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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 구조의 균열

Author: 8489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23 05:41:33

차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병원 지하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서아와 도윤은 바로 태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태성 본관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시 감시선 안으로 들어간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 안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생각을 정리하는 정적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오히려 말이 막히는 상태에 가까웠다.

서아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병원 외벽은 멀어지고 있었고, 새벽빛이 아주 천천히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지하 관리구역의 금속 냄새와 총성이 남아 있었다.

도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정리해야 합니다. 방금 전까지는 샘플 조작 사건을 쫓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큰 구조가 확인됐습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 이걸 병원 쪽에서 더 파고들지, 아니면 태성 내부부터 흔들지.”

서아는 창밖을 보다가 낮게 말했다.

“둘 다 해야지.”

도윤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물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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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핏빛 유산   97화 — 왕관의 덫

    UPLOAD COMPLETE.그 문장이 지하 기록실 모든 화면에 떠오른 순간, 강도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평정이 사라졌다.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소리치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오래 관리해온 질서가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본 사람처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서아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Blood Approval Authority leaked.Signatory: Kang Do-hyun.강도현의 이름. 태성의 피를 승인하고 지우던 자의 이름. 그 이름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갔다.위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거칠게 쏟아졌다.“언니!”지연이 먼저 뛰어 내려왔다. 손에는 부서진 잠금장치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 뒤로 도윤이 장비 가방을 메고 내려왔고,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서아 씨, 괜찮습니까?”서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랑 하윤이는?”지연이 바로 답했다.“차 안. 내 사람 둘이 붙어 있어. 문 잠그고 있어. 지금은 안전해.”그제야 서아의 어깨에 아주 짧은 힘이 빠졌다.하지만 태준은 여전히 강도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끝난 거 아닙니다.”강도현은 조용히 웃었다.“그래. 끝난 게 아니지.”그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지연의 얼굴이 구겨졌다.“아니, 이름 까였는데도 왜 이렇게 여유로워?”강도현은 지연을 보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서아에게 고정돼 있었다.“강서아.”서아는 차갑게 대답했다.“내 이름 부르는 거 허락한 적 없어.”“네가 방금 뭘 했는지 알고 있나.”“당신 이름을 공개했지.”“아니다.”강도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너는 유산의 문서를 열었고, 네 생체키로 원본에 접근했으며, 외부망으로 전송했다.”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도윤이 급히 단말을 확인했다. 몇 초 뒤 그의 표정이 굳었다.“서아 씨.”태준이 바로 물었다.“뭔데.”도윤은 화면을 확대했다.“전송된 파일에 접근 로그가 같이 붙었습니다. S-01 생체 접근, 원본 권한 열람, 외부 전송 승인.”지연이

  • 핏빛 유산   96화 — 묻힌 이름들

    바닥 아래로 열린 계단은 생각보다 깊었다.집 안의 불은 꺼졌고, 현관문은 잠겼다. 밖에서는 지연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언니! 들려? 강서아!”도윤의 목소리는 이어폰 속에서 끊겨 있었다. 잡음만 희미하게 튀었다.태준은 서아의 팔을 잡은 채 현관 쪽을 한 번, 열린 계단을 한 번 바라봤다.“지금 내려가면 저 사람 뜻대로 움직이는 거야.”서아는 어둠 속 계단을 내려다봤다.“이미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도 저 사람 뜻이었어.”“그러니까 더 조심해야지.”“조심할 거야.”서아는 태준을 봤다.“근데 피하면 안 돼.”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서아.”“하윤이를 지키려면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해. 엄마가 숨긴 집이 왜 관찰점이 됐는지, 강도현이 왜 나를 기다렸는지, 왜 나더러 유산을 받으라고 했는지.”짧은 숨.“그 답이 저 아래 있잖아.”태준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때 뒤쪽에서 회장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내가 먼저 내려가겠다.”서아가 돌아봤다.회장은 아직도 이마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이상하게 또렷했다.서아는 차갑게 말했다.“몸 상태로요?”회장은 강도현을 노려봤다.“저 사람은 내 형이다.”강도현은 계단 입구에 서서 조용히 웃었다.“그래. 그래서 네가 제일 늦게 내려와야 한다, 무진아.”회장의 얼굴이 굳었다.강도현은 천천히 말했다.“너는 늘 바닥을 보지 않으려 했다. 위에서 명령을 내리고, 중간에서 모른 척하고, 마지막엔 인정하지 않은 채 물러섰지.”짧은 침묵.“오늘은 끝까지 봐라.”서아가 그 말을 잘랐다.“회장님은 뒤에 계세요.”회장이 서아를 봤다.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이번엔 회장님이 먼저 막는 그림 필요 없어요. 제가 보고, 제가 판단할 거예요.”“위험하다.”“계속 위험했어요.”짧은 정적.“다만 지금은 제가 위험한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에요.”그 말에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태준은 서아 옆에 섰다.“그럼 같이 내려가.”서아는 짧게

