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착한 아내는 오늘부터 그만둡니다: Chapter 111 - Chapter 120

122 Chapters

제111화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치명적인 약점 하나쯤은 있다는 걸... 지금 저 답답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인정해 왔던 투자 감각마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영우가 저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해 줬는데도, 진짜 못 알아듣는 건가?’‘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물론 챙겨 달라고 부탁을 받긴 했겠지. 그건 친구로서 믿으니까 한 말이고.’ ‘그렇다고 남의 아내 산후조리까지 24시간 내내 곁을 지키며 챙기는 건...’‘누가 봐도 선을 넘은 거잖아.’여준은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너희도 오늘 라이브 방송 다 봤지? 우리 엄마랑 이모가 시유한테 그렇게 한 건 분명 잘못한 게 맞아.”“하지만 다들 시유한테 당했잖아. 시유가 피해자인 척하면서 뒤로는 드론까지 띄워서 그 모든 걸 생중계해 버렸다고.”“그러고는 우리 엄마한테 맞은 만큼의 두 배로 되갚게 했어. 지금 우리 엄마, 새나, 이모 전부 병원에 누워 있다고.”“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난 시유를 탓하지 않았어. 꾹 참고 먼저 찾아가 모든 걸 바로잡고 싶다고 했어.” “심지어 엄청난 돈을 주고 산 핑크 다이아몬드까지 딸 주려고 가져다줬어! 그런데 다이아몬드는 챙겨 가면서, 끝까지 날 용서 못 하겠다는 거야!”주찬은 할 말을 잃었다.‘이게 내가 알던 여준이가 맞나?’ ‘우리 앞에서는 사업이랑 투자 얘기밖에 안 하던 놈이, 자기 집안일은 입 밖에도 안 꺼내던 놈이 왜 지금은 앞뒤 꽉 막힌 사람처럼 계속 하소연만 하는 거야?’주찬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막연한 환상마저 산산이 깨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투명인간이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얽히고설킨 남의 집안싸움에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애꿎은 술만 더 열심히 따랐다.참다못한 연호가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그럼 생각해 본 적 있어? 시유는 아내인데, 시어머니를 비롯한 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병원까지 찾아가 행패를 부릴 수 있었는지?” “결국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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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여준은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방금 영우가 한 말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았다.영우에게 연달아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건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 안내뿐이었다.영우는 잠귀가 예민해 잘 때는 항상 핸드폰을 꺼둔다. 여준도 그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아내가 병원에 있는데 잠이 오나 보네. 강영우 저 자식도 나보다 나을 거 하나 없네.’여준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문득 시유와 새나를 비교해 보니,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새나가 억지를 부리고 울며 매달리긴 해도 그저 애교 섞인 투정일 뿐이잖아.’‘시유처럼 일을 이렇게까지 키우진 않잖아.’‘어쩌면 내가 너무 져준 걸지도 몰라. 시유한테도 다른 방법을 써야겠어.’하지만 시유는 이미 회사도 그만두었고 그림빌에서도 나갔다. 심지어 딸도 못 보게 막고 있었다.집에 붙잡아 두려 했을 때, 망설임 없이 집에 불까지 질러버린 여자였다.모든 게 걷잡을 수 없게 된 지금, 대체 어떻게 해야 시유를 말릴 수 있지?여준은 심란하고 짜증이 치솟아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는 것조차 내키지 않았다.환자복을 입은 새나는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옆에서는 똑같이 환자복 차림인 진명화가 새나의 손을 사색이 되어 붙잡고 있었다.여준을 발견한 진명화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여준아, 빨리 새나 좀 말려. 나쁜 마음 먹으면 안 된다고. 리오가 아직 저렇게 어린데!”여준이 다가가 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새나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퉁퉁 부어오른 뺨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애초에 죽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여준을 보고 싶었을 뿐이고, 이런 방법이면 여준이 반드시 달려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여준이 살며시 잡아당기자 새나는 순순히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대로 여준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진명화가 여준을 보며 말했다.“빨리 무슨 수라도 써서 이 일 좀 덮어라. 시유가 저렇게 굴고 있는데 언제까지 두고 볼 거야? 