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
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을 찾아 나서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쏟아내고 이혼하자고 하면 낫겠구먼.”최 씨는 빗소리에 묻히고 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평생 최선을 다해 가정을 책임져왔지만, 다정한 아버지나 남편은 아니었다.
가정을 돌볼만한 시간에 그는 마을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딸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 시간에 최 씨는 티브이를 보며 소파에서 쉬었다.
집안일은 당연히 아내의 몫이었다. 밭일과 가게 운영은 함께 했지만, 집안일은 당연히 여자의 몫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 때의 남자들은 모두 그러고 살았구먼-.”나 정도면 훌륭한 남편이었지.
담배 피우지 말라고 대놓고 눈치 주는 아내도, 딸도 없는 삶은 넘치도록 자유로웠다.
그렇게 원하던 자유가 삶에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싫었다. 싫고 허탈했다.
귀찮아서 좀 사라져 줬으면 하던 존재들이 사라지고 나니, 도리어 그리웠다.
그를 찾아댈 때는 그렇게 성가시더니, 없으니 좀 찾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최 씨는 술잔을 한 손에 들고 반대 손에는 담배를 든 채로 차가 지나다니는 국도만 내다보았다.
이제는 이 낡아빠진 구멍가게를 찾는 사람들도 잘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은 날이면 더더욱.
솨아아-.
할 일도 따로 없어서, 티브이만 가게에 딸린 방 안에서 주야장천 보다가 나온 그였다.
이렇게라도 해야 답답한 속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 “그래요? 인협이 녀석이?”에스더의 말에 본용의 눈이 커졌다.
며칠 전, 원길을 무서워하지도 않고서 눈을 똑바로 뜨고서 그에게 따지던 인협을 떠올린 본용은 고민에 빠졌다.
인협이 한때는 영재라고 불렸던 걸 모르는 그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모난 성격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제가 직접 제안했었는데, 꽤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임시로 예체능 쪽만 맡아주는 거면 그래도 문제는 아닐 것 같아서요.” “흐음-.” “그리고 인협 씨 성격에 대한 우려가 있으신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소량의 사례만 해줘도 인협 씨는 이 학교에 충성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더라고요. 성질이 더러운 만큼, 그에 대한 값을 받으면 자알 절제되는 모양이에요.” “…….” “금융 치료, 아시죠?”물론 인협이 학교에서 일하는 걸 승낙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에스더는 일단 밑밥을 깔아두기로 했다.
“소량의 사례비면 달에 몇십이어도 괜찮은 건가-.” “당장 생활비가 좀 급해서 그 정도로도 감지덕지할 거예요.” “그런가요?“에스더의 말에 본용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요! 아, 그리고 선생님 또 한 가지는-.“ ”그래요, 황 선생님.“ ”아무래도 빈 관사를 인협 씨에게 복지 차원에서 내어주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어제 인협 씨 집 상태를 보니, 지붕에서 물이 새는 게 아니라 그냥 흐르더라고요. 집안은 다 물바다가 되어있고.“ ”…….“인협의 집 상태를 모르지 않을 본용은 팔짱을 끼고서 고민에 빠졌다. 일단 당장 거절하지 않고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사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비어 있던 관사를 내어주면 어떨까 해서요. 그러면 인협 씨도 선생님으로 일할 맛도 날 거고요.“에스더의 조심스러운 설득에 본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그리고, 생각해 보세요, 교장 선생님. 그리고 잘 구슬려서 사무보조도 가능하면 그것도 써먹는 거예요.”에스더는 본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조 선생의 빈자리가 그에게 가장 크게 다가올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꽤 괜찮아 보였다.
”그래요, 그럼 빈 관사 내주고 예산에서 남는 돈으로 월급 주고. 그 이상은 안 돼요.“시골 마을의 장점이자 단점은 절차가 없고 체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무언가를 해야 할 때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렇게 무언갈 해내야 할 때 절차를 어느 정도 건너뛸 수도 있다는 것.
”좋죠! 아마 인협 씨도 아주 만족스러워하실 거예요.“사실상 인협에게 관사만 얻어줄 심산이던 에스더는 달에 몇십만 원의 돈도 덩달아 얻어냈다.
일단 본용이 가장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인 월급을 물어보고, 거절당하면 관사를 부탁해 그걸 얻어낼 심산이었던 에스더다.
“그래요. 일단은 허락하지만, 황 선생이 인협이 잘 지켜봐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험하게 대하면 나한테 보고하고요.” “당연하죠. 인협 씨는 제가 잘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드디어 몇 과목은 덜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희망에 가득한 에스더의 얼굴이 환해졌다.
