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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레몬과 향수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

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

짝!

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

이내 유선주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유지영! 선주에게 어서 사과하지 못할까!”

배준형이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유선주는 마치 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유지영은 턱을 치켜들고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내 성년례 날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실수라는 핑계로 언니인 나를 모함하고도 뭘 잘했다고 울어? 너는 대체 어리석은 거니? 아니면 원래 이렇게 간악한 아이였던 거니? 밤중에 내 침소에 사내가 들었다고? 증거는 있어?”

“시녀가 증언했잖아요.”

“시녀가 그 사내를 직접 보았다고 했어?”

유선주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배준형의 말에 유지영은 비웃듯 되물었다.

“동생이 입을 더럽게 놀리기에 언니로서 따끔하게 혼내 준 것뿐인데, 왜 안 된다는 거죠? 그런 논리라면 저도 세자께 묻고 싶군요. 어제 갑자기 찾아와 혼약 상대를 바꾸겠다고 하셨는데, 그럼 세자와 선주도 진작부터 서로 눈이 맞았나요?”

“허튼소리! 난 그런 적 없어!”

유선주가 빨갛게 부은 눈으로 반박하자, 유지영은 냉소를 보였다.

“여인의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데, 넌 같은 유씨 집안의 딸이면서 좋은 날 축복은 못 해 줄망정 역겨운 말로 날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구나!”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더는 유선주의 가식을 눈감아 줄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사람들 앞에 그녀가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심보를 가졌는지 낱낱이 드러낼 생각이었다.

한참을 참고 있던 한씨가 입을 열었다.

“댁의 둘째 아가씨는 참으로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르는군요. 이 또한 의도된 것입니까? 어제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줄곧 정왕 세자와 장녕 군주가 어울리는 배필이라고 하며 사돈이 되고 싶다더니, 갑자기 둘째 아가씨로 바꾼 것도 그렇고요. 결국 지영이는 어쩔 수 없이 수구라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지요. 유국공부는 이에 대해 합당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권세를 지닌 세가의 귀부인들이었다. 유선주의 뻔한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사람들이 술렁이자 송씨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담 부인, 어제 지영이가 밤새 성질을 부리며 시녀 넷을 처소에서 내쫓은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구 역시 지영이 스스로 고집한 일이고요. 우리 집안에서는 늘 이 아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었고, 절대 홀대한 적이 없습니다.”

유씨 노부인은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문의 불행이지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었다고 불쌍해서 거두어 주었더니, 이런 일을 저지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수구를 던지겠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이 늙은이가 어린 손녀의 궤변에 놀아났군요.”

그 가벼운 한마디로, 유지영이 일찍부터 배현준과 눈이 맞았다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분개한 한씨가 반박하려 하자, 유지영은 그녀를 말리고 소리쳤다.

“홍주야!”

홍주가 나갔다가 잠시 후 네 시녀를 모두 끌고 돌아왔다.

유지영은 주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주 네가 말한 시녀가 바로 이 아이다. 어제 내가 침소에서 시집을 읽고 있는데,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이닥쳐 방 안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지. 그래서 벌을 내리려 했더니 나머지 셋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고 하더구나. 종이 주인 말을 듣지 않는데, 곁에 두어서 어디에 쓰겠느냐?”

곧이어 홍주는 상자 하나를 열어 보았는데, 안에는 적지 않은 금은보화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유선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제 이들의 방에서 나온 것들이다. 내가 평소 시녀들을 박대하지는 않아도, 이런 귀중한 것을 하사한 적은 없다.”

유지영은 고개를 돌려 유선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주야, 이렇게 불성실하고 말도 안 듣는 시녀들을 내쫓았는데 뭐 문제라도 있어?”

주향을 본 순간 이미 당황해 정신이 아득해진 유선주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언니의 시녀들이니, 언니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죠.”

유지영이 되물었다.

“어제 주향이 근거도 없는 소리로 날 모함하며 방 안을 들쑤시기에 멀리 팔아버리려 했다. 그런데 선주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니?”

