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Chapter 1431 - Chapter 1440

1440 Chapters

제1431화

심유빈은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머리를 세게 맞은 듯 멍해졌다.‘총리라고?’‘소예지를 쫓아다녔던 그 젊은 군인이... 총리의 아들이었다고?’심유빈은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순간 흐려지고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질투와 부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그녀는 줄곧 소예지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이한과 결혼한 것도, 지금 고이한의 투자를 받아 최고의 과학자가 된 것도 단순히 좋은 기회를 잡은 결과라고 여겼다.하지만 심유빈은 몰랐다. 소예지의 뒤에 총리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배경을 가진 임현욱이 있었다.소예지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머지않아 총리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심유빈은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지금 자신의 처지가 우스울 정도로 초라하게 느껴졌다.온갖 방법을 동원해 겨우 조병호 같은 사업가에게 기대고 있었고 그마저도 그의 눈에는 장난감에 불과했다.그런데 소예지는 총리의 아들에게 진심 어린 구애를 받고 있었다.그 순간 심유빈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우월감과 억울함은 완전히 흔들렸다.하지만 곧 고이한이 떠올랐다.고이한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고 해도 결국은 사업가였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임현욱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만약 임현욱이 정말 소예지를 진심으로 마음에 두고 있다면 고이한이 아무리 소예지 곁을 지킨다 한들 결국 의미 없는 일이었다.이 생각은 심유빈에게 묘한 만족감을 안겨주었다.고이한은 아무리 돈과 영향력을 가진 사업가라 해도 진짜 권력 앞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윤하준이나 하종호조차 비교하기 어려운 존재였지만, 그런 고이한마저 임현욱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하는 듯했다.만약 소예지가 임현욱을 선택한다면, 고이한은 결국 버림받는 사람이 된다.그 사실에 심유빈의 마음은 복잡하게 뒤엉켰다.한편으로는 임현욱이 소예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고이한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을 느껴보길 바랐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임현욱이 결국 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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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2화

소예지는 이후 며칠 동안 새 실험 준비에 몰두했다.그 사이 딸을 데리고 고씨 저택에 들러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월말에는 M국으로 학술 교류를 떠날 예정이었다.그러던 중 진기태에게서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그녀를 위해 어렵게 마련한 이번 기회를 꼭 놓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소예지 역시 이번 학술 교류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녀는 딸의 유치원 졸업식에 참석한 뒤 짐을 챙겨 출국할 계획이었다.그날도 소예지는 스미스 박사의 내부 자료에 접속해 이번 교류회에서 참고할 수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러다 문득 예전부터 신경 쓰였던, 잠겨 있는 마지막 문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이던 소예지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다시 문서를 클릭했다.곧 비밀번호 입력창이 나타났다.그녀는 떠오르는 비밀번호를 하나씩 입력해 보기 시작했다.예전에 고이한과 함께했던 시간, 딸의 생일, 자신의 생일, 고이한의 생일, 결혼기념일까지 생각나는 중요한 날짜를 모두 넣어봤다.하지만 십여 번을 시도해도 문서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소예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고이한은 대체 어떤 비밀번호를 설정해 둔 걸까.’스미스 박사조차 이 문서를 언급하는 것을 몹시 꺼릴 정도였으니 그 안에는 분명 중요한 자료가 들어 있을 터였다.결국 소예지는 필요한 자료만 모두 정리한 뒤 컴퓨터를 끄고 딸을 재우기 위해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다음 날 오전, 유치원에서는 아이들 간 교류 행사가 진행되었고 오후 두 시 반에는 문화회관에서 졸업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오후 두 시.고수경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문화회관 주차장에 도착했다.오늘은 고하슬의 공연이 있는 날이라 가족 모두가 함께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이한한테 도착했는지 물어봐라. 이런 날은 절대 놓치면 안 되지.”최현숙이 손녀를 재촉했다.“오빠한테 물어봤어요. 오는 중이래요.”고수경은 할머니를 부축하며 문화회관 안으로 들어갔다.진가영이 뒤를 따랐고 그 뒤에는 이문혁이 부하들과 함께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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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3화

