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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조금은 서툰 진심

Author: 랑끗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6 11:27:04

꺄아아-.

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

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

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고, 밥을 한 주걱 펐다. 

원래 입맛이 안 돌아서 아침을 안 챙겨 먹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먹고 나가고 싶어진 그였다. 

***

“저기요, 계신가요-.”

우비를 입은 기탁은 반찬통이 든 방수 가방을 들고서 인협의 집 마당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집 문이 열려있었다. 

 

“저기요! 인협 씨?”

기탁의 부름에도 집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혹시, 설마. 

불길한 느낌에 기탁은 빠르게 걸어가 바람에 흔들려대던 문을 활짝 열었다. 

“세상에-.”

집안은 엉망이었다. 바닥은 물바다였고, 인협이 늘 덮었던 이불은 한눈에 봐도 푹 젖어있었다. 

이전에도 사람이 살만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집으로서의 수명을 다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만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동그란 알 너머의 눈이 커졌다. 

“설마….”

마른침을 꿀꺽 삼킨 기탁은 조심스럽게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종종 이렇게 외딴 시골 마을에서 사체가 발견되기도 한다고 하던데. 

언젠가 소원리와 사정이 비슷한 곳에서 목회를 하던 선배 목사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 기탁은 꽉 쥔 주먹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인협 씨! 계십니까!”

기탁의 부름에 답하는 건 처마 너머로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소리뿐이었다.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인협은 없었다. 

결국 이 시골 마을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 건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서 밖으로 나가려던 기탁의 눈에 인협의 유일한 짐꾸러미인 캐리어가 들어왔다.

 

“짐은 아직 그대로 있는데-.”

그 광경에 기탁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쳤다. 마을 맞은편에 흐르는 개천은 현재 장마로 인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기탁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스락. 그때, 집 담장 너머로 빗소리를 뚫고 인기척이 들려서 기탁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협이었다. 그는 거센 빗줄기에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젖은 풀숲을 헤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인협 씨!”

기탁은 무언가 뜨거운 게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이름을 부르며 여러 문을 열어댈 때, 이 이름의 주인이 무사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기탁은 안도감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어, 안녕하세요.”

기탁의 등장에 놀란 채로 잠시 멈칫했던 인협은 이내 인사를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목소리는 지난번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들렸다. 

기탁은 감격하는 눈으로 담장을 돌아서 집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와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인협을 바라보았다. 

“인협 씨, 제가 진짜 얼마나 간절하게 찾아 헤맸는지 아세요?”

“아-.”

기탁의 물음에 인협은 흙 묻은 발자국이 찍힌 집안 쪽을 힐끗 확인했다.

 

“죄송해요. 어젯밤에 물이 너무 심하게 새는 바람에-.”

“그럼, 밤새 어디에서 지냈어요? 교회나 저희 집으로 오셨어도 됐는데.”

아차. 기탁의 순진한 물음에 인협의 물기를 털어내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소문을 조심하기는 해야 할 텐데. 

인협은 동그란 안경테 너머에서 순진하게 깜빡거리고 있는 기탁의 두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신세를 좀 졌어요. 가까우니까요.”

“다음에는 꼭 교회나 저희 집으로 오세요. 상황이 여의치 않으시면 제가 차로 데리러 올 테니 알려주세요.”

자연스럽게 인협에게 핸드폰을 건네려던 기탁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아, 목사의 수작질은 아니고요. 진심으로 걱정되는 마음에-.”

지난번 인협의 반응을 떠올리고 아차, 싶었는지 기탁이 당황한 얼굴로 덧붙이며 핸드폰을 뒤로 뺐다. 

그 순간 인협이 그것을 낚아채듯이 제 손에 들고는 망설임 없이 제 핸드폰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고는 기탁의 핸드폰으로 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교회에 나간다는 말은 못 하겠고요,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도움은 청하겠습니다. 염치는 없지만.”

헝클어진 머리. 문 앞에 나뒹구는 보온 가방. 그리고 인협을 발견하고는 가쁘게 숨을 쉬어대던 기탁의 모습을 짧은 순간 동안 모두 눈에 담았던 인협이었다.

그리고 그는 직감적으로 기탁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인협의 안위를 걱정해 사색이 된 채로 집안을 뒤졌던 것이었다. 

지난밤 그를 무작정 찾아와 집안으로 쳐들어왔던 에스더처럼. 

“괜찮아요. 절 이용하셔도 좋아요. 아무 생각 말고 그냥 도움 요청해 주세요. 위험하다, 배고프다, 심심하다 뭐든 다 좋습니다.”

이제야 정상적인 호흡을 되찾은 기탁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인협이 슬쩍 미소 지었다. 

불신을 한 꺼풀 벗겨내니 이제야 그를 향한 상대의 배려와 선한 마음이 보이는 덕분이었다. 