그 말에 유선주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고, 그 틈을 타 송씨가 끼어들었다.

“집안 살림은 내가 관리하는데 내가 왜 모르겠니? 어제 종령원에서 그런 소란이 있었으니 당연히 무슨 일인지 부관에게 캐물었지. 선주는 그걸 지나가다 들은 거고.”

유선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숙모님도 주향을 심문하셨는데 별다른 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선주는 근거도 없는 말을 사람들 앞에서 꺼냈을까요? 정말 실수였나요? 아니면 의도적인 모함이었나요?”

송씨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어젯밤 유지영이 시녀들을 처리한 뒤, 주향은 천한 노비 신분으로 어딘가에 팔려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송 씨는 뒤에 사람을 붙였고, 이 사실을 안 송씨가 사람을 시켜 주향을 창고에 가두었다가, 노부인의 말을 듣고 멀리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송씨는 이 기회에 유지영의 평판을 한층 더 끌어내릴 생각이었는데, 유지영이 중간에서 사람을 가로챌 줄이야.

주변의 수군거림이 커지자 송씨는 이를 부드득 악물었다.

“선주도 가문의 명성을 걱정하다가 실언한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유지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만하거라!”

유씨 노부인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유지영에게 말했다.

“집안의 맏언니로서 동생에게 양보하지는 못할망정, 웃어른들이 다 보는 앞에서 동생에게 매질이나 들다니! 당장 사당으로 가서 무릎 꿇고 가훈을 백 번 필사하며 이틀 동안 반성하거라!”

연회는 결국 그렇게 뒤숭숭하게 끝이 나 버렸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유씨 노부인은 가장 먼저 네 시녀를 집안에서 내보내고는 한씨에게 해명하듯 말했다.

“지영이가 오늘 연회에서 한 행동은 실로 도를 넘었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벌을 내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씨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노부인께서 지영이를 아끼신다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고, 이 또한 유씨 집안의 집안일이니 제가 간섭할 바는 못 되지요.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어 전하러 왔습니다. 형부상서 자리가 비었는데 정왕께서 둘째 대감을 추천하셨습니다. 아마 다음 달이면 국공부 식솔들은 경성으로 복귀하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노부인의 안색이 곧바로 환해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한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 그럼 경성에서 뵙겠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노부인은 뒤돌아서 유지영에게 말했다.

“어서 외숙모를 바래다드리고 오너라.”

유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외숙모 한씨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한씨가 당부하듯 말했는데, 말투에는 은은한 불만이 담겨져 있었다.

“네 오늘 행동은 너무 과격했어. 앞으로 그 성격 좀 고쳐.”

한씨가 유씨 저택에 온 것은 담씨 노부인의 명 때문이었다. 그녀는 평소 유지영을 그리 대견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인 성격이 이렇게 모나면 결국 자신만 고생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경성에 돌아가면 그 성질부터 좀 죽이고 조용히 지내거라.”

유지영은 시선을 내리깐 채 바닥만 바라보다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 감사히 듣겠습니다, 외숙모.”

한씨를 보내고 돌아오니 고씨 어멈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가씨, 노부인께서는 잘못이 있으면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위신을 세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어멈은 바로 사당 쪽을 가리켰다.

유지영은 어차피 피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주에서는 도와줄 사람도, 기댈 곳도 없으니 참는 수밖에 없었다.

경성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었다.

그렇게 잠도 못 자고 무릎이 부서질 듯한 고통을 참았다.

다음 날, 종령원으로 돌아가 약을 바르려고 했는데, 고씨 어멈이 또 찾아왔다.

“아가씨, 노부인께서 찾으십니다.”

유지영은 대충 목을 축이고 밀떡을 몇 조각 입에 넣은 뒤, 절뚝거리며 유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

송씨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그녀는 유지영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영이 왔구나.”

“예, 숙모님.”

유지영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오늘의 송씨는 이상할 정도로 친절했다.

