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에 하이틴 퀸카로 환생하다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36 챕터

피했을 뿐인데

곧 터질 일을 예감한 듯, 브리의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 이 장면은… 눈에 익는데.’ 복도 한가운데서 브리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원작 속에서 브리아나가 크게 놀림받는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 쉐이크….’ 바네사 옆 시녀 하나가 뚜껑도 없는 뽀얀 밀크셰이크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브리 머릿속에 원작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 바네사가 지나가는 척 발을 슬쩍 내밀고, 브리아나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복도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손에 들고 있던 콜라가 브리 머리 위로 전부 쏟아지고, 지나가던 학생들은 사진을 찍어 학교 커뮤니티에 올린다. 그날 이후 한동안 브리아나는 학교 안에서 웃음거리였다. 브리는 자기도 모르게 에이든의 교복이 걸린 옷걸이를 더 꽉 쥐었다. 복도 창문으로 쏟아진 햇빛이 바네사의 금발을 반짝이게 비췄다. 헤일리는 뭔가를 재잘거리고 있었고, 다른 애들은 하나같이 브리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브리는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 바네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발을 내민다. 누구도 고의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아주 조금만 중심을 잃게 만들 정도로만. 브리는 속으로 숫자를 세듯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정말로, 바네사의 발끝이 아주 조금 앞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이번엔 그냥 안 당해.’ 브리는 원작의 브리아나처럼 멍청하게 당해주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몸을 아주 살짝 틀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바네사가 내민 발이 허공을 헛디뎠다. “어—?” 짧은 비명이 터지더니 바네사의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하이힐 굽이 미끄러지자, 헤일리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 순간, 콜라를 들고 있던 시녀 쪽으로 바네사가 쓰러졌다. 셰이크와 바네사가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졌다. 콰앙. 하이힐 한 짝이 벗겨지며 바네사는 무릎부터 바닥에 내리찍혔다. 미끄러운 콜라가 바닥에 퍼져, 그녀는 거의 슬라이딩하듯 앞으로 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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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안 따라와도 돼

“넌 안 따라와도 돼. 일단 수업 들어가.” 에이든의 말이 끝나자 마자 절묘하게 다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맞다. 이 기분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혼자가 되는 기분. 아무리 억울하다고 소리쳐봐도 누구도 듣지 않는 기분. 미영의 나날이 숱하게 내려앉은 먼지가 돌덩이가 되던 순간들. 모두가 자신의 탓을 하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와이프가 취향이 구려서, 며느리가 싹싹하지 못해서, 손이 빠르질 못해서, 야무지게 거절을 못해서. 남편 관리를 잘 못해서. 죄라면 살아온 것 뿐인데, 얼마나 큰 돌덩이를 지고 살아온 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 “브리양, 수업에 왜 이렇게 늦었나.“ 로버트 교수는 안경을 치켜내리곤 브리를 타일렀다. ”죄송합니다.“ 브리는 꾸벅 인사하고 강의실 자리로 들어갔다. 종종걸음으로 자리에 가서 앉는 브리의 뒤통수에 로버트와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애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웅성거림은 점점 퍼져 대강의실이 웅웅하고 울렸다. 모두들 브리와 바네사 얘길 하고 있었다. “야 이거 봤어?” 브리가 강의실 열을 지나치는 동안, 학생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켜고 바네사가 쉐이크를 덮어쓴 사진을 공유중이었다. “이게 글쎄, 브리아나가 발을 걸었다던데?” “정말이야? 브리아나 보기보다 용감한 애였네~” “야야 온다. 온다. 쉿.” 브리는 애써 그런 광경을 뿌리치려 애썼다. 일어난 일만 해도 버거웠으니까. 그런 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강의실이 학생들이 떠드는 소음에 더 웅성거리다 울리기까지 했다. 로버트가 미간을 잔뜩 찌뿌리더니 원목 교탁을 세번 탁탁탁하고 크게 쳤다. ”어험! 다들 조용!“ 그리고서 로버트는 칠판에 분필을 가져갔다. 점심 시간에 생긴 일 때문에 거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져있었다. 브리는 옆 빈 의자에 에이든의 교복을 가지런히 놓았다. ‘아 맞다. 이거. 까먹고 전해주지도 못했네.’ 발을 걸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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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지마

