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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비
환관의 비
Author: 양순이

1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2-26 17:16:00

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쏟아졌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백색의 지옥이었다.

북방의 잔혹한 겨울바람이 여인의 비단 옷자락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겹겹이 껴입은 비단옷이 종잇장처럼 얇게 느껴질 정도의 혹한이었다. 드러난 살결은 이미 감각이 마비된 지 오래였고,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서리는 속눈썹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미옥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금속의 소름 끼치는 서늘함, 그리고 그 칼끝에 매달린 누군가의 지독하게 뜨거운 생명력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는 액체는 차가운 대기와 만나 하얀 김을 내뿜으며 그녀의 손목을 적셨다.

"하아, 하…….“

은백색 설원 위에 쓰러진 남자의 입술 사이로 하얀 김과 함께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졌다. 그의 가슴에 깊숙이 박힌 검을 타고 흐른 피가 눈을 녹이며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미옥은 그 핏빛 웅덩이 한가운데, 망연히 서 있었다.

미옥의 손에 쥐어진 검은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고결한 물건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남자의 심장을 가르는 추악한 흉물에 불과했다. 그녀는 비릿한 혈향이 섞인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으며 쓰러진 남자의 눈을 보았다.

정작 죽어가는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오히려 안도하는 듯한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옥은 그 미소가 진저리치게 싫었다.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고, 권력을 위해 기꺼이 등을 떠밀었던 그 치밀함이, 마지막 순간에는 이토록 숭고한 희생으로 둔갑하는 것이 가증스러웠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떨림의 이유가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그가 없이 견뎌야 할 고독한 날들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째서…… 피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쯤은…… 진심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남자는 떨리는 손을 들어 미옥이 쥐고 있는 칼날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날카로운 날에 그의 손바닥이 베여 나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의 시선은 미옥의 얼굴을 지나, 그녀의 아직 평평한 복부로 향했다. 그 눈빛은 가련할 정도로 애틋했다.

“어서…… 우리 아이를 지켜.”

“어떻게 그리…….”

그녀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으며 물었다.

“확신합니까? 당신을 죽여서라도 살고자 하는 이 독한 계집을, 대체 어찌 끝까지 믿느냐 말입니다.”

그는 대답 대신 칼끝을 제 심장 쪽으로 더 깊숙이 당겼다. 살점이 갈리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미옥의 고막을 잔인하게 긁었다. 그는 고통을 삼키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너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니까. 끝내 닿을 수 없었던…… 나의 비(妃)여.”

그 고백은 죽음의 문턱에서 부르는 연가치고는 지나치게 오만했고, 지독하게 뜨거웠다. 남자는 마지막 힘을 다해 미옥에게 손짓했다. 더 가까이 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미옥이 주저하며 몸을 숙이자, 남자는 제 품 안 깊숙한 곳에서 묵직하고 차가운 무언가를 꺼내 그녀의 손에 강제로 쥐여주었다.

손바닥에 닿는 기괴한 서늘함. 그것은 황금빛 용의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된, 절대 권력의 상징인 옥쇄였다.

“가져가…… 그리고 살아라. 누구의 발밑도 아닌, 가장 높은 곳에서.”

남자의 눈빛은 마지막 숨 하나까지 태워 그녀를 그리겠다는 듯 형형하게 빛났다. 자신에게는 목숨보다 이 붉은 진심이 먼저였다고, 보라고, 결국 당신의 손을 빌려 내 가슴 속에 이토록 붉은 마음을 피워내지 않았느냐고 시위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사랑하겠다는 그 지독한 고집. 그것이 이 남자가 선택한 운명이었다. 그의 눈에는 원망이 없었다. 그 평온함이 미옥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를 증오해야만 이 지옥 같은 궁궐에서 버틸 수 있었는데, 그는 마지막 순간에조차 그녀에게 증오할 권리조차 주지 않았다.

“......”

미옥은 눈을 감으며 손에 마지막 남은 힘을 실었다.

서걱-!

흉곽을 관통하는 불쾌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사내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꺾였다. 끝내 감기지 못한 그의 눈동자에는 마지막까지 미옥의 일그러진 얼굴이 낙인처럼 담겨 있었다.

미옥은 차마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억눌렀던 뜨거운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그것이 얼어붙기도 전에 거친 손등으로 차갑게 닦아내 버렸다. 슬퍼할 시간조차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이제 그녀는 이 죽음을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더 깊은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멀리, 어둠 속에서도 금빛으로 휘황하게 빛나는 황궁의 지붕이 보였다. 저곳에는 또 다른 괴물이, 자신의 여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너를 가장 높은 곳에 올려주마.“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린 미옥이 서늘하게 읊조렸다.

미옥은 단 한 번의 돌아봄도 없이, 남겨진 온기를 뒤로한 채 눈보라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옥쇄의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눈보라를 뚫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여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만약…… 우리가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면.’

붉은 옷자락이 눈 위를 쓸며 긴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핏자국 같기도 했고, 이제 막 피어난 도화(桃花)의 꽃길 같기도 했다.

과거의 기억들이 눈발처럼 어지럽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모든 비극의 시작, 비릿한 욕망과 낡은 가구의 냄새가 뒤섞여 나던 그날, 미천한 하녀였던 그녀가 처음으로 왕이라 불리던 사내의 눈에 들었던 그날의 기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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