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Bab 171 - Bab 180

182 Bab

#168. 크리스마스 기적을 내려 주소서

주효진과 엘에프, 헤르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턴테이블의 음악도 뚝 끊겼다. 찬란했던 축제의 막이 내린 것이다.“드디어 우리뿐이네? 앙큼한 알바생. 아니, 보육원 부지 소유자 현신 양.”규련이 넌지시 던진 그 한마디가 기폭제가 되어, 장내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빙결되었다. 현신 역시 도망치듯 매달려 있던 웃음기를 완전히 지워낸 채 그들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했다. 이 서늘한 침묵 속에서 제일 먼저 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현신은 주저 없이 깊은 숨을 들이켜며 사죄의 고개를 숙였다.“여러분들께는 진심으로 죄송했습니다. 제가 한비단 소속 요원이었기에 신분을 철저히 숨겨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년 행세를 하며 여러분들을 속이고 기만했습니다. 진심으로 송구합니다.”진심 어린 사과가 언제나 완벽한 면죄부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신에게 차고 넘치도록 감사한 사람들이었고, 자신은 그들에게 철저한 거짓말쟁이였기에 이 부채감을 덜어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게다가 이젠 엘에프의 동생이 되고, 헤르만과 약혼까지 했다니.”강무가 평온하게 건넨 축하의 어조치고는, 그 이면에 담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부분 역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그때,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한규련이 현신의 가냘픈 어깨를 슬쩍 두드려 주며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그 험악한 놈들 사이에서 거짓말하느라 꽤나 속이 시커멓게 탔겠어?”현신이 놀라 고개를 들자, 규련의 굳어 있던 안색이 어느새 희미하게 풀어져 있었다.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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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마침내 찬란한 진실을 알려주소서

시간이 흐를수록 크리스마스이브라는 특별한 기운이 병원 구석구석을 채워 나갔다. 강무가 소유한 성형외과 병동 로비 한편에서는 환자들을 위한 작은 위문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본래 가족 중 누군가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면 온전한 미소를 지을 수 없는 것이 잔인한 현실이다. 하지만 이곳은 미(美)를 가꾸고 축복된 외모를 얻기 위해 찾은 이들이 주를 이루는 성형외과였기에, 공기는 여타 종합병원의 무거운 가라앉음과는 사뭇 다르게 활기가 감돌았다.서시온과 마리선은 로비 멀리서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거룩한 캐럴을 배경음악 삼아 서로의 마른 두 손을 맞잡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일상이 실은 그토록 과분한 축복이었다니. 언제나 인간은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뼈아픈 이치를 깨닫기 마련이었다.치명상을 입은 여렌이 기적처럼 눈을 뜨는 것, 그리고 어딘가로 몸을 숨겨버린 무휼이 부디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 흘러나오는 음악에 마음을 기댄 두 여인은 비로소 조금 전보다 맑아진 어조로 마음속 심상을 뱉어냈다.“그래도 우리는 무사하잖아. 계영 님과 강무 선생님이 버티고 계셔주시는 덕분에, 적어도 그 나쁜 자들이 감히 여기까지는 접근조차 못 하고 있어.”리선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만약 적들이 여렌을 마저 해하려 들었거나 무휼에게 정말 최악의 변고가 생겼다면, 벌써 살벌한 소식이 병동을 덮쳤을 터였다. 지금으로선 무소식이 가장 고마운 희소식이었고, 여렌의 규칙적인 숨소리 자체가 곧 유일한 희망이었다.“우리 조금만 더 힘내요. 새해에는 분명 좋은 일이 찾아올 거예요.”“그래, 난 믿어. 계영 님과 그 대단한 친구분들이 어떻게든 우릴 지켜주실 거야.”그때, 시온이 손에 쥔 휴대전화를 유독 꼭 쥐어 짜내며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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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잔혹한 성역을 열어 주소서