고수경은 휴대폰을 들어 막 전화를 받으려던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복도 조명 아래,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윤하준이 서 있었다.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수화기 너머 상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고수경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때 윤하준이 통화를 마치고 몸을 돌리려 하자 그녀는 황급히 복도 한쪽 그늘로 몸을 숨겼다.윤하준은 그대로 다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제야 고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에는 씁쓸한 자격지심이 어려 있었다. 윤하준을 볼 때마다 심장은 어김없이 빨리 뛰었지만 이제는 그를 마주할 용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윤하준에게 자신보다 더 좋은 여자가 어울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문을 열고 들어선 윤하준의 자리는 뒤쪽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앉지 않고 어둑한 곳에 서서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바로 소예지가 앉아 있는 자리였다.조명이 꺼지기 전부터 그는 이미 소예지를 발견했다. 다만 사람이 너무 많아 다가가 인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그리고 지금, 어둠 속에서 그는 소예지의 곁에 고이한이 앉아 있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예상했던 광경이라는 듯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윤하준은 말없이 자기 자리로 향했다. 어둠이 그의 감정을 모두 감춰 주었다. 그는 이내 시선을 무대로 옮겼다.무대 위에는 고하슬이 올라와 있었다.조명이 원을 그리며 무대를 감싸자 고하슬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채 객석을 향해 공손히 인사한 뒤 피아노 앞에 반듯하게 앉았다.곧 작고 앳된 손이 건반 위에 내려앉았고 공연장 안에는 맑고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졌다.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연습곡이었다.고하슬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연주했고 어린 나이답지 않게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였다.고이한은 휴대폰을 꺼내 딸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정성스럽게 촬영했다.소예지는 부드러운 눈길로 딸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기쁨과 뿌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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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4화

이윽고 윤하준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소예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예지 씨, 우리 외숙모님 명의로 있는 연구 자금은 계속 지원할 만한 연구를 찾고 있었어요. 지금은 저희 어머니 같은 환자가 너무 많잖아요. 저는 예지 씨를 믿고 예지 씨 팀도 믿어요. 저희 어머니 같은 분들에게 앞으로 희망을 드리고 싶어요.”저녁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서늘한 기운을 실어 왔다.소예지는 윤하준의 눈빛에 담긴 간절한 기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하준 씨, 저를 이렇게 믿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이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라 불확실한 부분이 너무 많아요. 투자금을 회수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 점은 미리 알고 계셔야 해요.”“알아요.”윤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예지 씨 말씀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이해해요. 설령 연구가 아주 작은 한 걸음밖에 나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한 걸음만으로도 희망이 될 거라고 믿어요.”윤하준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그 안에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오직 소예지를 향한 믿음만 담겨 있을 뿐이었다.소예지는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이 제안이 단순한 연구비 지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알겠어요.”소예지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최선을 다해볼게요. 하준 씨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윤하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이한이가 상공회를 통해 예지 씨 이름으로 전용 연구 기금을 만들어줬다고 들었어요. 저도 상공회를 통해 기부해서 그 연구 기금으로 들어가도록 할게요.”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고이한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윤하준은 이안의 손을 잡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차 안에서는 최현숙과 진가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하준이 떠난 뒤에야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왕할머니, 할머니!”고하슬이 반갑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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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5화

