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끄으응-.”
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
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실망감 가득한 얼굴로 수업에 참여할 아이들을 상상한 에스더는 울상을 하고서 무너져 내렸다.
“어떡하지?”답 없는 질문만 관사 안에 울렸다.
투두둑. 그때,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났다.
“아, 벌써 장마철이구나.”동해의 장마철은 보통 6월 말에 찾아오는 편이었으나 올해는 조금 일찍 시작될 모양이었다.
아싸, 일단 체육 수업은 실내에서 대충 이론이랑 게임으로 대체해서 진행해 보자.
에스더는 벌써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 때문에 흐릿해진 풍경 사이로 뭉툭하게 퍼진 작은 불빛이 눈에 띄었다.
“아니야, 미친 생각이지. 아무리 급해도 저 인간을 어떻게 선생으로….”지난번, 학교에 가끔 놀러 오는 다섯 살배기 예솜을 대하던 인협의 모습을 떠올린 에스더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 세상에서 아이를 가장 안 예뻐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인협일 것이었다.
“정렬 씨한테라도 한번 부탁해 볼까?”에스더는 이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렬은 돈도 거의 되지 않는 농사일 외에 가계를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인 원길을 대신하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는지는 그녀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결과 유림이 풍족하지는 못해도 큰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데, 그런 정렬 씨에게 일을 포기하고 봉사나 다름없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인간이라면 마땅히 안 해야 하는 짓이지.
“저 인간이 성격만 좀 좋았으면-.”지난번에 들어보니까 공부도 잘했다던데.
에스더는 팔짱을 끼고서 창밖 불빛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아이고-.”
“언니, 일어났나?”갑순의 앓는 소리에 옆방에서 복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
낡은 한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솨아아, 하고 내리는 장맛비 소리 사이에 들렸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낸 갑순이 덮고 있던 이불을 들추고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비 오는 날이면 늘 온갖 곳이 다 쑤시고는 했다.
더 가까이서 들려온 문소리와 함께 습한 기운과 비료 냄새가 섞인 비 냄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비가 오니 많이 쑤셔?” “안 쑤시는 데가 있나.” “아이고-.”복란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방 안으로 들어와 갑순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피차 늙은 사이에.” “그래도 내가 좀 더 덜 고장 나고 조금이라도 더 젊잖아. 나중에 내가 아프면 언니도 나한테 이렇게 해줘.” “나중은 무슨. 당장 내일 눈뜰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껄껄껄. 갑순의 농담에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얼핏 들으면 무례할 수도 있는 이런 농담은 늙은이들만의 특권이었다.
그새 갑순의 시선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으로 향했다. 처마 너머로 쉼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퍽 굵었다.
”또 자식들 걱정돼?“ “걱정되지. 애들 사는 데에 홍수는 안 날까,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되네.” “하여튼 산전수전 아무렇지 않게 겪어낸 언니가 이런 쓸데없는 걱정하는 거 보면 신기하다니까. 언니,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런 시골에 사는 우리가 자식들을 더 걱정시키는 게 맞아.” “…….” “도시가 얼마나 더 잘돼있는데.”긴 시간 동안 대구에서 살다 온 복란인지라, 그녀는 도시의 삶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끽해야 한 달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한 읍내에 나가는 게 일상의 전부인 갑순이었다.
어쩌다 자식들이 모시고 도시에 나가도 웬 이 세계에 간 것처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녀였다.
그녀에게 도시란 미지의 세계요, 어쩌면 결코 그녀가 속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옛날에는 비가 많이 오면 옆에 흐르는 강이 불어나서 소도 떠내려오고 사람도 떠내려오고-. 산사태도 많이 나서 집도 묻히고 했었으니까.” “알지, 그래서 고모님이랑 사촌 동생도 그렇게 잃었다고. 언니가 백번은 말해준 거 같은데.”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옅어진다는데.
어찌 그날 느꼈던 공포,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장마철에 대한 공포는 영혼에 새겨진 것처럼, 수많은 괜찮은 장마철을 겪어내도 여전히 갑순의 뼛속까지 새겨져 있었다.
늙은 대로 늙은 자신은 죽으면 만다지만, 갑순은 늘 비가 올 때마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손주와 죽음을 자꾸만 연관을 짓게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지나친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하는 늙은 엄마가 되었을 뿐이었다.
서운함이 섞인 갑순의 시선이 아침부터 아무 전화도 울리지 않은 애꿎은 전화기로 향했다.
