 옆에는 예전에 변소로 쓰던 작은 건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창고 공간이 있었다. 사랑방으로 쓰던 공간과 아궁이가 있는 공간을 끝으로 기역자 중 한쪽 공간은 끝이 났다.
그리고 장독대와 수돗가가 있는 꺾어진 부분을 지나면 있는 공간에는 약간의 현대식 공간이 있었다. 인협이 어렸을 적 동네 사람들과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위인 인협의 아버지가 공을 들여서 고쳐준 공간이라고 들었다.
그곳에는 거실로 사용하던 공간이 있었고, 그 안으로 한 번 더 들어가면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법한 작은 부엌 공간이 나왔다.
부엌 공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부엌과 거실 공간과 두 문으로 연결된 큰방이 있었다.
큰방에서 한지와 나무로 만들어진 미닫이문을 열면 예전에는 툇마루였지만, 현대식으로 바꾸며 생겨난, 베란다 같은 복도 공간이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복도를 지난 끄트머리에는 예전에 어머니의 공간이었던 작은방이 있었다.
인협은 익숙하고도 낯선 집 외관을 둘러보았다. 돌봄을 받아 낡았어도 포근한 느낌을 주던 집은 온데간데없었다.
흙으로 된 마당에는 구석구석에 듬성듬성 풀이 높게 자라있었고, 마당 한구석을 차지한 아무것도 없는 닭장과 개집은 흉해 보일 뿐이었다.
“후-.”괜한 선택이었나?
이곳으로 오기로 한 건. 집 외관을 찬찬히 둘러본 인협은 약간의 후회를 했다. 이 정도로 낡아빠진 집의 상태는 이곳으로 와야겠다는, 계시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인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집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언젠가는 꼭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당연히 제 것이었던 열쇠를 챙겼던 그였다.
당시에 지긋지긋해하던 소원리를 떠났던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열쇠였지만.
낡은 쇠붙이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인협은 비릿한 쇠향이 맡아질 때에서야 그것을 낡은 철문으로 가져갔다.
바로 거실로 통하는 문이었다.
철컥. 인협이 약간의 힘을 주자,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약간 열렸다.
끼익. 녹슨 철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리자, 일부러 누군가가 보존이라도 해둔 듯이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공간이 보였다. 군데군데 물샌 자국이나, 장판이 들렸다거나 보수가 필요한 부분은 있었지만.
모든 것이 기억보다 조금 더 낡고 먼지가 쌓여있기만 할 뿐이었다.
“하-.”한숨을 푹 쉬자마자 확 밀려오는 먼지 냄새에 재채기를 연달아 한 인협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건넌방 앞 복도 문을 열어서 그 앞에 놓인 청소도구를 집어 왔다.
유선 청소기와 빗자루와 쓰레받기.
부지런했던 할머니가 이른 아침부터 걸레질하기 전에 늘 즐겨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코드를 꽂고 버튼을 작동으로 바꾸니, 낡은 청소기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 바람에 다시 한번 밀려오는 먼지바람에 재채기를 또다시 연거푸 한 인협은 앞으로 지내게 될 거실, 부엌, 그리고 큰방까지 청소기를 꼼꼼히 돌렸다.
다른 곳들은 차근차근 청소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당장 허물어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얼마간 머무를지도 모르는 노릇이니까.
그다음은 걸레질. 할머니가 습관처럼 하던 걸 기억해 낸 그는, 부엌 낡은 수납장에 쌓여있는 걸레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집안의 물건도, 위치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 수도를 연결해 두어 다행이었다. 걸레에 물을 꽉 짜낸 뒤, 그는 바닥을 꼼꼼하게 훔쳤다.
기억 속 외할머니처럼 야무진 손짓은 못 됐지만,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흉내는 내는 듯해 보였다.
“하, 이 정도면 됐고-.”집안에 에어컨도 없어, 땀이 맺힌 이마를 팔뚝으로 대충 닦아낸 그는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그러자, 어둑하던 집안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이 집안을 비추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흠이 아주 잘 드러났다.
군데군데 핀 조그마한 곰팡이 자국. 물샌 자국. 장판이나 벽지가 들리거나 우는 부분들. 그저 자연스럽게 낡아진 부분들이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곳에 햇빛이 내려앉자, 집안이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딘가 따스해 보이는 집안을 보며 인협은 잠시나마 어린 시절 소원리에 살았던 기억 속의 온기를 조금 느낀 것 같았다.
얕은 담 너머로 보이는 마을 풍경과 산의 모습에 인협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늘 분주함에 치이고 노력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의 불안에 쫓겨 멈춤이라고는 모르던 그의 삶에 드디어 완벽한 고요함이 찾아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망망한 바다 위에 떠다니는 돛단배가 된 막막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당장, 이 고요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특히나 머릿속이 이 정도까지 조용한 일이 없었으니까.