*** “인협 씨, 아, 인협아!”관사 문이 열리자마자 신난 강아지 같은 에스더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침에 짐을 챙겨온 덕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던 인협이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차, 싶어진 에스더는 관사 문을 살짝 열고서 주변을 둘러보고는 문을 재빠르게 닫았다.
인협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한 걸음으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너 이제 학교에서 일할 수 있어! 관사도 나오고 조금이지만 월급도 나온대.”꼭 자기의 일인 것처럼 신이 나서 조잘거리는 에스더를 인협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제 표정을 자각하고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괜스레 머쓱함을 느끼고 말았다.
“진짜?”이게 이 정도로 신날 일인가.
에스더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인협은 잠시 생각했다.
“그래, 예체능 세 과목만 맡아주면 달에 50정도 나온다고 하지, 작년에 완전 새롭게 인테리어 된 관사도 나오지. 이게 웬 떡이야?” “…….”에스더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날이 좀 나아지면 태욱이 아저씨한테 부탁드려서 집 보수 도와주실 어르신들도 좀 알아보자. 마음 좋으신 분들이 많으셔서 도와주실 거야.” “어째 나보다 네가 더 좋아하는 거 같아.”인협의 음성에 신나서 조잘거리던 에스더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연히 좋아해야지. 어제 널 저 집에서 구해낸 것도 그렇고, 물이 줄줄 새던 저 집에서 네가 나오게 된 것도 그렇고.”에스더의 말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그 순간, 늘 날이 서 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는 것만 같았던 사람들 틈바구니에 살았던 때. 인협은 늘 불안했었고, 그로 인한 불면이 깊었었다.
이렇게 사소한 행운에 저보다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보니 낯설면서도 기뻤다.
마치 마음이 처음으로 원래 있어야 했던 제자리를 찾아낸 것처럼.
“당연히 좋아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지, 안 그래?”에스더의 순진무구한 미소에 인협은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웃음도 전염이 되는 건가.
웬 도도한 고양이 같던 에스더의 첫인상.
그 위에 떠오른 티 없이 맑은 미소에 인협도 덩달아 녹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네.” “뭐가?”인협의 혼잣말에 에스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그는 조용히 그런 그녀를 응시했다.
“평생 인생이 썩은 웅덩이처럼 고여있다가 죽어버릴 것만 같았는데, 너를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어.” “썩은 웅덩이?” “응, 아무것도 못 하고 고여만 있다가 썩어버린 물처럼 말이야.”인협의 말에 에스더의 두 눈에 안타까움이 가장 먼저 깃들었다.
썩은 웅덩이. 자신의 인생을 이런 식으로 정의 내리기까지 얼마나 맘고생했었을까 싶었다.
그래봤자 스물다섯일 뿐인데. 그 어떤 걸 다시 시작해도 그럴듯한, 아니, 이른 나이인데.
“썩어버리기에는 우리 아직 스물다섯이야. 그냥 가만히 있으려 해도 에너지가 너무 많은 나이야.”에스더의 말에 인협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스물다섯이면 이스포츠 계에서 끝물이나 마찬가지인 나이였다.
세상의 시선을 따라서 곧 실력이 꺾이고 자연스레 은퇴를 대비해야만 하는 나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게다가 끝에 다다라가는 시점에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오명을 쓰게 되어 선수 생활은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믿었었다.
“뭐든 해. 뭐든 새로 해도 되는 나이야.”자신에 찬 에스더의 말에 인협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던졌더라면 무책임한 낙관이라고만 느껴졌을 텐데, 신기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굳게 믿고 싶어졌다.
“그래.” “일단 아이들 가르치는 것부터 해봐.” “…….” “아이들이랑 잘 지내면서 가르칠 수 있잖아? 너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어.”어느새 심각해진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에스더를 본 인협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볼게.” “좋아.”무거운 제 짐을 덜어내고 싶어 안달 난 에스더의 몸부림이라는 게 너무나도 잘 보였지만, 이번만큼은 인협은 기꺼이 이용당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도 고이지 않고서 힘차게 잘 흘러갈 곳이 필요했다.
“아침은? 아침은 챙겨 먹었어?” “어-.”흔한 안부 인사에 인협은 순간 멈칫했다.
누가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내 안부를 궁금해해 준 적이 언제였지?
그의 의문에 떠오른 건 그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뿐이었다.
‘우리 강아지, 밥은 먹었나?’늘 직접 식사를 챙겨주다가 밭일이 바쁘거나 무슨 일이 있어서 직접 챙겨주지 못하던 날이면 꼭 할머니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협에게 묻고는 했다.
