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도국은 의아했다.
그저 우연의 일치가 겹쳐 신하늘의 곁을 맴돌며 도와준 줄 알았던 차준호가 아니었나.
“도국아, 김희주 그 여자 진짜 악질 중의 악질이야. 이번에 그렇게 눈 뒤집혀서 날뛴 거, 다 시커먼 속셈이 있어서 그래.”
속셈이라니. 도국은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이동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올 다음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그게 뭔데?”
주변을 극도로 살피며 눈치를 보던 이동근이 마침내 제 턱을 바짝 붙여오며 나지막하게 소리를 흘렸다.
“김희주 남편이 건설회사 대표잖아. 세종동 재개발 사업권, 그거 자기 남편 회사로 밀어주려고 자그마치 10년 동안 뒤에서 온갖 더러운 작업은 다 쳤거든? 근데 거기에 뜬금없이 3년 전부터 차준호 본가인 CC건설이 끼어들었단 말이지.”
도국의 눈동자가 일순 의아함과 충격으로 크
차진철 회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내가 원하는 건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네. 확실한 정답이지.”어떤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일까. 지금의 판도에서는 그 수가 최선일 텐데.그때, 옆에 있던 차준호가 내게 훈수를 두듯 차분하게 설명을 보태었다.“신하늘, 이미 끝난 게임이야. 헛된 희망을 내비치는 건 오히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지.”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난 단 1%의 반전 가능성을 믿었을 뿐인데.현실의 법칙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그 순간, 벽면의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김희주 의원의 모습이 비쳤고 선거 관련 뉴스가 이어졌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뉴스 화면으로 시선이 쏠렸다.다행히 나를 둘러싼 스캔들 파문은 언급되지 않았다.하지만 김희주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새장 안의 새처럼 미친 듯이 퍼덕였다. 그럼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모니터를 꼿꼿이 응시했다.나 역시 피가 도는 인간이었기에, 김희주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했던 그날 이후로 어떻게 해야 그 여자의 뒤통수를 화끈하게 후려쳐 줄 수 있을지만을 남몰래 갈구해 왔다.계란으로 바위를 쳐봐야 깨어지는 것은 계란뿐이라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어째서 인간은 거대한 벽 앞에서 한낱 희망 따위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하지만 난 하나 나는 정답은 아닐지라도, 가능성은 믿는 여자였다.나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차진철 회장을 향해 대답을 건넸다.“회장님, 판을 흔들 수는 있습니다, 상대의 멘탈을 건드려 치명적인 허점을 노린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커지니까요.”그 말을 들은 차준호는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려 보이며 차진철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차진철은
예기치 못한 차진철 회장의 등장에 숨이 턱 막혀왔다.어쩌면 차준호는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하고 아침부터 보란 듯이 점심을 함께하자 청했던 것은 아닐까.결국 두 거물의 움직임과 이 점심 약속의 중심에 내가 놓여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었다.그렇다고 감히 도망칠 이유는 없었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하면 될 일이었다.허기찬 비서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을 흘깃 담은 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단단한 발걸음으로 대표실 내부로 들어섰다.***대표실 중앙 소파에 마주 앉은 차진철과 차준호 사이에는 고급스러운 체스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벽면에 걸린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를 향한 구설수를 일부러 보여주며 망신이라도 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나는 묵직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며 차진철 회장에게 다가갔다.