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으아아아악-!!!!”
인협이 놀랄 새도 없이 여자로 보이는 사람이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 갑작스럽고 우렁찬 비명에 인협은 놀라지도 못한 채,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다.
젊은 사람 같은데, 이 마을에는 왜?
인협은 호기심에 안경을 집어 들어서 그것을 바로 썼다. 그러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눈과 콧구멍을 있는 대로 크게 개방한 여자 하나가 보였다.
까무잡잡한 편인 피부에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지만, 팔다리는 얇고 긴 편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어딘가 탄탄한 인상을 주었다.
모델 한혜지를 닮은 거 같은데? 아주 좋게 말하면 피겨 여신 김윤아와도 언뜻 닮은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눈에 띄는 미인상은 아니었으나, 매력이 충분히 있는 인상이었다.
182센티미터인 인협과 눈높이가 많이 다르지 않은 걸 보아하니, 키가 적어도 170센티미터는 넘는 듯해 보였다.
“어, 어-.”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잠시 인협의 헐벗은 상체로 내려갔다가 황급히 그의 눈으로 돌아왔다.
“전 아무것도 못 봤-.” “누구신데 남의 집 옆을 막 다니십니까?”얼굴이 붉어진 채로 황급히 변명하려던 여자의 말을 인협이 막았다. 그러자 여자는 천천히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또 다른 충격으로 인해 헤벌어진 입이 보였다.
무슨 뻐끔대는 붕어 같네. 그 모습에 인협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저, 저-.” “……”흔들리는 동공.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던 여자는 이내 더 깊이 팬 인협의 미간 주름을 보고는 황급히 제정신을 붙들었다.
“아, 저는 저기 소원 초등학교 관사에 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름은 황에스더예요. 나이는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입니다.”한국 나이? 에스더의 이질적인 소개법에 인협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애석하게도 그 표정 변화는 에스더의 오해를 사, 그녀의 어깨를 한껏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죄송해요. 이곳에 사람이 사는 줄 알았더라면 돌아갔을 거예요. 그동안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해서 여길 지름길로 많이 다녔거든요. 아시다시피 여기가 관사에서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길이잖아요.”에스더는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가파른 턱 위에 풀숲 사이로 보이는 관사 건물을 가리켰다.
인협의 냉정한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쫓았다가 이내 궁지에 몰린 한 마리의 쥐 같은 애처로운 미소를 짓는 에스더에게로 향했다.
“그쪽한테 여기가 지름길이고 뭐고 제 알 바는 아닙니다. 앞으로는 지나다니지 마세요.” “아-.”따지고 보면 담장 너머로 나 있는 길인데, 혹시 이 길로 지나다니는 것도 안 되나요? 라고 묻고 싶어진 에스더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철옹성처럼 보이는 인협의 차가운 표정을 보며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회적 미소를 지었다.
웬 듣도 보도 못한 싸가지가 왔어. 분명히 갑순 할머니가 예전에 여기에 되게 좋으신 분들이 살았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에스더는 속으로 인협을 매섭게 욕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미소를,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보는듯한 표정을 짓는 인협의 모습에 그마저도 약간 희미해졌지만.
“이 집에 사시던 할머니 손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꼴 자주 보고 싶지 않은 거면 앞으로는 조심하세요.”에스더의 의문 가득한 눈빛을 읽어낸 인협의 대답에 그녀는 약간 찔렸지만, 그래도 미소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아, 네. 그럼요. 혹시 그쪽은-?”에스더가 펼친 양손을 조심스럽게 인협 쪽으로 향하게 하자, 인협은 무슨 의미냐는 듯한 눈빛을 그녀에게 쏘아댔다.
“혹시 이름이랑 나이가?” ”알 거 없어요. 어차피 마을 사람들이랑 가까이 지낼 마음도 없으니까, 신경 끄고 사시죠.”말을 마친 인협은 에스더를 힐끗 쳐다보고는 수건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낡은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에스더는 입을 떡 벌린 채로 할 말을 잃었다.
진짜 그냥 들어가 버린 거야? 사람이 저 정도로 싸가지가 없어도 될 노릇이냐고?
에스더는 경악한 얼굴로 한참 동안 그곳에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제 갈 길을 갔다.
