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이게 맞나?”
“나도 몰라.”철호와 태욱은 긴장한 얼굴로 내리막길을 걸어가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이들 예배가 시작된 후.
부인인 조 선생과 영애에게 양해를 구한 두 사람은 잠시 인협의 집을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니, 그 폐가에 사람이 들어와 산다꼬?” “그러니까. 못해도 10년 정도는 방치되었던 거 같은데. 우리가 소원리에 왔을 때 이미 김 씨 할머니네 부부가 돌아가신 후였으니까.” “그래?” “응.”귀향하기 전에도 영애를 따라서 소원리를 일 년에도 여러 번씩 찾아왔던 태욱이었다.
그래서 어렴풋이나마 지나가다 마주쳤던 어린 시절의 인협을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읍내에 있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쯤 부모님의 상황이 좀 잘 풀리게 되어서 다시 인협이랑 동생을 데리고 갔다고 들었고.
태욱은 사실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두 형제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와중에 인협이 나이에 답지 않게 어둡던 인상을 하고 있던 건 기억이 났다.
“그 꼬맹이는 어떻게 자랐으려나?”태욱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인협의 집으로 향하는 길로 꺾어 들어갔다.
“저기요, 계십니까?”목소리가 큰 철호가 담장 너머에서 외쳤다.
그러자, 이내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끼이익, 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낡은 철문이 열렸다.
얼마나 관리가 안 되어있으면 저 철문에 기름칠 한번을 안 했대.
굳이 집안까지 둘러보지 않아도, 집안 상태가 눈에 훤하다고 느낀 철호였다.
“누구시죠?”그 어둡던 꼬맹이는 더 어두워지고, 가시까지 돋아나 버렸구나.
차가운 표정으로, 마당으로 걸어 나오는 인협을 본 태욱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협의 두 눈은 고요하고 어두워 보였으나, 동시에 세상을 향해 불만 가득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 인협아. 나 태욱이 아저씨야, 기억나? 문 씨 할머니네 첫째 딸인 영애 이모의 남편.” “아-.”태욱의 기나긴 소개에도 인협은 꼿꼿한 태도로 일관했다.
큰일이네, 이거. 생각보다 어렵겠는데.
갑순이 인협을 한번 봐주기를 왜 그리 간절하게 부탁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마지못해 건네온 인협의 인사에 철호와 태욱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저 옆집에 갑순 할머니 알지요? 할머니가 이 집을 한 번만 보고 보수해달라고 사정 사정을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싫어요.”태욱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철호는 단번에 인협을 찾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는, 성질 급한 철호의 평생 철학이었다.
“네?” “알다시피 집이 1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셨으니까 원체 관리가 안 되어있었을 거고,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안 살아서 집안이 엉망일 건데-.”철호의 눈에도 인협은 아직 완전히 여물어지기 전인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회는 그를 성인이라 인정하고, 다 자란 어른이라고 인정해도 50대 어른의 눈에는 스물다섯인 인협도 이런 집에서 살기에는 지나치게 앳되어 보일 뿐이었다.
“됐습니다.” “네?”인협의 차가운 거절에 어느 정도 예측했던 태욱은 눈을 꾹 감았고, 철호는 입을 헤벌린 채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됐다고요. 저는 이런 도움 원한 적 없습니다.” “그게-.”흔들리는 철호의 두 눈에 멀리서 볼 때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집의 외관이 들어왔다.
지붕 상태도 엉망인 데다가, 집 외관도 고치고 보수할 곳이 수십 가지였다.
외관도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 사는 공간인 집 내부일까.
“돌아가세요.” “아니-.” “이만 돌아가자.”인협의 단호한 거절에 황당해하는 철호의 한쪽 어깨를 손으로 살짝 붙든 태욱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자. 집주인이 싫다잖아.”철호는 다정하지만, 표현은 조금 투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나고 자랐던 태욱보다 속정은 훨씬 더 깊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인협같이, 딸뻘인 사람이 이런 엉망인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협의 집 보수를 해주기 위해 혈안이 되어 버린 것이고.
그러나 송곳니를 드러내고서 으르렁거리는 인협의 선을 넘는 게 좋지는 않겠다는 판단이 선 태욱이었다.
이 엉망인 집에서 살기를 고집 피우며 자존심을 내세우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쯤 되면 물러서야 할 때임을 태욱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자.” “안녕히 가세요.”태욱의 반복된 권유에 인협은 차가운 인사 한마디를 남기고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쉿.”억울하고도 황당한 마음에 무언가 토로하려던 철호에게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 태욱은 그를 데리고 마을 길로 나왔다.
인협의 집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철호의 입이 터졌다.
“아니, 유진이보다 어린 녀석이 무슨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보기 드문 청년일세. 집을 공짜로 고쳐주겠다는데도 저런 썩어빠진 집에서 살아보겠다고 하고-.” “사정이 있겠지.” “아이고, 내 속이야. 뉘 집 아들내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속이 썩어나시겠네.” “부모가 애한테 관심이 있었으면 애가 이 깡촌에 들어와 저런 꼬라지의 집에서 이러고 있겠어?”늘 밝고 다정한 편인 태욱의 비꼬는 어투에 철호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이런 말투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웬 제대로 된 고슴도치 한 마리가 동네에 들어왔네.”껄껄. 철호의 말을 회피한 태욱은 소리를 내어 웃을 뿐이었다.
