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시각, CH-컴퍼니 테헤란로 본사 10층 휴게실.
걸그룹 ‘에스텔라’는 신곡 발매를 앞두고 땀에 젖은 안무 연습을 이어가다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하나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경멸과 은밀한 호기심이 뒤섞인 열띤 목소리로 비난을 쏟아냈다.
“어머, 신하늘 그 여자.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악녀네. 증거도 쫙 깔렸잖아?”
하나의 말에 두나는 신하늘이 명품을 두른 채 차준호와 공식 석상에 등장했던 기사 사진들을 훑으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언니. 김희주 의원이 터트린 게 마냥 억지는 아닌가 봐. 새벽에 대표님이랑 그렇게 은밀하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뒤로는 참 여러 남자를 만났네요.”
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나까지 입을 삐죽이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처음엔
세나의 손을 지그시 감싸 잡으며 도국이 낮게 입을 열었다.“이대로 가면 진짜 걷잡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릴 것 같아.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눈부시게 웃는 그의 미소 너머로 쓸쓸한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세나는 갑작스레 가슴이 차갑게 짓눌려 오며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그럼······ 우린 이제 끝인 건가요?”도국이 내민 상자 안을 내려다보며 세나는 직감했다. 오늘 밤 그와 함께 보내게 될 이 시간은 미래를 약속하는 밤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찾아가기 위한 마지막 인사라는 사실을.도국이 상자에서 꺼내 내민 것은 작은 열쇠 모양의 펜던트가 세공된 목걸이였다.목걸이를 직접 걸어주는 그의 손끝이 세나의 쇄골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과 도국의 체온이 동시에 피부에 닿자, 세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려 왔다.“네가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고 마음껏 나아가도록, 내가 계속 응원할게.”고개를 숙여 목걸이를 바라보았지만, 반짝이는 황금빛 광채는 도리어 차갑고 서럽게만 느껴졌다.마치 이별의 각인을 새겨 넣듯, 열쇠 펜던트만이 세나의 목 언저리에서 서늘하게 맴돌 뿐이었다.세나의 가슴속은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거세게 요동쳤다.물론 알고 있었다.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까마득한 남자를 자신이 탐내고 있다는 것을.어린 시절 동경했고, 처음 가요계에 발을 들였을 때, 그가 제 이름을 기억해 준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었다.미래를 응원해 주며 대학에 합격하면 키스를 해주겠다는, 빈말이라도 약속을 건네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그리고 실제로 걸그룹으로 데뷔해 자신을 찾아와 달콤한 키스를 건넸을 때, 세나는
택시가 강남역 한복판을 지나가자, 도로변 곳곳에 세나가 속한 걸그룹 ‘에스텔라’의 대형 광고판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걸그룹 센터가 남자 톱스타의 프라이빗 숙소를 찾는 일은 막대한 스캔들 리스크를 동반했지만, 지금의 세나는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절박했다.‘오늘 난 오빠의 여자가 될 예정이야.’드디어 도국이 자신과 밤을 함께 보내주겠다는 뜻 같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몽글몽글한 설렘이 차올랐다.도국에게 전달할 선물과 함께, 백팩 안에는 속옷과 화장품, 그리고 다음 날 갈아입을 여분의 티셔츠까지 세심하게 챙겨둔 상태였다.건물 외벽과 버스 정류장 곳곳에서 다시금 도국의 근사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하필 대한민국을 뒤흔든 대형 스캔들이 터진 데다, 국민적 악녀로 낙인찍힌 신하늘과 엮여버렸으니.오늘 이 만남을 계기로, 어쩌면 자신과 도국 사이의 스캔들이 다시 불거지면서 신하늘의 사건이 자연스럽게 묻히고 상쇄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섰다.어차피 신 비서는 차준호 대표와 연인 관계일 테고, 도국은 그저 신 비서를 혼자 짝사랑하는 것뿐일 텐데.참으로 애달프고도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천하의 차준호는 이미 신하늘에게 깊이 빠져있는 듯했다. 멤버들 사이에 감도는 소문에 따르면, 최근 차준호가 신 비서에게 더욱 적극적이고 거침없이 대시하고 있다고 했다.하긴, 차준호 정도의 거물이 단지 누군가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쫓아다닌다고 해서 선뜻 마음을 받아줄 위인이던가.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차갑고 철두철미한 이미지의 남자였으니 말이다.사실 세나는 차준호라는 사람이 몹시 무서웠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냉철한 데다, 범접할 수 없는 중압감을 풍기는 존재였으니까.그때 택시 라디오에서
차준호라는 남자의 진심은 차치하고라도, 현재 그는 벼랑에 매달린 나를 끌어 올려줄 가장 튼튼하고 견고한 밧줄임이 분명했다.김희주가 이렇게 도를 넘어 저열하게 나오는 이상, 나 역시 차준호라는 가장 확실한 카드를 쥐고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를 밀어내기보다는 적당히 달래야 할 때였다.[대표님, 대신 며칠 뒤에는 신세 좀 질게요.]조만간 그의 호텔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었다.차진철 회장에게 서늘한 경고를 받긴 했으나, 내가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쓴 것도 아니니 당분간은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설마 그 껄끄러운 사람들하고 계속 이렇게 지낼 건가?]그래도 내가 직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에 마음을 써주는 걸까.[저야 어차피 이미지 바닥을 찍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일만 하면 되니까 의외로 견딜 만해요.][내가 품었던 여자가 고생하는 건 싫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간이 침대 보내 줄 테니까 참고해.]그의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말투에서 예전과 다른 다정함이 묻어난 동시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나는 대체 어떤 부분에서 이토록 놀란 걸까.거침없는 표현? 아니면 다정한 배려?어느 것 하나 예상치 못한 의외의 연속이었기에, 나는 복잡한 마음을 눌러 담으며 다시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그리고 한 시간이 더 흘렀다.차준호의 사내 메신저 상태 창이 꺼져 있는 것을 보니, 그도 이제는 퇴근한 모양이었다.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차준호에게 늘 투덜대면서도, 나를 챙겨주는 그의 다정함이 내심 싫지 않아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그렇게 묵묵히 업무를 이어가던 그때.갑자기 개발실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정신 바짝 차리자며 마음을
