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길을 지나 관리인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정자 근처에 도달했을 때였다.나무 기둥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던 소년, 카시안이 고개를 돌렸다.“엘라엔!”그의 부름에는 이안의 달콤한 수식어도, 르세인의 건조한 명령도 없었다. 그저 담백하고 투명했다.엘라엔은 비로소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카시안!”“엘라엔, 괜찮아? 힘들지는 않아? 네가 황궁에 들어올 날만 기다렸어.”카시안은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엘라엔의 얼굴 곳곳을 살폈다.르세인이 오차를 찾기 위해 해부하듯 훑어보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친구의 안부를 걱정하는 순수한 염려였다.엘라엔은 정자 난간에 기대어 앉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말도 마. 전하께서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숫자로 보는 분이거든. 하르만 앞에서도 어찌나 엄격한지, 곧 보급 장부를 다시 맞추지 못하면 라안느 가문의 체면이 깎일 판이야.”엘라엔은 투정 섞인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이안 앞에서는 결코 보일 수 없는 나약함이자 르세인 앞에서는 절대 드러내선 안 될 빈틈이었다.오직 카시안만이 자신의 이런 영악하지 못한 투덜거림을 받아주는 유일한 창구였다.카시안은 곁에 앉아 주머니에서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이게 뭐야?”“네가 지난번에 준 만년필로 처음 써본 거야. 네가 좋아하는 시의 구절은 아니지만…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이야.”엘라엔이 종이를 펼치자 카시안의 외관을 닮은 정갈한 필체가 나타났다.[엘라엔, 넌 최고야.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용감하고 멋진 소녀야.넌 뭐든 할 수 있고, 반드시 해낼 거야.]엘라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글자들을 보고 있자니 르세인이 박아 넣었던 질서라는 이름의 쐐기가 조금은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고마워, 카시안. 넌 정말이지 이 황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칭찬으로 들을게.”카시안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석양이 완전히 저물고 어스름한 보랏빛 어둠이 내려앉자, 엘라엔은 자리
Last Updated : 2026-06-25 Read more