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그녀가 뒤로 쓰러지며, 뒤에 있던 원목 수납장에 뒤통수를 부딪친 탓이었다.
“으윽-.”에스더는 밀려오는 두통에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를 벌레 보듯이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인협은 당황한 얼굴로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마당에 소쿠리를 들고 있는 갑순과 그 옆에 선 복란이 보였다.
함께 살며 유독 친하게 지내는 두 사람을 에스더는 소원리 듀오 할머니라고 부르고는 했다.
“너, 너-.” “인협이, 이 몹쓸 놈아!”복란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던 사이, 오이와 애호박, 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집어던진 갑순은 굽어진 허리에도 꽤 빠른 걸음으로 인협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녀의 입술은 노환으로 떨리는 편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격렬한 분노로 인해 더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언니, 위험해!”그러자 복란이 그런 갑순을 가로막았다.
“어디 이 좋아진 세상에 남자가 여자한테 주먹질이야!” “주먹질 안 했어요. 이 사람이 제 팔을 붙들고 놓질 않아서-.” 옛 할머니들이 종종 그랬듯, 갑순의 남편은 술을 마시면 돌변해 그녀를 괴롭게 하고는 했었다.노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나기 직전에는 비교적 순순하게 굴었던 그였으나, 그 아픔이 아직도 생생할 걸 알기에 인협조차도 그런 갑순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그게 뭐! 그렇다고 여자를 때려! 이거 놔, 저 금수보다 못한 놈은 한대라도 때려줘야 쓰겠어-.”
한번 자극당한 갑순의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언니, 진정해. 이 나이에 이 난리 피우면 쓰러져.”복란은 갑순 옆에서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곧 아흔을 바라보는 갑순이 아프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 에스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 제가 먼저 귀찮게 매달리다가 이 사람이 뿌리쳐서 쓰러지게 된 거예요.” “그래?”에스더의 설명에 일순간 갑순의 몸부림이 멈췄다. 그러자 마당에는 급작스러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휴-.”복란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흙바닥에 나뒹구는 채소들을 주워서 인협에게 주기 위해 소쿠리에 다시 담았다.
“자, 갑순 할머니가 너 먹을 거 없을 것 같다고 걱정하면서 밭에서 방금 따온 거야. 그러다가 큰 소리가 나서 우리가 다 와본 거야. 채소는 씻어서 먹으면 되겠다.”복란이 분노가 가시자 멋쩍어하는 갑순 대신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흠흠, 인협아. 내가 오해했네, 미안해-.” “할머니, 아무리 그래도-.”인협은 마치 어렸을 적에 무지막지한 오해를 받고 혼이 난 어린아이처럼 억울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그는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에스더를 의식하고선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열다섯의 나인협이 아니라, 스물다섯 나인협이었으니까.
“저도 여자 때리는 남자들 혐오해요, 할머니.” “그래, 크흠. 미안하다, 인협아.” “그나저나, 황 선생님 뒤통수는 괜찮아요? 저 나무 장에 세게 부딪친 거면 꽤나 아팠을 텐데.”어색한 정적이 잠시 흐른 후 복란이 엉망이 된 분위기를 정리했다.
“하하, 저는 괜찮아요.”
약간 부어올라 혹이 생긴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에스더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소쿠리는 내일 돌려줘.” “우린 먼저 가볼게, 인협아.” “네, 들어가세요.” “들어가세요, 할머니-.”갑순이 옆에 세워두었던 보행기를 밀며 앞장서자, 복란이 그 뒤를 따랐다.
에스더와 인협은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폭풍이 지나간 거지?
에스더는 조용히 눈만 끔뻑거리며 생각했다.
아까 실랑이를 벌일 때까지는 전혀 몰랐으나,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오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다 내가 사왔던 컵 물회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니.