‘분명 뭔가 있어.’

“마침 잘 왔다. 네 숙모가 소주로 사람을 보내 가져온 운부 비단인데, 모두 열여섯 필이나 도착했단다. 집안의 어린 아가씨들 옷을 지어 입히고 싶다니, 너도 어서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보거라. 네 나이면 한창 꾸밀 나이니 사양하지 말고.”

운부 비단을 보는 순간 유지영의 안색이 급변했다.

전생에도 송씨는 사람을 보내 운부 비단을 구해 왔고, 유지영은 아무 생각 없이 그중 네 필을 골라 옷을 지어 연회장에 입고 나갔다.

유씨 집안에서 운부 비단옷을 입은 처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이 일로 그녀는 어사들에게 탄핵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운부 비단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탄핵의 이유였다. 특히 붉은색 운부 비단은 짙은 붉은빛을 내기 위해 사람의 피에 담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운부 비단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는 매우 희귀했고, 수놓이 또한 뛰어난 기교를 필요로 했다. 연일 작업에 시달린 수놓이 시녀들 가운데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이도 여럿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운부 비단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탄생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열여섯 필 가운데 네 필만 진짜였지만 말이다.

나머지는 색이 탁하거나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 탓에 주목을 받지 못했고, 오직 붉은색과 연녹색, 상아색, 연노랑색 네 필만 색감과 수놓이가 최상급이었다.

그러니 열여섯 필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집안의 어린 처자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다는 말로 유지영의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전생의 유지영은 탄핵의 증거가 명확하다는 이유로 곤장 서른 대를 맞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 형벌 탓에 몸에 이상이 생겨 회임도 어려워졌다.

게다가 사치를 부리고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는 악명까지 뒤집어써, 온화하며 소박함을 중시하는 유선주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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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을 거슬러   제316화

    "부관이 십칠만 냥의 은자를 횡령했으니, 합당한 해명이 있어야 마땅하지요."유지영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그 은자를 경왕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다.부관은 관아에 고한다는 말을 듣자 쉴 새 없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세자비 마마, 억울합니다. 은자는 참으로 전하께서 가져가신 게 맞습니다. 장방에도 전하께서 은표를 가져 가신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이에 유지영은 장방 선생을 바라보았다.장방 선생은 평생 이토록 혼란스러운 광경을 겪어본 적이 없어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세자비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인물이 아님을 잘 알기에,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모든 것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그, 그게... 전하께서 가져가신 것이 맞습니다."장방 선생은 다른 장부 하나를 더 꺼냈다. 그곳에는 경왕이 언제 얼마를 지출했는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그중 가장 큰 지출은 양정화가 저택을 구매하는 데 쓰인 삼만 냥이었고, 병을 치료하고 보약을 사는 데 또 만 냥 넘게쓰였다.또한 방현숙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도 이만 냥이 넘게 들었다.그 밖의 친척들에게도 만 냥, 오천 냥 등 제각각 은자가 돌아갔다.심지어 사람을 시켜 영지로 삼만 냥의 은자를 보내기도 했다.기록된 날짜를 보니 모두 이번 달에 벌어진 일들이었다."전하께서 가져가신 거라면 더는 할 말이 없구나."경왕비는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무마하려 손을 휘휘 내저었다.하지만 유지영이 이대로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장부를 손에 든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왕비께선 집안 살림을 맡아오신 지 꽤 오래되셨지요. 제게 장부를 넘기실 때 장부가 맞지 않다고 한마디 언질만 주셨어도, 제가 일을 이리 크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경왕비는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린 채 유지영을 노려보았다."속으로 화가 나고 전하께 불만을 품으셨더라도, 굳이 제 손을 빌려 이 일을 키우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제가 전하를 오해할 뻔하지 않았습니까."할 말은