”그러니까 애 발을 걸긴 왜 걸어?“ 브리는 손에 가지런히 접어둔 교복을 땅에다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에이든은 진짜 발을 건 게 맞냐고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브리가 교복을 처량히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나갔다. “하... 아까 못 들었어? 내가 안했다고.” 브리는 힘을 쥐어짜 말하는 듯했다. 꽤 지쳐있었다. 거기다 대고 에이든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그냥 얌전하게 학교 생활하면 된다고. 교복 갖다주랬지 누가 애 발걸랬어?” 브리는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한 번 으윽-하고 삼켰다. 근데 그게 잘 안되었다. 하. 엔딩봐야지. 브리야. 참자. 참자. 결국 브리는 참지 못했다. “내가 걔 발 걸 이유가 뭔데? 너 때문에? 그거야? 그래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걔가 너 약혼녀될 뻔 한 사람이어서?” 에이든은 쏘아붙이는 브리에 잠시 온 몸이 굳어 뒷걸음질 쳤다. “너가 그렇게 잘났어? 그래서 내가 너 미친듯이 좋아서, 발 걸었다고? 착각하지마. 아직도 내가 바본 줄 아나본데.....” 브리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아차차. 이렇게 말하면 에이든이 의심할 게 뻔했다. 브리가 회귀한 거라도 알면 계약은 당연히 무효고, 에이든이 까무러칠 게 뻔했다. ”어차피 내 말은 안 믿을테니까 니 알아서 생각해. 네가 말하는 계약 여친 규정도 어긴 적 없고, 난 그냥 날 보호한 거 뿐이야.“ “.....” 에이든은 꿀 먹은 병아리가 된 듯했다. 뭐지? 이 듣도 보도 못한 태도는? 이렇게 하면 에이든이 예상한 건 브리가 울고 불고 잘못했다고 빌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데이트를 가는 거였는데. 언제부터 브리가... 이렇게 똑부러지는 말을 할 수 있었지? ”흠흠“ 에이든은 약간 상기된 표정을 풀더니 브리에게서 교복을 건네 받았다. 약간 풀이 죽은 허스키처럼, 에이든은 교복을 건네 받았다. 시선은 옆으로 향하면서 약간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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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네

