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지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유씨 노부인을 바라보았다."애초에 네가 국공부에 있을 때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네 아버지가 분가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테고, 네 삼촌들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게다."말을 마친 유씨 노부인은 연신 한숨을 내쉬더니 원망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직접 오지 않았다면 너는 나서서 사람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지. 지영아, 할미는 이제 늙었다. 과거에 너를 홀대하고 신경 쓰지 못한 것은 앞으로 다 보상하마. 네 삼촌들은 모두 지금 처지가 말이 아니니 그만 분을 풀고, 삼촌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다오."지난날을 떠올려 보면, 유지영이 유씨 노부인을 원망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홀대당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몫까지 더해진 것이다.전생에 아버지가 유정혁의 계략에 빠져 명성에 먹칠을 당했을 때, 유씨 노부인은 유정혁을 꾸짖기는커녕 사사건건 아버지를 비꼬았다.유씨 노부인의 이런 성정으로 보아, 유지영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적잖이 서러운 일을 당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지금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그저 상황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쉽게 용서한다면, 아버지가 맞이했던 비참한 결말과 어머니가 겪은 억울함은 대체 무엇이 된단 말인가?유지영의 눈빛이 너무 차가웠던 탓일까, 유씨 노부인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우리는 다 같은 가족이 아니냐. 훗날 국공부가 잘되어야 네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수 있고, 그래야 경왕부 사람들도 감히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게다."유지영은 분노를 억누르고 일부러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유씨 노부인에게 되물었다."그런 말씀은 나중에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시급한 것은 셋째 삼촌을 구하는 일이지요. 할머니, 셋째 삼촌은 대체 어쩌다 저리되신 겁니까?""그게…."유씨 노부인은 끝내 유지란이 독을 탔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유씨 집안이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딸을 팔아 넘기려 했고, 그 일로 궁
방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임 태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경왕비를 바라보았다. 경왕비는 입술을 꾹 깨물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어머님, 먼 길을 오시느라 고단하실 텐데 며느리인 제가 대신 필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왕비가 이리 마음을 써주니 고맙구나."임 태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배현준은 연일 일찍 나가서 늦게 돌아왔다. 유지영이 한밤중에 깨어보면 곁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었고, 잠결에 뒤척일 때면 곁에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기도 했다.하지만 매번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동금은 이렇게 전했다."세자비 마마, 평안의 말로는 세자께서 오늘 군영으로 가셨다고 합니다.""마마, 평안의 말로는 세자께서 오늘 관아에 가셨다고 합니다."오늘도 어김없이 관아로 향한 날이었다.이게 일상이었기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그녀는 서재에 앉아 장부를 꺼내 놓고 방비원 시종들에게 녹봉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때 운청이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셋째 나으리네에 큰일이 났습니다."주판을 튕기던 유지영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운청을 바라보았다."지란 아가씨는 자초지종을 알게 된 후 단단히 화가 났는지 약을 사다가 죽에 탔다고 합니다. 셋째 나으리와 부인, 그리고 막내 공자까지 모두 그 죽을 먹었습니다. 막내 공자는 나이가 어린 데다 가장 많이 먹어서,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다고 합니다."운청이 보고했다.유지란이 이토록 독하게 마음먹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진실을 알자마자 곧바로 독을 풀다니!"셋째 나으리는 가장 적게 드셨으나 상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노부인과 둘째 나으리는 이미 그곳으로 달려갔고 의원도 여럿 불렀다고 들었습니다.""무슨 독이라더냐?""한성초라고 합니다."유지영은 혀를 내둘렀다."세자비 마마, 유씨 노부인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어린 시녀가 황급히 달려와 고했다.유지영은 노부인이 북명 대사에게 부탁하여 셋째 삼촌네 일가족을 살려달라