“다시는-.” “…….”굳은 표정을 한 인협이 운을 띄우자마자 에스더가 잔뜩 긴장한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혼나지 않으려는 한 마리의 강아지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는 우리 집에 이딴 식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예의 지키라고요.” “그럼, 그쪽도 빈속에 안주도 없이 술 퍼먹는 거 그만하시던지요.”어어라, 이게 아닌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잘못한 걸 너무나도 잘 알아서 모든 걸 인협에게 순순히 맞추리라 다짐했던 에스더였다.
그러나 입이 말을 듣지 않고서 멋대로 폭주해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내뱉어버렸다.
인협의 따가운 시선이 제 관자놀이에 꽂히는 걸 느낀 에스더는 그 시선을 최선을 다해 모른 척을 했다.
“아, 날씨 좋다~.” “예의 지켜요. 다음에 이렇게 찾아오면-.” “그쪽이 제가 말한 거 지킬 생각 없으면, 저도 지킬 생각 없어요. 그렇게 술 퍼마시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 외딴 마을에서 누군가는 한 번씩이라도 살펴봐야 제때 발견되지 않겠어요?” “마치 내가 곧 죽을 사람이라는 단정이라도 지은 것처럼 말을 하네요?”인협의 비꼬는 어투에 에스더는 당당하게 굴어보기로 작정했다.
쫄지 말자. 이 사람은 그냥 불만 많은 투덜이일 뿐이라고.
갑순 할머니 앞에서 잠시나마 삐져나왔던, 그의 유순한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한번 믿어보기로 한 에스더였다.
“그쪽이 먼저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놓아서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고요?”아, 워딩이 너무 셌나.
에스더는 인협의 말에 단숨에 받아쳐 놓고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살면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정도로 강하게 군 건 처음이었지만, 그녀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강하게 군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아는 척을 잘 해대는 편인가 봐요.”끼이익, 쾅.
인협의 말을 마지막으로 에스더의 면전 앞에서 철문이 굳게 닫혔다.
황당한 표정으로 에스더는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속으로 그를 향한 욕을 한 바가지 읊조리고는 뒤로 홱 돌아섰다.
험한 말을 굳이 입 밖으로까지 내뱉지 않은 것은, 그녀가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찰나 동안 미세하게 흔들렸던 인협의 눈 때문이었다.
직감적으로 어쩌면 그녀의 말이 칼같이 날카로운 쇠붙이와 다름없는 인협의 마음을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상대를 찢어발기려는 듯한 사나운 맹수의 나약한 면을 발견한 기분은 매우 묘한 것이었다.
더 이상 그의 약점을 건드리면, 어쩌면 저 사나운 사람은 그 사실을 못 이기고서 정말로 자신을 해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걱정도 함께 찾아온 탓에 그녀는 여기서 멈추기를 택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스더는 설거지를 마치고선 부엌 옆에 나 있는 작은 창의 블라인드를 열었다.
보통 수풀이나, 폐가에 가까워 보이는 김 씨네 집이 바로 내려다보여서 평소에는 굳게 닫아놓는 블라인드였다.
스으윽.
블라인드가 열리자마자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불이 들어온 인협의 집 부엌 창문이 보였다.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아하니, 집의 거실 공간에서 주로 생활하는 그가 불을 켜둔 모양이었다.
“아직은 살아있나 보네.”낮의 실랑이를 떠올린 에스더는 그 불빛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광경을 본 에스더는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낮의 일을 겪고 나서는 인협은 그녀에게 또 다른 의미의 시한폭탄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는 인협이 언제 마음속에 쌓여있는 분노를 터뜨릴지 모를 시한폭탄이었다면, 이제는 언제 자신을 놓아버릴지 모를 그런 또 다른 의미의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던, 어둡고 엉망이었던 집 내부와 그것을 등지고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태도로 일관하던 인협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난 행동에 관한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사과나 변명도 듣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 하나가 자꾸만 가슴 한구석에 남아서 마음이 먹먹해지고는 했다.
나와 또래처럼 보이는 사람이 삶에 대한 의지를 다 놓아버린 것에 대한 일종의 충격 때문이려나.
정체를 도저히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에스더는 다시 블라인드를 내려버리고 말았다.
