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Chapter 11 - Chapter 20

23 Chapters

11. 집요한 탐색

마레즈나에 도착하자 이사벨라가 의기양양하게 마중을 나왔다. “하르만! 전하 곁에서 무엇을 배웠니? 전하께서 직접 요새 건설의 비결을 전수해 주셨다니! 정말 대단한 영광이구나.” 엘라엔은 이사벨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거울을 통해서 본 자신의 얼굴엔 현장에서 묻은 옅은 흙먼지가 남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 먼지를 훑어내며 피식 웃었다. 르세인이 요새를 세우며 하르만을 길들이려 한다면 자신은 그 요새의 물류와 보급을 장악해 르세인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필수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연정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르세인에게 엘라엔은 의외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녔으나 여전히 오점이 가득한 자산이었고, 엘라엔에게 르세인은 가족의 미래를 제 계산기 속에 집어넣으려는 못마땅한 사람일 뿐이었다. *** 이른 새벽의 마레즈나는 푸스르름한 안개에 잠겼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 엘라엔은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책상 위에 펼쳐진 두툼한 양피지 뭉치를 응시했다. 그건 전날 요새 건설 현장에서 하르만이 설명을 들을 때 그녀가 영악하게 머릿속으로 베껴온 지형도와 물류 배치도의 사본이었다. 르세인이 설계한 요새는 군사학적으로 완벽해 보였다. 적의 시야를 차단하는 각도, 투석기의 사거리, 병사들의 이동 동선까지. 하지만 엘라엔은 깃펜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집요하게 두드렸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땅은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아.’ 그녀의 입매가 끌어올려졌다. 르세인은 전장의 지배자였지만 이 땅을 수백 년간 갈아엎고 씨를 뿌려온 라안느 가문의 방식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선택한 주 보급로는 우기가 되면 지반이 약해져 거대한 수렁으로 변하는 점토질 토양이었다. 제아무리 철저한 계산하에 물자를 실어 날라도 수레바퀴가 진흙에 처박히는 순간 르세인이 그토록 신봉하는 효율은 변질될 터였다. 엘라엔은 지체 없이 하녀들을 호출했고 준비를 시작했다. 와인빛 머리카락을 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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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부드러운 압박