“모두 아직도 계시려나?”인협의 가슴팍까지 오는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소원리 마을의 한 자락에는, 떠나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집도 있었지만, 낡은 집들 속 완전히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도 두 채가 눈에 띄었다.
새로이 이 따분한 곳으로 이사 온 분들이시려나. 아니면 나처럼 도피하듯이 이곳으로 숨어든 분들이시려나.
인협은 잠시나마 겉보기에도 예쁜 집들의 주인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던 인협은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환기되지 않아 텁텁했던 집안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청소하다 보니, 피부가 간질거리기도 했고, 또 청소하느라 땀을 흘려서 물을 끼얹고 싶어진 그였다.
아직 청소가 완전히 되지 않아 군데군데 곰팡이도 슬고, 더러워 보이던 욕실 내부를 떠올린 그는 얼굴을 찌푸린 후, 바로 야외 수돗가로 향했다.
어렸을 적 더운 날이면 이곳에서 남동생인 인섭과 등목을 하거나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는 물장난을 치고는 했었다.
안경을 수돗가에 놓인 작은 돌 위에 벗어둔 그는 씻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수돗가에 연결되어 있는 짤막한 초록색 호스를 붙든 인협은 더러워진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는 물을 틀어서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어차피 땀과 먼지에 절은 옷들을 모두 벗어 던질 생각이었기에, 젖는 건 상관없었다.
온도 조절도 안 되는 시원한 물을 끼얹자, 추워서 이가 딱 맞물렸다.
이 짓도 어렸을 때나 할만하구나. 20대 중반인 나이에 하니까 곧 심장마비라도 올 것 같네.
인협은 생각보다 더 차가운 물을 견뎌내며 챙겨온 것들로 간이 샤워를 마쳤다. 그러고는 일어나 캐리어에서 미리 꺼내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냈다.
부스럭.
그때 바로 옆 담장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인협이 안경을 벗어둔 탓에 흐릿한 초점을 맞추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집을 둘러싼 풀숲에서 인영이 하나 불쑥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황 선생님!”시골 동네의 단점은 종종 너무 고요해서 소음이 잘 들린다는 것. 옛 시골집의 단점은 방음이 잘 안된다는 것. 어떤 젊은 남자의 밝은 음성에 인협은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일요일 아침. 물론 딱히 주말 주중 구분 없이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는 인협이었지만, 깰 이유가 없는데 원치 않는 시간에 원치 않는 이유로 깨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도 없었다. “에이씨-.”그놈의 황 선생 이름은 왜 집안까지 들리냐고. 조용히 투덜거린 인협은 숙취에 묵직한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자리에서 몸을 겨우 일으켰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가 쓸데없이 밝아. 이른 아침부터.”이어진 에스더의 인사에 인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교회 가는 길이세요?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드릴까요?”이름 모를 남자의 조심스러운 질문 세례에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묘하게 사투리 억양이 묻어나오지만, 서울말을 하기 위해 애를 쓰는 느낌이었다. 소원리 사람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애쓴다, 애써. 물론 게임만 하느라 모태 솔로인 그였지만, 남자의 음성과 말에 담긴 진심을 읽어내지 못할 만큼 그는 최악의 눈치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저 여자가 얼마나 우악스러운지 알아야 하는데-.”여하튼 제환이 형도, 이름 모를 남자도 불쌍하네. 아, 제환이 형은 취소. 어쩌면 잘 맞는 한 쌍일지도. 인협은 옆에 놓인 2리터짜리 생수병을 통째로 들어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뇨, 걸어갈게요.” “아, 그럼 같이 걸어가요. 저도 시간이 많아서-.”아주 눈물겨운 노력이네. 꿀꺽꿀꺽 물을 삼키며 인협은 생각했다. 도란도란 대화하며 멀어지는 두 사람의 소리에 인협은 물병을 내려놓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잠은 물 건너갔네. 으, 머리야.”불만 가득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인협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산뜻한 월요일 아침.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소원 초등학교의 유일한 교사 세 명이 교무실에 모여있었다. 정부
까르륵. 멀지 않은 초등학교에서 들려온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인협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떴다. 철문에 있는 반투명한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집안을 비추고 있었다. 정말이지 죽고 싶은 날이야. 어젯밤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한심한 자신을 향한 저주를 퍼부어대서 그럴까. 눈을 뜨자마자 무기력했고, 그것은 곧 살기 싫음으로 이어졌다. 그날 이후로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그렇다면, 여기서 삶을 끝내야 하나? 사실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서울의 월세방이 그렇게 하기에는 최고의 장소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서 배려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소리를 죽이며 살아가지만, 어쩌면 그곳에서 일을 치렀더라면 아무도 그렇게 된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 한참 동안 그렇게 있다가 발견될 수 있었을 것 같아서였다. 반대로 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고립된 것처럼 보이는 소원리에서의 삶은 좋든 싫든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엮여 있었다. 그가 이틀 이상 마을 초입에 있는 가게에 들리지 않으면 최 씨 아저씨가 신고할 것이고, 그의 집에 며칠 동안 불이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에스더나 갑순 할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문을 세차게 두들겨 댈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후-.”