엘에프가 던져준, 잔혹하리치만큼 거대한 크리스마스 선물.스위트룸에 모인 사내들이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응시한 한비단의 본거지는, 다름 아닌 현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공간이었다.“S 요양 병원······? 거긴 할멈이 계시는 곳이잖아요.”이럴 수가. 현신이 그동안 지극정성으로 최주현을 모셔 놓은 그곳이 하필 호랑이 굴이었다니.피가 머리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듯 극심한 현기증이 현신의 전신을 엄습했다. 무휼이 재빠르게 최주현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인질로 잡혀갈 뻔도 한 것이었다.그 바람에 무휼이 쫓기는 신세가 되어 지금 사선(死線)의 문턱에 있지 않을까 걱정도 밀려왔다.엘에프는 건조한 시선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모두 제대로 확인했겠지? 내가 준비한 선물의 무게가 제법 묵직한 것 같은데.”엘에프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거실을 채웠다. 그는 지금 제 손에 쥔 가장 강력한 창을 가계영에게 고스란히 쥐여주는 중이었다.무휼이 제 본진인 계영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지 못하고, 굳이 엘에프라는 우회로를 택한 이유가 비로소 퍼즐처럼 맞아떨어졌다. 현재 가계영도 그렇고 현신도 한비단 내부에서 ‘가장 불온하고 위험한 숙청 대상’으로 낙인찍혀 있기에 이 모든 정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값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엘에프 사장. 지체할 시간이 없군. 바로 한국으로 귀국해 판을 짜야겠어. 정보를 공유해 준 것에 경의를 표하지.”“공치사는 체질에 안 맞는데.”어깨를 가볍게 으쓱한 엘에프가 현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정교하게 적힌 작은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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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거짓된 성벽을 무너뜨려 주소서

현신은 모두 떠나고 굳게 닫혀버린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제야 엘에프에게로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크리스마스 선물, 정말 감사해요.”“에스. 나한테 그런 표정 짓지 마, 부담스러우니까.”“이제 한비단의 본거지만 완벽하게 파헤치면, 얽힌 실타래도 쉽게 풀리겠지요?”“글쎄.”현신 역시 이번 판이 그리 만만하게 끝날 리 없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비극을 끝내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시작이 필요했다. 엘에프는 지금 자신에게 상당한 호의를 베풀며, 가계영과 그녀가 걸어가야 할 앞날의 가시덤불을 묵묵히 걷어내 주는 중이었다.그가 이렇게 큰 도움이 되다니.“이렇게 도와주시다니, 좀 놀랐네요.”“착각하지 마, 에스. 저들을 장기말로 이용하려는 난 나쁜 남자니까.”“제겐 좋은 선배예요. 고맙습니다.”“넌 그 입이 마지막에 문제야.”현신이 고개를 숙여 깊이 목례를 건네자, 엘에프는 여전히 덤덤한 낯빛으로 몸을 돌려 효진이 잠들어 있는 침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헤르만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묵직한 숨을 토해냈다.“이거, 어쩌면 우리가 선택한 이 동선이 그리 나쁜 패는 아닐지도 모르겠어.”헤르만의 나직한 독백에 현신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의중을 살폈다. 그러자 헤르만은 조금 전 모두와 대화를 나누었던 거실 한복판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우리가 결속된 모습을 보이면 저들도 기겁하겠지. 엘에프와 켄즈 대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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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깊은 밤의 지옥을 거두어 주소서

전혀 엉뚱한 곳이 한비단의 제2 근거지로 지목되다니.그곳은 다름 아닌 계영이 재개발로 추진하려던 지역이었다. 의아함이 머리를 스쳤지만, 현재로서는 다시 급습하여 판을 깨부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좋아. 헤르만이 준 정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살펴봐서 나쁠 건 없어.그 뒤로도 계영은 강무와 긴밀하게 통화를 이어가며 작전을 순조롭게 진행시켰다. 마 실장은 경찰과 공조하여 수완 좋게 요양 병원에 고용된 자들을 회유해 나갔고, 덕분에 하나둘 불법적인 행각에 대한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임무 조작은 물론, 요원들에게 지급되는 임무 완수금 중 일부를 편취해 빼돌린 정황까지 드러났다.평범하게 고용되었던 간호사들과 환자들도 그간의 비밀을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곳에서는 임무를 거부한 한비단 요원들의 납치 및 감금, 각종 불법적인 수익 사업, 그리고 임무 도중 부상을 입은 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불법 시술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 속속들이 확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원 미상 시체의 불법 처리 등 한비단 운영 이면에 가려진 각종 강력 범죄와 관련된 정황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여 나왔다. 이들은 모두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서 진술해 줄 것을 확답했다. 이에 계영은 그들의 신변을 확실하게 보호하고자 경찰 측 및 사설 경호업체와의 협조 체계 구축을 끝마쳐 놓았다.유혈 사태 없는 합법적인 처리를 위해 경찰들에게 추가 수색을 요청하려던 찰나, 엘에프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엘에프, 전부 다 유의미한 정보였어.”― 수색영장도 신속히 발부되다니.“그래. 능력 있는 검사가 뒤에서 활약하고 있지.”― 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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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자극적인 연극의 막을 올리소서