“비결이라 할 것까지 있겠어요? 전하께서는 제국의 안보를 위해 헌신하고 계시고, 라안느 후계자인 제 동생은 그 숭고한 질서를 곁에서 배울 뿐이죠. 저는 그저 동생을 챙기고 물자 보급이 차질 없도록 돕는 소임에 충실할 뿐이랍니다.”엘라엔은 완벽하게 정돈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현장에서 르세인과 대등하게 보급로를 논하며 설전을 벌였던 그 치열한 투지는 겹겹이 쌓인 드레스 아래 교모하게 감춰졌다.“어머, 역시. 저는 전하의 시선만 받아도 심장이 멎을 것 같던데…. 전하께서는 여전히… 감정의 동요가 없으신가요?”또 다른 영애가 르세인을 입에 담으며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르세인은 사교계의 여인들에게 있어 닿을 수 없는 고결한 북극성인 동시에 조금의 온기도 허락하지 않는 무정한 신과 같았다.“그분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대업을 그르칠 분이 아니시죠. 오직 논리와 국익만을 생각하는 그 정갈한 태도야말로 제국이 신뢰하는 힘 아니겠어요?”엘라엔은 르세인을 칭송하는 척하며 선을 그었다. 그는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자신과 르세인 사이에 사적인 심리적 감정이 존재하지 않음을, 오직 공적인 협력만이 있음을 사교계에 각인시키는 영악한 수였다.그때, 황후 로잘린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엘라엔의 손을 잡았다.“라안느 양, 고생이 많군요. 황자가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소 거칠 텐데도 그대가 잘 보필해 주고 있다니 마음이 놓이네요.”황후의 노골적인 총애에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시기와 질투가 섞인 시선들이 화살처럼 날아왔으나 엘라엔은 가볍게 피해버렸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찬란한 다과회의 조명 아래에서 자신이 빛날수록 르세인이 지휘하는 그 거친 현장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강력한 정치적 자산으로 바뀐다는 것을.하지만 화려한 다과회의 가식적인 웃음소리 사리에서도 엘라엔은 문득 모호한 괴리감을 느꼈다.불과 며칠 전만 해도 흙먼지가 날리는 공사장에서 르세인의 지형도를 수정하며 느꼈던 그 날 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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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파격적인 행보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길을 지나 관리인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정자 근처에 도달했을 때였다.나무 기둥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던 소년, 카시안이 고개를 돌렸다.“엘라엔!”그의 부름에는 이안의 달콤한 수식어도, 르세인의 건조한 명령도 없었다. 그저 담백하고 투명했다.엘라엔은 비로소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카시안!”“엘라엔, 괜찮아? 힘들지는 않아? 네가 황궁에 들어올 날만 기다렸어.”카시안은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엘라엔의 얼굴 곳곳을 살폈다.르세인이 오차를 찾기 위해 해부하듯 훑어보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친구의 안부를 걱정하는 순수한 염려였다.엘라엔은 정자 난간에 기대어 앉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말도 마. 전하께서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숫자로 보는 분이거든. 하르만 앞에서도 어찌나 엄격한지, 곧 보급 장부를 다시 맞추지 못하면 라안느 가문의 체면이 깎일 판이야.”엘라엔은 투정 섞인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이안 앞에서는 결코 보일 수 없는 나약함이자 르세인 앞에서는 절대 드러내선 안 될 빈틈이었다.오직 카시안만이 자신의 이런 영악하지 못한 투덜거림을 받아주는 유일한 창구였다.카시안은 곁에 앉아 주머니에서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이게 뭐야?”“네가 지난번에 준 만년필로 처음 써본 거야. 네가 좋아하는 시의 구절은 아니지만…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이야.”엘라엔이 종이를 펼치자 카시안의 외관을 닮은 정갈한 필체가 나타났다.[엘라엔, 넌 최고야.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용감하고 멋진 소녀야.넌 뭐든 할 수 있고, 반드시 해낼 거야.]엘라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글자들을 보고 있자니 르세인이 박아 넣었던 질서라는 이름의 쐐기가 조금은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고마워, 카시안. 넌 정말이지 이 황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칭찬으로 들을게.”카시안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석양이 완전히 저물고 어스름한 보랏빛 어둠이 내려앉자, 엘라엔은 자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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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오만한 고집

“전하, 그것은 황실 공병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또한 외부 인력이 요새의 기밀 구역에 드나드는 것은 보안상….”“자존심은 능력이 뒷받침될 때 부리는 사치다. 오차를 낸 공병대에게는 더 이상 기회는 없어. 보안은 네가 책임지도록. 영애와 그 기술자들의 동선은 오직 수정된 보급로 지점에만 한정한다.”르세인은 단호했다. 그는 엘라엔에게 권한을 준 것이 아니라 시험대를 제공한 것이다.만약 그녀가 가져온 기술자들이 조금이라도 미숙함을 보이거나 가문의 이익을 위해 정보를 빼돌리려 한다면 르세인은 그 즉시 엘라엔을 위험 요소로 규정하고 제거할 명분을 얻게 될 것이다.“그리고.”르세인이 말을 이었다.“영애가 직접 현장에서 보급 공정을 감독하도록 하라. 라안느 후계자의 참관 교육 역시 영애의 관리하에 진행한다. 그녀의 주장이 현장에서 어떤 효율을 내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배려를 가장한 집요한 관찰 선언이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였다. 영리한 그녀를 가장 가까운 곳에 묶어두고 그 발톱이 어디를 향하는지 감시하겠다는 계산이었다.‘어디 한번 증명해 봐, 엘라엔. 네가 내 질서의 부품이 될지, 아니면 이 판을 뒤엎을 오차가 될지를.’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르세인의 눈동자 속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지만 깊은 곳에는 이미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 소리 없이 타올랐다.***황실의 인장이 찍힌 공문이 라안느 공작저 마레즈나에 도착했을 때, 내부는 일순 정지한 듯하다가 이내 거대한 파동에 휩싸였다.에드먼 폰 라안느는 집무실에서 공문을 펼쳐 든 순간, 평소의 엄격함을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엔을 향해 파안대소했다.“엘라엔! 네가 끝내 일을 저질렀구나! 황실 기사단이 독점하던 요새 공정에 우리 가문의 기술자들을 투입하라니! 이건 단순한 실무 참여가 아니다. 제국 국방의 한 축으로서 라안느 가문의 지위를 전하께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신 거다!”에드먼의 목소리는 희열로 떨리고 있었다.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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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묘하게 간질거리는