배이수는 자녕궁 문 앞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안쪽의 동태를 살피던 그는 다시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무려 한 시진이나 서 있었건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경군자, 그만 돌아가시지요. 폐하께서는 태후 마마와 오찬을 드실 예정이라 만나주시지 않을 겁니다."소 상궁이 걸어 나와 조용히 타일렀다.배이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아바마마께서는 정말 저를 안 만나주실 생각입니까?"황자로 인정받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는 매일같이 태화궁으로 문안을 갔다.하지만 건양제를 만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건양제의 태도가 이렇다 보니, 궁 안의 궁녀와 태감들조차 그를 무시하며 전혀 공손하게 대하지 않았다."오늘은 제가 출궁하여 부저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할마마마와 아바마마께 작별 인사를 올리러 왔습니다."배이수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서러움이 서렸다.소 상궁이 답했다."폐하께서는 경군자께서 길일을 택해 거처를 옮기면 된다고 하셨습니다."배이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대놓고 만나기 싫다는 뜻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그는 씁쓸하게 발길을 돌렸다.한편, 궁에서 나와 왕부로 돌아가려던 경왕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급히 돌아오는 배현준과 마주쳤다. .경왕은 몇 번이나 입을 떼려다 망설였다.배현준은 그런 그를 곁눈질로 한 번 훑어보더니 미련 없이 지나쳐 갔다.'불효자식 같으니라고'분통이 터진 경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임 태비의 처소로 돌아오니 임 태비는 그를 힐끗 보고는 무심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태후 마마께서 무슨 일로 너를 찾으셨느냐?"경왕이 손을 저어 시종들을 물리려 하자, 임 태비가 막아섰다."남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도 아닐 텐데, 그냥 말하거라."곁에 있던 경왕비 역시 소식이 궁금하여 끼어들었다."태후 마마께서 어머님을 걱정하시어....""오늘 자녕궁에 폐하께서도 계셨습니다."경왕은 호되게 걷어차인 무릎이 아직도 욱신거려 표정이 좋지 않았다."태후께선 태의
경왕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건양제는 경왕에게 호통쳤다."네가 감히 태후와 나를 기만해?""폐하, 신은...."경왕은 속이 타들어갔다. 태후가 이렇게 빨리 태의 두 명을 보내 진맥을 보게 할 줄은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임 태비가 걱정되어 살펴본 것인데,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속이고 있었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니. 경왕, 참으로 실망이 크다!"서 태후가 싸늘한 얼굴로 호통쳤다.경왕은 우물쭈물하며 변명했다."태후 마마, 어머님은 건강 상황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어 신도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요 며칠 두통이 심하셨고 또 영준이 걱정도 하셨습니다. 어제 영준이가 무사한 것을 보시고는 마음의 병이 반쯤 나으신 것입니다."건양제는 상석에 앉은 서 태후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것을 힐끗 보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병이 없는데 왜 꾀병을 부리며 현준이의 혼례에 오지 않은 것이냐? 내 기억으로는 현준이의 혼례가 먼저였고, 영준이가 낙마한 것은 그 후의 일이다.""폐하, 영준이가 낙마한 것이 먼저이옵니다."경왕이 정정했다.건양제는 즉시 경왕을 쏘아보았다. 경왕은 지레 겁을 먹고 목을 움츠린 채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그렇다면 임 태비는 영준이가 낙마한 일로 충격을 받아 현준이의 혼례에 오지 않았다는 뜻이냐?"서 태후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경왕은 고개를 끄덕였다.쾅!서 태후는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헛소리! 영준이가 낙마한 날과 현준이가 혼인한 날은 고작 다섯 날 차이였다. 네가 사람을 시켜 밤낮없이 말을 달려 소식이라도 전했단 말이냐?"경왕은 흠칫 놀랐다. 왜 이야기가 다시 거기로 돌아간단 말인가?"그것이....""임 태비에게 조금이라도 뜻이 있었다면 진작에 길을 나섰어야 했다. 같은 손자인데 왜 이리 차별을 하는 것이냐!"서 태후는 단단히 화가 났다.건양제는 다시 발을 들어 경왕을 걷어찼다."이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당장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임 태비는 무엇 때문에 꾀
두 태의가 임 태비의 진맥을 보러 왔을 때 임 태비는 이를 거부할 생각이었으나, 태의들이 서 태후의 명이라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맥을 짚어본 두 태의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굳이 사실을 폭로하지 않고 보신 탕약 몇 첩만 처방한 뒤 물러갔다.사람들이 물러가자 경왕비가 말했다."어머니, 어제 막 경성에 당도하셨는데 오늘 곧바로 태후 마마께서 진맥을 보라 사람을 보내시다니, 참으로 공교롭지 않습니까."임 태비는 손목을 옷소매 안으로 거두고 자세를 꼿꼿이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문밖의 하늘을 흘끗 바라보았다."벌써 십오 년이나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선황께서 왜 그 여자를 황후로 봉하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의 폐하도 마찬가지지. 멀쩡한 황장자를 두고 왜 유독 현준이만 편애하는지 모르겠다."임 태비가 보기에 황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이상했다. 속내를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경왕비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했다.아랫사람을 통해 소 상궁이 태의들과 함께 입궁했다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경왕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반면 임 태비의 안색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그 여자가 그리도 두렵더냐?""어머니, 태후 마마께서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수단은 보통이 아닙니다."경왕비는 자녕궁 불당에서 몇 번 무릎을 꿇어본 적이 있었다. 그 고통은 곤장을 맞는 것보다 훨씬 끔찍했다. 몇 번만 더 시달리면 무릎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예전 후궁에 있던 시절, 나와 그 여자는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 나를 아주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게다."임 태비가 무심하게 말했다.과거의 일에 대해 임 태비는 경왕비에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오늘에서야 우연히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그때 선황께서는 황후 자리를 두고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않으셨다. 그 자리 하나 때문에 수많은 비빈들이 수십 년간 피 터지게 싸웠거늘, 결국 갓 성년례를 치른 어린 계집의 차지가 되