비 때문에 할일이 없어진 탓에 비 내리는 풍경만 보고 있자면, 쳇바퀴 돌듯이 지난번 통화로 없애버렸던 걱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언니,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자식들은 그래. 팽팽하게 젊어서 사느라 바쁘지. 그리고 그렇게 바쁘게 잘 산다는 게 복이고.” “어째 늙어갈수록 사람 속이 좁아져.” “몸이 여기저기 고장이 나니까, 자꾸만 누워있게만 되어서 그래. 우리도 바빴던 시절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사실 갑순에 비해 자식 걱정은 덜 한 편인 복란인지라, 해당 사항은 없었지만, 그녀는 공감의 의미로 기꺼이 갑순과 한편이 되어주었다.
“그러게. 이놈의 망할 비나 그쳤으면 좋겠네.” “밭에 나가라도 있어야 잡생각이 덜할 텐데, 그치?” “……” “보일러 좀 틀어줄까? 여름에도 종종 추워하잖아.”나이가 들어가니 체온이 내려가며, 여름에도 종종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는 하는 갑순이었다.
“방에서 이불 덮고 있으면 괜찮아.” ”그래-.“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울 비가 꼭 누군가를 잡아먹으러 온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갑순은 주름진 눈을 감고서 생각했다.
*** 툭, 툭-.볼에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곤히 잠들어 있던 인협이 눈을 떴다.
톡. 그때, 다시 한번 그의 얼굴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뭐야-.”당황한 인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사방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시간은 아침 일곱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지만, 장마철이라 그런지 불이 꺼진 집안은 어둡기만 했다.
인협은 불을 켜고서 집안을 살폈다. 물샌 자국이 난 곳부터 시작해, 족히 서너 군데는 더 물이 새고 있었다.
“아-.”그때 아저씨들이 도와주신다고 할 때 도움받을 걸 그랬어.
집 상태에 관한 걱정이 가득하던 철호와 태욱의 눈빛을 떠올린 그는 거친 손짓으로 뒷머리를 쓸었다.
그는 일단 욕실에서 적당한 크기에 바가지와 부엌 찬장에서 그릇을 가져와 물이 새는 곳에다가 두었다.
집안을 쭉 둘러보니, 물이 새는 곳이 족히 열 곳은 넘었다.
”괜찮나?“이제 막 시작된 장맛비 줄기는 그다지 굵은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두 주 정도는 지속될 비였다.
그리고 더 거세질 빗줄기였고.
“……..”뒤늦게라도 보수를 시작해 볼까 했지만, 집 보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인협이 봐도 장마철에는 공사를 하는 게 아니겠다 싶었다.
일단 버텨보자.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
서울 자취방은 이미 다 정리하고 내려왔고, 본가에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은 그였다.
그렇다고 따로 번듯한 숙소를 구할 돈을 쓰기에는, 프로 게이머 시절 벌어두었던 돈 중에서 가족에게 넘기지 않은 일부만 갖고 있어서 겨우 몇 달 생활비를 하면 끝일 돈이었다.
“정렬이한테 일이라도 같이 나가자고 해봐야 하나.”안 되면 데리고 다니면서 조수로라도 써달라고 해야겠네. 일이라도 배우게.
인협은 짐을 물이 새지 않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며 고민했다.
*** 우중충.장마가 시작된 소원리의 하늘을 교무실 창문으로 내다본 에스더는 이보다 적절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소원 초등학교의 교내는 유독 어둡고 습했다. 이런 기운이 학생들에게도 내려앉는 건지, 이런 날씨인 날에는 유독 아이들이 더 차분해지고는 했다.
조 선생님은 잘하고 계시려나.
남편인 철호와 상의한 후, 결국 조 선생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병가를 내기로 했다. 이 소식에 대해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한 말로 설명을 해주고 있을 터였다.
소식을 들은 본용은 곧바로 병가를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조 선생의 간곡한 부탁에 그녀의 일을 이어받을 에스더에게 추가로 약간의 돈을 더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본용은 발을 빼려고 시동을 걸었던 고 선생에게 에스더를 도와 적어도 두 과목 정도는 맡아달라고 그에게 신신당부를 해주었다.
명색이 교장이어도 학교 운영에는 전혀 관심 없는 줄로만 알았더니, 고 선생의 뺀질거림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동네 어른이자, 아버지와 가장 절친인 본용의 부탁인지라 고 선생은 거부하지도 못한 채 우는 얼굴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중에는 가장 쉬워 보이는 미술과 체육을 날름 골라버린 게 얄미웠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어디냐는 생각에 에스더는 일단 감사하기로 했다.