폭풍우가 휩쓸고 간 요새 현장은 처참했지만 엘라엔이 닦아놓은 우회로와 배수 체계 덕분에 붕괴라는 최악의 오차는 피할 수 있었다.진흙투성이가 된 채 마차에 몸을 싣는 엘라엔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변해 있었다.마레즈나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의 치아는 딱, 딱 맞부딪히며 떨렸고 몸 안쪽에서부터 오한이 밀려왔다.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뛰어왔지만 그들을 밀치고 나타난 건 공작 부인 이사벨라였다.그녀는 젖은 생쥐 꼴이 된 엘라엔을 보며 안쓰러운 듯 미간을 좁혔으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엘라엔. 전하의 인정이 결국 이거였니? 하르만은 전하 곁에서 기사들의 비호를 받아 멀쩡한데 말이야. 괜히 욕심을 부리다 가문의 위신을 깎아 먹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구나.”이사벨라는 걱정을 가장한 질책을 쏟아내며 하르만을 엘라엔에게서 떼어내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하르만은 엘라엔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이사벨라의 억센 손길에 울먹이는 눈으로 엘라엔을 바라보았다.“누나, 누나…!”“하르만, 괜찮아. 어서 들어가 씻으렴.”엘라엔은 한껏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하르만을 다독인 뒤, 이사벨라의 시선을 무시하며 방으로 향했다.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뒤로 이사벨라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으나 몽롱한 의식 탓에 귓속에 닿지는 못했다.엘라엔은 뜨거운 목욕물에 몸을 노곤하게 녹였다. 그리고 저녁도 거른 상태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겨 올렸다. 온몸은 여전히 떨리고 무거웠다. ***다음 날, 아침.제국을 삼킬 듯하던 폭풍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하늘은 푸르게 갰다.요새의 현장은 젖은 흙이 마르며 내뿜는 향으로 가득했다.르세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서 물웅덩이를 튀며 달려오는 라안느 가문의 마차에 고정되었다.어제 그 지옥 같은 진흙탕 속에서도 꺾이지 않던 그 붉은 눈동자가 오늘은 또 어떤 영악한 수를 들고 제 질서에 도전해올지 그는 아주 미세하게, 자신도 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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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어디에 있든

에드먼의 안색이 순식간에 파르라니 떨렸다. 그는 이사벨라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을 망설였다.르세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에게 망설임이란 감추고 싶은 오차가 발생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였다.르세인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에드먼이 기함하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영애의 방은 어디입니까.”“전하! 그, 그것이……!”“안내하죠, 공작.”르세인은 에드먼의 말을 잘라냈다. 낮고 고요하지만,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국의 의지가 실린 목소리였다.르세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식당 문을 열어젖혔다.그의 굽 소리가 대리석 복도를 가로지르자 에드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급히 뒤를 따랐고, 이사벨라와 하녀들은 넋이 나간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의 방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감각으로 수많은 방 문 중 가장 깊은 구역, 엘라엔의 침실이 있을 법한 복도 끝으로 거침없이 걸음했다.쾅!르세인의 손에 의해 거칠게 열린 문 너머로 보인 것은 주인을 잃고 흐트러진 하얀 침대뿐이었다.“…….”르세인은 방 한가운데 멈춰 섰다. 뒤따라온 에드먼이 숨을 몰아쉬며 문가를 손으로 짚었다.방 안에는 주인이 앓던 고열의 잔열과 와인빛 머리칼의 잔향이 미약하게 감돌고 있었으나 정작 르세인이 확인해야 할 변수는 증발해버린 뒤였다.르세인은 천천히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갔다.그는 평생 무언가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 전쟁터의 고지는 그의 계산대로 함락되었고 지병을 앓고 있는 황제 헤이브릭 대신 제국의 질서는 그의 펜 끝에서 완성되었다.그런데 지금 자신의 체스판 위에서 가장 정교하게 움직여야 할 말인 엘라엔이 제 통제를 벗어났다.“공작, 영애는 어디 있습니까.”“전하…. 베… 베르제 대공 각하께서 기사단을 보내 엘라엔을 강제로 데려갔습니다…. 저희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강제로.”르세인은 텅 빈 침대를 다시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그에게 엘라엔은 요새의 보급로를 수정하고 질서의 오차를 짚어내는 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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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대체 불가능한 변수