인협이 한 끼라도 굶으면 큰일이 난다는 듯이.
에스더가 지나가는 인사치레로 물어온 게 아니라서, 진심으로 인협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마음이 절로 와닿은 탓에 그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 물음에 담긴 마음이 너무나도 따스해서.
“응.”인협은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게 목구멍을 막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 먹었어? 냉장고에 있던 거 잘 챙겨 먹었지?” “응, 아까 집에 짐 챙기러 갔다가 목사님 마주쳐서 반찬을 더 얻어오긴 했어.” “어? 양 목사님 만났어?” “응, 반찬 좀 만들었다고 전해주러 오셨더라고.” “어때? 아직도 목사님이 불편해?”에스더의 뼈 있는 질문에 인협은 순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래, 굳이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받아도 되는 호의야.” “…….” “주는 게 기쁨인 분인걸. 그냥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반찬만 잘 받아먹기만 해도 기뻐하실 거야.”이 세상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에스더의 설명에 기탁의 얼굴을 떠올린 인협은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약간의 의심이 들었다.
소원리가 이상한 동네인 건지, 아니면 그가 살아왔던 환경이 이상한 곳이었던 건지.
그 누구를 향해도 아무런 득이 안 되는 인협을 향한 순수한 호의와 응원이 그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저 하나 건사하며 살기도 버겁고 벅찬 세상인데.
“아무튼, 모든 마음의 힘은 밥심에서 나오니까 무조건 잘 챙겨 먹어.”에스더는 인협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치고는 그대로 소파로 향해 그곳에 풀썩 앉았다.
“뭐 보고 있었어?” “그냥.”사실 우연히 튼 너튜브 메인화면에 뜬 리그 오브 카오스 소식을 보고 있었던 인협이다.
인협의 퇴출 후 빠르게 하락세를 보이는 케이비 소식을 보던 와중에 에스더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황급히 티브이 채널로 돌려놓았던 그였다.
어색한 표정을 짓는 인협을 보며 에스더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뭔데?” “뭐어-.”답지 않게 당황해서 꿍얼거리는 인협을 본 에스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씩 웃었다.
“뭐야? 그런 거라도 본거야?” “그런 게 뭔데?” “왜, 혈기 왕성한 남자들이 보는 거.” “야, 너는 나를 뭐로 보고-.”귀가 붉어지며 발끈한 인협을 본 에스더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에스더는 짓궂게도 스마트 티브이 앱을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행여나 너튜브를 틀까 걱정된 인협은 그녀의 손에 들린 리모컨을 뺏기 위해 기를 썼다.
“어어-!”그러다 인협의 무게를 못 이긴 에스더가 뒤로 넘어갔고, 인협이 그녀의 위에 자리하게 됐다.
시끌벅적하던 곳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당황한 인협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에스더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 왜 이래-.”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고, 에스더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아니라니까.” “그럼, 뭐 봤는데?” “그건-.”인협은 얼떨결에 모든 걸 털어놓으려다가 멈칫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달리던 수많은 비난들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걸 알게 되면 너는 뭐라고 할까?
에스더의 맑은 두 눈을 응시하며 인협은 잠시 고민했다.
이 눈에 그를 지나치게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심이 담기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그를 의심하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싫었다.
그저 지금처럼, 그에게 적당히 틱틱대고 적당히 이렇게 안부를 물어봐 주면 좋겠어. 그냥 나를 아무것도 아닌, 옆집에 사는 나인협으로 봐주면서.
“…….”무언가 말하려고 벌려져 있던 인협의 입이 다시 다물어지자, 에스더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뭔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에스더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은 인협은 몸을 일으켰다. 에스더는 어리둥절해하며 저도 몸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것 같더니만, 또 껍데기 안에 숨어버린 소라게처럼 굴고 있네.
에스더는 어느새 굳은 얼굴로 소파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인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 번 더 놀려볼까, 싶었지만, 에스더는 인협의 눈빛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슬픔 같기도 하면서, 분노 같기도 한 어떠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벼랑 끝에서도 내던져버릴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언젠가 술을 사러 가며, 술을 사 오며 보이던 그 눈빛이었다.
스스로도 스스로를 포기한 얼굴.
도대체 네 가슴에 담겨있는 게 뭐길래, 이런 표정을 지어.
에스더는 묻고 싶었으나, 잔뜩 움츠러든 그를 그만 놓아주기로 했다.
언젠가 저 꽉 닫힌 마음에 약간의 틈새가 보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주기로.
감사합니다 :-)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