  • 핏빛 유산   95화 — 유산의 규칙

    “그럼 그 문, 내가 열게.”서아의 말이 떨어지자 강도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기다리던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서아는 바로 말했다.“대신 먼저 조건이 있어.”강도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조건을 거는 버릇이 있군.”“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니까.”서아는 하윤이 있는 차를 가리켰다.“엄마랑 하윤이를 우리 쪽 차로 옮겨. 그다음 내가 들어가.”강도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민유라가 탄 차량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민유라는 하윤을 품에 안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 그러나 아이를 안은 팔만큼은 단단했다.강도현이 낮게 말했다.“유라는 늘 도망칠 곳을 만들었다.”서아가 차갑게 답했다.“당신은 늘 그 도망칠 곳까지 따라왔고.”강도현은 서아를 보았다.“그 집을 남겨둔 건 나다.”“그러니까 이번엔 당신 뜻대로 안 들어가.”짧은 정적.“엄마랑 하윤이 먼저.”태준이 서아 옆으로 다가왔다.“내가 데려올게.”서아는 그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아니. 지연이가 가.”태준의 표정이 굳었다.“서아.”“넌 내 옆에 있어.”짧은 침묵.“저 사람은 네가 움직이는 것도 보고 있을 거야.”태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지연이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나 또 쓰네.”서아가 낮게 말했다.“이번엔 믿어서.”지연의 얼굴이 아주 잠깐 멈췄다.“…그런 말 갑자기 하지 말라니까.”“가.”지연은 대답 대신 민유라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가벼워 보였지만, 손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돼 있었다.강도현은 막지 않았다.그가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짧게 손짓했다.“물러서라.”검은 옷의 남자들이 몇 걸음 뒤로 빠졌다.민유라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하윤은 그녀의 품 안에서 잠든 채 작은 숨을 쉬고 있었다. 지연이 얼른 다가가 주변을 확인한 뒤, 낮게 말했다.“괜찮아요. 빨리 움직여요.”민유라는 서아