우리 집안이 아주 쑥대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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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병원 복도 비상구.진명화는 여준의 아버지인 부인걸과 통화 중이었다.부인걸은 본사 사업을 핑계로 주로 G시에 머물며, H시의 모든 업무는 여준에게 넘긴 상태였다.평소 H시에 내려오는 일이 드물어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진명화는 남편이 밖에서 딴살림을 차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있었다.수십 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이제 두 사람을 묶고 있는 건 이해관계뿐이었다. 중요한 문제에서는 뜻을 같이했지만 평소에는 철저히 각자의 삶을 살았다. 매달 생활비만 꼬박 들어오면 진명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간섭하지 않았다.이번엔 라이브 방송 파장이 너무 컸다. 부강그룹 주가까지 심하게 흔들리자, 단단히 화가 난 부인걸이 먼저 상황을 캐물어 온 것이었다.안 그래도 답답한데 아들마저 미적거리자 진명화는 잘됐다 싶어 이것저것 덧붙이며 죄다 일러바쳤다.“여보, H시에 한 번 내려와요. 직접 임시유 만나서 우리 집안에서 쫓아내요.”“순순히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당신이 알아서 손 좀 써 줘요. 여준이는 마음이 약해서 지금까지 질질 끌고만 있잖아요.”“어떻게든 그 기집애를 떼어내야 해요. 안 그러면 우리 부강그룹은 영원히 조용할 날이 없을 거예요.”진명화는 전화기에 대고 끊임없이 재촉했다.수화기 너머로 분노가 섞인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자 하나 제대로 정리도 못 하고, 여준이 그 녀석은 언제부터 그렇게 우유부단해진 거야?][우리 집안에 도움이 안 되는 여자는 절대 안 돼! 임시유 그 애, 내가 처음엔 사람을 잘못 봤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진명화가 맞장구를 쳤다.“내 말이 그 말이에요. 처음에 시집온다고 했을 때 내가 그렇게 반대했는데 당신이 허락했잖아요.”“여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에요. 5년 동안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굴던 게 다 오늘 같은 상황을 노리고 있었던 거예요!” “딸 하나 낳았다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잖아요!”부인걸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상황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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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전화는 엄마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시유는 눈물을 닦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엄마...”수화기 너머로 애교의 쉰 듯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방금 G시 공항 도착했어. 곧바로 H시로 환승할 건데, 너 어디야?]시유는 깜짝 놀랐다.“엄마, 내가 D국으로 모시러 간다고 했잖아. 어떻게 혼자 온 거야?”애교의 목소리는 평온했다.[애 데리고 움직이는 게 보통 일이니? 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으니까 넌 집에서 기다려.]시유는 이런 성격만큼은 엄마를 꼭 빼닮았다. 무슨 일이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스스로 해결하는 성격이었다.시유는 미안한 마음에 목이 메었다.“알았어. 나 지금 병원 가는 길이야. 빛나가 갑자기 열이 너무 심하게 나서... 미안해, 공항에 마중은 못 나갈 것 같아.”애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뭐? 빛나가 아프다고? 어느 병원이야. 주소 찍어 놔. 비행기 내리자마자 바로 갈 테니까.]“엄마, 엄마...”시유가 무리하지 말고 먼저 집에 가서 쉬라고 말리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뚝 끊긴 뒤였다.시유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늘 이랬다. 한 번 결정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눈물을 훔치는 사이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시유는 그럴 겨를도 없이 빛나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빛나의 체온은 무서울 정도로 높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0도에 육박했다.태어난 지 겨우 두 달 된 아기가 이토록 고열에 시달리자 의료진도 바짝 긴장했다.간단히 체온을 잰 뒤 서둘러 처치실로 옮겼다.시유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마치 깊은 바다에 빠진 것 같았다. 숨 막히는 절망과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어젯밤에 내가 너무 깊이 잠들어서 이불을 덮어주는 걸 깜빡했나?’‘에어컨 온도를 너무 낮춰서 감기에 걸렸나?’‘아니면 목욕할 때 물 온도가 너무 낮았나? 목욕을 너무 오래 시켰나?’‘멀쩡하던 애가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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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시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위로하듯 영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정말 다행이네요. 