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비행기 안에서 살펴봐야 할 자료가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준비 기간이 워낙 촉박했던 탓에 남은 자료는 비행하는 동안 마저 확인할 생각이었다.다음 날은 집에서 푹 쉬었다.저녁 무렵, 고수경이 고하슬을 데리러 왔다. 다음 날 다시 찾아와 고씨 저택까지 데려다주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그날 밤, 소예지는 필요한 짐을 미리 챙겨두었다. 다음 날 아침 일곱 시가 되자 눈을 뜬 그녀는 마지막으로 준비물을 확인했다.오전 여덟 시, 집 앞에 차가 멈춰 섰다. 곧이어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자 고이한이 서 있었다. 마침 캐리어 하나와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나오던 소예지는 그와 마주쳤다.고이한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에 들린 짐을 하나씩 받아 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양희순은 환한 얼굴로 소예지를 배웅했다.“사모님, 안전하게 잘 다녀오세요!”소예지도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도 푹 쉬세요.”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소예지는 문득 고이한에게 짐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짐은?”“김 비서가 미리 공항으로 보내놨어.”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늘 고이한의 마이바흐가 서 있던 자리에는 은회색 스포츠카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날렵한 차체와 미래적인 디자인이 조명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차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소예지도 이 스포츠카가 엄청난 고가라는 것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예전의 고이한은 스포츠카를 여러 대 가지고 있었지만 고하슬이 태어난 뒤부터는 카시트를 설치하기 편한 세단이나 SUV만 몰았고 스포츠카는 거의 타지 않았다.고이한은 소예지의 짐을 앞쪽 트렁크에 실은 뒤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타.”소예지는 무언가 묻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고이한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지하 주차장에는 낮고 묵직한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소리가 차분한 저음으로 가라앉았고 스포츠카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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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6화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다.소예지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이 진동했다.확인해 보니 고이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착륙하면 문자 줘.]소예지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도착했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뒤에서 이문혁이 소예지의 캐리어를 끌고 다가왔다.그는 이번 일정 동안 고이한의 부탁을 받아 줄곧 소예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이 비서님, 고마워요.”소예지가 웃으며 인사하자 이문혁도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그때 전용 차량 한 대가 소예지 앞에 멈춰 섰다.이문혁은 운전기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소예지에게 말했다.“대표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차량입니다. 소 박사님, 타시죠.”소예지는 눈앞의 고급 세단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지금 와서 사양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고이한이 여기까지 준비해 둔 이상,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다.차는 부드럽게 시내를 향해 달렸고 이문혁은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다.이번 학술 교류회는 M국의 명문 대학에서 열릴 예정이었다.소예지가 머물 호텔도 그 대학에서 걸어서 2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호텔 객실에 도착한 소예지는 짐을 정리한 뒤 곧바로 노트북을 켰다.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 이어질 예정이었다.삼십 분쯤 자료를 정리하던 소예지는 눈이 뻑뻑해지는 것을 느끼고 잠시 손을 멈췄다.창밖으로 낯선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그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번 여행을 위해 고이한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챙겨준 일들을 떠올렸다.그 배려 하나하나가 잠잠했던 마음을 조금씩 흔들어 놓았다.소예지는 알고 있었다. 고이한이 말없이 자신의 방식으로 미안함을 전하며 조심스럽게 다시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소예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지난 3년 동안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쌓여 있던 오해는 하나씩 풀렸고 고이한을 향한 그녀의 마음도 어느새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이혼하던 날의 차갑고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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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7화

그날이 소예지가 고이한을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고개를 든 소예지는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숨을 멈췄다. 그렇게 눈에 띄게 잘생긴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그 순간 심장이 제 박자를 잃고 뛰기 시작했고 순진했던 소예지의 마음은 고이한을 본 순간 활짝 열리고 말았다.훗날 아버지의 진료실에서 고이한을 다시 마주친 뒤에야 소예지는 아버지가 지난 반년 동안 치료에 매달려온 환자가 바로 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후로도 소예지는 병원 도서관 한쪽에서 시험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이한이 책을 들고 찾아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때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오후 내내 같은 자리에 머물곤 했다.그해 소예지의 공부는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아버지가 내준 공부까지 소홀히 하는 바람에 결국 크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소예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고이한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도서관에서 보낸 오후마다 책은 펼쳐놓았지만 글자는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해 여름방학 내내 소예지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고이한이 건네는 시선에 소예지가 눈빛으로 화답하면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눈길이 한 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은 오후 내내 두근거렸다.그만큼 소예지에게 고이한은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고이한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그녀가 망설임 없이 학업까지 내려놓고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이국의 대학 캠퍼스 벤치에 앉은 소예지는 저녁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쳐 가는 것을 느끼며 오래전 기억을 하나씩 되짚었다.지나간 기억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름다웠던 순간도 있었고 결코 지울 수 없는 아픔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가슴을 찢을 듯했던 고통은 어느새 많이 흐려져 있었다. 이제는 그저 아련한 감회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박시온에게서 온 메시지였다.[M국에 도착했어? 시차 적응은 괜찮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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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8화

소예지는 그날 저녁 와인을 두 잔 마셨다.원래는 고하슬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딸이 고이한 곁에 없다는 말을 듣자 소예지는 살짝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이내 고이한의 질문에 대답하며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힘들긴 했어. 그래도 정말 알찼어. 대단한 학자들도 많이 알게 됐고.”소예지의 목소리에는 감추지 못한 설렘과 기쁨이 묻어났다. 화면 속 그녀는 평소보다 한층 더 생기 있어 보였고 눈빛도 유난히 반짝였다.“일찍 쉬어. 밤새우지 말고.”고이한이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소예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리고도 애써 외면했다.화면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소예지는 테라스에 서 있었다. 저녁 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그녀의 뺨을 스쳤고 조명 아래 비친 얼굴에는 와인 기운 때문인지 옅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평소와는 다른 은은한 분위기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화면 너머의 고이한은 그런 소예지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졌다.잠시 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일찍 쉬어. 먼저 끊을게.”“응.”소예지도 영상통화를 종료했다.그녀는 난간에 기대어 멀리 펼쳐진 야경을 바라봤다.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씩 잔잔해졌다.잠시 뒤 소예지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다음 날 있을 혈액 질환 관련 토론을 준비하려면 아직 확인해야 할 데이터가 몇 가지 남아 있었다.그녀는 다시 스미스 박사의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공개 플랫폼에 올라온 자료와 보고서를 찾아 필요한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메인 화면으로 돌아온 소예지는 다른 자료가 더 있는지 확인하려고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그 순간 맨 아래 잠겨 있던 문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소예지는 한동안 그 문서를 바라보다가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만약 이 비밀번호를 고이한이 설정한 거라면...’‘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비밀번호로 정했을까.’와인을 마신 탓인지 머릿속이 평소보다 흐릿했다. 평소라면 차분하게 생각했겠지만 오늘은 생각이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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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9화

