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내가 좀 쓰레기인데, 과연 신 비서가 이런 나를 감당했을까?" "…대표님은 내 것이었지만, 이젠 쓸모없으니 버려야겠네요." 숨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나는 가장 잔인한 거짓말을 속삭였다. 차가운 내 손끝이 그의 턱 끝을 느릿하게 훑었다. 버려지겠다는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포식자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내 혀는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거짓말을 뱉었지만, 심장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진실을 외쳤다. 90%의 진실과 10%의 비밀. 다 가진 포식자로 군림하는 이 나쁜 남자를 길들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세상을 속이는 마녀라도 되어주겠어!
Voir plus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
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
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릴 때마다, 등골을 타고 찌릿한 소름이 돋아났다.
이내 커다란 손이 가슴을 소유욕 가득하게 거머쥐었다. 그의 지문이 닿는 곳마다 마치 뜨거운 인장이 새겨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느릿하게 허리선을 타고 내려가 가장 연약한 여성의 안쪽 살결에 닿는 손길은 지독하게 집요했고, 그가 지긋이 힘을 줄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떨리는 숨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
지극히 완만하면서도 잔인할 만큼 정확한 자극이 예민한 곳을 문지를 때마다, 뇌리를 찌르는 전율에 척추가 미친 듯이 휘어졌다.
나보다 내 몸의 반응을 더 기민하게 읽어내는 남자답게, 차준호는 내가 어느 지점에서 이성을 놓고 무너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윽고 거칠게 속을 파고드는 그의 단단하고 묵직한 남성의 존재감이 온몸의 신경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몸의 온도가 가파르게 치솟아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창밖은 서슬 퍼런 겨울이었으나, 서로의 알몸을 빈틈없이 밀착한 채 생생한 온기를 탐닉하는 이 침대 위만큼은 한여름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보다 더 뜨거운 열기로 넘실거렸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정막한 방 안을 야릇하게 채워나갔다.
“신하늘, 오늘도 예쁘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베이스 음성에 결국 참지 못한 신음이 젖은 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 매혹적인 목소리에 취해, 나는 그의 단단한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매달렸다. 그의 어깨 근육이 요동칠 때마다 내 손톱 끝에는 그의 살결이 깊게 박혔다.
“대표님도······ 여전히 멋지시네요.”
그가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자세가 깊어질수록 맞닿은 곳에서 시작된 일체감이 온몸을 사정없이 달구어냈다. 이 오만한 남자가 이토록 미치게 좋았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영혼을 저당 잡힌 듯 사로잡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완벽한 지배자이자 최고의 연인이었다.
본래 나는 S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자마자 CH-컴퍼니의 게임 개발자로 지원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내게 배정된 부서는 비서실이었다.
내 성향과는 전혀 다른 업무였지만, 그의 곁에서 완벽한 비서로 남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버텨낸 시간이었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고결한 얼굴을 매일 마주하고, 그가 무심히 건네는 따뜻한 배려의 잔상을 쫓는 것만으로도 나는 매 순간 황홀경에 빠졌으니까. 고된 업무조차 그와 함께라면 달콤한 유희처럼 느껴졌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긴밀하게 2년의 세월을 공유하며 지내다가,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진 것은 정확히 작년 이맘때였다.
은은한 와인 향에 취해 충동적으로 밤을 보낸 것이 도화선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사귀자는 명확한 언약도 없이 시작된 관계였지만, 지난 1년간 비밀스럽게 탐닉했던 살 떨리는 시간 동안 나는 과분할 만큼 행복했다.
스물여섯. 아니, 며칠 뒤면 스물일곱이 되는 나이.
이성적인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늘 술을 멀리해 왔건만, 차준호가 붉은 입술을 적셨던 와인 때문이었을까. 강렬한 접촉 속에서 입술 사이로 번지는 달콤한 체리브랜디 향이 코끝을 스치자 머릿속이 아득하게 몽롱해졌다.
차준호는 내 인생의 첫 남자였고, 여전히 갈망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관계를 정의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이 애매함이 늘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취기가 돌아 그의 독특한 기운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는 순간, 억눌러왔던 금단의 욕망이 기어코 빗장을 풀고 터져 나왔다. 머릿속의 제어 장치가 고장 난 것처럼 그의 숨결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그의 미래에도 내가 함께하기를. 그 욕심을 오늘 전하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의 몸을 조련하고 열기를 피워 올리며, 고백할 타이밍을 집요하게 엿보았다. 그의 뜨거운 피부가 닿을 때마다 등골을 타고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듯 찌릿한 떨림이 일었다.
오늘 역시, 어제와 다름없이 완벽한 밤이어야 했다.