“음악 시간은 어떡하냐고-.”에스더는 당장 내일부터 맡게 될 과목들을 떠올리고는 눈앞이 캄캄해져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조 선생이 남겨준 교육 자료를 훑어보는 중이었는데, 에스더는 더욱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가르칠 때는 주말에 잠깐 짬 내서 수업 계획을 짜고 자료를 만들면 일주일 동안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과목들까지 가르치자니 날마다 잠을 줄여가며 수업 계획을 짜도 모자랄 판이었다.
“아으아-.”쓰러지듯이 책상에 몸을 기댄 에스더는 우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내뱉은 말이니,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지. 아이들도 배워야 할 것 아니야.
주루룩. 유리창에 빗물이 연달아 부딪쳐 흘렀다.
“네? 부용이가요?”카페에서 일하던 영애는 전화를 받고는 홀 뒤편 룸에서 장부를 확인하다 말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 너 어딨느냐고 묻더라. 그 기집애가 네가 그리울 리는 없고 보나 마나 김 씨네 땅 이야기겠지]“일단 알겠어요. 카페로도 찾아올 수도 있겠네요.”갑순의 적나라한 표현에 영애가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감사해요. 네-.”핸드폰을 내린 영애는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언니, 그게….”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
음악 시간이 끝난 후 교무실. 에스더가 수업하는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너, 대학은 나온 거니?”“네?”“인협이 너, 대학은 나왔냐고.”옆 책상에서 들려온 제환의 깐깐한 목소리에 인협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서른 살 무렵의 제환이나, 마흔 살 무렵의 제환이나. 옹졸하고 짜증 나게 구는 건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더 똘똘 뭉쳐 단단해지기까지 한 옹졸함은 더 답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대학 안 나왔는데요.”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인협이었다. 그의 돌직구에 제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근데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칠 생각을 해?”시골에만 살아서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약아빠지게 굴 줄 전혀 모르는 듯해보여 불쌍해 보이는 지경의 제환의 공격에 인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의 요청이 있어서 맡게 된 건데요.”인협이 에스더를 언급하자마자 제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잡아낸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황 선생님이야 맡은 과목 수가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다지만…. 교장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야, 알아?”“그럼, 황 선생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그전에 형님이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뭐?”“형님이 맡은 과목 수가 해봤자 네 개였고, 영어 선생님으로 임시로 와있는 황 선생님이 맡고 있던 과목 수가 여섯 개는 족히 됐다면서요? 그것도 필수 과목 위주로.”인협의 대꾸에 제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다크서클이 유독 짙어 보이는 탓에 오늘따라 제환은 더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았다. “게다가 형님은 뭐가 억울한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살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관사 주시고, 형님의 월급에 훨씬 못 미치는 50만 원 다달이 받으면서 이 자리를 메꿀 건데요.”“…….”“겨우 몇 시간씩이긴 하지만, 주중 매일 출근인데 이 정도 돈이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방과 후. 아침에 본용으로부터 옆집 관사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에스더가 그것을 인협에게 건네자마자 둘만의 작은 이사가 시작됐다. 7월 초. 오랜만에 잠시 비가 쉬어가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옆집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후에 캐리어 하나를 달랑 바로 옆집으로 옮기는 거였지만 말이다. “진짜로 짐이 이게 다야?” “응.”에스더와 인협은 에스더의 집과 똑같이 생겼지만, 방향만 다른 집안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온기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관사 안은 휑했다. “이사 기념으로 자장면은 대접 못하지만, 짜파게리나 같이 끓여 먹을래?”짐이 든 캐리어를 한구석 벽에 기대어놓은 인협의 제안에 에스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지! 오늘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잘 됐다.” “잘됐네. 소파에 앉아 있어.” “좋아.”에스더는 아직 물건 없이 텅 빈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인협은 능숙하게 움직여, 관사에 있던 냄비를 하나 꺼내서 그것을 씻었다. 생각보다 어깨가 넓네. 에스더의 눈이 인협의 뒷모습을 바쁘게 좇았다. 팔을 뻗을 때 은근히 보이는 근육.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의 선.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차라리 내 취향은 정렬 씨라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성격도 순하고. 마른 안경잡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에스더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잠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이상하게도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협의 뒷모습에 절로 흐뭇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뭐가?”에스더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짜파게리를 끓이던 인협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피식 웃고서 돌아보는 인협의 모습의 잔상이 남아 에스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응시했다. 나,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야,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었던 거지. 단지 그거뿐이야.내가 저 인간을….