대표님이 일찍 발견하지 못하셨으면 아이가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만 해도 끔찍해요.”영우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가만히 시유를 보았다.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지금 위세척 중입니다. 끝나면 소아과로 옮겨서 정밀 검사를 진행할 생각입니다.”“이 결혼은 끝낼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혼할 때는 아니죠.”영우의 말투는 마치 시유를 오랜 친구처럼 대하며 자연스럽게 속내를 털어놓는 듯했다.두 사람은 고작 세 번 만났을 뿐이고, 사적인 대화를 깊게 나눈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어쩌면 같은 절망을 겪고 있었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건지도 몰랐다.시유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행복하지 않다면 빨리 정리하는 게 맞아요. 저도 같은 생각인데, 부여준이 이혼을 안 해주고 질질 끌고 있네요.”영우도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밤에 여준이를 만났습니다. 새나와 제 아들에게 필요한 건 다 마련해 뒀으니 더 이상 참견할 필요 없다고 말해뒀죠.” “제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으면 좋겠네요.”시유가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쳤다.“아마 평생 못 알아들을걸요.”영우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눈치채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시유는 핸드폰을 열어 새나가 보낸 사진을 영우 앞에 내밀었다.조금 전까지 여준과 함께 있었던 영우는 단번에 사진 속 뒷모습의 주인을 알아차렸다.동시에 어떤 상황에서 찍힌 사진인지도 단번에 알아차렸다.영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늘 온화하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시유는 영우의 주먹을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등이 하얗게 질린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위로했다.“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어요.”“분명 잘못을 저지르고 남에게 상처를 줘놓고도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부류에게 자기 잘못을 깨닫게 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워요.”“남을 바꿀 수 없다면 내 방식을 바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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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보호자분, 아기 열은 다행히 조금 내렸습니다. 현재 38도 정도예요.”“하지만 워낙 갓난아기라 선생님께서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십니다. 동의하시면 저와 함께 가셔서 수속을 밟아주세요.”‘입원’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시유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그렇게... 심각한가요? 우리 아기 지금 어때요, 괜찮은 거 맞죠?”간호사는 시유의 불안과 긴장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위로했다.“심각한 건 아니에요. 요즘 유행하는 바이러스 탓에 열이 오르내리는 아기들이 꽤 많거든요.” “입원은 저희가 더 꼼꼼히 살피기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 아기 상태는 나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시유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곧바로 입원 수속을 밟겠다고 했다.간호사를 따라 입원 수속을 밟으러 가는 길, 시유는 곰곰이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했다.워낙 갓난아기라 지난번 백화점에 다녀온 것 외에는 외출한 적이 없었다. 날씨가 좋을 때 장순영이 유모차를 태워 집 앞을 가볍게 산책한 게 전부였다.시유는 위생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외출 후에는 손을 깨끗이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에야 빛나를 안았다.‘도대체 어디서 옮은 거지?’시유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서둘러 입원 수속부터 마쳤다.곧바로 장순영과 함께 빛나를 안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아기를 위해 1인실을 선택했다.내내 기운 없이 쳐져 있던 빛나는 열이 서서히 내리자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다. 분유를 먹고 나서는 옹알거리며 어른들과 눈을 맞추기도 했다.시유의 굳어 있던 마음이 간신히 한시름 놓이려던 순간이었다.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가 체온을 재더니 다시 열이 오르고 있다고 알리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날 밤, 시유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빛나의 열은 내렸다 싶으면 새벽에 다시 펄펄 끓어올랐다. 