“고슴도치는 귀엽기라도 하지. 그, 어디 자연 다큐에서 봤는데 아프리카 어딘가에 산미치광이라는 게 있던데. 딱 그것 같아.”태욱의 말에 철호는 대놓고 투덜거릴 뿐이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네. 영애를 만나기 전까지 세상에 잔뜩 뿔이 나 있던 그 시절이.
태욱은 이제는 다른 사람의 과거처럼 느껴지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저 가시들은 또 누가 뽑아주려나? 분명 저 가시보다 더 단단한 손을 가진 여자가 한 명 있을 텐데 말이야.
태욱은 제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
아이들 예배가 끝난 후.늘 늦게까지 남아서 도우미를 자처해 주는 정렬과 함께 뒷정리를 마친 에스더는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아, 황 선생님!” “사모님!”소원 초등학교의 최고 모범생인 예담의 엄마이자, 가끔 심심할 때마다 학교로 도둑 수업을 들으러 오는 어린 예솜의 엄마인 지혜였다.
식당에서 올라온 지혜의 양손에는 남은 반찬이 담겨있는 반찬통이 담긴 봉지가 두 개 들려있었다.
일요일마다 남은 반찬을 지혜는 늘 마을에 혼자 사는 사람 위주로 나눠주고는 했다.
그중에 한 명은 에스더였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반찬이 좀 많이 남았나 봐요?” “그러니까요. 이렇게 대량으로 할 때마다 양 조절이 잘 안되네요. 모자란 것보다 많은 게 낫다 싶어서 양을 자꾸만 늘리다가 맨날 이래요.”에스더의 질문에 지혜가 민망해하며 웃음을 흘렸다.
“감사해요.” “아 참, 선생님. 갑순 할머니 댁 옆집에 손주분이 들어오셨다고-.”지혜의 말에 에스더는 방금 받아 든 두 개의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혹시 가시는 길에 그쪽에도 하나 갖다드리는 걸 부탁드려도 될까요?”그분은 이걸 받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릴지도 몰라요, 사모님.
에스더는 진실을 알리고 싶었으나, 순수한 지혜의 눈망울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 인협이네 들리게?”그때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교회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잠시 안으로 들어온 갑순의 음성이 들려왔다.
갑순과 복란은 종종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교회에 남아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 돌아가고는 했다.
“네, 할머니.” “그럼 혹시 인협이한테 내 소쿠리도 좀 받아서 우리 집 앞에 놔줄 수 있을까?” “아-.”에스더는 어제의 만남의 끝을 떠올리고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망했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에스더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할머니나 사모님이 그 인간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게 낫겠지.
어쭙잖은 정의감일지 배려심일지 모를 마음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아으아아악-.”교회에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에스더가 절규했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속마음 담긴 소리를 내뱉고는 에스더는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댔다.
다행이다.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아.
“어? 철호 아저씨. 태욱 아저씨-.”절망 속에 길을 걸어 내려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 올라오는
태욱과 철호가 에스더의 눈에 띄었다. “퇴짜 맞았어요.” “황 선생님, 저 친구 보통내기가 아니네요. 이야기 나눠본 적 있으세요?”태욱과 철호가 허허 웃으며 인협과의 첫 만남에 대한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그럼요. 쉽지 않으셨죠?” “아잇, 선생님. 서운해요. 아셨으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시지.” “사실 그럴까 했었는데, 그러면 두 분이 안 가실 거 같아서요.”에스더의 대꾸에 철호는 깊은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요.” “어제 봤는데, 집 상태가 워낙 엉망이더라고요. 그리고-.”그 사람도 적잖이 위태위태해 보였고요.
에스더는 끝말은 생략한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눈치가 빠른 태욱과 철호는 그녀가 하지 못한 말의 의미를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사모님이 인협이 반찬 갖다주래요? 줘요, 내가 대신 다녀올게요.”에스더 손에 들린 두 봉지를 발견한 태욱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마 막내딸보다 어린 에스더가 인협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릴까 싶어서 배려의 마음으로 제안을 한 듯 싶었다.
“괜찮아요. 오늘의 분량은 충분히 다 하신 듯해요, 아저씨.”에스더의 당찬 말에 철호와 태욱은 소리를 내어서 껄껄껄 웃었다.
“그래요, 그럼.” “우리는 와이프 얼굴 보며 다친 마음 힐링을 좀 해야 하겠어요.”태욱과 철호는 에스더의 선택을 존중하고는 다시 오르막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괜히 내가 간다고 했나?
에스더는 결의를 다지고서 길을 걸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아냐, 무서워하면 지는 거야.”무서워할 이유 따위는 없는 거야.
원래 요란하게 짖어대는 사람은 분명 약함이나 두려움을 감추려고 그러는 법이니까.
에스더는 반찬통이 담긴 비닐봉지를 꼭 붙들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에스더는 오늘은 또 어떤 막말을 마주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품고서 걸음을 서둘렀다.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