*** 최고의 남자인 차준호와 침대 위에서 맞이한 절정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했다.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격렬했던 정사 뒤에 찾아온 나른함마저 달콤했다. 몸을 섞은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니, 이제는 서로의 마음까지 나누어도 되지 않을까.
“신하늘, 오늘 유난히 특별하게 구네?”
그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느긋하게 로브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나 역시 침대 시트 사이에 흩어진 속옷을 챙겨 입은 뒤 분홍색 니트 원피스를 걸쳤다. 등 뒤로 손을 뻗던 그때, 그가 다가와 지퍼의 고리를 잡아 천천히 올려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여열이 남은 살결을 훑으며 올라갈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이런 사소한 순간마다 그는 지독하게 다정했다. 이 다정함에 취해 준비한 책을 건네며 고백하려던 찰나였다.
차준호가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한 채, 낮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신하늘, 참고로 나한테 고백 따위는 하지 마. 난 연애 안 해.”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척추를 타고 차가운 한기가 오소소 돋아나며 뜨거웠던 몸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의 얼굴은, 남의 불행을 구경하듯 지나치게 태연하고 덤덤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끝이 잘게 떨려와, 애꿎은 원피스 자락만 바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대표님이 저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봐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지만,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을 간신히 붙잡으며 억지로 무표정을 가장했다. 걸을 때마다 타이트한 치맛단이 연신 말려 올라가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지분거렸다.
사실 그가 선물해 준 이 원피스는 몸매 라인이 지나치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옷이라, 오늘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한 상태였다.
긴장감과 허기, 그리고 배신감이 뒤섞여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쥔 CC그룹의 후계자이자 CH-컴퍼니의 수장. 185cm가 넘는 압도적인 실루엣과 서른한 살의 농익은 남자.
그는 마치 신이 공들여 빚어낸 조각상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가장 잔인한 성정을 숨긴 남자였다.
지난 3년간 그를 보필하며, 그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이 스위트룸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나는 내가 특별한 줄 알았다.
‘비서의 품격이 나의 얼굴’이라며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조율해 주던 그의 손길이 사랑인 줄 알았다.
그때, 미니바 쪽으로 걸어가던 차준호가 잔인할 정도로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내뱉었다.
“친절과 호감을 혼동하면 안 되지. 신하늘, 순진하네?”
내 머리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던 걸까.
남녀 사이의 그 얄팍한 역학 관계에 이토록 무지했다니.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이 가슴을 짓눌렀고, 조금 전까지 그와 맞닿아 뜨겁게 달아올랐던 내 몸은 이제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렸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자정. 사위에 어둠이 깊게 깔린 시간이었다.오랜만에 회사에 복귀해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시달린 하루였지만, 생각보다 피곤하지는 않았다.드디어 나 스스로 이 지옥 같은 상황을 타개할 앞날의 선명한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맞이할 소중한 친구들을 기다리는 동안, 내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머물렀다.내가 집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난히 커다란 인기척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늘아!”“왔어?”나 역시 겉옷을 벗으며 고개를 돌리자, 이아준이 서둘러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하늘아, 너도 이제 막 들어온 거야? 얼굴이 왜 그래?”하긴, 그 소동 이후로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 데다 눈가가 퀭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니 이아준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요즘 일상이 좀 피곤해서 그래.”“빌어먹을 김희주! 내가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려줄게!”오랜만에 만난 이아준은 양손 가득 들고 온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내 안색을 꼼꼼히 살폈다. 홧김에 내뱉는 말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온몸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그 뒤를 따라 들어오던 도국 역시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텅 빈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보일러 제대로 돌아가는 거 맞아? 집이 왜 이렇게 차.”“이제 막 틀어서 그래. 오랜만에 들어온 집이라 온기가 통 돌지 않네.”“고생 많았어.”친구들의 낯익은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온종일 팽팽한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봄눈 녹듯 스르르 풀어져 내렸다.사실 차준호가 병원에서 철