며칠 뒤, 12월도 끝자락에 접어들었다.새벽부터 가동된 계영의 움직임은 분초 단위로 조여왔다. 크리스마스의 대대적인 급습 이후, 마 실장과 손을 잡고 온갖 선을 동원했음에도 한비단의 제2 근거지는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지독한 교착 상태였지만 허탕만 친 것은 아니었다. 성남의 모 요양 병원의 붕괴를 기점으로 한비단과 얽히고설킨 정·재계의 추악한 유착 정황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수면 위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이조차 빙산의 일각일 뿐이야.’서재 모니터 너머로 마 실장의 실시간 보고를 받던 계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입안이 서글프도록 썼다. 밀려드는 피로감에 독주라도 한 잔 들이켜려던 찰나, 경고음과 함께 노트북 화면에 화상 통화 요청 팝업이 띄워졌다.발신인은 엘에프.‘살다 살다 이 지옥 같은 판국에 가장 긴밀하게 패를 섞는 인물이 그자라니.’지독한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난잡한 한국의 상황을 가장 제삼자적인 시선으로 차갑고 냉철하게 꿰뚫어 볼 괴물은, 오직 엘에프뿐이라는 사실을.화면이 연결되자,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엘에프의 안색이 내려앉았다.― 켄즈 대표. 옛날이야기 좋아해?뜬금없이 엘에프는 묘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엘에프. 우리 사이에 한담이나 나눌 만큼 살가운 신뢰가 쌓였다고 착각하진 마.”― 들어둬서 나쁠 건 없을 텐데. 내 양부모는 나를 인간이 아닌, 오직 ‘빅토리아’라는 거대한 체스판의 말로 써먹기 위해 입양했었지.“······비극이군.”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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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여리고 어린 영혼을 품어 주소서

엘에프는 통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긴 채로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넓은 침대 위에는 현신과 주효진이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세상모르고 엎어진 두 여자를 내려다보며, 방금 통화를 마친 가계영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충격을 받아 이성을 잃고 날뛸 줄 알았건만, 계영은 의외로 빠르게 동요를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답을 건넸다.― 누군가 그랬어. 인간이 인간을 믿지 않으면 숨 쉴 수조차 없다고······. 난 강무를 믿어.엘에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머릿속도 꽃밭인가 싶으면서도, 침대 한편에서 또다시 악몽에 빠져 흐느끼는 현신에게로 넌지시 시선이 닿았다.“좀 닮았군.”저 찡그려진 미간을 거칠게라도 펴주고 싶은데. 현신은 묵직하게 가라앉은 한숨을 토해내며 오늘도 역시 울먹이고 있었다. 저러다 정신이 먼저 타버리는 게 아닐까 채 걱정이 들기도 전, 등 뒤로 침실 문이 열리며 헤르만이 들어와 자신과 똑같은 한숨을 내쉬었다.“엘에프, 아직도 저 여자들은 꿈나라군.”“내가 침대를 통째로 뺏긴 덕분에, 밤새도록 일해 버렸어. 좀 억울하군.”“저 골칫덩어리들이 기특하게 보인 건 난생처음이야.”어제 주효진은 상하이 공연을 마친 뒤, 주최 측이 제공한 최고급 호텔을 마다하고 굳이 이곳으로 쳐들어왔다. 멋진 레이디를 변신하는 특훈을 마친 현신은 독주를 몇 잔 들이켜더니, 겁도 없이 효진과 얽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엘에프가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낮게 읊조렸다.“에스. 남의 침대에서 너무 느긋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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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게 하소서

새해의 첫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으나, 황푸강 너머의 하늘은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다.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빠져나온 현신은 통유리창 앞에 멈춰 섰다. 와이탄 호텔 스위트룸에서 내려다보는 상하이의 전경은 지독할 만큼 이질적이었다.창유리에 이마를 대자, 이 시린 대륙의 겨울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올해, 나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밀려드는 잡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과연 엘에프가 제 목숨을 담보로 꾀하고 있는 빅토리아 붕괴 작전은 무사히 막을 내릴 수 있을까. 모든 진흙탕 싸움이 끝난 여름이 오면, 자신은 무사히 가계영에게 돌아가 안도할 수 있을까.아니, 애초에 그전까지 온전히 숨을 쉬고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계영도, 엘에프도, 헤르만도. 이 미친 지옥도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들이 올해가 가기 전에 단 한 명도 하데스를 만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을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모두가 미소 짓는 행복한 결말 같은 건, 이 잔혹한 현실에선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판타지 같아서 가슴이 기괴할 정도로 먹먹해졌다.대륙 너머, 광활한 바다를 건너면 있을 가계영.그에게 오늘, 1월 1일은 어떤 표정의 아침일까.그 역시 자신만큼이나 비장한 각오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에게도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이뤄내야만 하는 과업이 눈앞에 가로놓여 있으니까. 과연 그의 현재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사무치게 궁금했다.‘저는 꼭 계영 님에게로 돌아갈 거예요. 어떻게든 살아남을게요.’자신을 여자로 만들어 준 유일한 남자. 그리고 거짓말로 기만했음에도 끝까지 저를 믿어 준 사람. 이성적으로도 애틋하고, 인간적으로도 깊이 존경하는 계영을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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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찬란한 무대에 주인공이 되게 하소서