“어떻게 한 거야?” 바네사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브리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울 것처럼 떨던 애가, 브리가 책을 찾으러 오래된 사물함 쪽으로 가자 따라붙었다. “제법 끈질긴 애였네.” 브리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바네사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어떻게 했냐고.” “너야말로 어떻게 했는데?” 브리는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연기를 해?” “뭐?” 바네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다친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니?” “다쳤어?” 브리 시선이 바네사의 무릎으로 내려갔다. 깔끔한 밴드 아래로 아주 조금 붉은 자국이 비쳐 보였다. 순간 바네사 눈빛이 흔들렸다. 브리는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맞네. 그런 거네. 너 찔리지?” 그녀는 낮게 말했다. 바네사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마저 가늘게 떨렸다. “왜 또 아까처럼 애들 불러 모아서 작당질 좀 해보지 그래? 나한테 와서 이러지 말고.” “그러기엔 네가 좀 여우 같아야지. 브리야.” “응?” 브리는 비웃음기 어린 얼굴로 눈썹을 들었다. “내가 여우 같다는 게 무슨 소리야?” “네가 에이든을 꼬신 것도. 그리고 어떻게 했는진 모르겠지만 내 발을 피한 것도.” “하.” 이번엔 브리 쪽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 네 입으로 말했네.” “뭘.” “내가 네 발을 피했다고.” 브리는 한 걸음 다가갔다. 목소리는 더 낮아졌고, 그래서 더 선명하게 들렸다. “내가 쌩뚱맞은 걸 피한 건 아니었나 봐.” 바네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당장 뱉어낼 말을 생각하는듯 하더니 말인지 똥인지 모를 걸 마음대로 뱉어냈다. “고작 말실수 하나 가지고 물고 늘어지지 마. 추하니까.” “그래?” 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하고.” 그리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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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인생의 가장 긴 문장이 된 순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려운 일인 것 같다.좋아한다는 말은 쉽다.보고 싶다는 말도, 마음이 간다는 말도,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볍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사랑은, 그런 말들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한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이 보이는 모습과 보이지 않는 모습을 함께 기억하고, 그 사람이 웃는 얼굴 뒤에 숨긴 아주 작은 그늘까지 눈치채는 일.내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처음 이 동네로 이사 온 날, 나는 부모님을 도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낯선 집, 낯선 거리, 낯선 공기.프랑스에서 건너온 뒤 처음 맞는 미국의 오후는 이상할 만큼 밝았다. 창문 밖으로는 햇빛이 흰 벽에 부서지고 있었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자들 사이로 먼지가 천천히 떠다녔다.나는 상자 안에 담긴 물건들을 대충 꺼내고 있었다.그때였다.창문 밖으로 네가 지나갔다.너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머리칼이 빛났고, 햇빛은 네 어깨 위에 너무 자연스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꼭 세상이 오래전부터 너를 위해 빛나는 법을 연습해온 것처럼 보였다.나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멈춘 게 아니라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아니, 정말 멈췄다.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부모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그날 오후의 온도가 어땠는지, 그런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은 아주 선명하다.자전거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던 소리.네 치맛자락 끝에 스치던 바람.그때부터였다.너의 빛나는 그림자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건.너는 분명 빛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빛 아래에는 어딘가 슬퍼보였다.그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지만.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처음 배운 건, 우리 부모님을 통해서였다.두 사람은 가끔 별것 아닌 일로 다투기도 했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안았다.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사랑은 폭죽처럼 터지는 감정이 아니라, 매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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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 대회라니

로버트는 교탁 위 원고 뭉치를 한 번 탁, 내려놓았다.떠들썩하던 강의실이 아주 조금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적어도 로버트가 입을 열면 듣는 척은 했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교실을 장악하는 사람이었다. 크게 소리치진 않는데, 괜히 더 거슬릴 만큼 정확한 타이밍에 분위기를 끊는.로버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학생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자. 이건 여러분들이 저번 시간에 썼던 에세이다.”그는 원고를 한 장씩 나눠주기 시작했다.브리는 자기 몫의 종이를 받아 들고 잠깐 숨을 멈췄다.그날은 정신이 반쯤 부서진 상태라 거의 생각나는 대로 써버렸으니까.로버트는 칠판에 크게 적었다.READ / RESPOND“오늘은 이 에세이를 짝과 바꿔 읽는 거다. 읽고 끝내는 게 아니라, 어떤 문장이 마음에 걸렸는지, 어떤 부분이 더 궁금한지, 혹은 어디가 잘 이해되지 않았는지 적어서 돌려줘.”학생들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아…”“싫어요…”“그냥 읽기만 하면 안 돼요?”로버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남의 글을 읽는 건 남의 머릿속을 잠깐 빌리는 일이야. 대충 하지 마.”브리는 괜히 어깨가 뻣뻣해졌다.그때 로버트가 다시 교탁을 두드렸다.“그리고.”이번엔 분위기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다음 교내 스피치 대회 등록 후보를 발표하겠다.”강의실 안 공기가 한순간 팽팽해졌다.누군가는 자세를 고쳐 앉았고, 누군가는 벌써 자기 이름이 불리길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엘리즈하이의 스피치 대회는 그냥 발표회가 아니었다. 추천서, 재단, 입시, 선생들 평가까지 다 이어지는 제법 중요한 행사였다.로버트는 명단을 내려다보며 한 명씩 호명하기 시작했다.“줄리안 포터.”앞줄 어딘가에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에밀리 하트.”작게 박수치는 소리가 들렸다.“케빈 모리스.”케빈이 장난스럽게 손을 들어 보였다.로버트는 종이를 한 장 넘겼다.“바네사.”강의실 한쪽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바네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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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코크의 비밀