내 입에서는 허- 하고 나직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래된 기사 속에서 묘한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며,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가 기적처럼 걷혀 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깨달음이 파도처럼 세차게 몰려왔다.‘이제 좀 알 것 같네.’숨겨진 진실을 똑똑히 마주한 내 입꼬리가 느릿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김희주가 왜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나와 부모님을 폄하하며 서쪽 동네를 밀어내려 발악을 했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지독한 탐욕의 실체가 무엇인지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가 갔다.나는 가슴 깊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떨리는 두 주먹을 화면 아래에서 불끈 쥐어 보였다.세상의 모든 진실이 다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이면에는 늘 다른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제 나도 그런 어른들의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김희주도 그렇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차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내가 마냥 세상 물정 모른 채 친구들의 비호나 받는 온실 속 공주님이라고 생각했다면 아주 커다란 오산이었다. 지금까지 난 항상 내가 하고자 하는 결정을 스스로 내려왔고, 한 번 의지를 세우면 반드시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해 냈던 나였다.차준호가 지금 내 인생에 제멋대로 끼어들어 나를 구원하겠다는 듯 휘두르고 있지만, 나는 드디어 그가 없어도 이 지옥 같은 상황을 타개할 단 하나의 확실한 희망을 보게 되었다.화면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 전화 진동이 요란하게 울리며 액정 위로 문자 한 통이 떠올랐다.[하늘아, 국이와 같이 세종동에 오늘 자정쯤 도착할 것 같은데. 괜찮아?]언제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마다 내 편이 되어 기꺼이 손을 뻗어주던 소중한 친구들이 오늘
그 시각, 이아준은 드디어 인천공항에서 기지개를 켰다.“아,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네.”자신 뒤로 주렁주렁 따르는 비서진과 경호원들을 뒤로하고는 바로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그는 만사를 미루고 제일 먼저 도국에게 전화를 돌렸다.녀석이 얼마나 바쁜지 잘 알았기에 한 번에 받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통화 연결음만 들으며 입국 수속을 밟았다.-아준아, 드디어 온 거야?“럭키. 우리 국이가 전화를 바로 받다니. 아, 행복하다. 너 바쁘지?”이아준은 도국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푸근해져 성마르게 주절거리며 말을 쏟아냈다.-너보다는 덜 바빠. 왜 이리 오래 걸렸어?“그렇게 됐어.”이아준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소리 같아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예상보다 미국 텍사스의 공장 건립 허가를 빠르게 마무리하였기에 빨리 온다고 온 것이 지금이라 구구절절 설명은 아꼈다.-고생했어.좋아한다고 언급한 바람에 도국이 불편할까 싶었는데 이리 예전처럼 대해주니 다시 이아준도 마음이 편해졌다.“어서 게임이나 같이 하고 싶네.”-네가 지금 경제계를 주무르고 있는데, 태평하네.마음 편한 것을 가장한 이아준이었다.사실 그룹 임원진들이 가하는 압박은 상상을 초월하는 요즘인 것을.미국 공장 진출과 세금 문제 그리고 그룹의 사업 확장을 어느 정도 해결해서 그렇지 하마터면 5월까지 돌아오지도 못할 뻔했다.자신의 능력을 하나하나 검증하는 이 상황은 자다가 가위에 눌릴 정도로 고통의 강도가 엄청났다.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얼마나 일거수일투족 흠집을 내고자 파고드는지.하지만 힘든 건 공유할 필요가
한 입, 또 한 입.눈에 힘을 주고 도시락만 응시하는 사이, 느릿느릿 숟가락이 무의미하게 입속을 오갔다. 발끈해서 당장이라도 대표실을 뛰쳐나갈까 하다가도, 이 잔인한 상황을 지혜롭게 이용해야만 한다는 냉정한 자각이 머릿속을 울렸다.그동안 살면서 부모를 잃은 어린 내게 김희주도 그렇고, 동쪽 동네 사람들이 쏟아낸 말들은 대단하리치만큼 잔인했었다. 언제까지 사정 봐줘야 하냐고, 지긋지긋하다며 빨리 개발 좀 하자고. 어르신들이 집세를 내지 못하자 진짜 주인들은 모조리 내게 책임을 떠넘겼다. 모두들 떠나지 못하게 내가 발목을 잡은 건 아니었는데.“대표님이 무슨 신이라도 되신 듯, 저에게 구세주 역할을 하고 싶으신가 보네요?”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기에는 차준호에게 휘둘린 자신이 안쓰러워, 일단 날이 선 가시를 그에게 뱉어 보았다.“그래, 현재 난 김희주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지.”그동안 도국과 이아준이 부지를 매입하려 발버둥을 쳐도 이미 늦었다고 했었다.이미 팔렸다는 집도, 주인이 누구인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집도 허다했다. 남은 어르신들은 모두 세입자여서 더 이상 대항할 힘조차 없었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세종동을 둘러싼 모든 갈등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설마, 정확하게 3년.지독한 소름이 온몸의 솜털을 훑고 지나갔다. 차준호는 그럼 지난 3년 동안 세종동의 부지를 남모르게 늘려간 걸까.김희주가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절대적인 존재가 바로 CC그룹이니, 내게 3년간 거대한 우산이 되어 거짓 평화를 선사한 셈이었다. 결국 차준호가 모든 판의 키를 쥐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뼈저리게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래서, 제가 밥도 잘 먹고 대표님 말씀 잘 들으면 해피엔딩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거네요?”차준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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