“안녕하십니까, 회장님.”비록 오늘 차림새는 캡모자에 항공 점퍼를 걸친 캐주얼한 전투복이었으나, 서 있는 자세만큼은 단정한 정장을 입었을 때처럼 허리를 세웠다.“신 비서. 앉게.”통속적인 드라마처럼 아들에게서 당장 떨어지라며 고함을 치거나 뺨을 때리는 상투적인 손찌검은 없었다.그건 차라리 고미주의 역할이겠지. 차진철은 의외로 담담하고 우아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팽팽한 긴장감에 두 주먹을 꽉 쥔 채, 그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 소파 끝자리에 정갈하게 앉았다.달리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체스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차준호의 격렬하고 공격적인 수가 점차 승리를 예고하고 있었다.“그래서, 준호 너 요즘 기억은 좀 어찌 된 거냐?”차진철이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슬쩍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김희주 의원이 쏘아 올린 잔인한 화살이었다.설령 최기범 팀장이 어머니의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들, 그가 나를 막아주고 보호해 줄 생각이었다면 진작 행동으로 보였어야 했다.지금 그와 마주 앉아봐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구구절절 비겁한 변명으로만 들릴 게 뻔했다.물론 그가 직속 상관인 만큼 업무 이야기만 건조하게 주고받을 수도 있겠지만, 급한 일이라면 메신저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나 역시 한 명의 인간이기에, 제 가슴을 파헤친 사람과 나란히 앉아 편안하게 담소를 나눌 여유 따위는 없었다.[게임 오류 수정 작업부터 우선 마무리해 두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급하신 업무는 사내 메신저로 주십시오.]직속 상관에게 감히 먼저 거절의 툇자를 놓다니. 하지만 이 바쁜 와중에 그를 찾아가 사적인 감정 따위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오늘만큼은 최기범의 얼굴을 마주하며 두유를 얻어 마실 기분이 전혀 아니었으니까.모니터 화면에 오늘 처리해야 할 과제들을 체크하고 프로그램을 띄운 뒤, 얼마 남지 않은 휴대전화 배터리를 충전기에 꽂았다.그러고 보니 주말 내내 차준호와 L호텔에서 함께 지내느라 핸드폰을 들여다볼 겨를조차 없었던 터였다. 그제야 쌓여 있던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왔다.아니나 다를까, 액정 위에는 도국과 이아준이 남긴 염려 섞인 문자들이 가득했다.[하늘아, 몸은 좀 어때? 사람 붙여줄까? 집으로는 절대 가지 마.][언론 완전 미쳤네. 막아보려고 손쓰는데도 소문이 너무 퍼졌어.][차준호 대표님 우리 호텔에 오셨다면서? 대단하네.][오늘 출근은 절대 하지 마. 기자들이 붙들어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역시 녀석들이었다. 특히 내가 또다시 언론의 날 선 칼날에 상처 입
기자들은 마치 신하늘이라는 먹잇감을 뜯어발기라는 지시라도 받은 듯, 사옥 로비를 지나치는 직원들마다 붙잡고 눈을 번뜩이며 추궁 섞인 질문을 퍼부어댔다.대표 차준호와 신하늘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한 것인지, 비서로서의 업무 자질에는 문제가 없었는지.신하늘을 둘러싼 무성한 추측성 질문과 최기범, 이아준, 심지어 슈퍼스타 도국과의 관계에 대한 은밀한 제보를 요구하며 기자들은 직원들의 손에 명함을 수북하게 쥐여주었다.“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어. 신 과장님이 설마 진짜 악녀겠어? 언론이 너무 자극적으로 소설을 쓰는 거 같아.”나정아가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한은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하지만 기사가 전부 사실이라면요? 우리 대표님은 물론이고 슈퍼스타 도국에, 최기범 팀장님, 심지어 L-DS 이아준 사장님까지. 그 대단한 남자들이랑 전부 은밀하게 얽혀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나정아가 입술을 깨물자 한은숙은 나직하게 덧붙였다.“근데 진짜 대표님이랑 연인사이였다면, 예전에 강소희 사건 터졌을 때 신 과장님이 오히려 피해자 아니야?”다른 부서는 몰라도, 게임개발실 직원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하늘과 함께 일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녀가 누구보다 진심으로 뼈를 갈아 넣으며 성실하게 임했다는 사실을.