“아, 반찬-.”

그제야 방문의 이유를 떠올린 기탁은 재빠르게 땅바닥에서 보온 가방을 집어 들어서 그것을 인협에게 건넸다.

“오늘 밤도 지낼 곳이 필요하시면, 교회로 오세요. 나름 아늑하고 쾌적합니다.”

“괜찮아요. 오늘도 학교에서 지내도 적당할 거 같아요.”

인협의 상냥한 거절에 기탁은 감격한 듯해 보였다. 

“네, 아무튼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저희 집에 여분의 이불도 아주 많아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조심스러운 진심과 조금은 서툰 진심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인협은 기탁이 내민 반찬을 순순히 받아서 들었다.

***

“옴마나? 저거 인협인가?”

“어어? 그러게, 인협인가봐.”

갑순과 복란은 비 내리는 소원리 풍경을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서 이전에 말려두었던 나물을 다듬는 중이었다. 

그때, 학교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인협으로 보이는 인영이 나무 사이에서 하나 뿅 하고 튀어나왔고 때마침 일을 잠시 멈추고는 한숨을 돌리던 갑순의 눈에 띈 것이었다. 

“왜 이 시간에 저 녀석이 학교에서 내려온대?”

“그러게. 집에 물이 많이 샜나?”

복란의 대꾸에 갑순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인협이 집 담장 너머로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쯧쯔, 그러니까 적당할 때 고치지.”

“이제 철호네도 못 돕겠어. 순옥이가 암이라며.”

복란의 말에 갑순이 혀를 끌끌 찼다. 

“죽어야 할 나 같은 사람은 안 죽고, 참 애꿎은 젊은 사람들만 괴롭게 하네.”

“언니가 왜 죽어야 하는 사람이야.”

“비 오는 날 이 정도로 몸이 괴로우면 죽을 때가 된 거 아닌가?”

갑순은 주먹으로 며칠째 아리는 무릎을 콩콩 두들겼다. 

“아휴, 말을. 그러게 파스 좀 바르고 진통제 좀 먹으라니까. 덜 괴로울 수 있는데 그렇게 고집만 피우고-.”

“이 늙은이가 그렇게 약을 처발라서 뭐 해. 들기나 하나.”

“한 번이라도 드셔보시고 말을 합시다.”

복란의 잔소리에 갑순이 전보다 약간 더 거친 손길로 나물을 다듬었다. 

“그나저나, 인협이는 학교에서 지난밤을 보낸 거 같지?”

“그러게. 가장 가까운 데라서 황 선생님한테 도움을 청했으려나.”

“황 선생님이랑 인협이 은근히 잘 어울리지 않아?”

갑순의 말에 복란은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떽, 우리 황 선생님이 훨씬 더 아깝지.”

“그래도, 우리 인협이도 그 정도면 인물 괜찮지.”

“인물이고 뭐고 다 떠나서 그 못된 인성은 좀 어떻게 고쳐먹을 거냐고.”

“딱 봐도 알잖아. 원래 속 여린 놈이 더 시끄럽게 굴어대는 법이야.”

“얼씨구-. 저어기 정렬이 아버지는 속이 여려서 그렇게 마누라랑 자식을 패댔대?”

늘 우아한 언행을 하는 복란으로서는 가장 욕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나물 다듬기에 집중했다. 

“그래, 여리지. 옛날부터 그 집안 유명했어. 첫째 아들만 다 해주고, 둘째인 원길이는 일찌감치 일 시켜서 제 형 뒷바라지시키고, 집안 재산 다 빼돌려서 첫째한테 더 못 해줘서 안달이었지.”

갑순의 변명 아닌 변명에 복란은 거친 손길로 다듬던 나물을 집어 던졌다. 

“그게 뭐? 우리 시대 때 안 그러고 산 사람 있어? 특히 여자인 우리는 더했지. 봐봐, 여기서 초등학교 제대로 졸업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고.”

“…….”

“아무리 큰 억하심정이 있어도 아무나 사람을 패지는 않아. 그것도 저보다 약한 가족들을.”

“우리 바깥양반도-.”

“아휴, 언니!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나쁜 사람은 그냥 나쁜 사람인 거야. 사연 있다고 나쁜 놈 되면, 뭐? 나도, 언니도 한 나쁜 년 되어 있어야지.”

복란의 매서운 대꾸에 갑순이 주름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여하튼 어디 줘도 아까울 우리 황 선생님, 그런 이상한 사람한테 갖다 붙이지 마. 언니야 어렸을 적부터 인협이를 봐서 정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모르겠다.”

복란의 볼멘소리에 갑순은 더 이상의 주장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랑끗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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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 웰컴 투 소원리   19. 색안경을 벗겨낸 듯이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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