죽고 싶어도 맘대로 죽지도 못하려나?그 생각에 이유 모를 억울함을 느끼며 막막해진 인협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서 집을 나섰다.집안의 고요함과 걸어 다닐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발에 채는 굴러다니는 술병이 가득한 집이 갑자기 숨 막히게 느껴진 탓이었다. 슬리퍼를 신은 그는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쪽으로 방향을 튼 그는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꺄아아-!” ”야, 양예담!“까르륵.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난 건지, 높은 소리를 내며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점심시간인가. 인협은 소원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쪽 길목에 멈추어 선 채로 멀리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잠시 감상했다. “언니이!!”낡디낡은 초라
“…….”진짜 들어가기 싫네. 인협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10미터 정도 되는 길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가는 고행길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며 서 있기만 하는 에스더였다.“이참에 차라리 번호라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굳이 대면할 필요가 없잖아.”음식만 앞에 두고 문자를 보내는 거지.인협을 마주하기 싫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에스더는 이내 스스로를 세차게 비웃었다.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자기 집에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기겁하는 사람이 핸드폰 번호를 잘도 주겠네.눈앞에 절로 그려지는 상황에 에스더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잠시 눈을 꾹 감았다. “하아, 진짜 들어가기 싫어.”그때 끼이익, 하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인협이 걸어 나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뜬 에스더는 어디 숨을 곳이 없나 싶어서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댔다. 애석하게도 길가 풀숲은 그녀를 숨겨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분명 멋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숨을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발각된 에스더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서 몸을 꼿꼿이 세웠다. 내가 죄지었어? 지난번처럼 무단침입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여기는 엄연히 동네 길인데요? 동네 사람이라면 모두 마땅히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잖아요.”에스더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인협의 집으로 꺾어지는 길 어귀에 서 있었다. 그녀의 반박에 인협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오늘 아무 이유 없이 온 건 아니에요. 저 언덕 위 교회 사모님이 그쪽한테 반찬 좀 전해달라고 하셔서요.”에스더는 용기를 내어서 어느새 제게 가까워진 인협에게 봉지 중 하나를 내밀었다. “다른 사람을 못 먹여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었습니까?”“어어, 이런 신성한 일요일에 무슨 소리예요?”“일요일은 그쪽한테나 신성하지,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인협은 가볍게 에스더가 내민 반찬을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 했다. “또 술 사러 가죠?”“그러든 말든.”“어제 내가 말했잖아요.
“이게 맞나?”“나도 몰라.”철호와 태욱은 긴장한 얼굴로 내리막길을 걸어가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이들 예배가 시작된 후. 부인인 조 선생과 영애에게 양해를 구한 두 사람은 잠시 인협의 집을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아니, 그 폐가에 사람이 들어와 산다꼬?”“그러니까. 못해도 10년 정도는 방치되었던 거 같은데. 우리가 소원리에 왔을 때 이미 김 씨 할머니네 부부가 돌아가신 후였으니까.”“그래?”“응.”귀향하기 전에도 영애를 따라서 소원리를 일 년에도 여러 번씩 찾아왔던 태욱이었다. 그래서 어렴풋이나마 지나가다 마주쳤던 어린 시절의 인협을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읍내에 있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쯤 부모님의 상황이 좀 잘 풀리게 되어서 다시 인협이랑 동생을 데리고 갔다고 들었고. 태욱은 사실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두 형제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와중에 인협이 나이에 답지 않게 어둡던 인상을 하고 있던 건 기억이 났다.“그 꼬맹이는 어떻게 자랐으려나?”태욱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인협의 집으로 향하는 길로 꺾어 들어갔다.“저기요, 계십니까?”목소리가 큰 철호가 담장 너머에서 외쳤다. 그러자, 이내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끼이익,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낡은 철문이 열렸다.얼마나 관리가 안 되어있으면 저 철문에 기름칠 한번을 안 했대.굳이 집안까지 둘러보지 않아도, 집안 상태가 눈에 훤하다고 느낀 철호였다.“누구시죠?”그 어둡던 꼬맹이는 더 어두워지고, 가시까지 돋아나 버렸구나. 차가운 표정으로, 마당으로 걸어 나오는 인협을 본 태욱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협의 두 눈은 고요하고 어두워 보였으나, 동시에 세상을 향해 불만 가득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아, 인협아. 나 태욱이 아저씨야, 기억나? 문 씨 할머니네 첫째 딸인 영애 이모의 남편.”“아-.”태욱의 기나긴 소개에도 인협은 꼿꼿한 태도로 일관했다. 큰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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