특히 무엇보다 차준호라는 남자에게 철저하게 냉정한 선을 긋던 모습 역시 그들이 직접 목격한 진실이었다.“보통 여자라면 사귀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대형 스캔들이 났는데 눈 하나 안 깜빡이고 옆을 지키기는 힘들죠. 그때 대표님이 기억을 잃어버리셨을 때도 그렇고.”“그런데, 딱 그 표정이었어. 차갑다 못해 쎄- 한 느낌.”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사이, 뒤에서 김강무가 나타나 파티션을 위협적으로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가슴팍을 실크 이불로 살짝 가린 채, 협탁 위 생수를 집어 들어 목을 축였다.“가만히 숨어 있어도 어차피 바늘방석인걸요. 당연히 출근해야죠.”“착각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회사는 신하늘 하나 없어도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가.”물론 내가 게임 개발실에서 뼈를 갈아 넣는다고 한들 전체적인 대세에 거창한 영향을 주진 못할 터였다.하지만 이까짓 스캔들 따위엔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다는 걸, 몸소 출근해서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직장생활 3년 동안 뼈저리게 깨달은 생존 법칙이 하나 있었다.때로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진실을 외쳐본들, 그들이 귀를 기울여 주는 데에는 철저히 '타이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돈을 받았으니 제값을 해야죠. 계약서대로라면 내 몫은 다해야 하지 않겠어요? 제 공백 때문에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질색이라서요.”“기특하네.”늘 차가운 거리를 두면서도 지독하게 내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그의 전매특허였건만, 어느 순간부터 저 오만하고 얄미운 차준호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돌고 있었다.스스로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지 않은 채 항상 타인의 상황을 관찰하는 방관자 역할만 하던 그가, 나 하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거리를 좁혀 주다니 고마운 일이었다.“대표님 덕분에 아주 달콤한 휴가를 보낸 기분이네요.”밉고도 미웠던 남자가 옆에 밀착해 있는데도, 주말 내내 단잠을 이룰 수 있었던 이상한 나날이었다.시간이 멈춘 듯 까마득한 101층 상공에 매달려, 이 지옥 같은 도심에서 견뎌내게 해준 그에게 인사는 건넬 필요가 있었다.“나도 즐거웠어. 내 호텔 비밀번호 안 잊어버렸지? 언제든지 와.&r
깊은 밤.그 시각, CH-컴퍼니 테헤란로 본사 10층 휴게실.걸그룹 ‘에스텔라’는 신곡 발매를 앞두고 땀에 젖은 안무 연습을 이어가다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하나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경멸과 은밀한 호기심이 뒤섞인 열띤 목소리로 비난을 쏟아냈다.“어머, 신하늘 그 여자.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악녀네. 증거도 쫙 깔렸잖아?”하나의 말에 두나는 신하늘이 명품을 두른 채 차준호와 공식 석상에 등장했던 기사 사진들을 훑으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그러게 말이에요, 언니. 김희주 의원이 터트린 게 마냥 억지는 아닌가 봐. 새벽에 대표님이랑 그렇게 은밀하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뒤로는 참 여러 남자를 만났네요.”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나까지 입을 삐죽이며 한마디를 거들었다.“처음엔 신 비서님 동정했는데, 알고 보니 최악이네요. 나 같아도 내 아들이 이 남자 저 남자 어장 관리하는 여자랑 친하게 지내면 질색할 것 같은데.”동료들의 험담이 이어지는 내내, 세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제 코가 석 자였으니까.도국과 한창 달콤하게 관계를 이어가던 차에 이런 대형 스캔들이 터져 버린 것이다.이번에 만나면 함께 밤을 보내기로 은밀하게 약속까지 했던 터였다. 아무리 비즈니스 계약 연애라 해도 아직 50일이라는 기한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이대로 유야무야 끝나는 건 아닐까, 불안에 애가 탔다.“세나 언니 속 터지겠다. 도국 오빠도 이름만 안 나왔지 사실상 거론된 거나 마찬가지잖아.”나나의 말에 갑자기 어깨가 찌릿하게 움찔거렸다.자신이 마음을 품은 남자가 다른 여자의 스캔들 한가운데에 얽히는 것을 보고 기분 좋을 여자가 세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