일렁거리는 미세한 불빛만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이 절로 심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지나친 관심도, 아는 척도 금물이지. 우리가 그럴 사이도 아니고.”애써 혼잣말로 잡념의 마침표를 찍고 돌아선 에스더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인협이라는 작은 돌멩이가 박혀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조용한 일식당 안. 18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적당한 체구. 안경을 쓴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조봉길 코치님.” “우겸 씨, 안녕하세요.”마스크를 쓴 우겸의 인사에 봉길이 화답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제게 연락을….” “지난 5년 동안 몸담았던 케이비에서 반 쫓겨나듯이 코치직을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우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봉길이 잠시 흠칫했다. 그런 봉길을 기다려주며 우겸은 잔에 물을 따라서 봉길 앞에 놓아주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갑작스러운 인협 씨 퇴출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을까요?” “…….” “승부조작건 말이에요.” “…….”봉길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리지만, 현재로서는 리그 오브 카오스로 전 세계 1위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우겸이었다. 그의 포커페이스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봉길은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신뢰 혹은 불신.모두가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몇몇은 진실을 알고 있는 승부조작건을 우겸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다.특히나 내부에서 모든 진실을 보고 들었던 봉길의 입장으로선. 게다가 우겸은 케이비의 오랜 천적인 원티드의 수장이었다. “저와 우겸 씨와 오며 가며 인사도 나눴기에 일면식은 어느 정도 있고, 제가 우겸 씨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지만 답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이네요.”그가 택한 전략은 보류였다. 우겸의 반응을 보기 위한 보류. 봉길의 긴장한 시선에 미소 띤 우겸의 얼굴이 담겼다. “아, 제가 중요한 사안인데 너무 다짜고짜 여쭤봤죠?” “사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봉길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우겸이 쿡쿡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일단은 봉길 코치님을 제가 옮겨갈 새 팀으로 영입하고 싶어요.” “네? 저를요?” “네, 그리고 인협 씨도 같은 팀 팀
“정렬 씨!” “황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유림과 정결만 남아 있던 학교에 정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깨끗하게 청소된 학교 상태를 고려해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들어온 그였다. “아, 괜찮아요. 비가 진짜 많이 내리죠?” “네, 오늘 일이 좀 바빴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지금 오셨으니 됐죠. 그동안 저도 학교 뒷정리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포터를 운동장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했던 정렬의 머리카락은 거센 빗줄기에 꽤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해봤자 집은 걸어서 1분 남짓이라 퇴근이 급할 것도 없는데요.”에스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 불을 다 끄는 에스더를 지켜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협이 형은요?” “네?”정결의 물음에 우산을 펼치려던 에스더가 멈칫하고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인협이 형,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고 양 목사님께 지난번에 들었거든요.” “아-.”지난번에 목사님이 반찬 전해줄 때 인협이가 집에서 마주쳤다더니. 에스더는 인협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에서 지냈다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녁에 들어오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거든요. 어차피 금방 걸어올 수 있는 거리니까요.” “어? 그럼, 낮에는 물새는 집에서 지내는 거예요?”정렬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한 에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하하하, 낮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인협이 형이 잠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소문이 참 빨리도 퍼지는 동네야. 에스더는 속으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지난번에 이야기 나누는데 악기도 좀 다룰 줄 아신다고 하셔서 잠시 예체능 쪽을 맡길까 하고요. 당장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요.” “그렇군요.”정렬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아,
“아으, 으으-.”곤히 잠들어있던 에스더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인협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채로 옆에 보이는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도둑을 아프게 만들 수 있겠지.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보이는 거실에는 다른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으으, 아니야. 그만-.” “인협아-.”에스더는 스탠드를 내려놓고서 인협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룩-. 도통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협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인협아, 일어나봐. 야-.”에스더가 인협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인협이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떴다. “괜찮아?”