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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2-26 17:16:37

“으아, 이 한겨울에 빨래 담당이라니! 세수도 하기 싫은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원래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잖아!”

동기의 칭얼거림이 차가운 냇가에 울려 퍼졌다. 미옥은 대꾸 대신 얼음장 같은 물에 방망이질을 해댔다.

“입 말고 몸을 움직여. 그럼 좀 덜 추울 테니까.” “그러지 말고, 미옥아.”

콧소리 섞인 목소리에 미옥이 경계 서린 눈초리로 고개를 돌렸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노 씨한테 가서 뜨거운 물 좀 달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물이 뭐야, 빨래도 대신 해줄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방망이질이나 해.”

매몰찬 대꾸에 동기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잘 생각해 봐. 노 씨는 상급 하인이잖아. 따로 살 집도 있고 돈도 꽤 모았을걸? 인물도 저 정도면 훤칠하고.” “그렇게 괜찮으면 네가 가지 그래?” “어머머, 정말 몰라서 물어? 노 씨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이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가 너만큼만 예뻤어도 벌써 꼬셨지.”

미옥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종년이 예뻐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래? 평민인 노 씨가 노비랑 혼인이라도 해줄 것 같아? 헛꿈 꾸지 마.”

퍽, 퍽! 미옥의 방망이질 소리가 거칠어지자 동기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미옥아! 미옥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멀리서 노 씨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 봐, 저렇게 애타게 부르잖아.” “입 닫으랬지? 누가 들을까 겁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노 씨는 미옥의 앞에 서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

“주인님께서 널 찾으신다! 일각을 넘기지 말고 오라 하셨으니 어서 뛰어!”

“예? 무슨 일로요?”

옆에 있던 동기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일어섰다. 하지만 노 씨는 대답할 여유도 없다는 듯 미옥의 팔을 낚아챘다.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그의 손길에 휩쓸린 미옥이 그만 반석에 걸려 냇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얼음물 같은 냉기가 치맛자락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

“으아, 차가워! 옷이라도 갈아입고 갈 테니 먼저 가세요!” “안 돼! 늦으면 장형이라 하셨단 말이다. 무슨 일인지는 나도 모르니 일단 뛰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엊그제 어멈이 먹어도 된다고 해서 슬쩍한 떡 때문인가? 아니면 설마 내가 저지른 다른 잘못이 있나? 머릿속이 하얗게 번지는 사이, 노 씨가 안채를 지나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잠깐,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긴, 별채지.”

미옥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별채. 높으신 귀빈들이 머물다 가는 곳이자, 그들이 머물 때마다 노비가 하나둘 죽어 나간다는 소문이 무성한 금단의 구역이었다. 상급 하인들만 출입하며 온갖 진귀한 보물과 일 년 내내 시들지 않는 꽃이 가득하다는 그 기괴한 낙원.

좁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서자, 한겨울임에도 눈이 시리도록 붉은 꽃들이 미옥을 반겼다. 아찔한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메마른 목소리가 고요를 깼다.

“늦었구나.”

미옥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꽁꽁 얼어붙은 흙바닥의 냉기가 무릎을 타고 올라왔지만, 눈앞에 선 사내가 뿜어내는 기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빨래터가 멀어 그만…….” “이 년이 따라오다 물에 빠지는 바람에 지체되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애를 태우던 노 씨의 목소리는 비겁할 정도로 차가웠다. 미옥은 배신감에 욕지거리가 치밀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바들바들 떨며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그 명령에 미옥이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미옥은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눈앞에 선 사내, 하륜은 환관의 관복을 입고 있었으나 그가 풍기는 아우라는 결코 거세된 사내의 것이 아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넓은 어깨였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관복이 어깨선을 따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뻗은 큰 키는 미옥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누가…… 이 자를 환관이라 하겠는가.’

미옥은 멍하니 하륜의 얼굴을 응시했다.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 위에 얹어진 이목구비는 얼음 호수를 벼려 만든 검처럼 날카롭고 매끄러웠다. 짙은 눈썹 아래로 깊게 자리 잡은 눈매는 서늘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고,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굳게 다물린 얇은 입술은 그가 얼마나 정에 무관심하고 냉혹한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내치고는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나, 그것은 감탄보다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륜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미옥을 훑어내렸다.

“그리 겁먹을 것 없다. 나는 쓸모 있는 자에겐 관대하니까.”

“예……?”

“내 너를 이 집에 두지 않으려 했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거두었다. 이제 네가 약인지, 그냥 버릴 오물인지 확인해 봐야겠구나.”

그의 목소리엔 감정이 없었다.

“이 집안에 빨래할 종은 차고 넘친다. 사내 놈들이라면 네 얼굴을 보고 첩이라도 삼겠지만, 내게 계집의 얼굴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느냐. 쓸모없다면 돈을 더 쳐주는 곳에 팔아넘길 뿐이지.”

미옥은 숨을 죽였다.

“네 운명은 저 안에 계신 분께 달렸다. 들어가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미옥은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졌다. 등 뒤에서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퇴로는 없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방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연기로 자욱했다. 뜨거운 증기가 피부에 닿자 얼음장 같던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지만, 코끝을 찌르는 향취는 기이했다. 달콤하면서도 비릿하고, 약재 냄새 같으면서도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기묘한 증기.

미옥은 매캐한 공기에 기침을 참으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때, 연막처럼 깔린 연기 너머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겨울에, 물에 젖은 꽃이라……. 하륜, 그놈이 제대로 작정을 했군.”

무심한 듯 서늘한 목소리. 미옥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사내의 실루엣이 천천히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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