아무리 떨어져도 37.5도 언저리의 미열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시유는 난생처음 이렇게 피가 마르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다음 날, 간호사가 건넨 검사 결과지를 받아 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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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 봐요.”장순영은 시유가 당장 내쫓으려는 기색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처음엔 댁으로 오겠다고 하셨는데, 사모님이 신신당부하셔서 집 주소는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했어요.” “대표님도 더는 고집하지 않으셨고요. 그래서 근처 백화점에서 만난 거예요.”“대표님이 따님을 보시자마자 어찌나 예뻐하시던지, 바로 품에 안고 몇 번이나 뽀뽀를 하셨어요.” “나중에 따님이 기저귀를 적시고 울음을 터뜨린 뒤에야 제게 다시 안겨주셨고요.”“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어요. 백화점에서 잠깐 식사만 하고 곧바로 따님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거든요.”장순영은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그 말을 들은 시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여준은 요 며칠 병원을 제집 드나들듯 오갔다.게다가 지난번에 만났을 때, 여준이 잔기침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그런 상태로 빛나에게 몇 번이나 뽀뽀를 했다면? 자신이 옮고 있던 바이러스를 빛나에게 고스란히 전염시켰을 가능성이 컸다.곰곰이 상황을 곱씹던 시유는 문득 장순영의 말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을 발견했다.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장순영이 외출할 때는 반드시 경호원이 동행하도록 조치해 두었기 때문이다.장순영이 몰래 빛나를 데리고 여준을 만났는데, 어째서 변항은 한마디 보고도 없었던 걸까?시유가 매섭게 추궁했다.“이모님 외출할 때마다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붙잖아요. 그런데 왜 아무도 나한테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거죠?”장순영은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했다.“제가... 경호원들을 속였어요. 따님을 모시고 단지 안에서 잠깐 산책만 하겠다고 했거든요. 다녀온 시간도 한 시간이 채 안 돼서 다들 의심하지 않았어요.”“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시유가 차가운 눈빛으로 장순영을 응시했다.“제가 예전에 회사에서 직원들을 관리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원칙이 뭔지 아세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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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엄마!” 그 한마디는 시유가 최근 들어 가장 속 시원하게 내뱉은 말이었다.“시유야!” 조금 쉰 목소리였지만 우렁차게 병실에 울려 퍼졌다. 곧 두 사람은 언제 다퉜냐는 듯 꽉 끌어안았다.옷을 겹쳐 입었는데도 품에 안기는 순간, 한쪽 가슴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유는 곧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엄마...” 임애교를 바라보는 시유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수만 가지 감정이 목끝까지 차올라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임애교는 끄떡없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시유 앞에서 빙그르 한 바퀴 돌았다.“뭘 울고 그래, 엄마 멀쩡해. 이 정도는 액땜했다고 치자.” “걱정 마, 수술 경과가 아주 좋아. 생각보다 훨씬. 거봐, 예정보다 일찍 퇴원해서 내 손녀 보러 달려왔잖아.” “빛나야, 우리 빛나. 할머니 왔다. 어서 할머니 품에 오렴!”임애교는 시유를 옆으로 밀어내고 안달 난 사람처럼 아기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누운 작은 아기를 환하게 웃으며 막 손을 뻗으려던 참에, 장순영이 기겁하며 소독 스프레이를 쳐들었다.“여사님, 먼저 소독부터 하셔야 아기를 안으실 수 있어요.”단호하게 막아서는 장순영의 태도에 임애교는 멈칫했지만, 시유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까 단단히 주의를 준 효과가 확실했다. 겪어봐야 안다더니, 단번에 확실히 배운 모양이었다.“엄마, 빛나가 지금 면역력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임애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조심하는 게 맞지.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온 옷이니 얼른 갈아입고 깨끗하게 소독한 뒤에 안아야겠다.”임애교는 말을 마치자마자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그 씩씩한 뒷모습 어디에서도 큰 병을 앓고 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순영이 감탄하며 말했다.“사모님 성격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이제야 알겠네요. 