화면이 어두워졌다.소예지는 곧바로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여든 개에 가까운 영상 대부분에는 아버지의 실험실 일상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영상이 뒤로 갈수록 소영욱의 머리는 점점 희어졌고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았다.촬영된 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이른 아침부터 실험실에 나와 있었고 어떤 날은 새벽까지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다.소영욱은 연구에 완전히 매달려 있었다.원하는 데이터가 나오지 않을 때면 거친 말을 내뱉기도 했고 신경이 곤두선 채 한동안 실험실을 서성이기도 했다.한 번에 모든 영상을 다 볼 수 없었던 소예지는 뒤쪽 파일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방대한 연구 노트와 데이터 분석 자료, 손으로 직접 쓴 원고를 스캔한 파일까지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그 자료들은 소예지가 백혈병 연구를 시작했을 때 스미스 박사에게서 받았던 자료와 똑같았다.역시 아버지의 원고였다.결국 소영욱은 자신이 남긴 가장 중요한 연구 자료를 소예지가 이어받을 수 있도록 남겨둔 것이었다.얼마나 오랫동안 자료를 들여다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눈이 뻑뻑해져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저녁 여덟 시부터 보기 시작한 자료를 어느새 새벽까지 보고 있었다.파일들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소영욱이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평생을 걸고 연구한 것은 결코 평범한 혈액 질환 프로젝트가 아니었다.‘희망’이라는 이름이 붙은 초기 백혈병 표적 치료 연구였다.정확히는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로 발병하는 백혈병 아형을 겨냥한 치료법이었다.그 순간 소예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바로 정연수였다.그녀 역시 같은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진 백혈병 환자였다.소예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아버지는 왜 생의 마지막 2년 동안 그렇게 목숨을 걸고 백혈병 연구에 매달렸던 걸까.‘정말 누군가를 살리려 했던 걸까.’소예지는 영상을 더 이상 차마 끝까지 바라볼 수 없었다.처음에는 생기 넘치던 소영욱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야위고 초췌해졌다.회색빛이 감돌던 머리카락도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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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0화

이른 아침 햇살이 호텔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에 소예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거의 밤을 꼬박 새운 탓에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다크서클도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 열릴 학술 교류회를 떠올린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깊게 숨을 들이쉬는 순간, 머릿속에는 실험실에서 쉼 없이 연구에 매달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마치 시간과 싸우기라도 하듯 연구에 몰두했던 아버지는 불과 2년 만에 몸도 마음도 늙고 쇠약해져 있었다.그 무렵만 해도 연구 기술과 인공지능은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오직 전통적인 실험 방식을 반복하며 하나하나 데이터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실패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끝없이 반복했다.그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예지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도대체 아버지는 무엇을 연구하고 계셨던 걸까?’그 당시 진가영의 혈액병은 아직 초기 단계였고 스미스 박사 역시 그것이 유전성 질환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때만 해도 딸이 유전성 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만약 아버지가 단지 고이한에게 이용만 당했던 것이라면 그것 역시 설명이 되지 않았다.아버지가 연구했던 것은 모든 백혈병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 갑작스러운 돌연변이성 유전 백혈병만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정연수는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확인된 희귀 돌연변이성 백혈병 환자였다. 지금도 의과대학 연구팀은 그녀의 가족을 대상으로 연구와 검사, 추적 관찰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번 치료비 역시 전액 지원받고 있었다.소예지는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도대체 누구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그토록 목숨을 걸고 이 연구에 매달렸던 걸까.’그리고 이제야 고이한이 왜 이 문서를 끝까지 공개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이 안에 담긴 것은 아버지 생애 마지막 시간의 기록이었다. 그녀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기록이었다.소예지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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