이런, 망할. 김희주는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나를 완전히 매장하기 위해 강소희에게 보낸 이 문자는 내게 강력한 반격의 무기이자, 그녀의 추악한 범죄를 입증할 대단한 증거가 되어 주었다.나는 강소희의 휴대전화 액정에 뜬 문자를 내 휴대전화 카메라로 신속하게 찍어 두었다.“강소희 씨야말로 뭐 약점이라도 잡혔어요?”그녀로서도 이 문자가 세상에 공개되면 리스크가 상당할 터였다. 내 질문에 강소희는 눈을 얄밉게 흘기며 다시 병 두유를 홀짝였다.“김희주는 내가 세종동 서쪽에서 살던 어린 시절을 언론에 까발린다고 그동안 협박을 일삼았거든. 자기 아들이랑은 절대 놀지 말라고 윽박지르면서.”역시 김희주라면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누군가의 불우하고 가난했던 과거를 약점 삼아 무려 20년 동안이나 부려 먹다니.나는 이를 악물고 찍어둔 문자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강소희 씨,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세종동 출신이 뭐 어때서요? 연기 잘하고, 예쁘잖아요. 연예인이 그거면 됐지.”그러자 강소희는 내 뜻밖의 칭찬에 머쓱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큼큼 헛기침을 뱉어냈다.시선을 피하며 눈동자를 천장으로 향하더니, 아랫입술을 떨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성형한 것도 그렇고, 금수저에 고급스러운 이미지도 전부 거짓된 거니까······. 밝혀지면 이미지 추락은 한순간이라······. 토끼 비서님도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 여자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상처만 입을 거야.”
강소희와의 예기치 못한 마주함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가르는 서늘한 벼락과도 같았다.“강소희 씨, 참 뜬금없으시네요.”완벽하게 공들인 풀 메이크업에, 당장이라도 화보를 찍어도 될 만큼 화려한 초록빛 시폰 원피스를 입고 어깨에는 숄까지 멋스럽게 걸친 모습이었다.그녀는 주말 내내 포털 사이트를 도배한 내 몰락을 지켜보며 남몰래 은밀한 희열을 느꼈을 터였다.분명 차준호 대표를 보러 사옥에 들렀다가, 무너져 가는 나를 비웃고 놀리려 찾아왔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비서님하고 단둘이 나눌 볼일이 좀 있어서요.”“저는 지금 아주 바쁩니다.”나는 이제 대표실 비서가 아니었기에, 강소희의 투정을 친절하게 받아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온 회사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매장당하기 직전인 마당에, 위선적인 가면 따위를 쓸 여유조차 없었으니 이판사판이었다.“바쁜 것으로 치면 내가 비서님보다 훨씬 더 바쁠 텐데요?”그렇게 바쁜 여자가 도대체 왜 남의 일터에 와서 기웃거리느냐는 반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 이제 비서 아니라는 냉정한 말이 입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시간 절약을 위해 결론만 간단히 말하세요.”“준호 보러 온 게 아니라, 비서님한테 무기를 주려고 왔답니다.”설마 김희주랑 싸울 때 필요한 그 무엇이란 말인 걸까.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미소는 조각처럼 완벽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스포트라이트 뒤편의 지독한 피로함이 짙게 스며 있었다.강소희에게 받을 무기 따위는 사실 별 관심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 힐끔대는 직원들 시선은 신경 쓰였다.“사실 그 무기도 별 관심 없지만, 일단 카페테리아로 가
차진철 회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내가 원하는 건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네. 확실한 정답이지.”어떤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일까. 지금의 판도에서는 그 수가 최선일 텐데.그때, 옆에 있던 차준호가 내게 훈수를 두듯 차분하게 설명을 보태었다.“신하늘, 이미 끝난 게임이야. 헛된 희망을 내비치는 건 오히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니지.”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난 단 1%의 반전 가능성을 믿었을 뿐인데.현실의 법칙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그 순간, 벽면의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김희주 의원의 모습이 비쳤고 선거 관련 뉴스가 이어졌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뉴스 화면으로 시선이 쏠렸다.다행히 나를 둘러싼 스캔들 파문은 언급되지 않았다.하지만 김희주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새장 안의 새처럼 미친 듯이 퍼덕였다. 그럼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모니터를 꼿꼿이 응시했다.나 역시 피가 도는 인간이었기에, 김희주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했던 그날 이후로 어떻게 해야 그 여자의 뒤통수를 화끈하게 후려쳐 줄 수 있을지만을 남몰래 갈구해 왔다.계란으로 바위를 쳐봐야 깨어지는 것은 계란뿐이라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어째서 인간은 거대한 벽 앞에서 한낱 희망 따위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하지만 난 하나 나는 정답은 아닐지라도, 가능성은 믿는 여자였다.나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차진철 회장을 향해 대답을 건넸다.“회장님, 판을 흔들 수는 있습니다, 상대의 멘탈을 건드려 치명적인 허점을 노린다면 가능성은 얼마든지 커지니까요.”그 말을 들은 차준호는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려 보이며 차진철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차진철은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