“흥, 내가 다시는 여기를 지나다니나 봐라.”그렇게 집을 사수하고 싶으면, 아예 오늘 온다고 미리미리 광고를 해놓던지. 다 알 수 있게 어디에 써 붙여 놓던지!
어차피 오랫동안 주인 없는 집이라 소원리에서 지내게 된 지난 일여 년간 마음껏 지나다녔던 길인지라, 에스더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에스더는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동네 길을 걸어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아주 볼품없는 몸매더구먼. 참나, 그렇게 형편없는 몸매는 한 트럭 보여줘도 싫다고. 그냥 남자 알몸을 갑자기 봤다는 사실에 놀란 거지-.”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갑게 그녀를 쏘아보던 남자의 눈빛을 떠올린 에스더는 더 세게 쾅쾅거리며 발을 굴렀다.
짜증 나. 그런 볼품없고 부정적인 인간한테 이런 취급을 받다니. 두고 봐. 이 소원리에는 안 퍼지는 소식이나 소문이 없으니까.
“그쪽 이름쯤이야 내일이면 마을에 다 광고되겠지. 흥! 주제에 되게 비싸게 구네. 지가 무슨 유명 인사라도 되는 줄 아나.”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보기에는 평균 이하의 외모를 한 인협을 떠올린 에스더는 이름 모를 남자를 향한 괘씸함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이것이 소원리의 앙숙이 될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열기가 가득한 리그 오브 카오스 월드컵 결승전이 치러지던 경기장.
총 팀스코어 2대1의 상황으로 케이비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5판 3선승제로 결정지어지는 결승전이었기에, 지금보다 한 스코어라도 더 내어주면 지난 1년간 모두가 치열하게 준비해 왔던 월드컵 경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역시 케이비는 만년 그래왔듯이 2등에 그치고 말 것이었다.
케이비 팀은 국내 부동의 1위 원티드와 그 중심을 지키고 있는 월드 랭킹 1위 카이 선수의 그림자에 다시 한번 눌려버린 2인자라는 타이틀을 벗기를 바라왔다.
한때는 카이 선수를 잇거나 뛰어넘을 선수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레브이자 인협은 그 누구보다 이 기회가 간절했다.
“아아! 케이비!!! 오늘 드디어 레브 선수의 활약으로 첫 월드컵 우승을 따내는 날일까요?!” “레브 선수가 아주 미쳐 날뛰는 중입니다!”비등비등한 상황 속, 경기는 치열하고도 팽팽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이 뒤늦게 케이비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찰나의 순간들이 이어지고, 경기 속 인협의 활약은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아, 케이비!! 이제 마지막 포탑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역전도 가능하겠어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승기를 완전히 가져갈 수 있겠는데요.” “원티드에서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해설자의 흥분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자, 마지막 마무리 들어가자. 지금이다-.”원티드의 다섯이 모두 마지막 포탑 주변을 지키기 위해 집결해 있었다.
그 주변을 맴돌며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던 때.
케이비의 리더인 기태가 지시를 내리자마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인협이 팀 연습 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야, 먼저 튀어 나가면 어떡해!” “어-?”하지만 그 순간, 기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인협이 다른 이들보다 미세하게 앞으로 튀어 나가 있었다.
뭉쳐서 공격에 들어가야 유리할 상황에, 인협 혼자서 동떨어지게 된 것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분명 연습 때는 바로 들어가자고-.
이상함을 감지할 새도 없이 어느새 다른 팀원들과 거리가 벌어져 있었고, 인협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걸 직감했을 땐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원티드의 세 선수가 단숨에 그에게 달려들었고, 인협의 모니터에는 곧 리스폰 화면이 떠 있었다.
“아아! 이게 뭔가요!!”가장 앞장서서 상대 팀을 공격해 줘야 할 원딜이자 공격력이 가장 강한 포지션인 인협이 사라지자, 원티드 팀이 다급하게 뒤따른 나머지 케이비 팀원들을 집어삼키는 건 한순간이었다.
참패. 다섯 모두가 황망한 얼굴로 발이 묶여버렸다.
원티드 팀이 일제히 포탑들을 부수고 케이비가 지켜내야 하는 본진까지 진출했고, 한순간에 중심을 모두 다 잃어버린 케이비로 인해 경기 분위기가 뒤집혀버렸다.