브리는 수업 전에 사물함 쪽 자판기에서 체리콕 하나를 뽑았다. 빨간 캔을 손안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보니, 따는 순간 탄산이 퍽 하고 치솟았다. “아앗!” 검붉은 거품이 손등과 교복 소매에 조금 튀었다. “으휴. 칠칠맞기는.” 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넌 언제 또 잔소리하려고 나타났어? 괜찮으니까 가봐.” “이렇게 또 혼자 사고 치다가 넘어져서 커뮤니티에 올라오면 어쩌려고.” “그게 너랑 뭔 상관…” “넌 내 여친이잖아.” 브리는 한순간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여친 맞긴 하지. 에이든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더프백 안을 뒤적이더니 큼지막한 타월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브리 쪽으로 손을 뻗어 교복에 튄 체리콕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브리는 약간 민망해져 얼른 타월을 빼앗았다. “됐어, 내가 할게.” 자기 몸보다도 큰 타월로 소매를 문질러 닦던 브리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안 되겠다. 손 씻어야겠어.” “그건 이리 내.” 에이든이 브리 손에 들린 빈 캔을 보고 말했다. “내가 다시 뽑아놓을게.” “나 손 씻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그럼 뭐하게. 훈련, 수업 말곤 할 것도 없는데. 너 사고 치나 안 치나도 봐야 되고.” ‘갈등의 주범이 너거든요.’ 브리는 속으로만 툴툴대며 화장실로 향했다. 등 뒤로 자판기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 차가운 물로 손끝을 씻어내며 브리는 문득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바네사가 뒤집어쓴 음료. 컵 가장자리로 흐르던 검은 액체.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얌전했던 표면. 브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자기가 자판기에서 뽑은 체리콕은 따자마자 탄산이 넘쳐흘렀다. 조금만 흔들어도 거품이 솟았다. 그런데 헤일리가 들고 있던 컵은 뚜껑도 없었는데 이상할 만큼 잠잠했다. 바네사가 넘어지며 쏟아졌을 때도, 기세 좋게 튀는 탄산은 거의 없었다. “이상한데.” 브리는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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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라는 남자애

훈련장은 평소처럼 시끄러웠다. 호루라기 소리, 런닝화 밑창이 잔디를 미는 소리, 누군가 지르는 욕설 비슷한 농담이 뒤섞였다. 에이든은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필드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첫 패스부터 이상했다. 툭. 평소 같으면 손에 딱 들어왔어야 할 공이 손끝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 옆에서 누군가 감탄하듯 소리 냈다. 오스틴이었다. 멀리서 보면 럭비공을 잘못 사람으로 빚어놓은 것 같은 애. 진저미머리에 배는 아주 살짝 나왔고, 웃으면 볼살이 먼저 들썩였다. 뛰는 폼은 우스운데 묘하게 빠른, 그래서 더 얄미운 수비수. 오스틴은 헬멧을 한 손에 든 채 에이든을 빤히 봤다. “우리 밀러 님 오늘 컨디션이 아주 화려하시네.” 에이든은 공을 다시 주워 올렸다. “닥쳐.” “오, 말투는 나쁘지 않은데?“ 오스틴은 스포츠 음료를 벌컥 마시고는 배를 한 번 툭 치며 웃었다. “근데 손은 왜 그래? 설마 여친님 생각?” 에이든은 고개를 돌려 오스틴을 노려봤다. 오스틴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더 신이 났다. “와. 진짜네.” “시끄러워.” “아니, 나 하나도 안 시끄러운데? 네가 너무 티 나게 조용한 거지.” 코치가 멀리서 소리쳤다. “밀러! 오스틴! 장난칠래?” 오스틴이 바로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에이든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근데 진짜 브리아나 때문이지?” 에이든은 대답 대신 공을 다시 던졌다. 이번엔 받았다. 그런데 다음 드릴에선 반 박자 늦었다. 수비를 읽는 타이밍이 미묘하게 밀렸다. 오스틴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야.” “왜.” “너 오늘 진짜 왜 이러냐.” 에이든은 턱을 한 번 쓸었다. 복도. 헤일리 글. 브리가 말하던 차가운 얼굴. 아까 저건 김이 빠져 있었어. 브리가 괴롭힘을 정말 당한걸까? 하지만 꽤 당당한 그녀의 태도와 자태가 자꾸 머리를 스쳤다. 공이 다시 날아왔다. 이번엔 가슴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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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 대회 준비