그날 오후. 베르제 대공저의 성문 너머로 황실 깃발이 밀려들었다. 르세인이 직접 대동한 황실 수석 의관과 기사단, 그리고 베르제의 기사단들이 팽팽하게 대치했다.엘라엔은 창밖으로 보이는 황실 깃발을 보며 피식 웃었다.르세인, 당신은 지금 나를 찾느라 제국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도 모른 채 갈증을 느끼고 있겠지.그녀는 하녀에게 명해 가장 단정하고도 위엄 있는 드레스를 준비하라 일렀다.르세인이 박아 넣은 질서의 쐐기를 이제 그녀가 직접 뒤흔들 차례였다.베르제 대공은 지팡이를 바닥에 쾅! 내리치며 격노했다.“감히 베르제의 성역을 침범하려 하다니! 엘라엔, 걱정 말거라. 황권을 내세워 압박해도 나는 너를…!”“아니요, 할아버지. 오히려 지금이 기회예요.”엘라엔은 블러드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으며 햇살보다도 밝게 미소를 지었다.“전하께서는 지금 제 능력이 필요해서 오신 게 아니에요. 자신의 질서에서 이탈한 오차를 견디지 못해 이곳까지 달려오신 거죠. 이 비정상적인 상황은 저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거예요. 그러니 문을 열어주세요.”***이안의 집무실 안은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책상 위에는 르세인이 기사단을 이끌고 베르제 대공저의 성문을 두드렸다는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기사단을 움직였다고?”이안의 정갈한 손등 위로 핏줄이 돋아났다.그는 헛웃음을 삼켰다.르세인은 감정이 없는 자였다. 효율과 질서만을 신봉하며 여인을 장식품이나 자산으로만 보던 냉혈한이었다.그런 그가 단 하나의 오차를 되찾기 위해 제국의 무력 집단인 베르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무리수를 두었다는 사실은, 이안에게 단순한 질투 이상의 위기감으로 다가왔다.“단순히 보급로 때문이라기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행보로군요, 형님.”이안은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엘라엔에게 주려 했던 또 다른 보석 상자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자신이 다정한 안부와 보석으로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려 할 때 르세인은 판을 깨부수고 그녀를 강탈해 갔다.“엘라엔. 당신은 지금 그 서늘한 질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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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화끈거리는 열기

요새 건설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별관은 이제 엘라엔의 새로운 거처가 되었다. 르세인이 마련한 이 공간은 지나치게 완벽했다.창밖으로는 공정의 진척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고 집무 채상 위에는 그녀가 필요로 할 모든 지형도와 장부들이 오차 없이 정렬되었다.하지만 문밖을 지키는 황실 기사들의 절도 있는 발소리는 이곳이 자신을 위한 배려가 아닌 르세인이 쳐놓은 거대한 거미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엘라엔은 침대에 기대어 앉아 르세인이 직접 서명한 공문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하르만 폰 라안느 : 요새 건설 본부 정식 수습 기사 임명.]비싼 대가를 치렀다. 지독한 열병과 르세인의 집요한 감시라는 대가.엘라엔의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가 걸렸다. 이 공문 한 장으로 하르만은 이제 르세인의 휘하에서 정식으로 군공을 쌓을 기회를 얻었다.이사벨라가 제아무리 아들을 끼고 돌려 해도 황실의 공식적인 명령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저급한 이사벨라와 하르만을 최대한 떨어뜨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라안느 가문의 진정한 미래였다.***그날 밤, 르세인의 집무실.별관과 복도로 연결된 지휘소의 중심부는 르세인의 성정답게 단출하면서도 위압적이었다. 엘라엔은 얇은 비단 망토를 걸친 채 약속된 대면 보고를 위해 그의 방 문을 두드렸다.그럼에도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엘라엔은 재차 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엘라엔은 돌아가야 하나 망설였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내부에 없는 줄 알았던 르세인은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안경을 쓴 채 서류를 훑던 그가 고개를 들자, 안경테 너머의 녹색 눈동자가 엘라엔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었다.“아, 저… 대답이 없어서 안 계신 줄 알았어요.”“원래 대답 안 합니다. 앞으로는 바델이 열어줄 테니 그리 알면 될 것이고….”“…….”“안색이 어제보다 낫군요. 베르제의 약재가 제법 쓸모 있었던 모양입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맞은편 의자에 허락도 없이 앉으며 장부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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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거대한 목적 아래