그렇게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기어이 회복하지 못한 채로 케이비는 마지막 게임을 내어주고 말았다.
“와아아아-!!” “아, 케이비! 이게 뭡니까!”이번에도 월드컵 결승전은 원티드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케이비를 응원하던 팬들의 황망한 표정보다 더 참담한 얼굴로 헤드셋을 벗어 내린 케이비 팀은 무대에서 내려와 한 줄로, 대기실로 내려왔다.
“야, 이 X신아!”절망스러운 심정으로, 대기실로 내려가자마자 케이비의 감독인 정현의 욕지거리가 가장 먼저 인협에게 꽂혔다.
“내가 몇 번을 말해! 팀원들보다 그렇게 네가 잘난 거 같아? 어? 왜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해-.” “그게-.” “왜 다른 애들보다 빠르게 튀어 나갔냐고, 새X야!”인협은 억울한 마음을 갖고서 오더를 내렸던 기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푹 숙인 기태는 꾹 닫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부족한 팀원을 향한 질책을 다 받아내겠다는 듯한 숭고해 보이는 그 태도에 인협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인협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아냥거리고, 그 누구보다 날 선 눈빛으로 그를 질타했을 그였다.
그러나 지금 기태는 그 누구보다 겸손해‘보이는’ 리더였다. 인협의 시선이 천천히 각 팀원에게로 옮겨갔다.
모두 화도 나고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 패배의 원인은 너인 게 명확하니, 굳이 내게 그 이유를 묻지는 말라는 표정이었다.
“뭐? 기태랑 애들은 왜 쳐다봐? 어? 또, 또 똑같은 변명을 하려고? 기태가 지시를 잘못 내렸다고? 다른 애들이 또 연습 때처럼 안 했다고?” “……….” “어?! 말 좀 해봐, 이 새X야!”감독의 폭언이 이어지자, 인협은 순간 기태와 그의 옆에 선 준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발견했다.
또 일부러 그런 거야.
인협은 점점 더 노골적이게 되어가는 기태와 준영의 따돌림에 기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반년 전쯤부터 시작된 묘한 따돌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협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가.
그 이유가 실력과 인기 차이로 인한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만큼 별다른 이유 없는 괴롭힘이었다.
거세지는 괴롭힘과 그 사정을 모르고 인협만 밟아대는 감독의 만행에 나머지 두 팀원도 결국 침묵하며 그들의 괴롭힘에 가담하고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 그것이 바로 팀 내 인협의 포지션이었다.
세간에는 알려질 일도 없을, 그런 비참한 자리. 세상은 그를 케이비에 가서 몰락한 선수 취급을 할 뿐이었다.
아니면 빛나던 순간 케이비에 영입되어 온 팀을 함께 추락시키고 있는 문제아 취급이라든지.
“감독님, 진정하세요.”케이비의 코치인 봉길이 인협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인협에게 매섭게 다가서는 정현을 겨우 막아섰다.
그나마 케이비 팀 내에서 공평히 인협을 대해주고 그를 위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전성기 때 워낙 이름을 떨쳤던 봉길의 실력 덕분인지, 아니면 하는 것 없이 기합만 시키는 정현을 대신해서 살뜰하게 팀을 꾸려나가는 봉길의 쓸모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현은 봉길에게만큼은 조금 부드러웠다.
“아휴, 저 새X는 아주 구제 불능이라니까. 왜 쟬 아직도 빨아주는 애들이 있나 몰라-.”정현은 거친 말을 남기고는 마지막으로 인협을 죽일 듯이 쏘아봤다.
늘 증명하려고 애를 썼으나, 팀의 미묘한 따돌림은 그의 발목을 늘 잡았다.
또 기사가 나겠구나.
의 떨어진 기량과 오판을 신나게 떠들어대고 씹어대겠지. 인협은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작년에 국내에서 공공연한 2인자 팀인 케이비로 이적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이 게임판에서 잘 버텨내서 팀을 1인자의 자리에 올려보겠노라고.
그러나, 그 꿈은 이내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이제는 선수로서 생명 유지만 할 수 있어도 감지덕지할 터였다.
쾅. 정현과 그를 달래려 애를 쓰는 봉길이 대기실 밖으로 나가고 난 뒤에는 정적이 흘렀다.