아직도 꿈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인협은 눈이 살짝 풀린 채로 에스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절망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에스더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에스더도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몽 꿨어?”에스더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서 에스더는 인협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그러자 인협이 순순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무슨 악몽이길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줘?”에스더의 음성은 인협을 달래듯이 절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응, 고마워.”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물 한 잔을 준비해 그에게 갖다주었다. 묵묵히 그녀만 기다리던 인협은 그것을 받아서 들자마자 몽땅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에스더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괜찮아?”잔을 내리며 한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꺄아아-.방음이 잘 된 집 덕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인협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무래도 열려 있는 학교 창문을 통해 들려온 소리인 듯싶었다. 날이 워낙 우중충한 데다가 커튼까지 잘 처져있어서 그런지, 한낮의 관사는 꽤나 어둑어둑했다. 체감상 눈을 아주 잠시 감았다가 뜬 것만 같은데, 몸은 굉장히 개운했다. 얼마 만에 잠을 뒤척이지 않고 편안하게 잔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태와 감독과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서는 사실 그 좋던 숙소에서조차도 잠을 뒤척이기 일쑤였으니까. “후-.”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나가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네. 인협은 괜한 머쓱함에 제 차림과 머리카락을 슬쩍 확인했다. 다행히 지나치게 추한 모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끼야야-! 신난 아이들의 소리에 인협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에서 색이 입혀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성가시게 다가오던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유심히 감상해 볼 만한 것이 되었으니까. “집 상태를 한번 확인은 해봐야 하나.”그는 빗소리를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짐도 어느 정도 챙겨는 봐야 할 터였다. 곧 에스더의 옆집으로 이사 오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직 아이들이 수업 중인 거면, 여기서 나가서 샛길로 내려가면 학교에서 눈에 띄지는 않을 텐데. 인협은 그곳까지 생각이 닿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식탁 위에 차려진 단출한 아침 식사가 보였다.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어. 점심으로 먹을만한 반찬들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밥이랑 같이 챙겨 먹어. 굶지 말고!]꾹꾹 눌러쓴 동글동글한 글씨체에 인협이 피식 웃었다. 에스더의 들뜬 음성이 귓가에 직접 울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준 건 할머니 이후로 처음이었다. 서울에 가서는 가족들과 제대로 시간을 보낼 새도 없이 바로 팀 합숙 훈련에 들어갔으니까. 인협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냉장고에서 반
천둥소리와 인협의 흐느낌이 모두 잦아든 후. 집 안에는 세찬 빗소리만 들려왔다. “일단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요.”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에스더의 손을 붙들고 그녀를 뒤따라서 인협은 질퍽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그가 미끄러질 때마다 에스더는 그의 손을 강하게 붙들어주었다.신기한 여자였다. 덩치가 훨씬 큰 자신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붙들어주는 걸 보면. 관사의 문이 열렸고, 늘 은은하게만 맡아지던 에스더에게 배어있던 향이 인협의 얼굴에 온기가 되어 훅 다가왔다. “들어와요.”혼자서 지내기에는 널찍한 크기의 관사는 깔끔해 보였다. 젖은 상태로 머뭇거리는 인협을 알아차린 에스더는 재빨리 욕실로 향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많이 춥죠? 일단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몸 좀 녹이면서 씻을래요?” “갈아입을 옷이-.” “찾아보면 입을만한 옷이 좀 있을 거예요.” “네….”인협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곧장 에스더의 인도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오랜시간동안 젖어있던 몸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에, 그도 물의 온도에 몸을 내맡기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예 욕조에 몸 좀 담그고 나와요.” “네.”욕실 문 바깥에서 들려온 에스더의 권유에 인협은 순순히 답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으로 제 바닥을 내보였다는 사실은, 은근한 위안이 되어주었다.에스더 앞에서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 있는 사람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주 편리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바닥을 보았으니까.온수를 튼 인협은 욕조에 앉았다. 작지 않은 체구의 그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욕조의 크기는 적당했다. 물의 온기에 몸을 내맡기자, 오랜 시간 동안 식어 내려있던 체온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좋다-.”그는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뒤에 있는 벽에 기대었다.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할머니의 낡은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관사는 최근에 인테리어를 모두 새로 한 건지, 매우 신식인 데다가 깔끔했다.그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