황실 별관의 아침은 차가운 이슬 냄새와 함께 시작되었다.엘라엔은 테라스에 서서 연무장 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이제 막 제 몸보다 큰 훈련용 갑주를 갖춰 입은 하르만이 서 있었다.이사벨라의 치맛자락 밑에서 나약한 후계자로 박제될 뻔했던 아이가 드디어 제국에서 가장 서늘한 지휘관의 시야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엘라엔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에게 이사벨라는 단순히 아버지를 홀린 여자가 아니었다. 하르만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가문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저급한 탐욕 덩어리 그 자체였다.그런 이사벨라로부터 하르만을 떼어놓는 유일한 방법은 하르만을 르세인이라는 거대한 태양 옆에 두어 그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뿐이었다.“영애의 시선이 지나치게 뜨겁군. 동생을 사지로 보낸 누이의 죄책감입니까, 아니면 계획대로 흘러가는 판을 감사하는 투기꾼의 만족감입니까.”언제 다가왔는지 르세인이 그녀의 뒤편에 서 있었다. 그는 건조한 눈빛으로 연무장의 하르만을 내려다보았다.“둘 다 아닙니다, 전하. 저는 그저 잡초가 무성한 정원에서 가장 소중한 꽃 한 송이를 옮겨 심었을 뿐입니다. 그곳이 비록 메마른 황야일지라도, 썩은 늪지보다는 나을 테니까요.”엘라엔의 비유에 르세인은 입매를 치켜올렸다.그는 엘라엔이 계모인 이사벨라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그리고 하르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라는 위험한 불꽃을 얼마나 영악하게 이용하고 있는지 정확히 꿰뚫었다.“늪이라. 공작 부인을 지칭하는 것치고는 꽤나 노골적이군요. 하지만 영애, 내가 라안느 후계자를 받아들인 것은 그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라안느 후계자가 내 기준에 미달하는 순간, 나는 자비 없이 그 직함을 회수할 것이니.”“전하의 기준은 높지만 정직하죠. 하르만은 버텨낼 겁니다. 제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르세인은 대답 대신 아래를 향해 짧은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르세인의 직속 기사들이 하르만에게 거친 훈련용 목검을 던져주었다.하르만은 휘청거리면서도 검을 받아 들었다. 르세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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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질서의 핵심으로

황제의 거처인 솔레움 궁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침묵과 약초 향에 짓눌려 있었다.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황제 헤이브릭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창밖의 정원을 응시했다. 비록 예전 같은 기력은 아니었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이 거대한 제국의 질서를 단숨에 재편할 수 있는 위엄을 품었다.그 곁을 지키는 것은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황후 로잘린과 깊은 생각에 잠긴 이황자 이안이었다.“형님이… 라안느 영애를 별관으로 데려갔다니요.”이안의 음성은 평소의 다정함을 잃은 채 낮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정원의 수국을 보며 미소 짓던, 시야가 어릿할 정도로 아름다운 엘라엔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녀는 그에게 안온한 휴식처이자 장차 자신의 곁을 지켜줄 화려한 꽃이었다. 그런데 르세인이 엘라엔을 흙먼지 날리는 요새의 심장부로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사적인 통제가 닿지 않는 관할 별관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은 가슴속에 생소한 감정의 불을 지폈다.황후 로잘린은 정교하게 세공된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단순히 데려간 것이 아닙니다, 이황자. 일황자는 지금 라안느 양을 제국의 질서를 지탱하는 실무자로 공인했지. 라안느 후계자에게 수습 기사의 직함을 준 것 역시 라안느 가문의 미래를 제 손에 쥐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고.”“……폐하!”로잘린은 이안을 보던 시선을 헤이브릭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일황자는 지금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을 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폐하.”“일황자가… 잘하고 있더군, 황후. 요새의 보급로를 재편하고, 라안느 후계자를 길들이고 있다니. 제국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소.”헤이브릭의 말에 이안의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졌다.헤이브릭은 황후와 이황자를 내보내고서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곁에 선 시종장에게 명령했다.“내일 오후, 요새 건설이 완공되는 날 제국의 황태자를 정식으로 책봉하겠다 공표하라. 누가 더 이 제국의 질서를 완벽하게 세우는지 끝까지 지켜보도록 하지.”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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