“야, 똑바로 안 하냐?”팀원끼리만 남겨지자마자 태세 전환을 빠르게 한 기태의 비아냥거리는 어투에 날이 선 인협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인협의 분노 섞인 시선이 그들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기태와 준영은 파하하, 하고 그런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어쭈? 주제에 꼴아봐? 야, 너만 아니었어도 오늘 우리 우승했어, 새X야.” “도대체 저한테 이렇게까지 굴어서 얻는 게 뭡니까?” “글쎄?”참다가 날린 인협의 질문에 기태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냥.” “‘그냥’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한 사람의 커리어를 망쳐도 되는 겁니까?” “아,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네. 네가 우리 커리어를 망친다는 생각은 안 들고?”기태의 당당한 태도에 인협은 주먹을 더 꽉 쥐었다.
기태가 이리도 당당하게 굴 수 있는 이유는, 팀을 스폰서해주는 회사의 임원진에 그의 아버지가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었다.
공공연한 비밀 덕분에 팀 내 사람들은 기태 앞에서 티 나게 굽신거리고는 했었다.
유일하게 순수 실력으로만 코치 자리를 얻어내었던 봉길만은 제외하고.
“잘 생각해. 여기서 누구 한 명만 빠지면 다 좋아질 거 같으니까.”낄낄. 마지막으로 인협을 비웃어준 기태와 준영도 대기실을 나갔다.
“……”숨 막히는 정적 속. 양측 눈치만 보며 조용히 있던 나머지 두
팀원은 자리를 떠버렸다. “후우-.”진짜 나만 떠나면 아무 문제가 없어지는 건가.
인협은 쓰러지듯이 대기실 소파에 앉으며 생각했다.
케이비 팀의 제일 가는 실력자가 인협이기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점점 이러한 생각은 그를 좀먹어가고 있었다.
지독한 최면에 걸려들듯이, 그 생각은 강하던 인협을 서서히 잠식해 갔다.
똑똑. “미치겠네.”거친 몸짓으로 이불 위에서 돌아누우며 인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물이 차오른 통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요 며칠 동안 인협의 불면의 이유였다. “아우씨-.”반복되는 소음에 인협은 거친 몸짓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어렴풋한 달빛을 의지해 그는 벽 한구석을 노려보았다.며칠 동안 이어진 불면에 화가 났으나, 애꿎은 집에다가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두운 밤이면, 제 처지가 유독 깊게 느껴지고는 했다. 누가 더럽게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꼭 끼어버린 기분. 다시 오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X 같네.”이런 감정이 밀려올 때면 인협의 인생 전체가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기분이 들면서, 더 이상 살아도 이런 어두운 터널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대한민국에 리그 오브 카오스의 2인자였으나, 그 옷을 빼앗겨버린 지금은 뭣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늘 훈련에 참석하느라 바빠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겨우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그의 마지막 방패였다.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할 만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이름이었다.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날마다 밤낮없이 게임만 해댄 경험은 지금의 인협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그 시간 동안 차라리 대학이라도 갈 걸 그랬나. 인협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던 자신의 삶의 궤도가 늘 후회스러웠다. 바보같이 내일이 없을 것처럼 외길만 파서는. 그렇게 성실하게 외길만 파면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고, 결과로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과거의 자신을 인협은 힘껏 비웃었다. 그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이 한심하기가 짝이 없었다. “미련한 새X.”세상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을 가장 강하게 손가락질해야 일종의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인협은 늘 자괴감이 들 때마다 나서서 자신을 비난했다. 나는 이미
“끄으응-.”조 선생을 보낸 후, 관사로 돌아온 에스더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관사 부엌과 거실 공간을 서성거리고 있었다.아, 괜히 큰소리친 건가. 조 선생이 맡은 과목은 일단 고 선생이 맡은 수학, 과학, 그리고 에스더가 맡은 영어를 제외한 과목 모두였다. 국어, 사회,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게다가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까지. 교장인 본용이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 걸 보면 사실상 학교의 모든 업무를 조 선생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조 선생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학교 관련 업무는 딸인 유진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일곱 과목…. 일곱 과목-.”에스더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을 떠난지라 한국 과정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애초에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교육 과정이 많이 바뀌었을 터였다. 