동일한 태양이 대륙을 건너, 강남의 마천루 숲을 거만하게 가로지르는 켄즈 빌딩의 펜트하우스를 붉게 적시기 시작했다.가계영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사방이 통유리로 트인 창 앞에 서서 그 장엄한 일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며 드러나는 서울의 빌딩 숲은 기괴할 정도로 뾰족했고, 차가웠다. 계영의 시선이 문득 발밑의 아스팔트 아래로 떨어졌다.눈을 감자, 지독하리만치 선명한 잔상이 시야를 침범해 왔다.이 거대한 유리벽 앞에 서서, 한없이 위태로운 실루엣으로 텅 빈 눈동자를 둔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현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로 어제 같은데.’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처음 그녀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던 그날의 감각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그녀의 온기가 다 마르기도 전에 찢어지듯 갈라져 버린 인연이라, 계영은 그녀가 머물던 자리를 눈으로 좇으며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이 새해의 아침만큼은 부디 고통스러운 기억도, 옥죄어 오는 사명도 전부 잊은 채 편안하게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면 좋을 텐데.그러나 계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실 너머 손님방에서 자고 간 밤마다 지옥을 헤매며 떨던 가녀린 영혼이었다. 필시 현신 역시 이 눈부신 새해의 첫 일출을 바라보며, 길을 잃은 마음으로 쓸쓸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지 않을까.계영은 창유리에 비친 이 자리에 없는 오만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그 어떤 안개와 교착 상태가 제 앞을 가로막아도, 결국 판을 깨부수고 승리해야 했다.‘올봄에는 반드시 해결해 놓아야 해.’현신이 편안하고 안전한 상태에서 다가올 여름을 맞이하도록 기어코 추악한 한비단의 그림자를 거두어 내겠다고, 계영은 가슴 깊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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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세상 눈을 속일 선물을 즐겨 주소서

무휼은 지금 누군가 절구질을 하듯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빻아대서 머리가 울리고 현기증이 일었다.일단 수면 부족에, 쫓기고 쫓기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탓인지 팽팽한 긴장 상태의 연속은 사람을 금방 폐인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사방이 막힌 이곳에 갇혀 온종일 게임만 붙잡고 있으니 뇌가 굳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그렇게 한잔하라고 할 때는 안 마시더니.”“새해이지 않습니까.”그 말에 규련은 피식 웃으며 눈을 껌벅거렸다.“강무야, 우리나라 풍습에 새해 아침에 술 마시는 게 있었나?”“귀밝이술인가 그건 정월 대보름 아니야?”무휼은 그저 독한 술 기운을 빌려 오늘만큼은 푹 잠들고 싶었기에, 제 목숨줄 같은 알코올에 기꺼이 손을 대기로 했다.그나저나 눈앞에 서서 덤덤하게 술을 따르는 김강무를 정말 온전히 믿어도 되는지,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깊은 의구심이 도사리고 있었다.“제가 그렇게 위험합니까?”“내가 널 확실하게 제거했다고 한비단에 거짓말할 때까지는 계속 노려질 테니까.”김강무의 덤덤한 대답에 무휼의 입꼬리가 삐죽하게 솟았다.“제 눈에는 눈앞에 계신 당사자분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해 보입니다만.”그러자 잠자코 듣던 규련이 웃음을 터뜨리며 강무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풋, 그래 조심해. 강무가 원래 제일 무서운 놈이야. 우리 무휼이 꽤 미남이라 잡아먹힐지도 몰라.”“아하, 나 지금 이래저래 의심받는 건가?”이 아슬아슬한 시국에도 농담이 잘도 흘러나왔다.김강무와 한규련은 이죽거리며 아예 거실 테이블 위에 견과류와 과일, 마른안주를 펼쳐놓고 판을 크게 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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