“이놈의 여편네가! 요새 내가 조용히만 있었더니!!”포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부터 들려온 거친 음성에 정렬이 집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엄마인 애라와 그 앞에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선 원길이 보였다. 참 익숙하면서 끔찍하고 동시에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늘 유순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정렬의 두 눈에 일순간 분노의 불이 일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혐오해, 도통 화를 내는 적이 없는 정렬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한 아버지 원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정렬이 거친 몸짓으로 신발을 벗고서 뛰어 들어가 애라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인해 거친 숨결을 내뱉는 원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결국 저보다 몸집이 커버린 아들 앞에서는 분노를 삭이고 말 비겁한 그였다. ”네 엄마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무시했다!”그놈의 무시. 정렬이 어렸을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단어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무시했는데요?”애라는 기력도, 말수도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무시할 힘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늘 빼빼 마른 몸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부작거리며 이 집에 유령처럼 존재해왔을 뿐. 일평생 순종적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목소리 내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폭력적인 남편 곁에 꾸역꾸역 머물러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집안에 점심거리 하나가 준비가 안 되어있어!” “아버지가 자주 밖에서 드시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못 하셨나 보죠.”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떡국과 김치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보나 마나 애라는 간단하게 점심만 때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당장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아버지-.” “고 이장네, 본용이 형님네 봐! 마누라들이 몇 분이면 뜨거운 요리 턱턱 내오지.” “그러면 최 씨 아저씨도 보세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조용한 일식당 안. 18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적당한 체구. 안경을 쓴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조봉길 코치님.” “우겸 씨, 안녕하세요.”마스크를 쓴 우겸의 인사에 봉길이 화답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제게 연락을….” “지난 5년 동안 몸담았던 케이비에서 반 쫓겨나듯이 코치직을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우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봉길이 잠시 흠칫했다. 그런 봉길을 기다려주며 우겸은 잔에 물을 따라서 봉길 앞에 놓아주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갑작스러운 인협 씨 퇴출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을까요?” “…….” “승부조작건 말이에요.” “…….”봉길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리지만, 현재로서는 리그 오브 카오스로 전 세계 1위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우겸이었다. 그의 포커페이스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봉길은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신뢰 혹은 불신.모두가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몇몇은 진실을 알고 있는 승부조작건을 우겸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다.특히나 내부에서 모든 진실을 보고 들었던 봉길의 입장으로선. 게다가 우겸은 케이비의 오랜 천적인 원티드의 수장이었다. “저와 우겸 씨와 오며 가며 인사도 나눴기에 일면식은 어느 정도 있고, 제가 우겸 씨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지만 답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이네요.”그가 택한 전략은 보류였다. 우겸의 반응을 보기 위한 보류. 봉길의 긴장한 시선에 미소 띤 우겸의 얼굴이 담겼다. “아, 제가 중요한 사안인데 너무 다짜고짜 여쭤봤죠?” “사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봉길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우겸이 쿡쿡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일단은 봉길 코치님을 제가 옮겨갈 새 팀으로 영입하고 싶어요.” “네? 저를요?” “네, 그리고 인협 씨도 같은 팀 팀
“정렬 씨!” “황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유림과 정결만 남아 있던 학교에 정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깨끗하게 청소된 학교 상태를 고려해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들어온 그였다. “아, 괜찮아요. 비가 진짜 많이 내리죠?” “네, 오늘 일이 좀 바빴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지금 오셨으니 됐죠. 그동안 저도 학교 뒷정리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포터를 운동장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했던 정렬의 머리카락은 거센 빗줄기에 꽤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해봤자 집은 걸어서 1분 남짓이라 퇴근이 급할 것도 없는데요.”에스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 불을 다 끄는 에스더를 지켜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협이 형은요?” “네?”정결의 물음에 우산을 펼치려던 에스더가 멈칫하고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인협이 형,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고 양 목사님께 지난번에 들었거든요.” “아-.”지난번에 목사님이 반찬 전해줄 때 인협이가 집에서 마주쳤다더니. 에스더는 인협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에서 지냈다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녁에 들어오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거든요. 어차피 금방 걸어올 수 있는 거리니까요.” “어? 그럼, 낮에는 물새는 집에서 지내는 거예요?”정렬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한 에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하하하, 낮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인협이 형이 잠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소문이 참 빨리도 퍼지는 동네야. 에스더는 속으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지난번에 이야기 나누는데 악기도 좀 다룰 줄 아신다고 하셔서 잠시 예체능 쪽을 맡길까 하고요. 당장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요.” “그렇군요.”정렬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