게다가 소원리 초등학교 특성상, 아이들에 맞춰서 그녀가 준비해야 할 과정은 다양했다. 전교생은 열 명 남짓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골고루 있었다. “아으으-. 그래, 일단 과목 중 두 개 정도는 고 선생님이 맡아주겠지. 사람이라면 말이야.”정말? 힘없고 비열한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긴 고 선생의 심드렁한 얼굴을 떠올린 에스더는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안 한다고 해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그는 당장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충분히 못 견뎌 할 위인이었다. “후우, 그럼 다섯 과목.”예체능만 누구한테 부탁할 수 없나? 에스더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음악과는 정말 연이 없다는 것. 심지어 노래도 못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던 조 선생의 음악 교실에는 전자피아노와 노래가 필수였다. 때때로 그녀는 창고에서 사물놀이를 꺼내 와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했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렇다고 고 선생도 이렇다고 할 음악적인 재능도 없었다. 당장 며칠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볼 만했지
같은 날 점심시간 무렵. 카페가 유독 바쁜 날이라 카페 사장인 아내 영애를 도우러 출근한 태욱이었다.그는 가게 일을 돕다가 잠시 한산해진 틈을 타 커피 한잔을 하며 쉬는 중이었다. “철호!”태욱은 그때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뜻밖의 손님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비싼 커피보다는 인스턴트커피가 제 입맛에는 제격이라며 읍내에서 일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는 카페에 절대 들리지 않던 철호였다. 대개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철호의 얼굴이었지만,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서글서글해지는 얼굴이 웬일로 가장 친한 태욱을 발견해 내고 나서도 여전히 굳어있었다. 어딘가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듯한 철호의 모습에 태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태 봐왔던 철호의 모습 중 새로운 모습이었다. ”태욱아.” “웬일이야, 여기에는? 철물점은?”카페 한구석에 빈자리에 앉아 있던 태욱 맞은편 의자에 철호는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가 풀려버린 사람처럼. “태욱아.” “커피 한잔 내려줄까? 달달하고 따끈한 거로?”평소에 펄펄 끓는 물로 만든 인스턴트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하는 철호였다. 뜨끈한 기운이 몸을 데워줘서 좋다나. 그런 철호의 취향을 아는 태욱은 인스턴트커피와 얼추 비슷한 달달한 라떼를 만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원한 걸로 내려주라. 내 속에 천불 좀 끄게.” “뭐?” “……..”놀란 태욱이 되물어도 철호는 말없이 카페의 자랑인 바다 풍경만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잠시 답을 거부하는 그 옆모습을 읽어낸 태욱은 바로 향해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영애가 이 카페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만 고생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태욱은 그녀 옆에서 부지런히 카페 일을 배워서 그녀를 보좌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고정으로 돌릴 직원이 생겨난 데다가, 갑자기 맡게 된 영애의 조카들 때문에 태욱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 여보? 커피 한잔만 하고 바로 집에 들어간다면서?”카운
주중 어느 평범한 날 낮.“아니, 거기 김씨네 첫째 손주 만나봤나?”“아휴, 말도 마. 성질이 어찌나 고약한지. 지난번에는 지나가다 나를 맞은편에서 이렇게 딱 맞닥뜨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나가더라니까-.”“하여튼, 그 버르장머리 보면 김 씨 아주머니네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거야.”고 이장의 부인 심 씨가 부쳐다 놓은 전 몇 장을 중간에 두고서 막걸리와 함께 어른 몇이 함께 밭일을 하던 차림으로 새참을 먹고 있었다. 6월 중순으로 치닫는 시간 속 햇볕은 매우 뜨거웠다. 멋보다는 기능에 더 치중한 모자나 토시 같은 걸 잔뜩 걸친 모두는 고 이장의 넓은 밭 한 귀퉁이에 그늘진 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의 멤버는 고 이장, 심 씨, 소원 초등학교 교장 구본용, 그의 부인 정 씨, 그리고 정렬의 아버지 원길이었다. 여기다 종종 최 씨까지 함께 자리하고는 했는데, 최 씨의 밭은 동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가게 핑계로 밭일 품앗이에서 종종 제외되고는 했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고 이장의 밭에 나 있는 물꼬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6월 말에 찾아오는 끈질긴 장마 때문에 소원리는 6월을 기점으로 많이 바빠졌다. 이전해 장마로 인해 모양을 잃은 물꼬를 보수하고, 그곳에 있는 이물질들을 잘 치워줘야 장마철에 밭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서로의 잔에 채워주며 그들은 아침 노동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아휴, 매년 도와줘서 고마워요.”“아이, 우리 형님들 일이면 나서서 도와야죠.”심 씨는 원길의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원길은 쑥스러워하며 대꾸했다. “크으-.”