  • 핏빛 유산   94화 — 안전한 집은 없었다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차 안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민서윤은 문지기였고, Core-2는 강도현. 회장의 형. 태성의 피 안쪽에서 사람의 이름과 혈연을 유산처럼 관리해온 사람.그리고 그가 있는 곳이 강릉이었다.서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하윤의 작은 손을 떠올렸다. 조금 전까지 품 안에 있던 따뜻한 체온. 이제 겨우 이름을 되찾은 아이.그 아이가 향하는 곳이 정말 은신처인지, 아니면 더 오래된 덫인지 알 수 없었다.도윤이 운전대를 잡은 채 말했다.“민유라 씨 차량 위치 잡았습니다. 강릉 외곽 진입 직전입니다. 아직 추격 차량은 붙지 않았습니다.”서아가 바로 물었다.“근데?”도윤은 잠깐 망설였다.“강도현 접속 위치와 거리가 계속 가까워집니다.”지연이 뒷좌석에서 낮게 욕을 삼켰다.“우연일 리 없지.”태준은 노트북 화면을 보며 말했다.“Core 방에서 새 메시지 떴어.”서아가 돌아봤다.“읽어.”태준은 화면을 한 번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Core-2: Y-00 귀환 가능성 상승. Garden House 관찰 단계 유지.”차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서아가 천천히 되물었다.“Garden House?”도윤이 바로 검색을 돌렸다.“공식 시설명은 아닙니다. 하지만 강릉 쪽 태성문화재단 산하 시설 중 비공식 명칭으로 Garden 계열이 붙은 곳이 있습니다.”지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G-17, Garden Line, Garden House.”태준이 낮게 말했다.“전부 같은 계열이야.”서아는 회장을 봤다.“아세요?”회장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잠깐의 침묵만으로도 서아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또네요.”회장이 낮게 말했다.“이름은 들어봤다.”서아는 웃지 않았다.“그 말, 이제 지겨워요.”회장은 고개를 숙였다.“강도현이 쓰던 말이다. Garden. 보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관찰과 격리 사이를 뜻했다.”도윤이 말했다.“그러면 강릉 집이 단순 은신처가 아니라 Garden

  • 핏빛 유산   93화 — 강씨 피 안쪽

    도로 위에 남은 것은 부서진 차와 깨진 유리, 그리고 아직 식지 않은 피 냄새였다.민서윤의 차량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위원회 사람들도 철수 명령을 받은 듯 하나둘 물러났다. 하지만 누구도 안도하지 못했다.끝난 게 아니었다.오히려 지금 막, 더 깊은 문이 열린 참이었다.서아는 천천히 회장을 바라봤다.“Core-2.”짧은 침묵.“누구예요.”회장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그 침묵이 너무 길었다. 서아는 이제 그 침묵의 의미를 안다.몰라서가 아니라, 말하기 싫어서. 말하면 무너지는 게 있어서. 그럴 때 회장은 항상 이렇게 침묵했다.서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또 미루실 건가요?”회장의 얼굴은 피로 젖어 있었고,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서아.”“제 이름 부르지 말고 대답하세요.”서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민서윤이 문지기라고 했어요. 뿌리는 강씨 피 안에 있다고 했고요. Core-2는 강씨 성이고, 회장님은 지금 그 이름을 듣자마자 굳었어요.”짧은 정적.“그러니까 아는 사람이잖아요.”지연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회장님, 지금 이 분위기에서 모른다고 하시면 진짜 너무 티 나요.”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회장과 서아 사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도윤은 태블릿을 확인하며 말했다.“Core-2 코드 일부 더 복구 중입니다. 아직 전체 이름은 안 열렸지만, 강씨 성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태성 내부 옛 법무라인과 연결 흔적이 있습니다.”회장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서아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법무라인.”짧게.“그 사람, 태성 안쪽 사람이네요.”회장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 이름을 꺼내면.”짧은 숨.“태성은 지금보다 더 크게 흔들린다.”서아는 차갑게 웃었다.“아직도 태성이 먼저예요?”회장은 고개를 저었다.“아니다.”“그럼 말하세요.”회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태준이 낮게 말했다.“회장님.”회장의 시선이 태준에게 옮겨갔다.태준은 조용하지