어쩐지 큰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으시더라니.” “남들은 제왕절개 하면 석 달은 고생한다는데, 사모님은 보름 만에 훌훌 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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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시유는 병실 문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복도에서는 새나가 뒤에서 영우를 쫓아가고 있었다.하지만 영우는 끝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매몰차게 걸어가더니, 새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홀로 남겨진 새나는 억울하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울어댔다.VIP 병동에 있던 환자와 보호자들이 그 소란에 놀라 하나둘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기 시작했다.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새나는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났다.서둘러 눈물을 닦고 캡 모자를 푹 눌러썼다. 마스크까지 바짝 끌어 올려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단단히 가린 뒤에야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아 서늘한 눈빛과 마주쳤다.시유를 발견한 새나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려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눈빛을 번뜩였다.곧 새나는 시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대로 들이받을 기세였다.깜짝 놀란 시유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했다.새나의 원래 목표는 시유의 배였다.하지만 빗나가 시유의 팔만 스치고 지나갔다. 중심을 잃은 새나는 문틀에 그대로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둔탁한 충격음에 시유는 본능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무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새나의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이성을 잃은 새나는 악에 받쳐 시유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악에 받친 힘으로 바닥으로 끌어내렸다.“임시유,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날 이 꼴로 만들었어!”“내가 너한테 보낸 사진을 왜 우리 남편한테 보여 줘? 이 망할 년아, 넌 내가 잘 사는 꼴이 그렇게 보기 싫어?”완전히 돌아버린 새나의 몸에서는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힘이 솟아났다.한 손으로는 시유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유의 목을 꽉 조였다. 눈빛에는 섬뜩한 살기가 번뜩였다.그 순간 새나는 진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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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시유는 피식 웃었다.‘D국에 다녀오더니 행동도 말투도 전보다 훨씬 거침없어졌네. 혹시...’시유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새나의 악에 받친 울음소리에 의사와 간호사, 경호원들까지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새나의 엄마, 진지원도 있었다.사색이 되어 달려온 진지원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새나와 그 앞에 서 있는 시유 모녀를 번갈아 보더니 순식간에 눈이 뒤집혔다.“임애교! 네가 감히 내 딸을 쳐?”“너희 모녀가 아주 뵈는 게 없구나. 당장 오늘 밤에 둘 다 경찰서에 처넣어 줄 테니까 두고 봐!”“여기 원장 어딨어! 당장 원장 나오라고 해! 당장 경찰 불러서 체포하게 해! 복도에 CCTV 다 찍혔을 텐데, 폭행죄로 감옥 갈 줄 알아!”진지원은 임애교를 향해 삿대질하며 기세등등하게 소리를 질러댔다.진지원은 화려한 모피 코트에 풀 메이크업을 한 상태였지만, 임애교는 병실에 들어오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도 지운 뒤였다.두 사람의 겉모습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한쪽은 잔뜩 치장한 귀부인이었고, 한쪽은 꾸밈없는 차림이었다.VIP 병동에서 벌어진 소란에 당황한 의사가 간호사에게 눈짓을 보내며 서둘러 원장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반면 임애교는 팔짱을 낀 채 진지원이 난리를 피우는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었다.“쯧쯧. 네 딸년이 왜 남의 가정 파탄 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나 했더니. 그 엄마에 그 딸이었네.”가볍게 툭 던진 한마디에 진지원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임애교, 너 지금 주둥이 조심 안 해? 뻔뻔하고 악독한 건 너희 모녀겠지!”“우리 새나가 강씨 집안 며느리인데 언제 남의 가정을 파탄 냈다는 거야? 함부로 입 놀리지 마!”임애교가 코웃음을 쳤다.“강씨 집안 며느리? 아주 대단하시네. 근데 그렇게 대단한 집안에 시집가놓고선, 자기 아들한테 수면제는 왜 먹이셨대?”“아까 복도에서 남편 바짓가랑이 붙잡고 자기 아니라고 질질 짜던 게 네 그 귀한 딸내미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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