원길이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키자, 심 씨와 정 씨가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길이 거나하게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온 마을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김 씨 아주머니네 첫째 손주가 어떤데 그래요? 어렸을 땐 그래도 고분고분하더니만.”원길의 질문에 최근에 인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포터는 열심히 내달렸다. 읍내로 나가던 길의 차 안 분위기와 돌아오는 길의 차 안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차 안은 여전히 고요했으나, 에스더와 인협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많이 완화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직접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으나,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있었다.서로가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서로가 아닌 정렬을 향해 보내던 따스한 모습들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심어준 듯싶었다.정렬 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사람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던데. 묵묵히 창밖만 내다보던 에스더는 치킨집에서 보았던 인협의 여러 모습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 앞에서나 다른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성격 파탄자처럼 굴던 그가 유일하게 정상인처럼 보이던 시간이었다.저 사람도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인협을 속으로 마음껏 비웃고 미워하던 시간만큼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인협이 소원리로 오게 된 이유를 가볍게 치부했던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저 사람에게도 타당하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몰라, 라는 생각과 함께.어느새 포터는 소원리 입구로 진입했다. 차 한 대만 겨우 지나다닐 만한 길을 어둠 속에서도 정렬은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그만큼 이 동네에 익숙한 그였다. “어어-.”그때 포터가 소원 초등학교 교문 앞을 지나쳐 내리막으로 향한 탓에 에스더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아, 형 먼저 내려주고 선생님 내려드릴게요.” 정렬이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인협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늦은 시간에 핑계를 대고 관사 앞까지 걸어가서 데려다주기 딱 좋을 터였다. “응, 나 먼저 내려줘.”물론 에스더에게 정렬이 아깝다고 생각한 인협이었지만, 저 정도로 좋아 죽으려는 정렬의 마음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협의 말에 정렬은 재빠르게 인협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앞에 차를 세웠다
신화읍의 어느 한 옛날 통닭집.다섯 자리 남짓 있는 홀 한구석에는 세 사람이 앉아서 치킨을 시켜두고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에스더와 정렬만 신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인협은 묵묵히 500cc 잔을 말끔히 비워내는 중이었다.정렬은 앞에 콜라를 두고 있었다. 술만 들어가면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로 인해 정렬부터 시작해 그의 동생들까지도 술이라면 입에 대기도 싫어했다. “그래서 유림이가요-.” “하하하-.”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정렬의 막둥이 동생들의 학교생활 이야기에 인협은 조용히 술잔을 다 비워냈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어쭙잖게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면, 인협은 다시는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터였다. 그러나, 서로로 인해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한 두 사람을 인협은 묵묵히 구경만 하면 됐다. 사실 에스더가 주로 떠들고, 정렬은 떠드는 에스더를 사랑스러워하며 중간중간에 그녀가 필요한 것을 굳이 말을 하거나 내색하지 않아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게 약간 힘든 부분이기는 했지만, 오랜만의 나들이에 나쁘진 않았다. 에스더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렬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한순간도 가시지를 않았다.아무래도 데이트에 낀 건 맞는 거 같은데. 그럼, 고제환은 도대체 뭐지? 인협은 날개 부위를 뜯으며 에스더와 인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은 어쩌다가 소원리로 다시 오게 된 거야?”다 뜯은 날개뼈를 뼈통에 집어넣으려던 인협은 정렬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아-.”어렸을 적, 교육을 위한다는 아버지의 횡포로 인해 컴퓨터는커녕, 인터넷도 없는 집에서 살던 정렬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렬은 돌아가는 세상사에 유독 관심 없어 했었다. 인협은 프로게이머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죽어도 숨길 예정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 이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어느 날 불현듯이 소원리가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진실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