  • 핏빛 유산   92화 — 미끼를 문 사람

    민서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그 짧은 변화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늘 사람을 숫자로 읽고, 반응을 계산하고, 감정을 조건값으로 처리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이 계산 안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서아는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도로 한가운데. 앞에는 민서윤. 뒤에는 회장 차량. 옆에는 태준. 그리고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는 지연이 검은 차량 쪽으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민서윤이 낮게 말했다.“네가 미끼였다고?”서아가 대답했다.“응.”짧은 침묵.“하윤이도, 엄마도 아니고.”민서윤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그래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아니.”서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이제 시작이라고 했잖아.”민서윤은 서아 뒤쪽을 훑었다. 태준, 도윤이 탄 차량, 피 묻은 얼굴로 안쪽에 앉아 있는 회장.그리고 다시 서아를 봤다.“하윤은 어디 있지.”서아의 눈빛이 단숨에 날카로워졌다.“그 이름 네 입에 올리지 마.”민서윤은 희미하게 웃었다.“이름을 되찾았다더니, 더 예민해졌네.”“아니.”서아가 낮게 말했다.“이제 그 이름이 뭔지 알았으니까.”짧은 정적.“네가 숫자로 덮으려고 했던 사람 이름.”민서윤은 바로 흔들리지 않았다.“이름은 감정을 붙이는 도구야. 감정은 판단을 흐리고, 흐린 판단은 아이를 위험하게 만들지.”태준이 옆에서 이를 악물었다.“아직도 그 말을 해?”민서윤의 시선이 태준에게 갔다.“강태준. 넌 늘 늦어. 알고도 늦고, 움직이고도 늦고, 지키려 해도 늦지.”태준의 얼굴이 굳었다.서아가 바로 말했다.“태준 건드리지 마.”민서윤의 눈이 다시 서아에게 향했다.“보호하나?”“아니.”짧은 숨.“내 앞에서 시간 끄는 거 보기 싫어서.”그 말에 태준의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하지만 서아는 그를 보지 않았다.서아의 시선은 오직 민서윤에게 고정돼 있었다.“네가 S-01 생포 승인했지.”민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아는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Core 방에

  • 핏빛 유산   55화 — 단절

    별관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복도는 조용했고, 새벽 공기는 싸늘했다. 그런데도 서아는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방금 전 라운지에서 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윤지연의 웃음. 태준의 침묵.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USB.배신이라고 단정하기엔 아직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었고, 연기였다고 믿기엔 너무 차갑게 보였다. 문제는 그 둘 사이에 놓인 그 애매한 틈이, 지금 서아를 가장 미치게 만들고 있다는 거였다.회의실 문이 닫히자 도윤이 먼저 입

  • 핏빛 유산   53화 — 네가 만든 함정

    라운지 안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 불빛은 화려했지만, 그 안에 서 있는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은 차갑고 날카로웠다.윤지연은 태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 USB가 둘 사이의 비밀처럼 보였는데, 서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건 바로 칼이 됐다.지연이 먼저 웃었다.“왔네, 언니. 생각보다 빨랐어.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늦은 건가?”서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시선을 태준에게만 고정했다. 지

  • 핏빛 유산   46화 — 먼저 나온 증거

    회장실 안 공기는 묘하게 차가웠다. 누가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없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조여들었다. 책상 위에 놓인 흰 봉투 하나가 그 이유였다.윤지연은 그 봉투를 회장 쪽으로 밀어놓은 채, 등을 곧게 세우고 서 있었다. 얼굴에는 익숙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반대로 서아는 회장실 문 앞에서 한 걸음 늦게 멈춰 섰다. 방금 막 불려 올라왔다는 티가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회장은 먼저 서아를 보더니, 다시 봉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늦었군.”서아는 천천히 안으로

  • 핏빛 유산   10화 — 탈출

    문이 잠긴 소리가 아직 공기 속에 남아 있었다.철컥.그 짧은 금속음이—이 방을 완전히 밀실로 바꿔버렸다.윤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눈앞.한수민을 닮은 여자.하지만—전혀 다른 존재.“…엄마 아니야.”그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도윤이 먼저 움직였다.문으로 달려갔다.손잡이를 잡았다.철컥.돌아가지 않았다.“잠겼습니다.”낮고 짧은 보고.서아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당황하지 마.”도윤이 뒤를 돌아봤다.“상대가 유도했습니다.”“알아.”짧은 침묵.서아의 시선이 방 안을 훑었다.문. 창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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