올리버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양손으로 서류철을 껴안고 있었다. 바네사가 직접 자기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그의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빨리 뛰고 있었다. “나… 나를?” “응.” 바네사는 너무 자연스럽게 웃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헤일리는 멀찍이 물러났고, 바네사는 일부러 창문이 반쯤 열린 조용한 복도 쪽으로 올리버를 데리고 갔다.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올리버는 안경을 고쳐 쓰며 헛기침했다. “무슨 일이야?” 바네사는 서류철 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너 이번 스피치 대회 스태프라면서.” “어… 응.” “역시.” 바네사는 감탄하는 척 눈을 반짝였다. “난 네가 그런 거 할 줄 알았어.” 올리버 귀가 빨개졌다. “그래?” “응. 너 이런 거 잘하잖아. 꼼꼼하고, 섬세하고.” 바네사는 말을 고르듯 아주 잠깐 멈췄다. “다들 널 이상하게 보는데, 난 아니야.” 올리버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세게 꽂힌 게 보였다. 바네사는 속으로 웃었다. “사실 부탁 하나만 하려고.” 올리버는 거의 즉시 고개를 들었다. “부탁?” “응.” 바네사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마치 정말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브리아나 로즈 있지.” 올리버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커뮤니티에서 모를 리가 없지. 바네사는 길게 한숨 쉬는 척했다. “나 진짜 쟤랑 이렇게까지 되고 싶진 않았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리버를 올려다봤다. “근데 넌 봤잖아. 요즘 걔가 얼마나 심한지.” 올리버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바네사는 그 망설임마저 다 읽고 있었다. “난 그냥…” 그녀는 낮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만큼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당당한 얼굴로 올라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올리버 손가락이 서류철 모서리를 더 세게 잡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바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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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과의 마주침

브리아나는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밴드부실 앞 복도를 지나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기타 줄 튕기는 소리와 드럼 스틱이 가볍게 리듬을 쪼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군가 웃었고, 누군가 음정을 틀렸다며 타박하는 소리도 들렸다.브리는 괜히 문틈 너머를 한 번 들여다봤다.그리고 그 안쪽에서, 케이블을 정리하던 이안을 발견했다.이안은 허리를 숙인 채 선을 한 번 감아 올리고 있었다. 교복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손목에 핏줄이 옅게 드러나 있었다. 별거 아닌 장면인데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저 애는 늘 저렇게 조용히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브리는 저도 모르게 문 앞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이안.”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괜히 반가운 마음이 먼저 올라왔다.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이안이 고개를 들었다.그는 브리를 보자 아주 잠깐 멈췄다. 손에 감겨 있던 검은 케이블도 같이 멈췄다. 시선이 브리 얼굴에 닿았다가, 그 입가에 걸린 웃음에 닿았다가, 다시 아주 느리게 아래로 떨어졌다.브리는 그 짧은 정적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더 가볍게 웃었다.“뭐 해? 아직 안 끝났어?”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손에 들고 있던 케이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밴드부 안쪽에서 떠들던 애들이 둘 사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하나둘씩 소리를 줄였다. 결국 드럼 스틱 소리도 끊겼다.브리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왜 그래?”이안은 문 쪽으로 몇 걸음 걸어왔다.가까워질수록 표정이 더 잘 보였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차분해서 더 이상한 얼굴. 일부러 감정을 눌러놓은 사람 얼굴.브리는 웃음기를 조금 거뒀다.“나 뭐 잘못했어?”이안은 아주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브리를 봤다.그 눈빛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차갑다기보단,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사람 같았다.“브리.”그가 낮게 불렀다.브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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