  • 피안을 거슬러   제315화

    경왕비는 유지영이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수많은 시녀들 앞에서 자신의 출신을 꼬집으며 면박을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일말의 체면도 봐주지 않은 처사였다.경왕비뿐만 아니라, 부관과 시녀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명문가의 예법을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유지영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한마디 더 보탰다."그만하지 못할까!"경왕비가 분노하며 호통쳤다."네가 두둑한 혼수를 챙겨오고 든든한 뒷배가 있다고 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내 출신이 아무리 미천하다 한들 엄연한 왕부의 주인이다. 아랫사람에게 비난받을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유지영 역시 더는 화목한 척 연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왕비께서 경왕부로 오시기 전까지는 집안 살림이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갔습니다. 매년 점포와 장원에서 은자가 들어왔고, 그간 세자 혼자 지출해 봐야 얼마나 썼겠습니까.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공용 장부의 은자가 바닥나고, 왕비께서는 굳이 제게 살림을 넘기셨습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시는 겁니까."유지영은 처음 장부를 손에 쥐었을 때부터 이미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하지만 애써 꾹 참고 부관이 제 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경왕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속으로 불안감이 슬슬 치밀었지만 겉으로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너는 왕부의 세자비이니 내 짐을 덜어주는 것이 응당한 도리다. 공용 장부에 은자가 없는 것은, 그간 현준이가 주색에 빠져 방탕하게 지낸 탓이다. 그런 짓거리들에 은자를 물 쓰듯 썼으니 남아날 리가 없지."막나가기로 작정한 듯한 경왕비의 모습에 유지영은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동금, 가서 장방 선생을 모셔 오너라!"일을 크게 벌리려 하는 유지영의 행보에 경왕비는 의구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부관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장방의 선생들이 모두 불려 왔다.유지영은 따로

  • 피안을 거슬러   제254화

    유지영이 자녕궁을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소 상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궁문까지 배웅했다."군주께서 입궁하시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태후 마마께서는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앞으로 자주 오셔서 마마의 말벗이 되어 주십시오."유지영은 흔쾌히 응했다.궁문에 다다르자, 그녀는 손을 저어 소 상궁을 돌려보냈다.정문을 향해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던 중, 화려한 비단 도포를 입은 배준형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재수 없긴!"유지영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배준형은

  • 피안을 거슬러   제253화

    단진을 대하는 건양제의 태도는 마치 남을 대하듯 무심하고 냉혹했다.그저 황실의 체면과 규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모자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단 귀인은 자신이 입궁 후에 이런 찬밥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아들 덕에 최소한 사비(四妃)의 반열에 오르거나 귀비로 책봉될 줄 알았다.명색이 황실의 유일한 황자가 아닌가!"태후께서 두통이 도지셨으니, 부름이 없이는 함부로 자녕궁에 발을 들여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거라!"건양제는 단 귀인에게 단단히 엄포를 놓으며 운락궁 편전을 거처로 내주었다.단진은 입술에서 피가 나

  • 피안을 거슬러   제252화

    청죽이 다급히 단진을 말렸으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결국 하는 수 없이 단진을 부축해 뒤뜰의 허름한 별채로 거처를 옮겼다."부인은 유일한 황자의 생모이시지 않습니까. 자식의 신분이 높아지면 앞으로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실 텐데,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머무려 하십니까?"단진은 단호하게 꾸짖었다."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게! 나는 지금 평범한 백성일 뿐이네. 대황자 전하를 낳아 키운 것만으로도 내게는 차고 넘치는 복이거늘, 감히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막 입궁하여 아직 건양제의 용안조차 뵙지 못했다.명

  • 피안을 거슬러   제251화

    배현준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태후 마마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어젯밤은 신분을 확인하느라 모두가 밤새 정신이 없었어."그는 유지영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영아, 태후 마마께서는 현명하시고 폐하께서도 효심이 깊으신 분이야. 단진이 고의로 회임 사실을 숨긴 것이라면, 진작에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고 일부러 태후 마마의 심기를 거슬러 궁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 폐하께서 이 일로 마마를 원망하시지는 않을 것이다."유지영은 그래도 마음이 온전히 놓이지 않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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