동금과 홍주는 그녀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반 시진쯤 지나 운청이 돌아왔다."관아에 갔을 때 평안이 밖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평안의 말로는, 누군가 사건 현장에서 세자의 영패를 발견했기 때문에 관아로 가 조사를 받으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는 정 세자의 영패도 같이 떨어져 있었고, 현재 정 세자 역시 관아에 머물고 있습니다. 평안은 빠져나갈 방도가 있으니 세자비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유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책을 덮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잠결에 누군가 허리를 감싸 안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눈을 뜨자 목덜미 위로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조금 더 자거라."익숙한 향기를 맡은 유지영은 안심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부자리를 만져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유지영은 목소리를 높였다."동금아!"동금이 어린 시녀 몇 명을 데리고 들어와 세숫물을 올리며 말했다."세자께서는 반 시진 전에 군영으로 가셨습니다.""간밤의 일이 꿈인 줄 알았는데."유지영은 미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어젯밤 관아에서 있었던 일을 물었다. 동금이 답했다."평안에게 물어보니, 경조 판사께서 조사 결과 이번 일은 세자와 무관하며, 오히려 정 세자와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그래?"유지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묵산마을 보물 도난 사건 당시, 폐하께서 정왕부에게 그 구멍을 메우라 명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누군가 정왕이 엽 가주를 찾아가 은밀히 협박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엽 가주가 거액의 재물을 정왕부에 빌려주었는데 정왕부에서는 발뺌을 했다는군요. 관아에서는 지금 그 일을 계속 조사하고 있다 합니다."유지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배현준은 정왕부와 엽씨 집안을 완전히 갈라서게 만들 생각인 것이다."유지란을 감시하거라. 방도를 찾아내어 그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진실을 알게 만들어야 한다."유지영
하지만 장공주는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이수를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나는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한 적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말해라!”옆에 있던 유지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지영 언니, 부광 비단옷은 언니가 장공주 전하께 직접 드린 거잖아요. 그러면 언니는 저 여자를 아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 여자가 여기까지 찾아온 거겠죠.”정씨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지영이 네가 아무 이유도 없이 비단옷을 장공주 전하께 드린 것도 이상했어. 어떻게 장공주 전하를 이런 식으로 해치려 할
“그래요! 너무 불길하잖아요!”유지란은 동금을 향해 눈을 부릅뜬 채로 호통치기 시작했다.“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생신 연회에 누가 저런 흰옷을 입고 간단 말이야?”동금은 당황한 척 고개를 숙였다.“태후마마께서 하사하신 옷은 언제든 입을 수 있잖아요. 시간도 늦었으니 빨리 갈아입어요, 언니. 연회에 늦으면 곤란하니까요.”유선주가 재촉했다.결국 유지영은 붉은 비단옷을 들고 내실로 들어갔다.유선주와 유지란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유지영은 화사한 붉은 비단치마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눈부
그렇게 며칠 동안 한가로운 날들이 이어졌다.평소와 똑같이 담씨 저택에서 돌아오는데, 화려하게 차려입은 송씨와 유선주가 대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어머니, 지영 언니는 같이 안 가나요?”유선주는 대문 앞에 서서 일부러 의아하다는 듯 송씨에게 물었다.송씨는 유지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놀란 얼굴로 물었다.“지영아, 너는 영천후부의 연회 초대장을 못 받은 것이냐?”유지영은 묘한 눈빛으로 송씨에게 물었다.“부관!”그러자 송씨가 이내 부관을 불러오더니 굳은 얼굴로 따지기 시작했다.“어찌 된 일이냐? 영천후부의 초대장을 군
담씨 노부인은 화도 나고 유지영이 안타까워서 울먹였다.“지영아, 네 외삼촌은 경성에 없지만 이미 사람을 보내 네 사정을 전했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리 치료 같은 건 받지 않는 건데, 할미가 경솔했어.”유지영은 가슴이 먹먹해져 고개를 저었다.“외할머니, 저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 이번 일은 제가 직접 해결할 수 있어요. 나중에 다리가 나으시면 저와 함께 산에도 가고 산책도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약속은 지켜주셔야지요!”담씨 노부인의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외할머니. 제가 알아서 할게요.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